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호

상처 입은 ‘유통 공룡’ 롯데, 전방위 공격경영으로 올인

  • 글: 이형삼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hans@donga.com

    입력2004-03-29 13: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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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년간 한국 유통업계 부동의 1위로 군림해온 롯데가 안팎으로 시련을 겪고 있다. 철옹성 같던 업계 1위 자리를 신세계에 내줘 자존심을 상한 데다 불법 대선자금 제공의혹까지 겹쳤다. 부채 규모가 이례적으로 증가하면서 자금시장 일각에서도 우려스런 시각이 감지된다. 이에 롯데는 전방위 공격경영으로 돌파구를 찾고 있는데….
    상처 입은 ‘유통 공룡’ 롯데, 전방위 공격경영으로 올인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위)· 신동빈 부회장 父子

    롯데는 ‘유통왕국’이다. 한국에서 롯데의 땅을 밟지 않고 상품을 유통시키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롯데는 1979년 12월 서울 소공동에 롯데백화점 본점을 열고 유통업에 뛰어든 이후 백화점 21개, 할인점(롯데마트) 32개, 대형 슈퍼마켓(롯데슈퍼) 40개, 편의점(세븐일레븐) 1300여개를 거느린 광역 네트워크를 구축해 전국 주요 상권을 장악했으니 웬만한 물류는 롯데의 촘촘한 그물망에 걸려들기 마련이다. 지역, 고객층, 상품 구색에서 전 영역을 커버하는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해마다 고속 성장을 거듭해온 롯데 유통부문은 매출 규모에서 1981년 이래 단 한 차례도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고 부동의 업계 1위를 지켜왔다.

    롯데쇼핑이 이끄는 유통부문은 ‘껌이나 만들던’ 롯데를 오늘날 대한민국 재계 랭킹 5위에 올려놓은 주역이다. 롯데쇼핑의 지난해 매출 추정치는 약 8조5000억원으로 롯데그룹 전체 매출의 3분의 1을 넘는다. 롯데쇼핑 1개 계열사 매출이 나머지 34개 계열사 총매출의 60%에 달한다는 얘기다. 롯데쇼핑은 자체 사업을 영위하면서 점포 건설, 식·음료 판매, 광고 발주 등을 통해 롯데건설, 롯데제과, 롯데칠성음료, 롯데호텔, 대홍기획 등 관련업종 계열사 매출에도 크게 기여한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롯데가 최근 들어 다소 주춤거리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흔들린다’고 표현할 정도는 아니지만, 몇 년 전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다. 우선 그룹 간판인 유통부문의 기세가 예전 같지 않은 데다, 그 동안 ‘롯데식 경영’의 장점으로 꼽혀온 요소들의 ‘유효기간’이 의문시되고 있는 것. 여기에다 비자금을 조성해 불법 대선자금을 전달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안팎으로 시름이 겹쳤다.

    22년 만에 1위 내줘

    롯데쇼핑은 지난해 3분기 1조7079억원의 매출을 올려 같은 기간 1조7874억원의 매출을 기록한 신세계보다 795억원이 뒤졌다. 소공동 롯데백화점 개장 1년여 만인 1981년 신세계를 누르고 정상에 올라선 롯데가 22년 만에 유통업계 1위 자리를 내준 것이다.



    신세계의 역전은 지난해 도입된 새 회계기준에 힘입은 바 크다. 금융감독원은 지난해부터 유통업체 임대매장의 매출을 총매출 대신 임대수수료로 계산하는 새 회계기준을 적용했다. 이에 따라 임대매장 위주의 백화점 비중이 높은 롯데쇼핑 매출이 크게 줄었다. 가령 삼성전자가 롯데백화점 임대매장에서 200만원짜리 냉장고를 판매할 경우 옛 회계기준으로는 삼성전자와 롯데백화점에 각각 200만원의 매출이 발생했다. 그러나 새 회계기준에 따르면 삼성전자에만 200만원의 매출이 발생하고 롯데백화점에는 유통업체 몫으로 떨어지는 수수료만 매출로 잡힌다. 롯데로서는 좀 억울한 면도 있지만, 어쨌든 브레이크 없는 22년 독주에 제동이 걸렸으니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몇몇 증권사와 신용평가회사들은 롯데의 경영효율에 대해서도 다소 부정적인 시각을 내놓고 있다. 롯데는 백화점부문에서 여전히 확고한 시장지배력을 가졌으나 국내 백화점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러 더 이상 비약적인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고, 할인점 등 경쟁이 치열한 부문에선 힘겨운 승부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롯데가 2002년부터 점포 증설과 M&A를 통해 공격적으로 사업확장을 시도하자 재무 위험성을 경고하는 목소리도 잇따르고 있다.

    지난해 말 현재 롯데쇼핑의 차입금 규모는 3조원에 육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채비율은 아직 180%대 정도지만, 3∼4년전 차입금이 1조원을 조금 넘는 수준이던 것과 비교하면 급속한 증가세다. 롯데쇼핑은 올 들어서만 두 차례에 걸쳐 4200억원의 회사채를 발행했다. 신용평가회사들은 롯데쇼핑 회사채 신용등급을 ‘AA’로 유지했지만, ‘향후 경쟁상황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관찰이 필요하다’는 식의 평가의견을 덧붙였다.

    그런가 하면 삼성증권은 롯데쇼핑에 대한 채권투자지수를 ‘S4’에서 ‘S5’로 하향조정했다. ‘S1’∼’S3’는 향후 신용등급이 상승할 것으로 전망할 때, ‘S4’는 등급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할 때 부여하는 지수인데 비해 ‘S5’∼’S7’은 등급 하락 가능성을 고려한 지수다.

    불법 대선자금 제공의혹도 입맛이 개운찮다. 다른 기업들도 비자금을 조성하고 불법 자금을 건넸지만, 롯데의 경우 수사에 유달리 비협조적이어서 단단히 미운털이 박혔다. 검찰의 거듭된 출두 요구에도 신격호(辛格浩·82) 회장·신동빈(辛東彬·49) 부회장 부자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소환된 임원들은 “일절 돈을 건넨 적이 없다”며 일관되게 혐의를 부인했다.

    더구나 “해외 업무가 바빠 귀국할 수 없다”던 신 부회장이 자신이 구단주로 있는 일본 프로야구 롯데 마린스 훈련장에서 이승엽 선수와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장면이 TV에 방영되자 검찰이 격분했다는 후문이다. 그래서 롯데호텔 신동인 사장이 검찰에 소환됐을 때는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이 직접 참석해 조사했을 정도라는 것. “정치권에 건넨 자금 액수가 크지 않아도 죄질이 나쁘면 총수도 사법처리 대상이 된다”는 안 중수부장의 발언이 롯데를 염두에 둔 게 아니냐는 추측도 나온다.

    한국롯데와 일본롯데를 오가는 신격호 회장을 보좌해 한국롯데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신동빈 부회장은 2000년 10월 ‘롯데 윤리강령’ 선포식에서 전 계열사의 윤리강령 실천을 총괄하는 ‘윤리위원장’에 취임하며 그룹 경영의 전면에 등장했다. 당시 선포한 윤리강령에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대목도 있다. 전 계열사 사장을 모아놓고 경영권 승계를 가시화하던 현장에서 한 약속을 저버린 셈이니 이래저래 볼썽사납게 됐다.

    탄탄한 자금력

    롯데그룹은 5대 재벌이라는 위상에 걸맞지 않게 그 속사정은 베일에 가려 있다. 어지간해선 기업 정보를 공개하지 않아 내부 변화나 신규 사업 계획이 사전에 노출되는 일은 드물다. 증권사 유통담당 애널리스트들은 “롯데는 애널리스트들의 기업 탐방을 내켜하지 않는 것은 물론 전화만 걸어도 빨리 못 끊어서 안달이다”며 혀를 내두른다. 그 정도 덩치의 그룹이면 ‘스타 CEO’ 몇사람도 나올 법 하건만, 오너가 그러하듯 전문경영인들도 언론에 노출되는 일이 거의 없다. 아파트 판촉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고객 앞에 내세웠던 임승남 롯데건설 사장 정도가 예외적인 인물이다.

    기업 지배구조도 투명하지 않다. 롯데그룹 35개 계열사 가운데 상장사는 롯데제과·롯데칠성음료·롯데삼강·호남석유화학 4개뿐이다. 이들 상장사도 발행주식 수가 적은데다 오너 일가 등 특수관계인들의 보유 지분이 많아 주식 거래량은 극히 미미하다. 거래량 부족으로 증권거래소로부터 경고를 받으면 유통물량을 늘리기보다는 특수관계인들의 내부자 거래로 무마했다. 주가 관리에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롯데그룹에선 롯데호텔이 지주회사격이다. 롯데호텔은 롯데건설 지분 47.5%를 보유한 것을 비롯, 롯데상사(30.5%), 롯데산업(36.6%), 호남석유화학(13.6%), 롯데쇼핑(13.5%) 등 주요 계열사의 지배적 주주로 계열사 간의 연결고리 노릇을 하고 있다. 롯데호텔 지분은 일본롯데 관련회사들이 100% 보유하고 있는데, 일본롯데의 지배구조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롯데그룹의 얼굴인 롯데쇼핑의 경우 신격호 회장의 차남인 신동빈 부회장이 21.74%, 장남인 일본롯데 신동주(辛東主·50) 부사장이 이보다 0.01%포인트 적은 21.73%의 지분을 갖고 있다. ‘가족 기업’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롯데가 기업 상장에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은 굳이 공시와 같은 번거로운 의무를 감수해가며 기업을 공개하지 않아도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일본롯데라는 든든한 자금줄이 버티고 있다. 일본에서 일찌감치 사업에 성공한 신격호 회장은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하면서 한국 투자를 시작했다. 일본에서 번 돈을 한국에 재투자하기로 한 것이다.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을 만난 뒤 “박정희에 대한 신뢰감에서 모국 투자를 결심했다”는 신 회장은 1970년대 초 외자 유치를 갈망하던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한미음료(롯데칠성음료), 삼강산업(롯데삼강), 반도호텔(롯데호텔) 등을 잇따라 인수하면서 성장의 발판을 다졌다.

    1979년 롯데백화점 본점을 개점하면서부터는 유통전문 그룹으로 입지를 굳히기 시작했는데, 탄탄한 자금력이 진가를 발휘한 것은 이때부터다. 유통업에서는 초기에 상권을 선점하는 것이 관건이다. 경쟁사보다 한 발 앞서 목좋은 부지를 사들이고 대형 매장을 지어올려야 한다. 그러니 자금 동원력이 승부를 좌우한다. 경쟁사인 신세계, 미도파 등이 두 자리수 고금리 자금을 어렵사리 끌어다 쓸 때 롯데는 필요할 때마다 일본에서 알토란 같은 저리 자금을 들여와 쏟아부었기에 정상 등극은 시간문제였다.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롯데의 유통부문 투자는 주로 백화점에 집중됐는데, 그 결과 오늘날 롯데의 백화점 시장점유율은 42%에 달해 2위 현대(21%)와 3위 신세계(12%)의 점유율을 합친 것보다 많은 구도가 고착됐다.

    ‘될 것만 키운다’

    신격호 회장의 집무실에는 ‘거화취실(去華就實)’이라고 씌어진 액자가 걸려 있다. 겉치레를 삼가고 실질을 추구한다는 좌우명이다. 무분별한 사업진출, 과잉경쟁, 무리한 차입경영을 경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모르는 것은 안한다’ ‘될 것만 키운다’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지 않으면 다른 것을 넘보지 않는다’는 철저한 보수 경영 원칙을 고수해왔다. 한국에서 40년 가까이 사업을 벌여왔지만, 지금껏 유통·식품·관광부문에만 치중하고 있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또한 신 회장은 “몸에서 열이 나면 병이 나고, 심하면 목숨까지 위태롭다. 기업에게 차입금은 우리 몸의 열과 같다. 과다한 차입금은 만병의 근원이다”는 논리를 설파해왔다. 그룹 전체 계열사의 절반인 17개 계열사는 지금도 무차입 경영을 하고 있을 만큼 재무구조가 안정돼 있다.

    상처 입은 ‘유통 공룡’ 롯데, 전방위 공격경영으로 올인

    지난해 12월 검찰 직원들이 롯데그룹을 수색한 후 압수한 물품을 검찰청사로 옮기고 있다.

    어떤 사업이든 먼저 치고 나가지 않되 경쟁업체들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시장을 안정시켜 놓으면 기회를 포착해 단숨에 파고드는 게 롯데 특유의 비즈니스 전략이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 검토한 후 일단 투자를 결심하면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대대적인 물량공세를 펴 기존 업체들을 고사(枯死)시킨다. 예컨대 롯데백화점은 1990년대 들어 지방 진출을 본격화했는데, 이 과정에서 지역 토종 백화점들은 문을 닫거나 아니면 무리하게 점포를 늘리는 방법으로 맞섰다. 하지만 1997년 말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금리가 폭등하자 자금력이 취약한 지역 백화점들은 결국 백기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롯데는 “지방 출점 6개월 안에 예외없이 상권을 장악한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롯데는 숱한 기업들이 쓰러져간 외환위기 무렵에 오히려 보수 경영이 빛을 발하며 급성장했다. 그 시기에 다른 대기업들은 계열사 잘라내기에 급급했지만, 롯데에선 단 한 개의 계열사도 정리되지 않았다. 오히려 블루힐·그랜드백화점, 편의점 로손, 해태음료, 제일제당 음료부문 등을 잇따라 인수하면서 확장을 거듭했다. 그 결과 1997년 약 8조원이던 그룹 매출이 2000년에는 16조6000억원으로 두 배 이상 늘어났다.

    그러나 이처럼 롯데의 안정된 성장을 견인해온 보수 경영이 신세계에 유통업계 1위를 내주는 빌미를 제공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지나치게 신중한 나머지 소비자의 구매행태 변화를 미리 내다보고 이에 신속하고도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큰 흐름에서 실기(失機)하고 만 것이다.

    신세계, 이마트로 ‘역전 펀치’

    유통업계의 판도를 바꿔놓은 분수령은 할인점이었다. 1993년 11월 신세계가 국내 최초의 할인점인 이마트 서울 창동점을 개점했을 때만 해도 업계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1990년대 초반부터 백화점간 경쟁이 심화되면서 선두주자인 롯데와 후발주자인 현대 사이에서 고전하던 신세계는 머지 않아 양질의 제품을 저가에 구매하려는 합리적 소비성향이 정착될 것으로 전망하고 할인점 중심 사업구조로 변신을 모색했는데, 이 전략이 들어맞았다.

    대중 소비가 급팽창하는 고도 성장기에는 과시적이고 획일화된 소비성향이 주류를 이룬다. 이런 성향을 충족시키는 데는 백화점만한 게 없다. 백화점에서 충족시킬 수 없는 영역은 재래상권이 떠맡으면 됐다.

    하지만 경제가 성숙기로 접어들면 소비자의 기호는 다양화, 실속화, 합리화 경향을 띤다. 중산층이 두터워지면서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형태의 시장이 필요하게 된다. 과거엔 누군가가 나이키 운동화를 신으면 유사품 ‘나이스’ 운동화라도 사 신어야 직성이 풀렸지만, 요즘은 형편이 되는 집 아이들도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굳이 나이키를 사 신지 않는다. 이런 소비층을 빨아들인 게 백화점과 재래상권의 중간 형태인 할인점이었다. 자동차 보유 가구가 늘고 주택 면적이 넓어져 한꺼번에 많은 양의 상품을 사다놓고 쓰는 소비 패턴이 증가한 것도 할인점의 성장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97년 외환위기다. 당시 이미 10개의 이마트를 운영하고 있던 신세계는 외환위기를 맞자 할인점 사업을 적극 확대, 2년 후인 1999년 말까지 점포를 20개로 늘리며 소비자들을 대거 흡수했다. 1999년에는 인근에 현대백화점이 입점한 이후 적자를 내고 있던 신세계백화점 서울 천호점을 이마트로 전환, 하루 매출 4억원대의 우량 점포로 탈바꿈시키기도 했다.

    현재 62개 점포를 확보한 이마트의 할인점 시장점유율은 33%. 2위 홈플러스(15%)와 3위 롯데마트(14%)를 큰 차이로 따돌리며 독주하고 있다. 신세계는 전체 매출 중 이마트 매출이 87%를 차지할 만큼 할인점 중심으로 진용을 완전 재편했다. 덕분에 국내 유통업계에서 할인점 총매출이 백화점 총매출을 처음으로 앞선 지난해에 신세계가 유통업계 1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상처 입은 ‘유통 공룡’ 롯데, 전방위 공격경영으로 올인

    한국형 할인점 운영 시스템을 개발해 효율을 극대화한 이마트.

    할인점 하나를 짓는 데는 많으면 900억원, 보통은 500억∼600억원이 들고, 백화점 하나를 지으려면 최소한 2500억원, 많게는 4000억원이 소요된다. 그러니 백화점 짓는 데 들인 비용을 뽑으려면 단순하게 계산해봐도 할인점보다 4배 이상 물건을 더 팔아야 한다는 얘기다. 백화점 시장에서 3위로 처져 위기감이 고조됐던 신세계로선 ‘선택과 집중’의 타깃을 제대로 설정한 셈이다.

    롯데는 1998년 뒤늦게 할인점 사업에 진출했으나 이마트와의 5년 격차를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할인점 시장에서도 누가 시장을 선점하느냐가 승부를 가름한다. 신세계는 롯데가 백화점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활용한 속도전, 규모전을 할인점 시장 선점을 위해 차용했다. 가령 신세계가 적절한 가격에 노른자위 땅을 매입해 이마트를 지으면 주변에 상권이 형성돼 지가가 상승한다. 노른자위 땅을 이마트가 차지하고 있기에 후발주자인 롯데마트는 인근의 그보다 못한 자리로 들어가면서도 이미 땅값이 많이 오른 뒤라 훨씬 많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더욱이 할인점은 철저하게 가격으로 경쟁한다. 점포 수가 많고 매출 규모가 큰 회사일수록 대량 구매를 통해 가격을 떨어뜨릴 여지가 더 커진다. 롯데가 할인점 진출 여부를 놓고 좌고우면하던 5년 동안 신세계는 이렇듯 발빠른 행보로 이마트의 브랜드 인지도를 확고한 지위에 올려놓았다.

    시스템 차이가 경쟁력 차이

    롯데는 2000년 이후 할인점부문에 집중 투자하며 이마트 추격전을 본격화했다. 그 결과 점포 수는 32개로 이마트의 절반 수준까지 다가섰다. 하지만 수익성과 운영효율성에서는 이마트와의 격차를 좀체 좁히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이마트의 매출 규모는 롯데마트의 3배, 영업이익률은 2배에 달했다.

    업계에서는 그 원인을 시스템의 차이에서 찾는다. 이마트가 초기부터 한국 실정에 맞는 할인점 물류시스템을 개발, 운용하면서 효율을 높여온 데 비해 롯데마트는 백화점 시스템으로 할인점을 운영했다는 것이다. 모 증권사 리서치센터 유통팀장의 말이다.

    “국내 백화점들은 상품을 직매입하지 않고 벤더에게 물류, 영업, 디스플레이까지 일임하기 때문에 소매업이라기보다 부동산 임대업에 가깝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수수료 수입을 챙길 수 있다. 그러나 물류 통관률이 높고 마진이 박한 할인점의 경우 업체가 직접 영업활동, 재고 리스크 관리, 물류 조직화 등에서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신세계는 이 부분에 강점이 있지만, 롯데는 아직 시험단계를 거치고 있는 듯하다.”

    예를 들어 이마트 정육 매장에선 초기부터 공급자에게서 고기를 직매입해 마진을 붙여 팔았다. 고객의 욕구를 잘 알고 고기의 품질을 정확히 판별할 수 있는 10년 이상 경력의 구매담당자(머천다이저)들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급자를 상대하다 보니 고기를 고르고 가격을 매기는 데 있어 이마트의 발언권이 세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롯데마트는 백화점 임대매장처럼 축협과 벤더 계약을 해서 축협더러 고기를 팔게 하고 수수료를 받았다. 이 경우 고객에게 어떤 고기를 얼마에 팔 것인가의 주도권은 축협이 쥐게 된다. 이런 차이는 이마트와 롯데마트의 가격·품질경쟁력과 직결되는 문제다. 요즘은 롯데마트도 농수축산물을 100% 직매입하는 등 직매입 비중을 높여가고 있지만, 이런 차이가 두 회사의 초기 브랜드 인지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물류센터 사정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이마트는 경기도 용인·광주·시흥, 대구에 4개의 대형 물류센터를 갖추고 있다. 제조업체가 이마트 각 점포로 상품을 배송하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 뿐 아니라 품질관리에도 어려움이 크다. 대신 이를 물류센터로 일괄 배송하면 시간과 비용이 절감되는 것은 물론 각 점포에서 필요로 하는 양만큼의 상품을 적시에 공급할 수 있어 재고 회전율도 높아진다. 이마트 물류센터는 박스 포장된 공산품을 취급하는 ‘드라이(Dry) 센터’와 신선식품을 처리하는 ‘웨트(Wet) 센터’로 나뉘어져 가동되는데, 이 때문에 선도를 유지한 상태로 하루 여러 차례 신선식품을 공급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롯데는 자체 물류센터가 없어 임대 물류센터를 이용해왔는데, 그나마 공산품 배송 위주로 쓰이는 창고형 물류센터다. 공산품·신선식품 처리가 가능한 물류센터는 올해 중에야 경기도 오산에 처음 세워질 예정이다.

    한 신용평가회사 유통팀 연구원은 “롯데마트는 이마트와 정면승부를 벌이려다 오히려 격차가 더 커졌을 뿐 아니라 삼성 홈플러스에게 2위를 내주기까지 했다”고 지적한다.

    “이마트와 롯데마트에는 지역적으로 겹치는 점포가 많다. 할인점 노하우가 부족한 롯데마트가 자금력만 믿고 이마트와 맞대결을 벌였기 때문인데 결국 이게 화근이 됐다. 이와 대조적으로 홈플러스는 이마트의 아성을 피해 지방과 수도권 외곽에서부터 바람몰이를 하며 치고 올라왔다. 매장 설계와 상품 구색도 이마트보다 좀더 고급스럽게 차별화해서 고객 포지셔닝에 성공, 롯데마트보다 점포 수는 적으면서도 매출은 앞서게 됐다.”

    롯데그룹은 최근 몇 년간 매년 1조2000억원 안팎의 유형자산투자 가운데 60∼70%인 7000억∼8000억원을 백화점과 할인점 등 유통부문의 신규 출점을 위해 썼다. 특히 올해에는 백화점에 4000억원, 할인점에 5000억원 등 총 9000억원을 투자해 점포를 늘려갈 계획이다. 백화점은 오는 2007년까지 26호점을 개점하고, 할인점은 올해에만 8개 점포를 신설한다. 또한 할인점보다는 작고 슈퍼마켓보다는 큰 슈퍼슈퍼마켓(SSM)부문도 지난해 14개이던 점포를 올해 48개로 크게 늘리는 등 사업확장을 본격화할 방침이다.

    롯데쇼핑의 사업전략은 어느 한 부문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전 부문에 걸친 공격적인 사업확장을 통해 업종간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점포 수가 늘어나면 입점업체와 납품업체에 대한 협상력이 커지고 공통비용이 감소하는 등 규모의 경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백화점과 할인점을 거쳐 SSM에 이르는 유통망을 강화하고 여기에다 롯데리아가 최대주주인 편의점(세븐일레븐) 체인망까지 연계하면 전국을 커버하는 광역 유통망이 구축돼 새로운 형태의 사업을 창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유통업계와 금융권 일각에서는 이같은 전방위 공격경영이 과연 투자 규모에 걸맞는 수익을 가져다줄 수 있을지 의문을 품는다.

    백화점의 경우 전국의 상권을 선점한데다 점포 수도 경쟁사보다 월등히 많아 향후 상당 기간 시장 지배적 지위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전망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시장의 트렌드가 롯데에 썩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그간 롯데가 주도해온 국내 백화점 시장은 고급품에서 중·저가품, 상류층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상품 구색과 고객층에서 거의 전 영역에 걸쳐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백화점보다 상품 선택의 폭이 더 넓은 할인점을 비롯해 홈쇼핑, 인터넷 쇼핑 등이 각광받으면서 백화점은 성장 정체가 예상되는 가운데 영역의 특화를 요구받고 있다. 현대백화점이 외환위기 이후 고소득층을 겨냥한 최고급 백화점 이미지를 지향, 점포 수나 규모에선 롯데에 못 미쳐도 단위면적당 매출에서 롯데를 앞지른 게 그런 사례다. 웰빙족을 위한 고급 식품관을 마련하는 등 VIP 마케팅에 주력한 신세계 강남점이 개점 3년 만인 지난해 현대 압구정점과 무역센터점 등 터줏대감들을 누르고 강남권 1위로 부상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에 비하면 롯데백화점은 여전히 대중형 백화점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자존심 지키기 위한 투자?

    한 증권사 채권분석팀 애널리스트는 “이미 성숙기에 접어든 백화점 시장에서 롯데가 대세를 거스르는 공격적인 투자로 기존 점포의 이익을 잠식하지 않으면서 추가로 창출할 수 있는 이익의 규모는 제한적일 것”이라며 “할인점에 대한 공격적인 투자도 롯데마트의 낮은 수익성과 운영 효율성을 감안하면 회사 전체 차원에서 수익성 하락을 가져올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는 또 “일련의 사업확장 과정을 지켜보면 롯데쇼핑이 장기전략에 따라 단계적으로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기보다는 ‘유통 일번지’라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혹은 일단 유통망부터 구축해놓고 보자는 보험 성격의 투자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SSM은 할인점과 재래시장 사이를 파고드는 틈새시장이자 조만간 포화상태에 이를 할인점의 대체시장으로 주목받으면서 치열한 선점 경쟁이 예상되고 있다. LG슈퍼마켓, 롯데슈퍼, 삼성테스코가 3파전을 벌일 전망. 특히 할인점 시장에 늦게 진출하는 바람에 지우기 힘든 상처를 입은 롯데는 SSM 시장에선 두 번 다시 그런 수모를 당하지 않으려고 지난해 한화스토어·한화마트 25개 점포를 인수하는 등 다부지게 전열을 정비하고 있다. 선두주자인 LG슈퍼가 시장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으나 중소업체들이 워낙 많아 점유율은 9%에 불과하다. 마진은 작지만 설비투자 비용이 적게 들고 자산 회전율이 높아 투자대비 수익은 높은 편이다.

    롯데의 SSM 진출에 대해 업계 관계자는 “롯데가 방향은 잘 잡은 것 같지만, 세븐일레븐의 전례를 답습하지 않을까 염려된다”고 말했다.

    “롯데는 편의점 시장에서 선두로 나서기 위해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시장을 공략했다. LG25, 세븐일레븐, 보광훼미리마트의 3파전이었는데, 세븐일레븐이 가맹점 수에서 상당 기간 1위를 달렸으나 실속은 없었다. 세븐일레븐은 가맹점을 늘리기 위해 점주에게 경쟁사보다 많은 마진율을 보장하고 심지어는 가맹점 임대료를 대신 내주기까지 했다. 덕분에 가맹점 수는 빠른 속도로 증가했지만, 가맹점이 늘어날수록 적자폭이 커지는 출혈경영을 감내해야 했다.”

    롯데 관계자는 “백화점 시장은 롯데가 압도하고 있지만, 할인점 시장에선 국내외 업체들이 한 치 앞을 못 내다볼 만큼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이고 있다. 앞으로 5년 안에 승부가 결판난다. 이런 상황에서는 약간의 위험요인을 안더라도 과감하게 치고들어가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투자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또한 ‘무경쟁 지역’인 백화점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계속 유지하려면 지속적인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

    재무구조가 견고하기로 소문난 롯데가 자금시장 일각에서 우려의 시선을 받고 있는 것은 이렇듯 수익 실현이 불투명한 투자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금시장 관계자는 “롯데의 자산 규모나 부채비율을 감안하면 아직 크게 걱정할 일은 못 되지만, 문제는 지금의 점포 증설이나 M&A가 투자의 종결이나 일단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몸집 불리기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롯데쇼핑의 지난해 말 기준 차입금 규모는 약 3조원. 여기에다 올해에도 자체 자금 창출 규모를 뛰어넘는 9000억원을 투자할 계획이라 차입금은 더 늘어날 전망이다. 롯데쇼핑은 지난 1월과 3월 각각 1700억원, 2500억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했는데, 전자의 사용목적은 ‘차환용’이었으나 후자는 ‘운영자금’이었다. 당장은 차입금 규모를 줄일 의지가 없어 보인다. 게다가 오는 5월부터 TV 홈쇼핑 업체들의 지분 매각이 가능해짐에 따라 오래 전부터 홈쇼핑 진출을 희망해온 롯데쇼핑과 신세계가 인수전에 뛰어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곳 저곳에서 돈 쓸 일만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롯데가 전에 없이 자주 회사채를 발행하자 그간 든든한 돈줄 노릇을 해온 일본롯데의 자금 사정이 예전만 못한 게 아니냐는 추측도 무성하다.

    그러나 롯데의 저력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이는 드물다. 롯데의 유통부문 투자수익은 영업활동을 통해서 얻는 게 전부가 아니다. 여기에다 자본이득, 다시 말해 땅값 상승이라는 짭짤한 수익이 더해진다.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의 평가차익만 해도 1조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롯데백화점이 들어선 전국의 노른자위 땅값을 감안해 자산 재평가를 하면 롯데의 재무구조는 지금과는 확연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롯데쇼핑이 만에 하나 자금난에 빠진다면 굳이 땅을 팔지 않더라도 롯데제과, 롯데칠성음료, 호남석유화학 등 알짜 계열사들이 자금 지원에 나설 준비가 돼 있다. 이런 회사들은 각자의 업종에서 확고한 시장우위를 차지하고 있는데다 마땅히 새로 투자할 만한 분야도 없기 때문에 벌어들인 돈을 걷어가기만 하면 되는 사업구조를 갖고 있다. 롯데그룹 전체의 부채비율은 70%대에 불과하다.

    또한 롯데쇼핑이 영위하는 유통업은 기본적으로 현금장사기 때문에 매출이 일어나면 바로 현금이 들어와 순이익과 운전자금도 증가한다. 따라서 올해 9000억원을 투자한다 해도 주머니에서 9000억원이 고스란히 빠져나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사이클’이다. 비록 당장 크게 부담스럽진 않다 해도 수익을 창출하지 못하는 투자가 지속된다면, 그래서 그것이 악성 사이클로 고착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더욱이 82세에 이른 신격호 회장은 머지 않아 후계자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 기업이 안정기에 접어든 이후가 아니라 한참 확장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권력이양이 이뤄진다면 불확실성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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