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7월호

왜 지금 이순신인가

드라마·소설·평전 재조명 열풍

  • 글: 김현미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khmzip@donga.com

    입력2004-07-01 14: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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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지금 이순신인가
    “임진왜란은 결코 패배한 전쟁이 아니었다. 침략자의 의지를 끊고 조국의 산하를 지킨 승리한 전쟁이었다. 세 번의 파직과 두 번의 백의종군에도 불굴의 의지로 조국을 지킨 이순신,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삼아 마침내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그는 꿈꾸는 사람들의 영웅이다. 우리는 이순신의 생애를 통해 우리의 꿈과 희망을 다시 확인할 것이다.”

    8월14일 첫 방영 예정인 KBS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제작팀이 밝힌 기획의도다. 이 드라마의 원작은 김탁환의 ‘불멸’과 김훈의 ‘칼의 노래’. 연출을 맡은 이성주 PD는 “등장인물의 기본 성격 등 큰 틀은 ‘불멸’에서, 그 속에 담는 정신은 ‘칼의 노래’에서 가져왔다”고 설명했다(동아일보 2004.4.23).

    드라마의 전개방향은, 박제된 영웅 이순신의 외피를 벗긴다는 점과 인물평가에서 양자택일 혹은 흑백논리를 지양한다는 데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불패신화·전쟁영웅이라는 외피를 벗기면 이순신의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그것은 원칙주의자, 혁신주의자, 비주류, 탁월한 리더십으로 요약된다. 흑백논리를 지양한 인물평가로 재평가받을 사람은 단연 원균이다. 제작진은 “이순신을 영웅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심하게 왜곡된 맹장 원균에 대한 평가를 달리할” 것을 분명히 해서 논쟁거리를 제공했다.

    드라마에 한 발 앞서 김탁환씨는 8권으로 개작한 ‘불멸’(황금가지)을 탈고했다. 새로 쓴 ‘불멸’에서 작가는 조선중기 중종 때부터 명종, 선조, 광해군, 인조로 이어지는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에서 이순신의 위치를 찾는 데 주력했다고 한다. 결혼을 했다거나 과거에 떨어졌다 등 단편적인 기록밖에 없는 입신(立身) 이전 이순신의 삶은 소설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했다.

    김씨는 “이순신을 평가할 때 23전 23승이라는 전적(임진왜란)만 가지고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 한 번도 진 적이 없기 때문에 이순신이 위대한 것인가. 소설가는 이순신의 내면세계로 파고들어야 한다. 즉 100명의 장수 가운데 99명이 다 왼쪽으로 갈 때 혼자 관행을 깨고 오른쪽을 선택할 수 있었던 동인(動因)이 무엇인지 캐내는 것이 문학적 탐구 자세”라고 말한다.



    최근 김탁환씨와 ‘이순신 폄훼논쟁’을 벌인 소설가 송우혜씨는 정확한 고증을 앞세운 ‘이순신 평전’(7월 출간 예정, 동아일보)을 준비중이다. 여진족 추장 니탕개가 2만여명을 거느리고 변경을 침략함으로써 조선 땅에 28년의 평화가 깨진 계미년(1583년) 전투가 평전의 출발점. 송씨는 이 사건 이후 조선군이 여진족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펼쳐 수많은 조선의 무장(武將)들이 역량과 명성을 세상에 알릴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 토벌작전에서 신립은 명장으로 칭송받았고 원균, 이순신도 나란히 참가해 공을 세웠다.

    그러나 7년간 계속된 임진왜란의 소용돌이에서 두 사람의 운명은 크게 엇갈린다. 송씨는 “원균이 이순신과 쟁공(爭功)했다는 사실만으로 명장이라 평가하는 것은 오히려 이순신의 신격화를 조장하는 일”이라면서 “평전을 통해 일부에서 진행되는 역사왜곡을 바로잡겠다”고 했다. 다분히 곧 시작될 드라마와 원작소설을 겨냥한 말이다.

    이순신과 7년 전쟁의 진실

    이번에는 소설가들의 역사논쟁에 보통사람이 끼어들었다. 전국은행연합회 김태훈 부부장은 민족의 성웅(聖雄)이라는 이순신의 숭고한 이미지가 오히려 친숙한 접근을 막고 있다는 생각에 직접 ‘이순신과 7년 전쟁’을 쓰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동료 장군과의 불화에 분통을 터뜨리는 인간 이순신을 있는 그대로 복원해 보고 싶었던 것. 원균 모함의 실체, 이순신의 하옥과 백의종군의 진실, 좌수사가 되기 전 미관말직을 전전했던 이유, 7년 전쟁에서 이순신이 벌인 전투의 실상 등 궁금한 점을 하나하나 풀어나간 결과가 ‘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가제, 7월 출간 예정, 창해)이다.

    ‘내게는 아직도 배가 열두 척이 있습니다’(북포스)는 부산고등법원 김종대 부장판사가 쓴 이순신 일대기. 2년 전 김 판사가 쓴 ‘이순신 평전’을 재출간하면서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장수들의 활약상, 이순신과 원균의 반목 등에 대해 꼼꼼하게 주석을 달았다.

    그동안 이순신 재조명 작업을 관망만 하던 역사학계도 본격적인 채비를 하고 있다. 서강대 정두희 교수는 “역사연구에서 사료비판은 기본인데 원균 옹호론자들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사료에 근거한다’는 주장만 하고 있다”면서 “실록은 굉장히 정치적인 문서로 편찬 당시 누가 실권을 쥐고 있느냐에 따라 서술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에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했다. ‘이순신 평전’을 준비중인 정 교수는 “조선왕조의 정치라는 씨줄과 동아시아의 국제전이라는 날줄이 촘촘히 얽혀있는 얼개 속에서 이순신의 삶을 살펴야 본모습이 보인다”고 설명했다.

    ‘임진왜란과 한중관계’를 연구해온 명지대 한명기 교수는 올해 안에 ‘이순신과 임진왜란’에 관한 책을 쓸 계획이다. 한 교수는 이순신 개인사보다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의 속성을 먼저 연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 지금 이순신인가
    “이순신은 국민영웅인데 이렇게 중요한 인물에 대한 정확한 평전이 없다는 것은 역사학자들의 책임이다. ‘난중일기’ 수준에서 이순신을 이해하는 데는한계가 분명하다. 16세기 후반 조선과 동아시아의 상황에서 임진왜란은 왜 발발했으며, 그 시기 각국의 지배층 내부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등 전체 맥락에서 이순신의 역할을 묻고자 한다.”

    드라마로, 소설로, 평전으로 2004년 우리 앞에 다시 선 이순신. 그러나 저자마다 달리 그리는 이순신과 주변인물, 사건에 대한 제각각의 해석과 시각차가 혼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 이것이 유신시대 ‘민족영웅 이순신’과는 또 다른 이순신의 이미지를 고착시킨다는 지적도 나온다. 21세기 이순신, 무엇이 문제인가. 몇 가지 쟁점별로 정리했다.

    시대 따라 달라진 위상

    송우혜씨는 4월28일 열린 세미나 ‘이순신 정신의 현대사적 재조명’에서 ‘문학작품을 통해 진행되고 있는 이순신 폄훼현상’을 발표했다. 우선 이 논문은 이순신 평가가 시대에 따라 큰 편차가 있음을 보여주고, 드라마 원작소설의 역사왜곡 부분을 지적했다. 다음은 논문 일부를 요약한 것.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원균을 모함하고 전공을 가로챘다”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이른바 ‘원균 명장론’은 원균 지지자들에 의해 줄기차게 제기됐고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더욱 기세를 올렸다. 결국 이것이 받아들여져 이순신이 투옥되고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됐으나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한다. 그러나 다시 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이 13척밖에 남지 않은 배를 가지고 명량대첩 신화를 이룩함으로써 이런 주장은 수그러들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이순신은 ‘희대의 영웅’으로 문학작품의 주인공이 된다. 종전 2년 후 나온 윤계선의 ‘달천몽유록’은 순국 충장 27명을 묘사하면서 ‘대장군 이순신’을 가장 비중있게 다뤘다. 정조시대에는 왕실에서도 이순신을 최고로 예우해 왕명으로 ‘이충무공전서’가 발간된다.

    일제시대에 지식인들은 300년 전 일본을 통쾌하게 이긴 이순신을 상기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북돋우려 애썼다. 이 시기 박은식 신채호 이광수 등이 각종 지면을 통해 ‘이순신전’을 연재했다. 이순신이 ‘성웅’의 이미지를 얻게 된 것도 이 무렵. 해방 이후 70년대 말까지 이은상의 ‘이충무공 일대기’를 필두로 이순신 전기물이 쏟아져 나왔다. 여기에 박정희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이순신 현창’에 나섬으로써 확고하게 ‘성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무너진 직후 ‘원균 명장론’이 등장하면서 ‘이순신 폄훼논쟁’이 벌어졌다. 포문을 연 것은 1981년 울산대 이정일 교수가 ‘역사학보’에 발표한 ‘원균론’. 이 논문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원균이 이순신, 권율과 같은 반열인 ‘일등공신’에 선정된 사실과 선조의 적극적인 원균 옹호 발언을 근거로, 이순신의 신격화 과정에서 원균이 부당하게 악역을 맡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정일 교수와 논쟁을 벌였던 송우혜씨는 “1980년대 초반 돌연 그런 주장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이 매우 새롭고 충격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였고 특히 대학가에서는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한 반감과 반발 때문에 그런 주장을 받아들인 학생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분위기는 1990년대까지 이어졌다. 정두희 교수는 1994년 발표한 논문에서 시대에 따라 달라진 이순신 평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체제유지를 위하여 이순신을 과도하게 비인간적으로 성웅시하면서 오히려 사람들은 이순신에 대하여 일종의 혐오감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을 체제 유지에 이용한 그 사람들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지 이순신에게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이순신연구-임진년 이후 그의 전략과 정유재란에 관한 재검토’ 이기백 선생 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

    한편 송우혜씨는 ‘원균 명장론’이 10년 주기로 고개를 든다고 말한다. 1981년 이정일 교수의 논문에 이어 1994년대 고정욱 소설 ‘원균 그리고 원균’, 그리고 이번에 개작한 김탁환의 ‘불멸’도 그런 혐의가 있다는 것. 송씨는 백번 양보해 원균이 이순신을 신격화하기 위해 부당하게 악역으로 설정된 ‘희생자’라는 주장을 받아들인다 해도 그것이 곧 ‘원균은 명장”이란 등식이 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평범에서 비범으로

    이순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이충무공전서’에 “어려서부터 호탕하여 구속을 받지 않았고 뛰어나게 기백이 있었으며 여러 아이와 장난할 때도 군진놀이를 하였는데 이순신을 받들어 장수를 삼는 것이었으며 그 지휘하는 법도는 아주 볼 만하였다”는 정도다. 이것이 어린이용 위인전기에 등장하는 ‘골목대장 이순신’의 모습이다.

    이순신은 스물한 살 때까지 ‘문과’ 공부에 정진하다 결혼 후 스물둘에 비로소 무과로 바꿨다. ‘이충무공전서’는 “처음 두 형을 따라 유학(儒學)을 배웠는데 재주가 있어 성공할 만도 했으나 매양 붓을 던지고 군인이 되고 싶어했다”고 전한다. 김태훈씨는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한다. 오히려 보성군수를 지낸 장인 방진이 활쏘기 등에서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어 그 영향으로 결혼 후 무예를 연마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게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장인 방진의 재력과 무예가 이순신의 무과 공부를 뒷받침했을 가능성이 높다.

    왜 지금 이순신인가

    1592년 4월13일 조선과 일본군의 부산진 전투 장면을 기록한 그림 ‘부산진순절도’. 이순신의 일기책 7권을 모아 엮은 ‘난중일기’.

    그럼에도 그가 1576년 식년무과에서 병과(丙科)로 합격했을 때 이미 서른둘이었다. 그나마 병과는 무과 합격자 중 최하위 등급(갑,을,병 순)으로 종9품(오늘날 하사급)밖에 되지 않았다. 훗날 영웅의 탄생을 기대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이순신은 상관의 인사청탁은 물론 병조판서가 서녀를 첩으로 보내겠다고 하는 것을 “권세가 있는 집안에 의탁해 승진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할 만큼 원칙에 충실했다. 꼬장꼬장한 성품은 전라도 발포 만호(오늘의 중령급) 시절 유명한 오동나무 사건(직속 상관인 전라좌수사가 거문고를 만들려고 발포객사의 오동나무를 베어가려 하자 이순신이 관청의 물건임을 들어 제지한 사건)에서 잘 나타난다.

    이런 일화들이 입소문 나면서 이순신의 이름이 서서히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그의 관직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38세에 병기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당했고 다행히 4개월 만에 복직했으나 종8품 훈련원 봉사(소위 바로 아래 직책에 해당)였다. 임진왜란 때 명성을 떨쳤던 신립, 이억기 등은 비슷한 시기 도호부사로 별 1개의 준장급이었고, 원균도 중령급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이순신의 관직생활은 승승장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김태훈씨는 이런 이순신의 생애를 한마디로 “평범에서 비범으로”라고 요약했다.

    1591년 2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불과 1년 전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임명을 놓고 조정이 시끄러웠다. 사간원은 현감에서 전라좌수사로의 파격승진(김태훈씨는 대위와 중위 사이의 계급에서 별 2개의 소장으로 승진한 것에 비유했다)에 대해 ‘관작 남용’ ‘요행길’이라며 반대했으나 선조는 이를 물리쳤다.

    선조를 직접 움직인 이는 유성룡이었다. 유성룡은 선조에게 “신의 집이 이순신과 같은 동네에 있기 때문에 신이 이순신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다”고 한다(선조실록). 하지만 국가의 재상이 어릴 적 같은 동네에 살았다는 이유 하나로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발탁했다고 믿기 힘들다. 이보다는 이순신의 강직한 성품을 잘 아는 유성룡이 파직과 백의종군으로 47세에 지방현감이라는 낮은 직위에 머물고 있는 이순신을 과감히 추천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김태훈).

    송우혜씨는 1589년 선조가 북방의 여진족을 토벌한 후 남방 왜적을 대비하기 위해 불차채용(不次採用: 차례를 뛰어넘어 벼슬을 줌)을 명했을 때 이산해와 정언신이 이순신을 추천한 사실을 들어, 이미 계미년 니탕개난 이후 무장으로서 이순신이 성가를 올리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병조판서 정언신은 니탕개난 토벌 때 총지휘를 맡은 순찰사로 당시 전투에 참가한 장수들의 역량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는 입장이었다.

    반면 원균을 추천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송씨는 소설 ‘불멸’에서 오랑캐 토벌전 이후 원균을 ‘육진의 수호신’이라 묘사하는 것은 근거 없는 과장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소설 ‘불멸’은 이순신과 유성룡의 관계를 사림과 훈구의 대립구도 속에서 피어난 일종의 ‘동지애’로 풀어간다. 이순신은 덕수 이씨 출신으로 조선시대에 고관대작을 많이 배출한 뼈대 있는 가문이었으나 중종 때 ‘기묘사화’(조광조의 급진적 개혁이 훈구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사림이 숙청당한 사건)로 이순신의 할아버지 이백록이 죽자 아버지 이정은 관직진출을 포기하고 처가가 있는 충남 아산으로 낙향한다. 소설에서 어린 이순신이 친구들로부터 “죄 짓고 도망쳐온 집안 자식 놈”이라고 욕을 먹자 “헛소리 마. 우린 역적 집안이 아니야”라고 항변하는 장면이 나온다.

    김탁환씨는 “유성룡은 이순신을 ‘어릴 적 친구’나 ‘무예가 뛰어난 장수’로 본 게 아니라, 자신이 존경하는 조광조와 개혁을 도모했던 집안의 자손으로서 ‘이념적 동지’라고 생각했다는 설정 아래 소설을 전개했다”고 설명한다. 소설에서 같은 건천동 출신 원균은 유성룡·이순신과 유년기를 함께하지만 자라면서 대립각을 이룬다.

    원균의 아버지는 경상좌병사까지 지냈으며 대대로 무사 집안. 한마디로 엘리트군인 출신이다. 용감한 ‘돌격대장형’ 원균은 이순신의 어린 시절 우상이었으나 전쟁을 치르면서 기존 전투방식을 고수하는 원균과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전법을 구사하는 이순신 사이에 틈이 생기고 이것이 훈구(원균)와 사림(이순신)의 갈등으로 확대된다는 게 소설 ‘불멸’의 구도다. 그러나 경상도 의성에서 자라다 13세 때 서울로 이사 온 유성룡이 15세의 원균, 10세의 이순신과 어울려 전쟁놀이를 했다는 유년기의 설정은 아무리 소설이라도 가당치 않다는 지적도 있다(송우혜).

    이순신의 생애에서 원균을 빼놓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전쟁기간 내내 이순신은 수많은 왜적과 싸우는 한편, 원균과의 반목과 거듭되는 조정의 불신으로 괴로워했다. 정두희 교수는 “원균과 관련된 문제는 이순신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나 임진왜란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정 교수에 따르면 ‘난중일기’에서 원균에 대한 언급이 84번이나 나오며, 특히 1593년과 1594년에 집중돼 있다. 다음은 정두희 교수의 논문 ‘이순신 연구’에서 옮겨온 것이다.

    임란 직전 조선은 충청도, 전라좌우도, 경상좌우도 모두 5군데에 수군절도사가 있었다. 이순신은 여수에 본영을 둔 전라좌수사였고 원균은 경상우수사였다. 왜적이 처음 들이닥친 곳은 부산으로 경상좌수사 관할이었으나 개전(開戰)과 함께 경상좌수사 휘하 수군이 궤멸됐고, 원균 함대도 초기에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거의 없어졌다. 경상도 수역과 접경하고 있는 전라좌수사인 이순신이 관할 구역을 벗어나 경상도 지역까지 진출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수군 편제상 나라 전체의 수군이 통일된 지휘권 아래 전쟁을 수행하는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의 주력함대를 거느린 이순신과 연장자인 원균의 충돌은 불가피했는지도 모른다. 조정에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 것은 전쟁이 일어나고도 1년이 훨씬 지난 후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이 통제사가 된 후에도 원균은 그의 지휘권을 번번이 무시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임진왜란 첫 승전보는 1592년 5월7일 ‘옥포해전’이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의 구원 요청을 받자 휘하 함대를 이끌고 경상도 바다로 가서 싸워 일본 함대를 격침한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원균은 왜적의 형세가 대단한 것을 보고 감히 나가서 치지 못하고 전선 100여척과 화포, 군기를 바닷속에 침몰시키고 수하 비장 이영남, 이운룡 등과 함께 4척의 배를 타고 달아나 수군 1만여명이 다 무너져버렸다”고 기록했다. 이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일본함대가 부산 앞바다에 출현한 것은 1592년 4월13일, 다음날 부산상륙작전이 벌어졌다. 전라좌수영의 이순신에게 그 사실이 전해진 것은 4월15일. 그렇다면 5월4일 첫 출동까지 스무 날 가까이 이순신은 무엇을 했을까. 그 사이 일본군은 육로로 빠르게 북상하고 있었고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평양으로 파천(播遷)을 준비중이었다.

    김태훈씨는 그 기간에 이순신이 전라좌수영 방어선 구축 등 출전 준비를 하면서 최종명령을 기다렸다고 본다. 4월26일 왕의 비서인 좌부승지 민준으로부터 “조정은 멀리서 지휘할 수 없으니 도내에 있는 주장(主將)의 판단에 맡긴다”는 내용의 공문을 받고, 이순신은 “저는 일개 주장으로서 마음대로 처리하기 어렵다”고 회답했다. 바로 다음날 다시 민준으로부터 온 공문은 “급히 출전하여 기회를 놓치지 말도록 하라”는 명령이었다. 이에 이순신은 “각 지역에 있는 병사들을 소집하는 데 3일이 걸리므로 4월29일 여수 앞바다에 모여 즉시 경상도로 출전하겠다”고 회신한다.

    그러나 출동은 연기됐고 5월4일에야 이순신 함대는 여수를 떠났다. 이순신이 즉시 경상도 해안으로 출동하지 않은 사실은 두고두고 문제가 된다. 나중에 원균이 “이순신이 처음에는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는 것을 내가 굳이 청하여 왔으니 적을 이긴 것은 내가 으뜸공이다”(징비록)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내게는 아직도 배가 열두 척이 있습니다’의 저자인 김종대씨는 이순신이 500척에 달하는 일본함대와 맞서기 위해 가능한 한 정보수집과 사전준비에 최선을 다했다고 평한다. 또 4월30일 출정이 연기된 이유는 그대까지 도착하기로 약속한 전라우수영의 이억기 함대가 미처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김태훈씨는 어떤 이유로든 4월30일 이순신이 출동을 머뭇거린 것은 사실이라고 말한다. 이순신은 4월30일 올린 장계에서 이렇게 적는다. “남해에 경솔하게 행동을 개시한다는 것은 또한 천만 뜻밖의 실패가 없지도 않을 것입니다. …일이 매우 급하더라도 반드시 구원선이 다 도착되기를 기다려서 약속한 연후에 배를 띄워 바로 경상도로 출전할 계획입니다.” 이것이 나중에 원균이 이순신을 공격하는 무기가 됐다.

    임란 최초의 승첩은 원균 몫?

    그런데 4월28일 원균이 보낸 긴급원병요청 공문의 내용이 묘하다. “본도의 수군이 적선 10척을 분멸했으나 적세가 나날이 치성해져 중과부적으로 상적(相敵)할 수 없어 본영이 이미 함락됐다”는 내용이었다. 바로 이 부분 ‘적선 10척 분멸’은 ‘원균 명장론’의 중요한 근거다.

    원균이 임진년 4월에 이루어냈다는 ‘적선 10척 분멸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임란 최초의 승첩은 달라져야 한다. 같은 해 5월 ‘선조실록’에는 선전관 민종신이 어전에서 “원균이 바다에 나가 적선 30여 척을 격파했다고 하였습니다”라고 보고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10척이 30여척으로 바뀌어 있다.

    그러나 송우혜씨는 전투 자체에 대한 상세한 근거가 없고, 이후 원균이 이순신과 치열하게 ‘쟁공’하던 시절에도 그런 주장을 되풀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반면 소설 ‘불멸’은 왜적이 침입해온 4월13일 원균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출동해 가덕도 앞바다에서 100척이 넘는 적선을 맞아 30여척을 격침시키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10척 분멸설’을 따른 것이다.

    김태훈씨도 원균이 4월19일 이후 어느 시점에 출동해 소기의 전과를 거두었다고 본다(그는 ‘숨겨진 원균의 활약’이라고 묘사했다). 또 원균이 도망가면서 100척의 함대를 침몰시키고 1만 명의 수군이 무너져버렸다는 ‘징비록’의 기록은 오류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원균의 경상우수영 휘하 함대를 다 모아 100척이 된다 해도 각 진과 포에 분산 배치돼 있어 한꺼번에 침몰시키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분석이다. 김씨는 경상우수영이 1만명의 군사를 보유했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고 말한다. 조선의 수군이 크게 늘어난 1597년 ‘선조실록’을 보면 3도의 노 젓는 인원이 1만3200명이라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처럼 임란 초기 전투에서 모호한 부분들이 이순신과 원균이 반목하는 빌미가 됐으며 이후에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1594년 수군과 육군이 합동으로 ‘장문포 작전’을 성공리에 마친 후 원균이 통제사 이순신을 제치고 독자적으로 조정에 보고한 것이 문제가 되어 11월 어전회의가 열리자 좌의정 김응남은 이렇게 원균을 두둔했다.

    “당초 수군이 승리를 거두었을 때 원균은 자신의 공이 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즉 이순신은 출전하여 왜적을 칠 생각이 없었는데, 선거이가 힘써 주장하여 출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순신의 공은 그렇게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지위를 원균보다 높였기 때문에 원균은 이로 말미암아 불만을 갖게 되어 이순신을 비난하게 된 것입니다”(선조실록).

    당시 조정은 이순신의 전공을 과소평가하고 원균의 능력과 공훈을 과대평가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이런 시각은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더욱 힘을 얻어 결국 이순신의 해임과 투옥, 정유재란의 발발로 이어진다.

    이순신을 죽여야 할 이유

    명나라와 일본이 강화협상을 진행하던 4년 동안 전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순신은 한산도에 1만명 이상의 수군병력을 집결시켜 일본군과 대치했다. 잘 알려진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로 시작되는 ‘한산도가’도 이 무렵 지은 것이다.

    정유재란 직전인 1596년 12월 ‘부산왜영방화사건’이 있었다. 이순신은 거제 현령 안위 등이 기습공격을 펼쳐 적의 집과 창고, 배를 불태우는 등 전공을 올렸기에 이들을 포상해달라고 장계를 올렸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이조좌랑 김신국의 장계가 조정에 도착하는데 “이 사건은 체찰사 이원익이 군관 정희현에게 명하여 도모한 것으로 이순신은 그런 내막을 모르고 부하에게 보고받은 대로 장계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원익은 평소 선조에게 “경상도 여러 장수 가운데 이순신이 제일”이라고 할 만큼 이순신을 아꼈기 때문에 일부러 이런 장계를 올렸을 리 만무하다.

    이 사건은 오늘날 이순신이 의도적으로 허위보고를 한 게 아니라 부하의 보고를 확인하지 않고 장계를 올린 ‘실수’로 해석하지만 당시 상황은 심각했다. 김태훈씨는 ‘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에서 “이순신을 애정의 눈으로 보면 실수려니 할 수도 있지만 선조와 조정은 그렇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1597년 이순신을 투옥할 때 선조는 직접 ‘이순신을 죽여야 할 이유’로 3가지 죄를 지목했는데 이 사건은 그 중 ‘조정을 속인 무군지죄(無君之罪)’에 해당됐다.

    하지만 죄의 무게로 치자면 두 번째 ‘적을 쫓아 치지 않았으니, 나라를 저버린 죄(負國之罪)’ 쪽이 무거웠다. 그 무렵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통역을 하던 요시라는 조선과 일본의 이중간첩으로 활동했다. 요시라는 경상우병사 김응서를 찾아와 “고니시가 가토 기요마사와 사이가 좋지 않아 그가 바다를 건너올 시기를 알려줄 테니 수군을 이끌고 나가 치라”는 정보를 흘렸다. 조선 조정은 이를 믿을 만한 정보라고 여겨 이순신에게 명을 내렸으나 이순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조정은 들끓었고, 몸이 단 도원수 권율이 직접 이순신의 출동을 재촉하기 위해 1월13일 한산도로 향했지만 이미 가토 함대는 바다를 건너버린 뒤였다.

    ‘징비록’은 “이순신이 왜적들의 간사한 속임수(反間計)가 있다는 것을 의심하여 나아가지 않고 여러 날 동안 머뭇거렸다”고 간략히 기록했다. 그러나 선조와 조정은 이순신을 용서하지 않았다. 체포명령이 내려지고 원균이 새 통제사에 임명됐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정유재란이 터졌다.

    한산도에서 4년을 버틴 까닭

    어떤 이유로 이순신은 왕의 명령을 거절했을까. 정두희 교수는 ‘기다림의 전략’이라 했고 김탁환씨는 ‘실용정신’이라 했다. 정두희 교수는 “이순신의 소명의식은 그릇된 왕명에 복종하는 것보다 더 크고 중요한 데 있었기 때문에 두 차례나 왕명을 묵살하고 마지막까지 움직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당시 일본군과 조선군의 전력 차가 너무 컸기 때문에 이순신은 버티는 전략을 썼다. 당시 상황은 입을 딱 벌린 악어(일본)의 목구멍에 조선군이 틀어박힌 형국이었다. 서로가 죽을 지경인데, 먼저 참지 못하고 움직이는 쪽이 진다. 그래서 이순신은 가토를 잡아오라는 왕명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출동하는 순간 일본군은 뒤에서 치고 들어와 조선군을 궤멸시킬 것이다. 가토를 잡으러 가도 죽고, 항명해도 죽는다. 이순신은 버티는 쪽을 택했다.”

    김탁환씨도 “이순신은 지지 않고 이겨야만 했다. 아무리 왕명이라 해도 이길 가능성이 없다면 따를 수 없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말한다.

    왜 지금 이순신인가

    소설 ‘칼의 노래’와 ‘불멸’을 원작으로 제작되고 있는 역사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출연진. 왼쪽부터 유성룡, 이순신, 선조.

    그러나 송우혜씨는 이순신이 체포령이 내려진 사실을 모르고 2월10일 이미 부산포로 진격했다고 주장한다. “함대는 이날 미(未)시에 부산 앞바다에 닿아 왜적과 싸우고 날이 저물자 절영도에 정박했다가 다음날 다시 싸웠다. 왜적들은 육지에 올라가서 일절 바다에 나오지 않았기에 해안에 정박해 있는 적의 함선들을 가까이 다가가서 공격하는 싸움이었다”(선조실록).

    송씨는 1597년 2월에 감행된 수군의 부산 공격전에 대해 이순신 연구가들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태훈씨도 이 시기 ‘선조수정실록’에는 “부산 근처로 진주하여 적이 오는 길을 차단하겠다”는 이순신의 장계가 실려 있으나 정확히 언제쯤인지 알 수 없다고 했다.

    당시 전투 상황을 비교적 상세히 알린 것은 그로부터 한참 지난 2월28일 원균이 올린 장계다. 원균은 “전 통제사(이순신)가 탄 배가 조수에 걸려 꼼짝 못하는 상황에서 적이 몰려오자 장졸들이 큰 소리를 질러 구원을 청하고 안골포 만호 우수가 급히 노를 저어 달려가 이순신을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와 웃음거리가 됐다”고 전한다.

    부산 전투의 상황은 보고마다 내용이 달라 도원수 권율도 “이번의 보고와 육지 정탐인의 보고사연이 크게 달라 매우 해괴하다”는 언급을 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순신이 부산의 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때 이미 조정은 이순신 ‘체포령’을 내린 상태였다. 김태훈씨는 “조정의 불만을 잠재우려던 이순신의 부산출동은 이미 시기적으로 늦었고 그 결과는 혹독했다”고 평한다.

    선조는 왜 원균을 두둔했나

    이순신 재조명과 관련해 연구자들은 이순신과 원균의 반목 뒤에는 선조가 있었음을 강조한다. 전쟁 기간 내내 선조는 원균을 옹호했고 이순신을 의심했다. 이순신의 전사와 더불어 전쟁이 끝나자 좌의정 이덕형은 선조에게 “정유년간 이순신을 통제사에서 해임하지 않았다면 이런 난리를 겪지 않았을 것”이라는 보고를 올렸다. 이 때에도 선조는 이순신의 전공을 선뜻 인정하기 어려웠고 “수군이 크게 이겼다는 말은 과장된 것이 아닐까 걱정된다”고 말할 정도였다. 전공(戰功)을 가려 공신을 선정할 때는 여러 신하의 반대에도 원균을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공신(무인으로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에 올렸다.

    송우혜씨는 “선조가 그런 오기를 부린 까닭은 조선사회의 관료문화와 제도 에서 찾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조선시대에는 누군가의 천거를 받아 관직에 임명된 자가 죄를 범할 경우 그를 천거한 인물에게도 연좌제를 적용해 처벌했다. 그렇기 때문에 선조는 끝까지 ‘사람을 잘못 쓴 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정두희 교수는 “선조가 7년 전쟁 기간에 단 한 차례도 전선시찰을 하지 않았으며 나라보다 왕권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평가한다. 임진왜란 때 선조에 대한 평가는 결코 후하지 않다. 심지어 실록을 작성한 사관조차 선조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정유재란 막바지인 1598년 11월7일 ‘선조실록’은 선조가 “친히 남하하여 군사와 민초의 사기를 진작시키겠다”고 하자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달아놓았다.

    “임진왜란 때는 흉봉이 경기도내에 이르지도 않아서 임금의 수레가 이미 서쪽으로 파천하였고 정유재란 때는 왜적이 겨우 남쪽 변방에 이르자 내전이 먼저 황해도로 옮겨갔다. 7년 동안 모든 것이 움츠려 구차하게 보전하려는 계책이었고 쇄신 분발하여 적을 섬멸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의리를 진작시키지 않았으니 지금 비록 남쪽으로 내려가겠다는 하교가 있지만 신은 믿어지지 않는다.”

    김탁환씨도 “이순신과 선조의 대립을 불편해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순신을 둘러싼 갈등의 핵심은 선조에 있다. 이순신은 기본적으로 사림이었다. 그들은 왕도 틀릴 수 있다,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믿었다. 이순신의 충(忠)이 임금을 향한 충이 아님을 선조도 알았고 그래서 ‘무군지죄’를 물어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 부분을 밝히지 않고는 이순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소설 ‘불멸’은 전쟁이 나자 이리저리 도망다니면서도 ‘전제군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으려는 선조와 승승장구하며 전쟁영웅으로 커가는 이순신의 대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한 번도 얼굴을 맞댄 적이 없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사화로 몰락한 가문에서 태어나 늦깎이로 무과에 급제했으며 강직한 성품 때문에 관직생활 동안 세 번의 파직과 두 번의 백의종군을 거쳐 전사한 비운의 주인공. 23전 23승의 전적이 말해주는 승리의 화신. 흔히 알고 있는 이순신의 모습이다.

    그러나 새롭게 이순신 평전을 쓰는 사람들은 감춰졌던 이순신의 진면목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순신은 마지막 전투(노량해전)만 빼고 모든 전투에서 시기와 장소를 골라서 수행했다. 즉 원하는 장소에 적을 끌어들여 원하는 시간에 싸웠다. 전쟁의 반은 이기고 들어간 셈이다. 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겠나. 이순신은 답답할 정도로 꼼꼼한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영웅호걸과는 다르다. 평소 어머니가 자식을 돌보듯 섬세하지만 목숨을 던져야 할 순간 엄청난 폭발력을 보여주었다. 이순신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소명을 깊이 깨달은 사람이다. 그러나 결코 비운의 주인공은 아니다. 자신이 구상한 전략을 100% 써보고 죽지 않았나”(정두희).

    “이순신은 책임감의 화신이다. 그의 위대함은 거북선을 만들어 왜군을 무찔렀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노량해전 때 명군(明軍)이 작전권을 쥐고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제지할 때 이순신은 이를 어기면서 공격을 감행한다. 그것은 파격이며 무장으로서의 책임감이다. 이순신은 조선의 영웅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영웅이었다. 이순신의 존재로 동아시아 역사가 달라졌다”(한명기).

    “무(武)로써 문(文)을 이룬 자라는 설명이 이순신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동시대인들은 이순신의 전략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일들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정은 그를 ‘컨트롤’할 수 없었다. 전쟁이라는 극한 속에서 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을 한계상황으로 몰고가 영웅이 되는지를 ‘불멸’을 통해 그리고 싶었다”(김탁환).

    “이순신 평전은 사후평가로 마무리 지을 생각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이순신 논쟁이 계속되고 있지 않나. 이것도 이순신의 삶이다”(송우혜).

    ‘이순신과 7년 전쟁’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공백이 너무나 많다. 이순신의 삶이 얼마만큼 복원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평전 한 권 없는 상황에서 드라마를 통해 왜곡된 역사상이 자리잡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지울 수 없다. “드라마와 소설은 픽션이라는 점을 잊지 말고 일반인들은 마음 한귀퉁이를 열어 놓고 보아야 한다”는 당부와 “학계는 이처럼 중요한 인물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다는 사실에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질책이 절실하게 와닿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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