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호

남에게 엄격한 봉두완의 말, 자신에 치열한 이외수의 글

  • 정혜신

    입력2006-07-27 14: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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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두완과 이외수는 우리의 삶에서 재능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또 어 떤 의미가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남자들이다. 때로 재능은 우리들의 눈을 멀게도 하는데….
    봉두완 교수는 다재다능한 사람이다. 그는 신문기자, 방송진행자, 국회의원, 대학교수 등 각각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직업을 두루 섭 렵한 흔치 않은 사람이다.

    93년 이래로 봉두완의 공식적인 직함은 광운대 인문사회과학대 신문방송학과 정교수다. 그런데 ‘돈 안되는 일’을 하기 위해서 맡고 있는 감투는 더 많다. 그는 현재 성(聖)나 자로마을(나환자촌) 돕기회 회장, 남북한 장애인 돕기 운동본부 고 문, 천주교 서울대교구 한민족 복음화추진회장, 적십자 봉사회 중앙 협의회 회장,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를 맡고 있다.

    많은 사람이 봉두완이란 인물에 주목하고, 박수를 보내거나 신경을 곤두세우는 건 그의 공식적 직함이나 존경을 받아 마땅한 봉사활동 경력 때문이 아닐 것이다.

    봉두완은 우리에게 영향력 있는 언론인 혹은 탁월한 진행능력이 돋보이는 방송인으로 인식돼 있다. 우리나 라 최초의 앵커맨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그는 나이가 벌써 66세임에도 방송진행 능력만큼은 아직도 절정의 감각을 유지하 고 있다.

    “어디 이런 사람 없나요? 말 잘하고, 호감 주는 목소리에 딱딱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풀어낼 만한 사람, 편파적이라는 이야기 듣지 않도록 시각은 균형 잡혀 있어야 하고, 사회 정치 경제 문화 환경 등 모든 분야에 상당한 지식과 일가견을 갖고 있는, 그러면서도 카 리스마가 있고 대중적인 지명도가 있는 그런 사람 혹시 어디 없나요 ?”



    이 황당하고 불가능할 것 같은 구인광고의 카피는 라디오 시사프로 그램 제작진이 늘 하는 말이란다.

    그렇다면 시사프로그램 제작진의 끊임없는 구애를 받고 있는 봉두완은 이런 불가능한 조건을 거의 완 벽하게 갖춘 사람이라는 의미 아닌가. 대단하다. 시사평론가나 방송 인으로서 봉두완의 재능이나 상품가치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

    1970년 4월 1일 TBC라디오 ‘뉴스전망대’에서 꽃피우기 시작한 봉 두완의 탁월한 재능은 여전히 유효하다. 엄밀하게 말하면 여전한 정 도가 아니다. 이제 그의 풍자나 질타는 봉두완의 사회적 중량감이나 만만치 않은 인맥과 맞물려 그 파괴력이나 영향력에 있어서 메가톤 급이다.

    이 대목쯤에서 봉두완의 놀라운 재능에 대한 부러움이나 감탄의 심 정을 잠시 접어보자. 대단히 변덕스럽고 방탕하며 무책임하기까지 한데 얼굴은 장동건인 남자가 있다 치자. 플레이보이 기질에 질려버 린 여자는 그 사내와 결별하고 싶어하지만 그때마다 흔들리는 자신 을 발견한다. 성격이나 기질이라고 하는 무형의 요소보다는 대리석 을 깎아놓은 듯한 그의 준수한 얼굴이 먼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때로 인간의 재능이란 ‘장동건의 얼굴’처럼 한 사람을 제대로 인식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봉두완은 이러한 인식의 걸림돌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인물이란 게 필자의 생각이다. 특히나 봉두완은 그의 빛나는 재능과 존경스러울 만큼 이타적인 삶이 어우러져 더더욱 그의 실체에 대한 정확한 인식 을 어렵게 한다.

    필자는 이 글에서 봉두완을 찬찬히 다시 살펴보려고 한다. 살다보면 예전에 보았던 헝클어진 사진더미가 마음에 걸려 느닷없이 책상서랍 을 뒤엎어 놓고 정리를 시작하는 때도 있지 않은가. 바로 그런 것이 다.



    타고난 작가인가, 노력하는 소설가인가

    소설가 이외수는 자신이 문학에 별로 소질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 다.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은 사람의 자신감에서 나온 의례적인 겸양 은 아닌 것 같다.

    “나는 딱 중간 정도의 인물이지요. 다만 남들보다 뛰어난 점이 있 다면 굶주림과 불면에 강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 활용에는 남들보 다 강한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94년 그가 한 잡지와 인터뷰할 때 한 말이다. 1980년 발간된 창작집 ‘겨울나기’의 작가 후기도 그런 마음의 일단을 잘 보여준다.

    “제 소설에 속지 마십시오. 저는 실패의 천재, 사랑도 실패하고 자 살도 실패하고 소설도 실패만 합니다.”

    소질 없는 사람이 소질 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쓰려면 어쩔 수 없이 몇 배나 많은 시간을 고통으로 뒤척일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주장 이다. 남들은 자기를 보고 ‘타고난 인물’이라는 평가도 하는데, 사실은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 뿐이라는 것이다.

    좀 의외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다작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의 소설은 항상 40만∼50만 부가 고정적으로 팔린다. 더구나 첫 출간한 지 20년이 넘은 그의 첫 장편소설 ‘꿈꾸는 식물’에서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그의 전 소설은 ‘죽지 않고’ 계속 팔리는 스테디셀러 다. 간간이 간행하는 몇 권의 산문집도 15쇄 정도는 기본으로 찍어 낸다.

    출판에 있어선 일종의 흥행 보증수표가 바로 이외수다. 이른바 ‘이 외수 마니아’란 독자군이 형성돼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아마 우 리나라의 모든 작가를 통틀어 2∼3명 정도만 이런 희귀한 경우에 속 할 것이다.

    그의 문학활동 초창기인 1980년, 어떤 문학평론가는 이외수를 일러 만들어진 작가가 아니라 태어난 작가라고 평가했다. 타고난 듯한 상 상력과 아름다운 언어의 연금술을 터득하고 있는, 한마디로 천부적 인 재능을 타고난 작가라는 것이다. 그의 독특한 감성과 재능에 대 한 찬사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럼에도 이외수는 자신의 재능없음을 한탄하면서, 선혈(鮮血)로 쓴 다는 말을 들을 만큼 처절한 노력으로 자신을 ‘타고난 작가’의 반 열로 밀어 올린다. 이 대목에 이르면 인간의 재능이란 게 도대체 무 엇일까 하는 의문이 생겨난다.

    과연 동시대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작가 중 한 사람이라는 대중의 평가와 재능있는 작가가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할 뿐이 라는, 이외수 본인의 말 중 어느 것이 진실일까. 늘 ‘재능이 있는 가 없는가’ 하는 화두로 해서, 부러움과 절망과 교만의 감정에 일 희일비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이외수는 또 다른 호기심을 불러일 으키는 인물이다.

    다시 봉두완으로 돌아가자. 현재 봉두완은 SBS 표준FM에서 아침 6시 30분부터 2시간 동안 ‘봉두완의 SBS전망대’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 프로그램의 청취율이나 스폰서 숫자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한다. 지난 11월 초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을 두고 있다는 한 직장여 성은 봉두완에게 감탄하며 감사의 글을 보낸다.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으면 가슴에 담겨 있는 묵은 찌꺼기가 내려 가는 것 같아 항상 기분이 좋아요. 제가 궁금하고 물어보고 싶은 말 들을 모두 하시고 때로는 질책과 칭찬을 하시는 선생님 정말 존경합 니다. 연세가 있으신데 그렇게 왕성한 활동을 하시고 남을 위해 봉 사도 하시고 젊은 저희가 많이 배우려 합니다.”

    고등학생 팬도 있다. “고2 소녀인데 학교에 갈 때 아버지 차에서 매일 듣다가 아저씨를 많이 존경하게 되었어요. 다른 라디오 프로그램에선 아저씨 프로그 램처럼 강렬한 카리스마가 느껴지질 않아요.”

    이쯤되면 젊은 오빠가 따로 없다. 그러나 진짜로 흥미로운 건 30대 의 한 남자가 보낸 편지다.

    “국민을 대변해서 그렇게 바른 소리만 하다가 어떻게 되는 것은 아 닌지 모르니까 조심하시구요. 하지만 걱정은 마십시오. 선생님의 뒤 에는 시청자라는 든든한 빽이 있잖아요. 세상에 두려울 것이 뭐 있 겠습니까.”

    흥미롭다고 표현하는 건 봉두완의 방송에 대한 시청자의 반응이 늘 이러한 심리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말하는 사람보다 오히려 그 방송을 듣고 있는 사람이 더 조마조마한 느낌이 들어서 힘을 보태주 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 그게 바로 봉두완이다.

    물론 봉두완이 ‘바른 소리’ 때문에 결정적인 불이익을 당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서민의 대변자, 박력있는 진행, 발군의 카리 스마,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통렬한 풍자 등은 20년간 이어져 온 봉 두완의 트레이드마크다.

    봉두완은 59년 동화통신 정치부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해 한국일보 주미특파원(1962∼1968년), 중앙일보 동양방송 논평위원(1969∼1980 년)을 역임했는데, 이 기간에 ‘뉴스전망대’ ‘시사토론 동서남북 ’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 등의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소위 봉두완식 진행을 선보여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았다. TBC TV와 라디 오의 모든 뉴스프로그램을 봉두완 혼자서 진행할 만큼 발군의 기량 을 과시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방송인으로서의 활동은 오히려 그 이후부터다. 방송 중단 8년 6개월 만인 1989년 11월 주부대상 프로그램인 MBC라 디오 ‘여성시대’ 진행을 시작으로 ‘MBC 전국패트롤 봉두완입니다 ’를 거쳐 KBS1 라디오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를 진행한다. 그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예전의 명성을 완전히 회복하며 또 다른 전성기를 맞이한다.

    95년, 96년에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는 여론주도계층이 가 장 선호하는 동시에 가장 영향력있는 프로그램으로 선정되었으며, 9 7년에는 봉두완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10걸에 선 정되기도 했다.



    봉두완의 바른 소리

    봉두완은 2000년 현재의 대한민국 사회, 특히나 정치권에 대해서 듣 는 사람이 민망할 만큼 강도 높은 비판을 일삼는다. 위에서부터 아 래까지 어디 하나 썩지 않은 곳이 없다며, 권력의 핵심을 쫓으며 아 직도 건재한 해바라기 정치인들은 낙향해서 글이나 읽으며 남은 평 생 참회록이라도 쓰며 여생을 보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고 질타한 다. 이렇게 말해도 되는 것일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봉두완은 5공 출범과 함께 정치에 입문한 사람 이다. 이제는 지겹게 들릴 수도 있는 5공의 정통성 시비나 원죄 의 식을 말하자는 게 아니다. 만일 제5공화국이 ‘새시대 새정치’를 표방하지 않았더라면 정치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그의 고백이 고 보면 원죄의식 운운할 것도 없다.

    그는 81년 1월15일 역사적인 민정당 창당 대회에서 사회를 맡았는데 광복 후 이 땅에 생겼다가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린 400여 개의 정당 들을 생각하면서 민주정의당의 창당이념만은 영원히 후손들에게 물 려줘야겠다는 사명감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고백한다.

    지금도 그의 이력 어디에나 자랑스럽게 명기되어 있는 건 11대 국회 의원 선거 결과다. 81년 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마포,용산에 출마 한 봉두완은 16여만 표를 얻었는데, 그의 표현대로라면 건국 이후 여당후보로는 처음 보는 전국 최다득표를 기록했다.

    당시 봉두완은 유세장에서 자신 같은 사람이 정치권 밖에서 마이크 를 잡고 비판의 소리를 외쳐대기에는 안팎의 사정이 너무 급박하다 고 절규했다. 당시 유권자들은 민정당이 어떤 정당인지조차 모를 때 였다. 단지 10년 가까운 세월 방송을 통해서 독특하고 탁월한 솜씨 로 서민의 대변자를 자임하던 봉두완은 너무나 익숙한 인물이었다. 결국 봉두완은 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서민의 대변자에서 민정당 초대 대변인으로 변신한다.

    그는 국회의원은 자유직업 중에 최고로 우대받는 유일한 직업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의 말처럼 11대와 12대 국회에서 봉두완은 최 고로 우대받으며 국회 외무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13대 국회의 원 후보 공천에서 제외되었다. 6·29 선언 직후 군출신 인사들을 일 선에서 물러나게 해야 한다는 건의를 노태우대표에게 했는데, 그때 앙심을 품은 군부세력들이 복수극을 펼쳤다는 것이다.

    공천에서 제외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충격과 배신감으로 치 를 떨었다고 한다. 3개월간 배신감과 무력감으로 팔다리가 마비되는 고통과 실어증(失語症)을 겪었다 하니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심했는 가를 짐작할 만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지나치리만큼 낙관적 이고 유머러스한 봉두완의 이미지만으로는 잘 상상이 안 가는 대목 이다.

    그는 12대 국회의원 유세 때도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고 말한다. 자 신의 사무실에 돌과 화염병을 던지고 명동성당에서 나오는 자신을 향해 돌과 계란, 모래를 던지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 다는 것이다. 자신을 끌어안고서 왜 여당 국회의원이 돼서 젊은이들 을 실망시키느냐는 한 젊은이의 울부짖음에 선거 때 빌려 쓰던 여관 방으로 달려가 문을 잠그고 혼자 울었단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 자.

    “내가 왜 군인들을 따라다니다가 이런 수모를 겪을까. 국회의원 하 는 일이 그렇게 나쁜 걸까. 내가 죄인인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 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자신의 정치적 과오 때문은 아니라 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과연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것 같다는 봉두완의 멘트인가. 방 송인 봉두완이 보여주는 날카로운 풍자의 칼날과 얄미울 만큼 정확 한 현실인식은 정치인 봉두완에게 적용되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 지는 모양이다. 더 실망스러운 건 노태우대표에 대한 인간적 배신감 과 공천제외라는 개인적 절망이 겹치면 팔다리가 마비되고 실어증에 걸릴 만큼 충격을 받지만, 자신이 진리요 정의라고 믿었던 가치관이 흔들릴 때는 그저 눈물 한방울 찍어내는 갈등으로 수습된다는 점이 다.

    어떠한 직책이나 어떠한 대가의 약속도 없이 무조건 신군부의 창당 작업에 동참할 만큼 그들이 제시한 ‘새시대 새정치’의 이념에 전 폭적으로 동의했다면 그 가치관이 뿌리째 흔들릴 때 그런 식의 반응 을 보여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자신의 이해관계에는 눈에 불을 켜 면서도 ‘대의(大義)’를 추구하는 일에는 나몰라라 하는 정치인을 질타하는 게 봉두완의 전매특허 아니던가. 그는 98년 2월 한 신문의 칼럼에서도 이런 아름다운 정신을 또 한 번 역설한다.

    ‘정치인들이 앞장서 스스로 뼈를 깎는 개혁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 는 한, 그리고 그 알량한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 조국의 앞날은 암울할 뿐이다.’

    88년 공천탈락된 지 1년쯤 후 봉두완은 MBC라디오 ‘여성시대’에서 워밍업을 거쳐 본격 시사프로그램 ‘MBC 전국패트롤 봉두완입니다’ 를 진행한다. 정치에 대한 한을 잠시 접은 채 특유의 대중적 감각을 바탕으로 노태우 정권에 대해 직격탄을 쏘아 댄다. 특히 강도 높은 수서사건 논평과 관련해 ‘국회의원에 출마하려고 인기작전 펴는 것 아니냐?’는 수군거림도 있었지만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청와대 개입설까지 시사했다. 사람들은 이제 그가 다시 예전의 럭비공 같던 방송인 봉두완으로 돌아오는 모양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바로 그해 봉두완은 정치재개 의사를 밝힌다.

    “정치에 대한 노스탤지어에 무척이나 시달렸던 3년 6개월이었습니 다. 치미는 분노를 달래는 한편 정치에 대한 샘솟는 관심을 누르느 라 무척 애를 썼지요.”

    다음해에 국민당 소속으로 용산지역에서 1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한 봉두완은 서정화, 한영애에 이어 3위로 낙선의 고배를 마신다. 당시의 민정당이나 국민당이 모두 신생 정당이었고 출마 직전까지 방송활동을 했던 상황까지 똑같았음에도 81년 16여만표를 얻었던 자 신의 지역구에서 10여년이 지난 92년에는 겨우 3만2000표를 득표하 는 데 그친 것이다.

    94년 10월 KBS1라디오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를 통해 다시 방송에 복귀한 봉두완은 방송인으로서 제2의 전성기를 맞았지만 심 심치 않게 공정성 시비에 휘말렸다. 97년 6월 국민회의 정동영 대변 인은 이 프로의 공정성에 강한 의문을 표시했다. 봉두완이 고정출연 자인 연합통신 김모 논설위원에게 다음 대통령은 누가 될 것 같으냐 고 질문했는데 김위원은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될 것이라고 대 답했다는 것이다.

    또 봉두완은 대선 전에 노골적인 이회창후보 편들기 발언으로 세 차 례나 선거방송 특별위원회의 주의를 받았다. 당시 국민회의와 자민 련의 후보단일화를 ‘두 김씨의 야합’이라고 공박했고, “그냥 두 분이 해 자시라 이거예요”라는 표현까지 썼다. 또 3김 정치를 밀실 야합이라고 맹비난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연설내용만 소개해 편 파시비도 불러일으켰고 방송기자 클럽 주최 이회창 대통령후보 토론 회 사회자로 선정돼 이회창 후보와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통령선거가 끝난 후에는 양상이 좀 달라진다. 김대중대통 령 당선자의 ‘국민과의 대화’ 사회자가 돼 그의 유연한 방송진행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더니 칼럼을 통해서는 김대중찬가를 부른다.

    “자유당 말기부터 정치부 기자생활을 했지만, 김대중 대통령 당선 자만큼 IMF 같은 위기의 극복을 위해 하느님이 도구로 쓰기 위해 준 비했던 사람도 없구나 하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98년 2월 한나라당 맹형규 대변인은 봉두완의 편파적 진행을 문제 삼아 KBS사장에게 진행자 교체를 요구한다. ‘이 말을 하면 한나라 당에서 전화가 온다’거나 ‘한나라당인지 두나라당인지 모르겠다 ’, ‘한나라당에 실망했다’는 등의 멘트를 통해서 의도적으로 한 나라당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방송을 했다는 것이다. 맹대변인은 또 봉두완이 공정성이 생명인 언론을 이용해 해바라기성 행태를 드 러내고 있다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봉두완은 신문 인터뷰를 통해 즉 각적인 반박에 나선다.

    “누가 누구의 편을 든다고 호통치고,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대변인 성명이나 발표하고 방송 그만하라 한다면 그건 한참 잘못된 일이다. 국민을 무시하는 행위며 언론을 탄압하는 일이다. 우리 사 회를 고스톱판의 룰로 심판하지 말라.”

    인기 앵커맨 출신 맹형규 대변인과 펼치는 방송의 공정성에 대한 설 전은, 지난 92년 대선 때 봉두완을 떠올리게 했다. 92년 국민당은 대선을 앞두고 심해지는 방송의 불공정 보도와 편향적 진행에 대응 하기 위해 ‘편파방송 특별대책위원회’라는 기구를 조직했는데, 당 시 국민당 홍보위원장이던 봉두완은 이 기구의 특위위원으로 언론사 를 상대로 공정방송을 촉구했다. 확실히 세상은 돌고 도는 모양이 다.

    한나라당의 요구에 대해 KBS라디오측은 봉두완의 뛰어난 방송진행 실력을 감안해 구두 경고하는 선에서 마무리짓기로 했다고 발표했 다. 방송인으로서 봉두완의 재능이 얼마만큼 가치가 있는지를 다시 한 번 극명하게 보여주는 말이었다.



    타인의 참회를 강조하려면?

    아직도 매번 선거 때마다 출마설이 나도는 봉두완은 몇 년 전부터 정치인들과는 커피 한잔 안 마신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엄격하게 이 것을 지키면서 살고 있다. 봉두완은 자신이 정치를 중간에 그만두게 돼 말년에 원숭이처럼 웃음거리가 되지 않았다고 굳게 믿는다. 그래 서 정치에 다시 손대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단다.

    그의 종교적 신념과 맞물려 봉두완은 정치를 악의 소용돌이라고 규 정한다. 그럴수록 그가 정치인이나 정치권에 들이대는 잣대는 더 엄 격해진다. 그는 누구보다 참회의 정신을 강조하는 사람이다. 봉두완 은 ‘잘못을 부끄러워하라. 그러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은 부끄러워 하지 말라’는 루소의 말을 자주 인용한다. 거짓으로 가득 찬 사회 를 정화하는 첫걸음은 참회하고 진실을 고백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나 많이 가지고 배운 사람이 그 어느 누구보다 앞장서서 참회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회지도층인사 중에 이런 참회의 자세를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게 봉두완의 생각이다. 그러니 봉두완에게 비판 받고 조롱당해야 할 인물은 ‘고기 반 물 반’처럼 세상에 널려 있 다. 이런 인물들은 봉두완의 매서운 질타로 남들 앞에서 원숭이처럼 웃음거리가 되거나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 봉두완은 자신이 ‘개인 의 목소리’가 아닌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때문에 그렇게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내 앞에서 사우나 도크에 앉아 있는 것처럼 땀흘리는 출 연자들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속시원해서 좋다고들 한다.”

    물론 봉두완이 가지고 있는 참회의 사상이나 통렬한 비판의식이 잘 못됐다는 말을 하자는 건 아니다. 오히려 존경받고 박수를 받아야 마땅한 일이다. 다만 그러한 참회의 정신이나 비판의 잣대를 자신에 게도 적용했으면 하는 것이다. SBS전망대를 듣던 한 청취자는 봉두 완에 대한 짜증스러움과 안타까움을 글로 적어 띄운다.

    “봉두완의 방송을 듣다 보면 정말 봉씨가 국회의원 깔 때 하는 말 처럼 ‘청취자노릇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든다. 코미디 프로라 생 각하고 가끔 듣기는 하지만 정말 못 들어주겠다. 자신이 예전에 국 회의원이었을 때 했던 말을 한번 생각해 보라.”

    그러나 봉두완은 그림자 없이 맑고 투명한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태 도를 근거로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인다. 청교도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 중에 자신에 대한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거나 더 나아가 배타 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들이 있다. 자신의 올곧고 순결한 삶에 자부 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재임중 도덕적 대통령이라고 자부하던 YS가 독선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것은 이런 심리적 메커니즘에서 기인한 것이다.

    작은 일에 감사하는 태도,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 남을 겉모습 만으로 판단하여 무시하지 않는 태도, 주어진 일에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태도, 고난과 시련이 닥칠 때 굴하지 않고 믿음 안에서 꿋꿋 이 이겨 나가는 태도 그리고 자신은 괴롭더라도 많은 사람에게 빛과 소금이 되려는 굳은 결심. 봉두완의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손꼽는 덕목들이다.

    확실히 봉두완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진지하고 교과서적이다. 감히 그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얘기하기가 민망할 만큼 도덕적이고 이 타적이다. 그는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타인에게 베푸는 삶의 한 전 형을 보여준다. 97년 KBS 노동조합이 공개한 봉두완의 1년간 출연료 는 7650만원이었다. 아마 지금 SBS에서도 비슷한 출연료를 받고 있 을 것이다. 그러니까 한 달에 600만∼700만원쯤 버는 셈인데 그때부 터 지금까지 그는 이 돈을 하나도 남김없이 자신이 관여하는 봉사단 체의 운영비나 은퇴한 옛 동료들의 밥값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자신 은 2000원짜리 구내식당 밥으로 아침, 점심을 때우면서도 가톨릭대 학 발전기금으로 5000만원을 약정하는 사람이 봉두완이다. 그는 ‘ 돈 안되는 일’에 돈을 쓰기 위해 돈을 버는 사람이며, 자녀들의 결 혼식에 30명만 초청할 만큼 검소하고 소박한 정신이 몸에 밴 사람이 다. 나환자나 장애인 등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그의 관심 과 애정은 유별나다. 봉두완은 아름답고 가치있게 세월의 흐름에 몸 을 맡긴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체험적으로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런데 필자는 가끔 천연소다수 같은 그의 ‘바른 소리’를 들으면 서, 한편으로는 가슴이 시원하고 한편으로는 개운치 않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필자의 찜찜함은 그가 98년에 한 신문에 기고한 칼럼의 다음과 같은 구절과 맞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과거를 기억할 줄 모르는 사람은 과거를 되풀이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미래를 향해 달려나가기 위해선 과거의 잘못부터 되짚어봐야 한다.”

    그가 입버릇처럼 주장하는 참회론의 또다른 표현이다. 이 구절을 그 대로 봉두완에게 되돌려보자. 봉두완은 1981년과 1992년, 선거 직전 까지 방송진행자였던 우월한 지위를 바탕으로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특히 1981년 신군부세력과 결탁한 것에 대해서는 처음의 순진한(?) 소신만 강조할 뿐 그 어디에도 그가 그렇게 부르짖는 참회의 기록은 없다. 그렇다고 그가 5공의 당위성을 믿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앞 서 인용한 1984년 때의 유세기록을 봐도 그렇고 1990년 MBC라디오 ‘여성시대’의 진행과 관련한 인터뷰 기사를 보아도 그렇다. 그는 그 인터뷰에서 “민정당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던 잘못에 사과하는 뜻으로 더욱 열심히 방송하겠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심인성(心因性) 기억상실증’이란 질환이 있다. 뇌에 아무런 이상 이 없는데도 심리적인 이유로 기억이 사라지는 특이한 병이다. 이 병의 가장 특징적인 현상은 ‘선택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 신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분만 선택적으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예 를 들어 강간을 당한 여자가 강간 사실 자체를 까맣게 잊는다거나 극단적인 재난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사고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경우다. 주제넘게 봉두완식으로 한번 말해보자. 우리 사회에는 이런 ‘선택적 사고’를 하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아직 한번도 제대로 된 과거청산이 이루지지 않 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까지 그럴 것인가.

    ‘선택적 사고’는 보는 사람을 혼란스럽게 한다. 1980년 11월30일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작업으로 동양방송(TBC)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 다. 봉두완은 10년째 진행해온 TBC라디오 ‘뉴스전망대’의 고별방 송에서 몇 번씩이나 목이 멘다.

    “여러분께서 그 동안 아껴주시던 이 ‘뉴스전망대’는 내 능력으로 는 어찌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여러분과 작별해야 될 순간에 이르 렀습니다. (목이 멤)… 그러나 역사는 쉬지 않고 계속 이어져 갑니 다. 자, 새로운 출발을 해야죠. 활기차게…(울음으로 잠시 중단) 열 심히 살아갑시다.… 오늘은 1980년 11월29일, TBC뉴스전망대에서 바 라본 오늘의 세계, 저는 더 이상 더듬지 않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12월6일자 신문에는 봉두완이 바로 그 언론통 폐합을 추진한 민주정의당 마포·용산 지구당 조직책에 임명되었음 을 알리는 기사가 실렸다. 전날 TBC의 고별방송에서 눈물을 흘렸던 한 남자 아나운서는 바로 그 다음날 KBS통합 축하쇼에 나와 밝은 얼 굴로 ‘새시대’를 외쳤다가 국민들의 ‘입뭇매’를 맞았다. TBC 고 별쇼에서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이란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 던 여가수는 TBC를 통합한 KBS측으로부터 출연정지 통고를 받았다. 그런데 1996년 봉두완은 TBC를 회상하는 글을 통해 아직도 여전한 분노의 감정을 드러낸다.

    “도대체 뭘 하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으로 무슨 권한으로 신문 방송 을 통폐합한단 말인가. 역사의 흐름을 군데군데 끊어버리고 한데 어 울려 살란다면 그것이 인류에 대한 죄악인 나치와 스탈린의 강제 이 주정책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고별방송에서 목이 메던 TBC 논평위원 봉두완과 민정당 조직책 봉두 완 그리고 영원한 방송인이라는 봉두완은 전혀 별개의 인물인가. 혼 란스러운 건 비단 필자만의 감정일까.

    봉두완이 특유의 박력과 명쾌한 진단으로 이 혼란의 사슬을 끊어주 었으면 좋겠다. ‘전망’이란 멀리 바라보거나 앞일을 미리 내다보 는 것이다. 필자는 봉두완의 전망 능력을 신뢰한다. 지금도 복잡한 시사문제가 있을 경우에는 일부러 아침 일찍 일어나 그의 전망대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면 모든 게 명확해진다. 늘 개운한 마음만으로 이 탁월한 능력을 가진 언론인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수 있기를 간절 히 기원한다. 이는 ‘영원한 방송인 봉두완’을 향한 한 시비꾼의 ‘화살기도’다.

    이번에는 이외수를 살펴보자. 이외수는 망원경과 현미경을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이다. 상징적으로도 그렇고 실제로도 그렇다. 밤새 국 립천문대의 천문학 박사와 별자리에 대해 토론하면서 천체 망원경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또 ‘거액’을 들여 일제 극현미경을 구입해 연 못 침전물을 떼어 그 속에 담겨 있는 대륙보다 넓은 세계를 살펴보 기도 한다.



    망원경과 현미경을 좋아하는 남자

    이러한 성향은 그의 작품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우리의 삶에 관한 근본적 물음들이 망원경적 시각이라면 소름끼칠 만큼 치밀한 그의 묘사는 현미경을 보는 것처럼 생생하고 구체적이다.

    1994년 이외수는 ‘감성사전’이란 전혀 새로운 책을 냈다. ‘감성 ’이란 코드로 201개의 단어들을 재규정한 일종의 이외수식 사전이 다. ‘눈물’은 지상에서 가장 투명한 시라거나 ‘영혼’은 우주 무 임승차권이라는 식의 해설을 실어놓은 책인데 많은 사람들이 그의 독특한 감성에 열광했다.

    그러나 이외수는 감성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 ‘황 금비늘’이란 그의 소설에는 조선시대 맹인들의 삶을 기술한 대목이 나온다. 이외수는 단 몇 줄의 그 문장을 쓰기 위해 17권의 ‘대동야 승’을 독파한다. 소설의 리얼리티와 자료적 가치를 높이려는 노력 이다. ‘꿈꾸는 식물’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정신과 병동의 리얼리 티를 확보하기 위해서 정신과 의사를 수도 없이 만난 것은 물론이고 본인 스스로 정신병동에 입원할 생각까지 했다고 고백한다.

    이외수식 감성과 리얼리티, 이 또한 상징적 의미의 망원경과 현미경 이다. 감성이란 재능적인 측면이 많지만 리얼리티의 추구는 성실하 고 치열한 노력과 노동을 전제로 한다. 어쩌면 이것이 그가 주장하 는 ‘노력하는 재능’의 실체일지도 모른다.

    ‘타고난 언어의 연금술사’란 평가는 마치 끌로 파는 것처럼 한 문 장 한 문장을 새기는 그의 집념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 25세 때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해 문단에 데뷔한 이외수는 2년 후 소 설 공부를 위해 강원도 산골에 있는 객골분교에서 소사 근무를 자청 한다. 이곳에서 그는 무섭게 문장공부에 몰두한다.

    “나는 한솥 가득 밥을 지어서 바깥에 내다 놓았다. 얼음밥을 만들 기 위해서다. 더럽게 눈물겨운 겨울이었다. 얼음밥은 도저히 수저로 먹을 수가 없다. 망치와 못으로 깨뜨린 다음 으적으적 씹어먹는 수 밖에 없다. 정신뿐만 아니라 내장까지도 투명해지는 느낌이었다.”

    몇 솥째의 얼음밥을 해먹은 후에 그는 ‘묘사적 문체’의 핵심을 터 득한다. 다른 작가들은 대부분 서술적 문체를 사용하는데 자신은 묘 사적 문체를 사용한다는 말이다. 언어를 생명체처럼 대하는 감각이 ‘묘사’인데 이건 서술보다 몇 배나 어렵다고 한다. 우리에게도 익 숙한 표현인 ‘시간을 죽인다’는 표현도 실상은 그가 처음 쓰기 시 작한 묘사적 문체란다. 30여년 동안 이외수의 문학 또는 예술활동은 이런 ‘얼음밥’ 정신을 근간으로 한다.

    그는 인간의 의지나 정신력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하는 사람이 다. 80년대 초반 ‘칼’이라는 장편소설을 잡지에 연재할 때는 하루 에 세 시간만 잠을 자면서 집필에 몰두했는데, 어떤 때는 닷새 동안 이나 한잠도 자지 않고 원고지와 씨름하기도 했다. 식사도 하루에 한 끼만 먹었다. 배가 부르면 의식이 흐려지고 육신이 나태해지기 때문이다.

    ‘벽오금학도’와 ‘황금비늘’ 등 장편 2권을 쓰는 8년 동안 그는 방문을 뜯어내고 특별주문한 교도소 철문을 달아 놓고는 밖에서 걸 어 잠근 후 그 안에서 글을 썼다. 일종의 ‘글감옥’을 만든 것이 다. 속칭 ‘식구통’이라 불리는 구멍으로 밥을 받아 먹고 용변도 안에서 해결했다. ‘기인 이외수’의 또 다른 해프닝으로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그런 차원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시퍼런 칼 날 같은 정신력을 유지하기 위한 이외수의 ‘피티체조’는 처절한 면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현재 이외수의 외양을 보고 그가 학창시절에 농구, 탁구, 핸드볼 선 수였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랜 기간 엎드려 글을 쓴 탓에 허리가 고장났고, 너무 원고지를 가까이 대고 쓰는 버릇 때 문에 왼쪽 눈의 수정체가 파괴됐으며, 과도한 음주와 불규칙한 식사 때문에 그의 위장은 하루 한끼 약간의 죽 정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라고 한다. 폐결핵을 4번이나 앓은 탓에 한쪽 폐는 완전 기능상 실이다. 게다가 골다공증이어서 그 좋아하던 술 대신 차를 마신다.

    결혼 첫해인 1976년, 그는 병원에서 알코올중독 진단을 받는다.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무박3일을 마셔야만 직성이 풀리는 주량이었고, 어느 때는 석 달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을 마신 적도 있단다. 술에 취하면 개집에서 잠을 자거나 쓰레기통 속에서 잠자는 습관이 생겼고, 한달 동안 마신 술병이 담벼락과 같은 높이로 마당에 쌓이 던 시절이었다. 45kg이던 몸무게는 38kg으로 줄어들었고 급기야 자 의식과 전혀 상관없이 손이 떨리는 수전증이 오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한 이외수는 술을 끊겠다고 결심한다. 갑자기 술을 끊으면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할 우려가 있으니 단계적으로 양 을 줄이면서 끊으라는 의사의 지시가 있었지만, 그는 알코올중독이 라는 진단이 내려진 그날부터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 실 제로도 그랬지만 이외수는 자신이 가진 재산은 정신력 하나밖에 없 다고 굳게 믿었다. 그는 석 달동안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술 생각 이 치밀어오를 때마다 콘크리트벽에 이마를 들이받으며 수도자가 고 행하는 기분으로 고통을 견뎌냈다. 결국 그는 정신력 하나만으로 알 코올중독에서 벗어났다. 필자는 직업상 알코올중독 환자를 많이 접 하게 된다. 그래서 이외수처럼 술을 끊는 게 얼마나 어마어마한 고 통과 의지력을 요구하는지 잘 알고 있다.

    이외수는 의지나 정신력의 중요성을 역설할 뿐 아니라 실천을 중시 하는 사람이다. 그럴 경우 재능이라는 건 부차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재능 없음에 대한 열등감이 오늘의 이외수를 만들었다 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모든 진보란 열등의식을 그 원동력으로 삼고 있다고 말한다. 새에 대한 인간의 열등의식이 비행기라는 괴물 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이 광 기로 불타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화가일 수는 없으며, 한쪽 귀를 자 른다고 모두가 고흐일 수는 없다고 말한다. 전생애를 바쳐서 열등감 을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외수 예술의 또 다른 한축인 그림에서도 이런 정신은 그대로 적용 된다. 그의 그림은 소설가의 심심파적을 넘어선다. 원래 그는 화가 가 꿈이던 사람이고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있다는 소리도 많이 들 었다. 춘천교대 시절 대학미전에 입상한 경력도 있는 화가 지망생이 었지만 ‘재능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에 ‘능력에 절망해서’ 소 설을 쓰게 되었단다.

    그러나 지금 이외수는 작고한 화가들까지 포함한 ‘춘천 미술인 100 명’에 선정될 만큼 인정받는 화가다. 94년에는 이외수 선화(仙畵) 개인전을 열었는데 신세계 갤러리 개관 이후 최대의 관객이 몰렸다 고 한다. 그는 이 전시회에 서른다섯 점을 출품했는데 몇 년 동안 하루 8시간씩 붓하고 씨름하느라 어금니가 다 빠지고 원래 새까맣던 머리가 다 세버렸으며, 파지만 해도 여러 트럭이 실려 나갔단다.



    자신의 피를 요구하는 구도자적 삶

    이외수를 보고 있으면 들끓는 성욕을 끊으려고 돌로 자신의 성기를 짓이기는 수도자의 처절한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이외수 마니아의 상당수가 아직은 치열한 삶의 정신이 파랗게 살아 있는 대학생들이 란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81년 문학평론가 이광훈은, 이외 수는 언제나 대학생처럼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갖는 다고 적었다. 얼마 전 서울대생 1000명을 대상으로 ‘좋아하는 작가 ’에 관한 설문조사를 했을 때도 이외수는 10위 안에 선정되었다. 한 20대 청년은 올해 쉰다섯 살이나(?) 된 이외수의 홈페이지를 방 문해 그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표한다.

    “선생님, 요새 ‘황금비늘’을 읽고 있어요. 어제는 선생님의 시집 을 읽으면서 가슴이 묘하게 아려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강력하 게 제 생활을 빨래해 주시는 분, 그래서 선생님 만나게 해주신 하나 님께도 오직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선생님의 순수함이 영원히 물들 지 않기를… 새하얗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그의 작중 인물들은 피흘리는 투사와 같다. 단지 남의 피를 요구하 지 않고 자기 자신의 피로 대신할 뿐이다. 전쟁의 투사는 남의 피를 요구한다지만 구도자는 자신의 피를 요구하기 때문이란다. 그의 이 런 정신은 1971년의 문단데뷔 당선소감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외수, 이 망할 자식아. 세상이 썩어 문드러지더라도 너만은 절 대 썩지 말고 영악스럽게 글을 쓰도록. 그러나 요절하지는 말도록. 마침내 나와 나의 언어들이 아름다운 비극으로 남아서 순수, 그 누 구도 잊을 수 없는 눈물이 되기를 빌며 살기를.”

    그는 그 약속을 쉰다섯 살이 되도록 지키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젊 은이들이 이외수란 인물에게 보내는 존경심의 원천일지도 모른다. 사랑의 열병도 30개월 정도만 지나면 일상적인 감정상태로 돌아온다 는 연구 결과가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뇌에서는 일종의 중독성 물질이 분비되어 극치감이나 흥분감 등을 느끼게 되는데 이 물질의 유효기간이 30개월 정도라는 것이다. 사랑 같은 달뜬 감정이 지속되 면 결국 정신적 에너지가 소모되므로 인체가 스스로 자기방어 작용 을 하기 때문이다. 사랑처럼 좋은 감정도 그러한데, 하물며 이외수 처럼 평생 동안 서슬퍼런 날을 벼리면서 칼 같은 작가정신을 유지하 려면 심신의 상태가 어떨 것인가.

    그는 장편을 쓰면서도 항상 처음부터 거듭 읽고 고치고 또 그 다음 을 쓰는 방식으로 끔찍할 정도로 반복하기 때문에 작품을 끝낼 때쯤 이면 조사 하나까지 깡그리 외운다. 본인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진 저리가 쳐진다고 말할 정도지만 그런 게 작가정신이라고 믿는단다. 이렇게 작업을 하면서도 이외수는 늘 자신의 재능에 절망한다.

    “밤을 새워 글을 써본들 무슨 낙이 있으랴. 언제나 닿아오는 것은 절망뿐이다. 써놓고 다시 읽어보면 엿 같다는 생각만 든다. 마누라 는 옆방에서 잘도 잔다. 백매를 쓰고 천매의 파지를 만든다. 그리고 다시 써놓은 백매를 태워버린다. 울고 싶은 심정뿐이다. 기침을 한 다. 목구멍에서 약간의 피비린내가 나고 있다. 어디까지 망가져 있 는 것일까. 그러나 망가져도 좋으니 하나만 쓰게 해다오.”

    이 정도면 그가 강조하는 구도자의 자세가 따로 없다. ‘한 소리’ 를 얻기 위해 구도자가 용맹정진하는 모습을 보며 재능이 있네 없네 를 따져 무엇할 것인가. 이외수를 향해서 들이대는 재능이란 잣대는 그런 것이다. 그에게 ‘타고난 작가’란 칭송은 아무런 의미가 없 다. ‘뼈를 깎는 구도자’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제 81년 ‘장수하늘소’의 작가 후기에 쓴 이외수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마지막 피 한방울이 마를 때까지 온갖 방법으로 다 시도해보겠습 니다. 지금까지는 모두 실패해버렸지만 주여 마흔여덟 장의 화투를 다 모아야만 고도리에서 스톱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필요한 것은 단 석 장이면 됩니다. 언제쯤 필요한 석 장이 제게 쥐어질는지 저로서는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필자는 이 놀라운 재능을 가진 구도자가, 필요한 석 장의 화투패를 쥘 때까지 오래오래 건강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봉두완과 이외수는 우리의 삶에서 재능이란 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를, 또 재능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인물들이 다. 때로 재능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우리 같은 범재(凡 才)들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세상에서 제일가는 재능을 얻 고 싶어하는 무의식적 욕구를 만나게 된다.

    재능이란 동전의 양면처럼 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뉴욕의 신체 장애인 회관에 적힌 시 한 구절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다.

    ‘나는 재능을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지만 난 열등감을 선물받았다. 신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만일 당신이 신에게 꼭 한 가지 재능을 요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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