
저녁 9시30분, A공단 컨테이너 보관소 앞 수위실에 잠복한 민 계장은 동료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2인1조로 움직이는 한 조는 공단 사거리에서 컨테이너 방향 50m 지점에 있는 차량 안에서 주위를 살피고 있었고 나머지는 행인이나 공단 관계자로 위장해 길거리에서 밀수 용의자들을 밀착 감시하고 있었다. 바람이 세게 불어 제법 쌀쌀했다.
순간, 컨테이너 보관소 옆 소공원에서 네 명의 밀수품 인수책들이 나타났다. 중국에서 밀수입한 건고추 6만여kg을 인수하기 위해 보관소로 찾아온 것이다. 보관소장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물건을 내주지 않자 용의자들은 보관소 주변을 배회하며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민 계장은 보관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물건을 반출하라”고 통보했다. 용의자들은 아직까지 세관 요원들의 잠복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이 민 계장은 밀수 용의자들이 이용한 것으로 보이는 차량 2대를 조회해 차주의 신원을 확보했다.
주변을 배회하던 용의자들은 더 이상 인수작업을 시도하지 않았다. 밤 11시쯤. 용의자들은 모여 뭔가를 상의하더니 타고 온 차량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한달 넘게 집에 못 들어가
이렇게 해서 밀수품 인수현장을 확보하려고 했던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용의자를 현장에서 검거하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정보원의 제보로 밀수품을 확보하고 운반용 컨테이너 번호를 입수한 것만도 큰 성과였다. 전산망을 통해 화물 진행정보와 관련자료를 확인만 하면 밀수조직 소탕은 시간문제였다.
현장에서 철수한 조사3계 요원들은 곧바로 세관 전산망을 통해 문제의 컨테이너가 부산항에서 밀반출됐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민 계장은 수사요원을 부산으로 급파해 컨테이너 화주(貨主)와 운송책임자를 붙잡아 서울로 압송했다.
북한행 환적화물을 이용한 중국산 건고추 밀수입 사건의 전모는 이렇게 해서 드러났다. 이번 사건은 밀수단 주모자인 김모(42)씨가 중국산 건고추를 밀수하기 위해 중국사업자와 공모해 설탕, 콩기름을 실은 배가 중국 다롄(大連)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을 경유하여 북한 나진항으로 가는 것처럼 서류를 위장한 것이었다. 그런 후 밀수범들은 중국에서 몰래 들여온 건고추를 부산항에서 빼돌려 인천으로 가져온 다음 국내 운반책을 통해 인수하려다 인천세관에 적발된 것이다.

북한행 환적화물을 이용해 밀수하려고 했던 중국산 건고추.
하지만 민 계장은 이 일을 천직으로 여긴다. 그는 현장 감시와 조사를 유기적으로 병행해 밀수단속에 나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했다. 인천세관 내부뿐 아니라 국내외 세관이나 정보기관과의 협조도 매우 중요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지난 4월 검거한 국내 최대의 가짜 비아그라(43만1000정, 정품 시가 65억원 상당) 밀수입 사건도 국가정보원의 제보를 바탕으로 끈질긴 수사 끝에 올린 개가였다.
현재 관세청 산하 30개 세관에는 560여명의 조사감시요원들이 활약하고 있다. 영장 신청 및 고발 권한을 가진 사법경찰관이기도 한 이들이 적발하는 관세, 외환, 밀수 관련 금액만도 한 달에 8000억원이 넘는다. 국경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공항과 항만이 이들의 주요 활동무대. 연간 17만회 운항하는 항공기를 통해 2700만명의 여객과 170만t의 화물이 오가는 인천공항에는 아예 인천공항세관을 따로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