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구로공단은 진한 땀 냄새가 밴 산업화의 시발점이다. 전성기이던 1977년, 10만여 노동자 대부분은 여공이었다. 그들의 삶을 극명하게 나타낸 노래가 ‘사계’다. 이 노래를 듣는 순간만큼은 ‘벌집’에서 살던 그들에 대해 한없는 연민을 느끼며 예의를 차려야 한다.
옆에서 듣고 있던 딸아이가 말한다. “아빠 넘 슬퍼.”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오래전 일이다. 그날 나는 오랜만에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의 ‘사계’를 틀었고, 옆에 있던 철부지 ‘초딩’은 그렇게 슬퍼했다.
그렇다. 사계는 슬프고 비장미 넘치는 노래다. 그럼에도 운동권 가요치고는 곡조가 지나치게 발랄하고 감각적이어서 일부 운동권으로부터 배척받았다. 그렇지만 그 발랄함 속에 숨은 페이소스(애상감)에, 사람들은 이다지도 경쾌한 노래를 들으면서 외려 깊고 무거운 슬픔에 잠긴다. 그 답은 ‘노찾사’에서 찾아야 한다.
1970년대 말~1980년대 초에 대학을 다닌 이 땅의 중년에게 노찾사는 하나의 상징이다. 노래는 역사에 청춘을 내던진 사람들의 비명에 가까웠다. 그 시절, 학과 MT나 직장 단합대회 끝 무렵이면 어김없이 터져 나오던 노래들이 있다. ‘사계’가 있고, ‘광야에서’가 있고, 아!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도 있다.
1970년대 말부터 본격화한 대학생들의 구로공단 일대 노동현장 투신은 한국 사회의 특이 현상이자 시대정신(Zeitgeist)의 상징이었다. ‘학출’(학생운동 출신) ‘학삐리’로 불리던 그들은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내던지고 가리봉 오거리 노동현장으로 뛰어들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그들을 ‘위장취업자’로, 노동현장에서는 ‘먹물’로, 정권에서는 ‘불순세력’ ‘좌경용공세력’으로 불렀다. 그 시절, 기업에선 위장취업자 색출 지침까지 배포되고 학습됐다.
자발적 ‘공돌이’ ‘공순이’
‘이력서의 필체가 기재된 학력에 비해 좋거나, 안경을 쓰고 대학생들이 잘 입는 복장을 한 근로자, 대학가의 속어를 무의식적으로 쓰는 경우, 글 쓰는 손마디에 굳은살이 박인 경우, 노동법 등에 지식이 많은 자, 이유 없이 동료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자….”
그들은 자발적 ‘공돌이’ ‘공순이’였다. 부모가 뼈 빠지게 일해 ‘우골탑’ 대학에 보낸 그 잘난 아들딸들이 고시 공부, 취직 공부는 안 하고 제 발로 공장으로 들어가 노동자가 됐다. 가난한 부모의 기대와 눈물을 모질게 외면한 채 노동현장으로 뛰어든 청춘들. 어찌 보면 불을 보고 뛰어드는 불나방 같은 무모함 그 자체였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 민주화의 원동력이 됐음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으랴. 지금의 20, 30대에게는 1980년대를 추억하는 선배들의 낭만쯤으로 비치겠지만, 청춘을 바쳐 민주화를 부르짖던 그들은 이제 꽃다운 꿈을 채 피워보지도 못하고 허름한 역사의 뒤안길에 들어섰다.
1970년대 말~1980년대 중반은 ‘혁명의 시대’라 할 정도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이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군부독재, 대학생 시위, 노동운동,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그리고 이들과 함께 등장하는 최루탄 냄새 등이다. 최루탄 냄새의 한가운데에 민주화를 향한 노동자, 대학생들의 핏빛 저항이 있었고, 그 몸부림에는 민중가요가 함께했다.
이 시기 운동권 학생들이 주동이 된 노동운동은 노동자 집단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이전 시대와는 다른 양상을 띤다. 1960~1970년대 학출의 경우 멀리는 러시아의 ‘브나로드’(민중 속으로) 운동, 가까이는 심훈의 상록수 같은 다분히 계몽적, 낭만적 감성으로 노동현장과 농활(농촌활동)에 뛰어들었지만, 1980년대부터는 집단적 · 조직적으로 투신했고, 노동자 스스로 정치적 주체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그 목표를 뒀다.
‘타이밍’ 먹던 효순이들
노동현장에서 젊은 학출들은 동료 노동자들과 연대했지만, 때로 갈등했다. 대학생, 그것도 일류 대학생과 공돌이 공순이라는 태생적 차이 때문에 적잖은 상처를 주고받았다. 서울대 재학 중 공장에 뛰어든 국회의원 심상정은 노동자들과의 정서적인 괴리에서 오는 갈등이 가장 힘들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작가 신경숙도 한때 ‘벌집’에 살며 구로공단에서 일했다. 1970년대 후반 열여섯에서 스무 살 때까지 벌집에서 여공으로 산 신경숙이 소설 ‘외딴방’에서 ‘서른일곱 개 방 중의 하나, 우리들의 외딴방’이라고 한 그 방들이다. 공단 입구에 ‘기계는 30%, 노동력은 70%’라는 표어가 걸렸던 시절, ‘라인은 24시간 돌아가야 한다’는 게 모든 공장의 업무 원칙 1조였다.
식권이 한 장 나오는 날은 잔업, 두 장 나오는 날은 철야를 하는 날이었다. 철야하는 밤, 공장 입구에는 ‘타이밍’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입시 공부를 하면서 한 번쯤 삼켜봤을 각성제다. 공단의 10대 소녀들에게는 졸다가 불량품이 나올까봐 반강제로 먹인 것이다.
고된 철야를 끝내고 돌아가 쉬는 곳이 벌집이다. 두세 평 남짓한 벌집엔 벌 대신 여공들이 살았다. 벌집의 필수품은 석유곤로와 비키니 옷장, 그리고 가족사진이다. 벽지는 당연히 신문지. 공동 구입한 카세트라디오가 사과박스로 만든 간이 책상 위에 놓였다. 그들은 대개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이 땅의 ‘효순이’들이다.
민주화를 향한 노동운동, 학생운동의 몸부림에는 ‘타는 목마름으로’ 같은 전설적인 저항의 노래가 있었다. 이름하여 민중가요다. 어렵사리 음반으로 나왔지만 아직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음반사는 돌연 음반 유통을 취소했고 이들의 노력도 기억 너머로 사라졌다. 그런 노래들을 찾아 집대성한 게 노찾사다.
1987년 6 · 29선언 이후 민주화 분위기 속에 열린 노찾사의 첫 공연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고향 생각이나 사랑이 공통의 주제이고, 서구 팝 음악의 모방에 그치던 당시 가요 시장에 노찾사의 묵직하고 음울하면서도 뜨거운 노래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 중심에 ‘사계’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등이 있다. 특히 ‘사계’는 대학생 퀴즈 프로그램 MBC ‘퀴즈 아카데미’의 피날레 뮤직으로 사용돼 많은 이의 귀를 사로잡았다.
민중가요의 합법화, 대중화
노찾사의 노래들은 당시의 상업성과 서구식 문화에서 벗어나면서도, 상대적으로 높은 음악적 완성도를 보여줬다. 아름다운 노랫말과 멜로디, 보컬의 가창력, 가사의 전달력과 수준급 반주는 거대한 주제의식에 눌려 ‘투쟁용’에 그치던 민중가요의 한계를 뛰어넘는 신호탄이었다. 노동현장에서는 물론 일반인에게도 선풍적인 호응을 얻으면서 회식 장소에까지 등장했다. 특히 김광석과 안치환이 번갈아 부른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와 ‘광야에서’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노래운동이 겪어온 길을 증거하는 듯한 노랫말과 호소력 짙은 음색으로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노래는 ‘사계’다. 여성 보컬, 건반의 경쾌한 연주와는 극히 대조적으로 여공들의 쳇바퀴 도는 듯한 단조롭고 신산한 삶을 그려낸다. 요즘도 가끔 7080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권진원의 젊은 목소리가 인상적이다. ‘사계’는 이후 거북이(터틀맨)에 의해 힙합 버전으로, 또 클럽하우스 버전으로 흥겹게 불려졌다. 랩 가사도 발랄해서 민중가요 세대에게 욕도 많이 먹었지만, 지금 세대에게 노래를 알리는 데는 큰 공을 세웠다.
노찾사 노래의 한계는 무거운 주제의식과 어두운 분위기다. ‘이 산하에’와 ‘오월의 노래’, 제주 4·3사건 희생자들을 위한 진혼곡 ‘잠들지 않는 남도’ 등 노래 대부분이 시종일관 침울하다. 소외된 것들을 조명하는 민중가요의 특성상 피할 수 없는 한계인 듯하지만, 대중성을 얻는 데 실패했고 그런 연유로 지금 시대에는 그 깊은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앉은뱅이 책상의 ‘철학에세이’
그러나 민중가요의 합법화, 대중화를 동시에 달성했다는 점에서 노찾사의 공로는 독보적이다. 한국 현대사의 아픔과 함께했고, 우리 사회에는 지금도 여전히 노찾사의 노래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우울하다.
노찾사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민중가요에 뿌리를 둔 태생적 한계로 인해 딱히 노래가 전하는 풍경을 시각화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러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목 놓아 부른 적이 있다면 인천시 부평구 신트리공원에 가보기 바란다. 노랫말의 원작자이자 1980년대 노동시의 새로운 지평을 연 박영근(1958∼2006) 시인의 시비(詩碑)가 있다. 커다란 화강암 시비 앞면에 그의 시 ‘솔아 푸른 솔아-백제 6’이 새겨졌다.
부르네 물억새마다 엉키던/ 아우의 피들 무심히 씻겨간/ 빈 나루터, 물이 풀려도/ 찢어진 무명베 곁에서 봄은 멀고/ 기다림은 철없이 꽃으로나 피는지/ 주저앉아 우는 누이들/ 옷고름 풀고 이름을 부르네/ 솔아 솔아 푸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
글자체는 시인이 남긴 육필원고에서 땄다. 박영근은 1974년 전주고 1학년을 중퇴하고 상경해 구로공단 일대에서 공장 노동자로 떠돌며 살았으며, 1985년 인천 부평으로 이사했다. 시인이 25년 동안 산 곳이 부평이었고, 마지막 삶터도 부평이었다. 시비가 고향인 전북 부안이 아니라 부평 신트리공원에 세워진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노찾사의 흔적을 느끼게 해줄 ‘끝내주는’ 뉴스가 등장했다.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과 경희궁 서울역사박물관이다.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은 금천구가 옛 벌집을 구입해 그 시절의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한 곳이다. 상설 체험관이라 느긋하게 찾아봐도 된다. 벌집으로 불리던 가리봉동 133-52번지 구로공단 노동자 거주지가 눈길을 끈다. 두 평 남짓한 방, 지금은 사라진 ‘후지카 석유곤로’가 맨 먼저 관람객을 맞는다. 방구석 앉은뱅이 책상이 남루하다. 못 배운 한을 풀고자 했을까. 앉은뱅이 책상에 놓인 ‘철학에세이’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같은 책들을 보니 먹먹해진다. 신문지로 도배한 벽에는 할리우드 여배우와 팝송 가수 사진 열댓 장을 다닥다닥 끼워 넣은 액자가 있다. 여공들은 돈을 아끼려고 한 방에 3~4명이 살았다. 이런 방이 6개 잇대어 있는데 화장실은 하나다. 아침마다 화장실 앞에서 발을 동동 굴렀으리라.
생활관 직원 김선영 씨에 따르면 과거 이 일대에서 일했던 중년여성들이 혼자 오거나 친구들과 찾는다고 한다. 가족과 함께 오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은 쪽방문을 열자마자 쏟아져 나오는 눈물 때문에 체험관을 다 둘러보지 못하고 흐느끼며 떠난다고 했다.
서울역사박물관의 ‘가리봉 오거리’ 전시회는 구로공단 반세기를 기념해 서울시가 기획했다. 노찾사를 그리워하는 세대는 즉시 역사박물관으로 달려가기 바란다. 7월 12일이면 전시회가 끝난다. 철거 예정인 가리봉동 133-52번지 벌집주택단지에서 가져온 문짝들을 비롯해 생활가구들을 실감 나게 전시해놓았다.
좋은 것은 언제나 미래에 있으리
구로공단은 진한 땀 냄새와 애환이 밴 우리 산업화의 시발점이다. 1977년 전성기 때 10만여 노동자의 대부분은 여공이었다. 그들의 삶을 극명하게 나타낸 노래가 ‘사계’다. 우리는 적어도 이 노래를 듣는 순간만큼은 그들에게 한없는 연민과 함께 예의를 차려야 한다.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가족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이 땅의 수많은 누나, 언니, 여동생이 흘린 회한과 고독의 눈물에 대해 우리는 오늘 말을 아껴야 한다.
‘폭풍이 부는 들판에도 꽃은 피고/ 지진 난 땅에서도 샘은 솟고/ 초토 속에서도 풀은 돋아난다/ 밤길이 멀어도 아침 해 동산을 빛내고/ 오늘이 고달파도 보람찬 내일이 있다/오! 젊은 날의 꿈이여, 낭만이여 영원히’
그 시절을 재현한 여공의 방, 낡은 액자에 끼워져 있던 바이런의 시 ‘희망’이다. 그렇다, 좋은 것은 언제나 미래에 있으리(The best is yet to be). 우리는 그렇게 믿고 살아냈다.
- 1990년대 초 필자는 서울 신촌의 한 여대 중강당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그날 하객으로 온 소프라노의 선창으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결혼축가로 다 함께 불렀다. 이날 풍경은 2011년 7월 12일 ‘중앙일보’에 실린 필자의 기명 칼럼 ‘루이뷔통 vs. 똥색 비닐가방’에 잘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