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호

천경자·박서보·박수근…시대를 밝힌 ‘신동아’ 표지화의 비밀 [창간 90주년]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21-11-0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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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4년 복간호부터 한국 화가 작품으로 표지 장식

    • 독자에겐 ‘선물’, 화가에겐 ‘기회’

    • 현대미술의 여러 얼굴 담아낸 폭넓은 그릇

    • 1990년대 중반 잡지 시장 경쟁 격화로 막 내려

    박수근, 박서보, 천경자 화백 작품으로 제작한 ‘신동아’ 표지(왼쪽부터).

    박수근, 박서보, 천경자 화백 작품으로 제작한 ‘신동아’ 표지(왼쪽부터).

    1964년 9월 복간한 ‘신동아’는 단풍을 연상시키는 붉은 배경에 탐스러운 밤송이가 등장하는 표지로 많은 이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신동아는 일제강점기인 1931년 11월 창간한 후 채 5년이 되기 전인 1936년 9월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당했다. 그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 사진을 게재하면서 가슴의 일장기를 삭제한 이른바 ‘일장기 말소사건’ 여파였다.

    이후 꼭 28년 만에 이뤄진 신동아 복간은 언론·출판계를 넘어 사회 전반의 큰 관심사였다. 서슬 퍼런 시대에도 할 말은 했던 매체가 1960년대 중반 한국 정치 현실에 대해 어떤 기사를 쏟아낼지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이가 많았다. 그러나 신동아 표지는 세간의 떠들썩한 관심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오직 김병기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의 서양화 한 점을 선보였을 뿐이다. 이 표지에서 제호를 제외하면 글씨라고는 발행처 ‘동아일보사’ 이름과 ‘복간특대호’라는 작은 안내문이 전부다.

    책장을 들추면 힘써 준비했을 기사가 가득하다. 당시 신동아는 “계엄은 해제되었으나”라는 특집을 통해 정권의 “법질서 파괴” 행태와 “학원감방화 망상” 등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한국 민주주의의 비용’이라는 부제가 붙은 200장 분량 ‘정치자금’ 특집도 실었다. 정치학 교수 출신 신상초 전 의원의 자전 수기 ‘일군(日軍) 탈출기’ 등 읽을거리도 풍성했다. 그러나 이런 기사를 표지 전면에 소개하는 대신, 따뜻한 그림 한 장으로 대신했다.

    1964년 9월 출간된 ‘신동아’ 복간호 표지.

    1964년 9월 출간된 ‘신동아’ 복간호 표지.

    독자에겐 선물, 화가에겐 기회

    언론학 연구자인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복간 당시 신동아 주간을 맡은 천관우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 “신동아를 논설 스타일 정론 잡지보다는 주장과 의견을 담으면서도 부드러움을 갖춰 독자가 친근감을 느끼는 잡지로 제작하려 한다.”



    복간호 신동아 표지는 이런 방향을 분명히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신동아’는 1996년 9월호까지 32년 동안 표지를 통해 매달 한 편씩 아름다운 미술 작품을 독자에게 선물했다. 국내 저명 화가들이 오직 신동아만을 위해 완성한 명화였다.

    디지털 파일 전송 기술이 없던 시절이라 작품은 모두 인편으로 주고받았다. 신동아 기자들이 화가 작업실을 방문해 그림을 전달받을 때가 많았다. 화가들에게는 소정의 화료(畫料)도 지급했다. 번거로운 과정인 데다 매달 적잖은 비용까지 발생했지만, 신동아는 이 제작 방식을 꾸준히 이어갔다. 그 배경엔 동아일보 사시(社是) 가운데 하나인 ‘문화주의’가 있다는 분석이 많다.

    ‘동아일보’는 1920년 ①민족의 표현기관임을 자임(自任)함 ②민주주의를 지지함 ③문화주의를 제창함 등 세 가지 정신을 선포하며 창간했다. 이후 언론자유와 민주주의 외에 사회 전반의 문화 역량을 키우는 데도 앞장섰다. 미술 분야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최열 미술평론가는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부터 국내외 미술 행사를 비중 있게 보도하고, 지면을 통해 미술 이론 형성을 위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왔다”고 분석했다.

    그 노력이 신동아 표지화 게재로도 이어졌다. 당시 신동아는 복간호 초판이 이틀 만에 매진되고, 다시 찍은 재판 또한 3일 만에 다 팔려나갈 만큼 대중적 인기가 높았다. 그 ‘얼굴’을 캔버스로 제공하는 것은 독자뿐 아니라 화가들에게도 기회이자 선물이었다. 복간 첫 호 표지를 담당한 김병기 화백은 훗날 해당 작품에 대해 “세 차례나 다시 그린 끝에 완성했다”고 회고했다.

    현대미술의 여러 얼굴 담아낸 폭넓은 그릇

    신동아는 작품화 제작을 의뢰한 뒤엔 자율권을 최대한 보장함으로써 화가들이 마음껏 예술혼을 펼치도록 했다. 30년 넘게 이어진 신동아 표지화 흐름을 분석한 일민미술관은 그 특징으로 ‘유연함’을 꼽았다.

    “신동아의 유연한 표지란은 한국 현대미술 대부분을 담아내고 있다. 작가 특유의 개성을 통제하지 않음으로써, 작가들의 예술성까지 담아내는 그릇이 된 것이다.”

    1988년과 1996년 두 차례 신동아 표지화를 그린 서양화가 황주리 씨는 “젊은 작가 시절 그 요청을 받고 시대정신을 반영한 표지를 완성하고자 노력한 기억이 난다. 당시 신동아는 묵직함이 느껴지는 매체였고, 많은 선배 화가들이 표지화를 그린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황 작가의 말처럼 한국 근·현대 화단의 걸출한 작가들이 신동아 표지화를 그렸다. 1965년 1월호 표지 그림은 서양화가 손동진 화백 작품이었다. 그는 일본 국립도쿄예술대와 프랑스 파리국립미술대학에서 공부한 뒤 한국 고유의 무속성을 살린 작품 세계를 일궈 호평받았다.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을 지냈고, 1999년 은관문화훈장, 2000년 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을 받은 거장이다.

    그해 9월호 표지는 지금도 대중적으로 인기 높은 천경자 화백의 꽃 그림이 장식했다. 천 화백은 꽃과 여인을 즐겨 그려 국내 화단에 채색화 붐을 이끈 선구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1973년 8월호 신동아 표지에서는 천 화백의 ‘여인상’을 감상할 수 있다.


    ‘신동아’ 1967년 1월호 표지에서는 서세옥 화백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신동아’ 1967년 1월호 표지에서는 서세옥 화백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1966년 3월호 신동아 표지를 장식한 건 박서보 화백 작품이다. 한국 단색화를 세계에 알리며 주목을 받고 있는 그의 젊은 시절 화풍을 감상할 수 있다. 1967년 1월호 표지화의 주인공은 서세옥 화백이다. 1960년대 수묵 추상으로 한국화의 현대화를 선도했으며, 26세에 서울대 미대 교수, 32세에 국전 심사위원이 됐을 만큼 일찍부터 국내 화단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화가’를 거론할 때면 늘 첫손에 꼽히는 서양화가 박수근의 그림도 1968년 4월호 신동아 표지에서 만날 수 있다. ‘제비’라는 제목의 이 작품에는 박 화백 특유의 마티에르 기법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소박하고 간결하면서도 동심이 느껴지는 화풍으로 유명한 장욱진 화백 작품은 1968년 9월호 신동아 표지에 등장한다. 단순한 필치로 산과 달, 물을 묘사한 이 작품 배경은 그의 화실이 있던 경기 남양주 덕소라고 한다. 그는 작품 완성 후 이런 글을 썼다.

    “나는 천성적으로 서울이 싫다. 서울로 표상되는 문명이 싫은 것이다. 그래서 이곳 한강이 문턱으로 흐르는 덕소에 화실을 잡았다. 나는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덕소의 비를, 덕소의 달을, 덕소의 바람을, 덕소의 모든 것을 얘기해 준다.”

    그 아름다움을, 덕소 장 화백 화실에 가지 못한 이들도 신동아 표지를 통해 만난 셈이다. 조상호 나남출판 회장은 젊은 시절 가까이하던 신동아를 돌아보며 “매달 선보이는 표지화의 예술은 내게 또 다른 축복이었다”고 한 바 있다. 많은 이의 사랑을 받은 신동아 표지화는 1990년대 잡지시장 경쟁이 치열해지고, 기사 제목을 표지에 내세워 독자 눈길을 끄는 마케팅 방법이 성행하며 막을 내렸다. 그러나 한 시대를 풍미한 거장들의 작품은 신동아 캔버스에 담겨 고스란히 남았다.

    #표지화 #박수근 #천경자 #캔버스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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