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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는 어떻게 교양이 됐나

고상하고 우아한 것, 저급하고 속된 것의 갈등

취미는 어떻게 교양이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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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들에게 공일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고 산책을 가는 일, 부인과 아이들을 데리고 연극과 활동사진을 보는 일, 책을 읽거나 악기 같은 것을 사랑하여 고적한 때와 피곤한 때 위안을 얻는 일.
  • 1920년대 도회인들은 새로운 취미를 발견하고, 가정생활 개조론을 부르짖었다.
취미는 어떻게 교양이 됐나

1925년 ‘조선극장’에서 개봉된 무성영화 ‘심청전’의 한 장면. 이 무렵 ‘활동사진’은 도시인들의 새로운 취미거리가 됐다.

“취미가 뭐예요?” 미팅이나 맞선자리에서 여지없이 하게 되는 가장 고전적인, 그러나 썰렁하기 그지없는 질문. 그리고 겨우 “독서요” 혹은 “음악 감상이요”라고 대답해야 했던 모든 남녀에게 이 글을 바친다. 한국인은 왜, 언제부터 “취미가 뭐예요”라는 질문을 하게 됐을까. 영화 보기, 책 읽기, 음악 감상, 무대공연 관람과 같은 취미가 생겨나고 생활의 한 부분이 된 것은 100년도 채 되지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딱 80년 전인 1924년 1월. 새해를 맞아 ‘동아일보’가 신년기획을 마련했다. 지금으로 치면 ‘잘’ ‘제대로’ 살아야 한다는 일종의 ‘웰빙’ 특집이었다. 동아일보는 각계 인사들에게 “생활개선의 제일보로 새해부터 조선인이 실행할 새 결심”이 무엇인지 물었다. 계몽운동가의 한 사람이자 ‘조선일보’ 사장이었던 월남 이상재, 천도교 도령이며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최린, 덕성여대의 설립자인 여성운동가 김미리사, 당시 가장 영향력 있던 잡지 ‘개벽’의 편집인 이돈화 등이 이 설문조사에 답했다.

‘생활개선’항목은 비단 생활적 ‘웰빙’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사회·문화 각 방면에서 20여가지 과제가 제시됐다. 여기에는 근대로 접어들면서 새로운 인간과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우리 할아버지·증조할아버지들의 고민이 집약돼 있다. 먼저 ‘시기와 당파(黨派)’ ‘비관과 부실’ ‘공덕심(公德心) 없음’ ‘자존허욕(自尊虛慾)’ ‘표리부동’ 등을 고쳐야 한다고 했다. 이는 모두 추상적이고 부정적인 것들인데, 민족성과 관계된 항목들이다.

1910∼20년대 한국인은 우리가 ‘나쁜’ 민족성을 가지고 있다는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왜 우리 엽전들은 이다지도 게으르고, 시기심이 많아 단결이 안 되고, 허영과 허식을 좋아하는지?” 그 고민의 시작은 일본의 영향 탓도 있고 근대 초기의 서구과학이 지니고 있던 인종주의에 물든 탓도 있다. 그것이 애당초 잘못된 문제인식임을 자각하지 못한 채 고민은 20세기 후반까지 이어졌다.

다음으로 ‘불결한 우리 집안을 잘 청소하자’ ‘신체를 정결히 하자’ ‘흰옷은 불결하기 쉬우니 염색된 옷을 잘 빨아서 입자’ ‘생식하지 말자’와 같은 기초생활 위생 항목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집회시간을 잘 지키자’ ‘낭비하지 말고 저축을 하자’ ‘시간 절약에 힘쓰자’ 등의 항목이 있다. 이 또한 그 의미가 간단치 않다. 당시는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가 형성됐고,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의 덕목이 요구되던 시기였다. 시간을 절약하고 지키며, 돈을 아껴 저축하는 것은 모두 ‘미래’를 위한 시민적 덕목이다. 그리고 내면화하여 항상 실천해야 할 덕목이다. 수입이 일정하지 않거나 예측할 수 없을 때, 또 타인과 어울려 해야 할 ‘업무’가 없다면 돈과 시간을 아낄 이유가 없다. 요즘에야 초등학교 때부터 가르치고 실천하는 항목들이지만 그때는 다 새롭기만 한 가치였다.

취미 없는 살림은 꽃 없는 동산

그런데 특집 마지막에 1930년대 만문(漫文)만화로 유명한 문인이며 화가인 안석주의 글이 실려 있다. 제목이 ‘무미건조, 우리 생활은 너무도 취미 없다. 새해부터 잘살자’였다. 안석주는 ‘잘살’ 조건으로 취미를 제시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무엇이 취미인가’가 문제지만 당시 조선인은 취미가 아예 없어서 문제였다. 없는 취미를 새롭게 만들어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 하니…. 안석주는 “취미가 없는 살림은 꽃이 없는 동산과 같아 그 건조무미한 살림에는 자연 화증(火症)과 트림밖에 날 것이 없을 것이”라 했다. 안석주뿐만이 아니었다. 1920년대 사람들에게 취미란 남는 시간을 활용한 과외활동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 1921년 4월 동아일보에도 같은 맥락의 취미론이 실렸다. 김기영이라는 의사가 쓴 글로 제목이 ‘참 사람다운 삶을 하려면 모든 일에 취미를 양성하라’였다.

김기영은 “조선사람만큼 취미 없는 생활을 하는 민족은 세계에 드물 것”이라면서 “단순무미하고 살풍경한 냉랭한 살림으로 그날그날을 무의식하게” “그저 남 하는 대로, 살아 내려오는 모든 관습대로 그럭저럭 사는 것”이 조선사람의 삶이라 진단했다. 이어 “개조시대에 처한 우리는 생존함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올시다. 다만 생존한다는 것이 사람의 목적은 아닐 것이올시다”라고 했다. ‘존재가 아니라 실존이 문제’라는 실존주의 철학의 명제를 연상시키는 마지막 말에서 취미가 인간 조건의 하나로서, 개조의 한 과제였음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취미가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김기영은 보다 근본적으로 취미라는 가치가 아예 의식주 같은 기본적 삶의 영역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조선사람의 ‘취미 없음’은 “조선인이 먹는 음식은 아침저녁이 한가지요, 어제 먹던 것을 또 오늘 또 내일 연속하여 먹으며, 조리의 방법도 그저 이왕 하던 대로 관습대로”만 한다든지, 또한 집도 보다 “미술적 위생적으로 건축하며 땅에 화초 같은 것을 심어 눈을 즐겁게 하며 방안의 장식도 될 수 있는 대로 아름답고 품위 있게 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데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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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천정환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서울대 강사 heutekom@hanmi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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