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호

‘넘볼 수 없는 그녀’ 유지인

“물 흐르듯 따라가야 하는데 버리지 못한 게 너무 많아요”

  • 글: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입력2004-03-29 17: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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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넘볼 수 없는 그녀’ 유지인
    누군가에게 의존하거나 남자에게 매달리거나 불행한 일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을 것 같은 유지인의 매력이 1970년대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감히 넘볼 수 없을 것 같은 상류층 여성이 주는 신비로움과 막연한 동경심을 피부로 느끼게 하는 질감 때문이었다. 환하고 여유로운 고급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동시대 관객에게 어떤 적대감이나 위협감을 줄 만큼 차갑거나 되바라지지는 않은 그런 느낌. ‘상노’ ‘아내’ ‘결혼 행진곡’ ‘보통 사람들’ 같은 TV드라마에서 그녀는 천편일률적으로 결혼을 통해 행복을 보장받는 여성을 연기했는데, 이들 드라마는 대부분 유지인이라는 브랜드를 일상적인 이미지로 만드는 역할을 했다. 김화가 쓴 ‘한국영화전사’는 유지인에 대해 ‘다듬어진 세련미와 소박한 순진함, 성숙함과 앳됨을 동시에 발산하는 복잡한 캐릭터’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의 유지인은 달랐다. ‘1970년대 한국 여배우 스타덤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이호걸은 유지인에 대해 ‘당시 한국영화계에서 여배우에 대한 가학적 쾌락이 거의 허용되지 않았던 경우’라고 정의한다. 남성편력을 통해 인생유전을 거듭하는 부박한 여성들을 즐겨 그렸던 당시 감독들이 유독 유지인에게만은 그럴 수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심지어 그녀가 ‘26×365=0’에서 맡았던 역할, 즉 오빠의 성 불구, 동생의 가출, 어머니의 죽음을 모두 경험하며 호스티스가 된 여인도 원래는 부유한 여대생이었다. 또 ‘가시를 삼킨 장미’에서는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과 결혼을 거부하는 페미니스트의 면모마저 보여준다.

    유지인의 배우론을 준비하면서 놀랐던 것은, 그녀가 사람들이 생각한 것과 달리 ‘정형미인’의 고양이괴물부터 ‘심봤다’의 소박한 아낙네, ‘피막’의 무녀, ‘바람불어 좋은 날’의 오만한 부잣집 딸 명희까지 무척이나 다양한 역할을 소화했다는 사실이었다. 유지인은 공포물과 호스티스물, 멜로와 전쟁영화를 넘나들며 여러 감독과 일했다. 어느 한 사람의 페르소나나 고정된 이미지로 남기를 거부했던 자립심과 스스로에 대한 보호본능은, 그녀로 하여금 틀을 깨고 싶다는 욕망과 ‘유지인답다’는 세간의 평가 사이에서 끊임없이 작두춤을 추게 했던 것 같다.

    상상과는 다른 배우

    그런 의미에서, 죽어가는 아이 앞에서 절규하는 ‘심봤다’의 무지렁이 아낙네나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우는 ‘피막’의 무녀 역할 등 그녀가 대표작에서 맡았던 캐릭터들이 매우 소박하고 가족주의적이며 아무런 자본이나 학력이 없는 ‘자연과 가까운 여성’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 깊이 내재한 ‘질박하고 원초적인 본능을 지닌 여성’을 연기할 때 가장 자연스럽고 농밀한 연기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2004년 초입에 필자는 근 16년 만에 본격적으로 활동을 재개한 유지인을 만났다. 두 아이의 어머니며 이제는 홀로서기를 시작한 그녀는 놀랍게도 필자가 만나본 어떤 여배우보다도 유머 감각이 넘쳤고 자신만만함을 지니고 있는 당찬 여자다. 솔직히 고백건대 유지인은 누구보다도 상상했던 이미지와 실제 모습이 차이가 나는 여배우였다. 순댓국과 육개장을 좋아한다는 이 여배우는 자신에 대해, 마음 깊숙이는 연약하고 겁이 많은 측면이 있지만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어 더욱더 강하고 당찬 모습을 보여주었노라고 회고한다.

    필자는 인터뷰를 마치고야 비로소 1970년대가 유지인이라는 여배우에게만은 ‘시대가 낳은 가학적 욕망’을 휘두르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생활에 대한 노출 혹은 그것을 통해 누군가가 상처받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여배우. 한 사람의 페르소나로 정착하기보다는 다양한 감독들과 협업하면서 차라리 영화계의 아웃사이더로 남고 싶었다는 이 여자. 내면 깊숙이 소박한 단순함과 짱짱한 자존심을 함께 갖고 있는 유지인의 성정은 당시의 폭압적 욕망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꿋꿋한 방패막이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인터뷰는 바로 그 점을 조명하고 싶었다. 이제는 대학 강단에 서서 여성으로서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사는 장미희, 가족의 그늘에 자신을 묻으며 전통적인 주부의 역할을 고수하고 있는 정윤희, 그리고 한때는 대한민국의 가부장 질서에 편입했으나 그것을 거부하고 다시 튕겨나온 유지인이라는 배우. 2000년대의 여성들에게 무언가 상징적 의미를 던지는 듯한 1970, 80년대 트로이카 여배우 중 한 사람의 삶과 영화를 통해 그녀가 행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 동시에 그녀가 불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듣고 싶었다.

    -예전에 그런 소문이 있었어요. 원래 여배우는 귀찮게 하는 남자가 많기 마련인데, 유지인씨만큼은 아버지가 장군이라 그럴 수가 없다는 거죠(웃음).

    “실제로 군인이셨지만 대령으로 예편하셨어요. 당시 영화계에서 제 위치가 묘했기 때문에 나온 말일 거예요. 그때는 대학을 나와 여배우가 된 사람이 많지 않았어요. 또 그때만 해도 저희 집이 경제적으로 꽤 여유가 있었거든요. 외가가 일본에 있었는데 외할아버지가 나고야 한인학교를 세운 분이셨고요. 그렇다 보니 동료 배우들과는 분위기가 좀 달랐겠죠.”

    -부친이 군인이었다니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때 반대가 심했을 것 같은데요.

    “엄청났죠. 대학에 진학할 때도 부모님은 가정과를 가라고 하셨거든요. 고등학교 2학년 때 교생선생님 중에 오빠 친구가 한 분 있었어요. 그 분 말씀이 중앙대 연극영화과에서 도강을 한 적이 있는데 너무 좋았다는 거예요. ‘하고 싶은 게 많은 너한테 어울리는 과’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 전공을 하기로 마음먹었죠. 솔직히 연기를 전공할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결과적으로는 나에게 딱 맞는 선택을 한 셈이 됐지만.”

    -연기는 대학 입학 전에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고3이던 1973년 9월에 동양방송(TBC)에서 14기 탤런트를 모집했어요. 그때 담임선생님이 직접 원서를 써주셨죠. 방송국 공채에 붙으면 대학 연영과에 가기가 쉽다는 거였어요. 반 학생 중 몇 명이 대학에 진학하느냐가 무척 중요한 시절이었으니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주신 거죠. 단발머리에 노란빛 원피스를 입고 방송국에 갔는데 정말 운이 좋았어요. 그때 기억으로 주위에 온통 쟁쟁한 사람들뿐이고 학생은 저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제가 뽑힐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겠죠.

    전부터 ‘끼’가 많은 편이었어요. 중학생 때부터 오락부장을 했거든요. 2학년 때는 학군단 기수를 하면서 전방에 위문도 다니고 그랬어요. 위문공연으로 ‘춘향전’을 했는데, 선생님이 춘향이 역을 하라는 걸 재미가 없겠다 싶어서 우겨서는 월매 역을 했어요. 결국은 ‘춘향전’이 아니라 ‘월매전’이 됐죠, 군인 아저씨들이 재밌다고 난리가 나고.”

    -스크린이나 TV 속 이미지는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데, 상당히 적극적인 면도 있었군요.

    “나한테 맞는 자리를 선택하길 즐겼어요, 부모님 뜻과는 상관 없이. 어릴 때는 어른들 말씀 잘 듣는 모범생이었죠. 새벽 6시에 일어나고 아버지가 퇴근해 오시기 전에 집에 가서 10시에 자는 게 철칙이었어요. 그 틀을 벗어나면 큰일나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 틀 바깥도 참 괜찮은 세상이더라고요.

    영화에 데뷔하게 된 계기는 잡지 표지모델 쪽이었어요. 막 창간한 대학생 대상 잡지 표지에, 하얀 문 앞에서 빨간 모자를 쓰고 강아지를 안고 있는 포즈로 찍은 사진이 실렸죠. 그 무렵 연방영화사에서 소설가 강신재 선생님 원작의 ‘그대의 찬손’이라는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강 선생님이 그 사진을 보고 ‘내가 찾는 사람은 이런 인상’이라고 하셨던 모양이에요. 영화사 직원들이 그런 이미지의 아이를 찾아 명동거리를 헤매다가 우연히 저랑 딱 마주친 거죠. 정말 말 그대로 우연히.

    끌려가다시피 영화사에 갔더니 여러분이셨어요. 그때는 아버지가 전방에 계실 무렵이었으니 집에서 허락할 리가 없죠. 끝까지 안 한다고 버텼더니 신문지에다 현찰을 싸주대요. 돈에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는데 결정적으로 ‘세계일주를 보내주겠다’는 말에 넘어갔어요. 당시 세계일주라면 말 그대로 꿈에나 그리던 일이었거든요. 물론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죠. 이후 너무 바빠 보내준다 해도 못 갔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대의 찬손’은 지금 필름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대본만 있어요. 참 순수하고 괜찮은 영화였는데…. 촬영하면서 박종호 감독님한테 많이 혼났어요. ‘그게 걷는 거냐, 로봇 다리지’ 그러시더라고요. 집에 TV가 있기는 했지만 저는 프로레슬링만 열심히 봤거든요.(웃음) 그러니 연기의 ‘연’자도 모르는 초보가 어떻게 연기를 하겠어요. 그에 비하면 요즘 젊은 배우들은 정말 잘하는 거예요.

    겨우 촬영을 끝내고 길바닥에 포스터가 좍 붙었어요. 아버지가 신문에 난 영화광고를 보고 ‘그 정도 유명해졌으면 됐다. 더 유명해질 것도 없고 뭔가를 이루려 애쓸 것도 없다’ 그러시는 거예요. 아마 그 말 때문에 제가 지금까지 오지 않았나 싶어요. 저 작품은 꼭 하고 싶다, 저건 나만 할 수 있다, 그런 고집을 피워 본 적이 없어요. 대신 나한테 맡겨진 작품은 반드시 소화해내려고 애썼죠. 수동적인 거죠.”

    -의외네요. 본인과는 거리가 있는 역할을 잘해냈다고 생각했거든요. 특히 산골 아낙네를 연기한 영화 ‘심봤다’를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 이름을 목놓아 부르면서 설악산을 헤매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때는 참 기운도 좋았어요. (웃음) 흔히 나를 대단히 차갑고 이지적인 사람으로 보는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음식도 순댓국 같은 걸 좋아하고. 드레스 입고 CF 찍다가도 육개장 퍼먹고 그러거든요. 촬영감독들이 ‘꿈 깬다 꿈 깨’ 그러죠. 그게 본래 제 모습이에요. 어려서는 자주 시골에 가 있었어요. 외가가 경남 진동이라는 어촌 마을이었고 큰아버지댁이 사천이어서 방학 때마다 내려가서 살았거든요. 아버지 근무지 따라 철원에서부터 전곡까지 안 가본 데가 없고요. 날마다 대포 소리가 꽝꽝 울리는 동네에서 자랐으니 생긴 것과는 반대로 촌스러운 부분이 많죠. 그런 모습이 영화에 드러난 것 같아요.”

    필자가 보기에 유지인이라는 배우가 에너지를 내뿜으며 광채를 발했던 것은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순박함이나 분노를 표현할 때였다. 그녀가 마음속에 가둬놓은 어떤 것을 끄집어내어 스크린 위에서 빛나게 만드는 감독을 만났을 때 비로소 유지인이라는 캐릭터도, 그리고 영화도 스파크가 일어나듯 접점이 생기곤 했다.

    오기로 계속한 연기

    -데뷔 후 한동안은 별 작품이 없다가 1978년부터 80년까지 작품도 많이 하고 흥행에서도 큰 성과를 거뒀습니다. 이 무렵에는 당시 여배우로는 드물게 서구적인 이미지를 풍겨 크게 어필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른 여배우와는 좀 달랐다고 할까요. 뭐랄까, ‘가질 수 없는 여자’라는 판타지가 있었어요. 최은희씨나 김지미씨의 동양적인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영화를 찍다 보니 성적이 모두 엉망이어서 학사경고를 받게 됐어요. ‘세계일주도 안 보내주는데 뭘’ 그러면서 학교에 나가기로 했죠. 그래서 1975, 76년에는 학교만 열심히 다녔어요. 그때 공부 안 했으면 지금 선생님(중앙대 연극영화과 겸임교수)도 못 하고 있을 걸요. 계절학기란 계절학기는 모두 들어서 겨우 졸업을 할 수 있었죠. 집에서 바라는 대로 학교 선생님이 되려고 교직과정도 이수했고요.

    그런데 마침 TBC에서 ‘서울야곡’이라는 드라마의 주인공을 제안해왔어요. 제가 안 하겠다니까 방송국 분들이 막 야단을 치는 거예요. ‘이게 어떤 역인데…’ 하면서. 저는 저대로 ‘내가 안 한다는데 왜 야단을 치냐’고 대들고 있는데 오현경 선생님이 설득을 하러 오셨어요.

    대본을 받아보니 무교동에서 빈대떡을 파는 여인 역할이었어요. 정말 안 되겠다 싶었는데 친구들이 살살 약을 올리는 바람에 그만…. ‘네가 이때까지 연기라고 해본 게 뭐가 있냐, 연기다운 연기를 한번 해봐라’ 그러는데 정말 화가 나더군요. 잠 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셈이죠. (웃음) 그 친구들 코를 한번 납작하게 만들어줘야겠다는 생각에 드라마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인기가 장난이 아닌 거예요. 무교동에 촬영을 나갔더니 구경꾼이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별수 있나요. 연기를 계속하는 수밖에. 그게 팔자예요.”

    -저는 이 시기 작품 중에서 1975년작 ‘정형미인’이라는 영화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얼굴에 끔찍한 분장을 하고는 ‘내 얼굴을 성형수술해달라’며 읊조리는 장면이 압권이었습니다. 일종의 컬트 영화였죠.

    “고양이의 본성이 남아 있는 캐릭터였죠. 제 얼굴이 딱 고양이상이잖아요. 얼굴 전체에서 눈이 3분의 2는 됐던 것 같아요. 그 영화를 찍다 보니 내 모습에서 자꾸 고양이가 연상돼 무서워서 거울을 못볼 정도였어요.

    워낙 묘한 일이 많은 영화였어요. 공중으로 날아다니는 장면을 찍다가 기절하기도 하고. 제가 원래 무서운 영화는 보지도 못해요. 아마 당시 여배우 중에 ‘전설의 고향’에 출연하지 않은 사람은 저밖에 없을 걸요. 그러니 그 엽기적인 영화를 찍느라고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날생선을 먹는 장면도 실은 대역이 한 거예요.”

    장일호 감독의 ‘정형미인’은 충무로가 만든 몇 안 되는 1970년대 공포 영화 중 하나다. 산부인과 의사인 정동국은 부인과의 사이에서 고양이아이를 낳는다. 이를 비관해 병원에서 자신의 딸을 다른 신생아와 바꿔치기했던 동국은 19년 후 미국에서 귀국해 자신의 얼굴을 수술해달라는 친딸 윤옥을 만난다. 수술 결과 이상하게도 길러온 딸인 소영이 고양이 모습을 하게 되고, 윤옥은 미인이 되지만 여전히 고양이의 습성으로 괴로워한다. 결국 동국은 윤옥을 다시 고양이로 만드는 수술을 하게 되고 소영은 제 얼굴을 되찾으나 이에 앙심을 품은 윤옥과 동국이 사투를 벌이다 둘 다 죽는다는 줄거리다.

    일종의 한국판 ‘캣 피플’, 혹은 할리우드 영화 ‘페이스 오프’의 상상력을 이미 1970년대에 발휘했다고도 할 수 있는 이 기괴한 영화에서 공포의 관건은 유지인이 분한 윤옥 역의 고양이가 사람으로 변화하는 장면과 반대로 사람이 고양이로 변화하는 장면의 비주얼이었다. 당시 컴퓨터그래픽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한 장면을 여러 번 찍어 합성하는 방식으로 특수효과를 냈다고 한다. 아마 유지인씨가 공중을 날다 기절한 장면은 나무에서 배우를 뛰어내리게 한 다음 그 장면을 거꾸로 돌려 나무로 휙 날아오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특수효과를 촬영하다 일어난 일일 것이다.

    ‘넘볼 수 없는 그녀’ 유지인

    데뷔작인 ‘그대의 찬손’ 포스터(1974, 왼쪽).<br>이두용 감독의 ‘피막’(1980).

    -저는 유지인씨가 오히려 그런 작품을 더 많이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영화는 한국의 장르영화, 특히 공포영화가 쇠퇴하던 시기에 나온 희귀작이거든요. 이 무렵 몇몇 영화에서 유지인씨 이미지는 TV에서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찍은 ‘바람불어 좋은 날’이나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같은 영화를 두고도 유지인이 왜 저런 역할을 하는지 이해 못 하겠다는 사람이 많았어요. 당시만 해도 여배우는 화장품 광고만 해야 되고 먹는 광고는 절대 하면 안 된다는 식의 금기가 많았거든요. 그럴 때마다 저는 뭔가 깨고 싶었어요. 남들이 뭐라 하든 말든. 여러 장르를 다 하면서 나 나름의 뭔가를 구축하고 싶다는 욕심이었죠. 영화학도로서의 자존심이랄까, 그런 것도 있었고요.”

    -1978년에 이르자 이른바 ‘트로이카 체제’가 완전히 굳어집니다. 정윤희씨나 장미희씨가 최대 경쟁자였던 셈인데 그분들과의 관계는 어땠습니까.

    “제가 학교에 돌아가 있는 동안 그 친구들이 데뷔했고 ‘서울야곡’ 이후에 삼각구도가 만들어졌다고 떠들기 시작했죠. 그 질문을 자주 받는 편인데 별로 의식하며 지낸 것 같지는 않아요. ‘혼자 잘난 척하느라고 안 낀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겠지만, 저는 그냥 맡겨지는 숙제를 충실히 한다고만 생각했거든요. 트로이카니 하는 말은 언론에서 만들어낸 거지 우리가 한 건 아니잖아요. 아버지 말씀대로 욕심을 갖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후였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고요.

    윤희랑 미희는 약간씩 경쟁도 하고 그랬던 모양인데, 제가 가운데 끼면 그런 일이 없었어요. 사실 윤희는 윤희 나름대로 예쁘고 미희는 미희 나름대로 멋있잖아요. 셋이 이미지가 완전히 다르다 보니 누구 역할을 누가 뺏는다거나 그런 일도 드물었고요. 싸울 일이 별로 없었죠. 대신 ‘우리나라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고 서로 물으며 신경전을 벌이기는 했죠.” (웃음)

    -욕심이 없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1979년부터 작품을 굉장히 많이 했거든요. 이유가 뭐였을까요.

    “몇 번 영화를 그만두려고 했어요. 상업적인 소모품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레몬처럼 꽉 짜서 즙 내면 그것으로 끝나는. 항상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 더 열심히 했어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정말 제대로 뭔가 한번 보여주고 끝내야겠다는. 상 타고 돈 버는 그런 거 말고 정말 내 마음에 흡족한 영화를 찍고 싶다는 욕심이었죠. 내 딴에는 열심히 했는 데도 주위의 반응이 좋지 않으니 계속 오기가 났죠. 그러다가 결국은 못 그만두고 발동이 걸려 이어진 거예요.”

    정진우 감독과의 ‘악연’

    -1979년 정진우 감독의 두 작품 ‘가시를 삼킨 장미’와 ‘심봤다’에서 모두 주연했습니다. 앞에서도 잠시 말했지만 ‘심봤다’에서 유지인씨는 기존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굉장히 순박한 여인, 남편이 삼을 캤는 데도 그걸 버리고 다시 옛날로 돌아가자고 사정하는 부인 역할이었죠. 미혼의 여배우가 두 아이의 엄마를 연기한다는 게 부담스럽지 않았을까요.

    “연약하지만 또 굉장히 강인한 캐릭터였죠. 엄마이기 때문에 남자보다 강한. 요즘 배우들은 제 나이의 역할을 많이 하지만 저는 그렇지 못했어요. 그 무렵에는 여배우들이 나이보다 늙은 역할을 주로 했거든요. 저만 해도 머리 올린 애엄마 역할을 더 많이 했고요. 지금도 저를 보고 ‘그때 그 유지인이 왜 이렇게 젊으냐’고 묻는 분들이 있어요. 마흔 살 무렵에 벌써 ‘이제 한 오십 되셨죠?’ 소리를 들었으니까요. 70년대 여배우라고 하면 굉장히 오래 전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웃음)

    빨리 제 고정된 이미지를 깨고 싶었어요. 재미있는 건 지금도 사람들이 청순가련형 하면 유지인을 떠올린다는 거죠. 최근 출연한 드라마 ‘회전목마’의 조소혜 작가만 해도 ‘이건 유지인씨가 해야 된다’고 그랬대요. 그분은 내가 실제로는 시트콤을 해도 좋을 만큼 털털한 편이라는 걸 잘 아는 데도요. 나는 이제 우는 게 지겨운데. 어떤 때는 진한 사투리를 쓰는 강한 역할을 하다가도 또 다음 순간에는 여지없이 청순가련형 여주인공으로 돌아가곤 했죠.”

    -결과적으로 ‘심봤다’에서의 연기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습니다. 정진우 감독 덕택이었을까요.

    “워낙 여러 사람이 고생하며 찍으니까 죽기 살기로 했죠. 저 혼자 이룰 수는 없는 일이죠. 정진우 감독님도 참 대단했어요. 촬영장에서 어찌나 소리를 많이 지르는지. 어느 때는 밥도 안 먹고 촬영을 계속해요. 원래 계약할 때 ‘밥은 제 시간에 먹어야 한다’고 단서를 달았거든요. (웃음) 여배우가 밥을 챙겨먹어야 다른 스태프들도 밥을 먹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정 감독님은 한번 작품에 미치면 생쌀 먹어가며 계속 카메라를 돌리는 분이에요. 밥 먹고 하자고 대들었다가 싸운 적도 있어요.

    그래서 사이가 나빠지기도 했죠. 나중에 우연히라도 자리를 함께하게 되면 내가 피할 정도로. 그렇지만 그분이 미워서는 아니었어요. 워낙 작품에 대한 애정이 강해서 그런 거였으니까요. 왜 그런 말도 있잖아요, ‘보이지 않는 사랑도 있다’고.”

    ‘넘볼 수 없는 그녀’ 유지인

    장일호 감독의 ‘정형미인’(1975, 왼쪽).<br>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1980).

    1970년대 영화계를 돌아볼 때 가장 눈여겨볼 대목은 어떤 여배우도 호스티스 멜로라는 장르를 피해갈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종잇장처럼 수동적인 여성 캐릭터와 개연성 없는 줄거리 구성, 사회적 메시지를 철저히 차단한 채 여배우의 육체를 전시하는 데 급급했던 호스티스 멜로물은 한국 영화계가 당대의 여성현실을 왜곡해 흥행을 만드는 최후의 보루였던 셈이었다.

    “나는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이들 작품에서 남성은 주로 여성을 노리개로 삼는 유부남이거나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호스티스 누이를 질책하는 가학적이면서도 무능한 오빠 등의 인간형이었다. 성을 소비하는 혹은 여성의 희생에 의해 부양되는 이들 남성은, 마치 유신으로 인한 사회적 억압을 여성의 몸을 통해 대리 만족을 얻거나 시대가 낳은 죄책감을 성적으로 방종한 여주인공에게 투사하는 것으로 보였다.

    결국 호스티스 멜로물은 순결 이데올로기에 물든 사회, 여성에 대한 가학으로만 자신이 남성임을 확인하는 남성들의 나르시시즘, 거기에 반공, 청춘, 에로물 외에는 거의 모든 소재가 검열의 제약을 받던 한국의 1970년대가 빚어낸 부끄러운 시대적 합작품이었다. 호스티스 멜로물이 관객을 불러모으며 시대의 상처를 위무할 때, 밖에서는 김대중이 납치당하고 정인숙이 죽고 전태일이 분신했으며, 서울대생이던 김상진은 배를 가르고 민주주의를 외쳤다. 그게 1970년대였다.

    -유지인씨도 이 무렵 노세한 감독의 ‘26×365=0’이라는 작품에서 호스티스 역을 맡았습니다.

    “스물여섯에 자살한 여대생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였죠. 그 영화에는 그래도 사회상이 담겨 있어요. 여주인공만 해도 자신의 즐거움이 아니라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희생한 거잖아요. 실화라는 점 때문에 무언가 고발하는 마음으로 찍은 영화였어요. 물론 흥행을 위한 설정이었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지만 사회전면에 드러나지 않는 부분, 숨기고 싶었던 치부를 드러내는 이야기니까요.”

    역할이 배우와 맞지 않으면

    -그 부분이 이 영화가 다른 호스티스 멜로와 다른 점이라고 봅니다. 유지인씨가 나왔고 주인공이 여대생이었다는 점. 많은 평론가들이 이 부분을 지적하는데요, 당시 사회가 여배우들에게 굉장히 가학적이었고 심지어 호스티스 멜로라는 장르였는데 유지인씨에게는 그런 가학성을 띠지 못했다는 말이죠.

    “이후에 비슷한 시나리오가 여러 개 왔는데, 다 거절했어요. 그랬더니 사람들이 이해를 못 해요. 어떤 때는 누가 봐도 뻔히 호랑이 굴인데 뛰어들고, 또 어떤 때는 괜찮아 보이는 곳도 거절한다는 거였죠. 베드신도 대부분 대역이 했어요.

    신성일, 윤정희 선생님과 ‘태백산맥’을 찍던 대학 1학년 때였어요. 수유리에서 밤새도록 군중 신을 찍는데 저는 한 신도 안 찍어주는 거예요. 어린 마음에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어서 새벽에 몰래 도망갔어요. 막상 촬영에 들어갔을 때는 제일 막내가 없어 난리가 났죠. 그 엑스트라들을 다시 동원하려면 돈이 얼마겠어요.

    그렇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어요. 한마디로 나는 ‘잘난 사람’이었던 거죠. 그 시간에 공부를 했으면 얼마를 더 했을 텐데 아까운 내 시간을 그냥 버리나 싶었죠. 또 그 무렵에 제가 TBC에서 드라마를 찍고 있었거든요. 집에서 편하게 자고는 다음날 아침에 드라마 촬영장인 부여로 가는데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영화진흥공사 버스가 쫓아와서 나를 찾아요. 결국 영화연출부랑 드라마 제작진이랑 협상을 해서 한동안 저녁까지는 드라마를, 새벽에는 영화를 찍기로 했죠. 지금 생각하면 참 여러 사람에게 못할 짓 한 거예요. 새파랗게 젊은 배우가 그러면 되겠어요?

    그때부터 ‘나는 영화를 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되뇌며 살았어요. 약속시간만 해도 저는 1분이라도 늦으면 안 되는 성미인데 다른 배우들은 늦어야만 스타라고 생각했거든요. 그게 그렇게 싫었어요. 그러니 다른 배우들하고 약속을 하면 오히려 그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아요. 30분쯤 늦게 나타나면 ‘왔니?’ 한마디 하고 가버리니까요.”

    -시간도 시간이지만 일종의 자존심이 아니었나 싶은데요.

    “그런 면도 있겠죠. 사실 영화계가 별세계는 아니잖아요. 내가 아무리 잘났다고 해봐야 남들보다 얼굴이 좀 많이 알려졌다 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제가 그렇게 편하게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일이 없으면 없는 대로, 조그만 일이라도 주어지면 또 그것대로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한창때도 친구들하고 시내버스 타고 다니며 길거리에서 두더지잡기 오락을 하고 놀았으니까요.” (웃음)

    -다시 영화로 돌아와 이야기를 계속하죠. ‘가시를 삼킨 장미’는 이전 작품과는 아주 달랐습니다. 자의식 있는 여대생을 그린,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멜로를 풀어간 영화였죠. 유지인씨가 새한테 ‘왜 우리는 수컷을 통해서만 존재가치를 인정받아야 돼?’하고 묻는 장면도 있고요. 그런데 이상한 건 이 영화에서의 유지인씨보다 ‘심봤다’에서의 유지인씨가 더 자연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느낌이라는 것입니다. 한 감독과 같은 해에 작업을 했는데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걸까요.

    “배우가 어떤 역을 하면서 그 역을 이해하지 못하고 연기하면서 불편하면 보는 사람은 더 불편한 법이거든요. ‘가시를 삼킨 장미’가 바로 그랬어요. 못 하겠다 싶은 순간도 있었고요. 보수적 성향인 나와는 동떨어진 역할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보는 사람 입장에선 그렇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을 겁니다.

    사람들은 저에게서 자유분방함을 읽고 싶어하지만 제 자신은 그렇지 않거든요. 저는 지극히 조선시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에요. 영화 속 인물을 연기하면서 사고방식이 깨어지고 그를 통해 깨달은 것도 많지만 여전히 다른 여배우들에 비해 유교적인 성향에 가까웠어요. 그런 성향과 외모가 잘 맞지 않으니까 괴리가 생기는 거죠. 아쉬운 부분이 많았어요.”

    1980년대 들어 유지인이 출연한 영화 가운데 흥미를 끄는 작품으로는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을 들 수 있다. 당대를 대표하는 영화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이 작품에서 유지인은 이전의 청순가련이나 호스티스 멜로의 수동적인 여인상과는 또 다른 이미지를 보여준다. 빨간 비닐 옷을 입고 피아노를 치며 안성기를 항해 ‘너 진짜 웃기는구나. 내가 잠 한번 같이 잔 게 그렇게 우쭐하냐, 이 병신아!’ 같은 대사를 날리는 그녀는 분명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캐릭터였고, 다른 트로이카 여배우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그녀만의 이미지였다. 능수능란하게 남자를 조종하는 영화 속 ‘명희’는 어쩌면 1980년대의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여성상을 거칠게나마 예단할 수 있는 단초였을지도 모른다.

    -‘바람불어 좋은 날’은 어떻게 출연하게 된 건가요.

    “제가 이장호 감독님을 비롯한 유명 감독들과는 작품을 많이 안 했어요. 그것도 일종의 고집인데, 만약 그런 분들 영화를 쫓아다녔다면 더 큰 흥행배우가 됐겠죠. 쉽게 말해 스스로 너무 잘났다고 생각한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굳이 그렇게 할 것 없이 즐길 수 있을 만큼만 하자는 식이었어요. 아웃사이더 성향이죠. 그러고 있는데 하루는 이장호 감독님이 ‘바람불어 좋은 날’을 하자고 그러더라고요. 일종의 특별출연 개념이었죠. ‘아, 나도 이제 연기의 틀을 바꿔야 할 시기가 됐나보다’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어요. 뭔가 소리지르며 표현하고 싶은 부분도 있었고. 그렇게 해서 출연하게 됐어요.

    애착이 많이 가는 영화예요. 의상도 특별히 제작해 가며 촬영했거든요. 그때는 의상협찬 같은 게 없었잖아요. 출연료가 대부분 옷값으로 들어갔죠. 촬영 내내 묘한 자부심이 있었죠. 이 작품이 영화사적으로나 유지인 개인에게나 한 획을 긋는 계기가 되겠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어요.

    어떤 사람들은 거의 엑스트라나 다름없는 역할 아니냐고도 했지만 저에게는 달랐어요. 예전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악역에 가까운 역이었으니까요. ‘요건 몰랐지’ 하는 즐거움이 있었죠. 그런 거라도 없으면 이전과는 다른 시도를 하기가 참 힘들어요. 그랬다면 참 지리멸렬하게 살았을 거예요.”

    -저도 이 작품은 유지인씨 연기에서 꼭 언급할 만한 작품이라고 봐요. 이런 영화를 좀더 많이 했다면 좋았겠다 싶고요. 배우의 고정 이미지를 깨는 것도 감독의 역량이죠. 이장호 감독은 그런 힘이 있는 감독이거든요. 그런가 하면 이 작품에서 안성기씨와 처음 함께 작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안성기씨는 정말 열심히 사는 배우죠. 그렇게 열심히 하는 배우는 처음 봤어요. 수줍음도 많고요. 언젠가 공옥진 선생님이 절대 표 사지 말고 그냥 오라고 하셔서 공연에 간 적이 있는데, 막상 극장 앞에 가서는 서로 눈치만 보고 뒤로 숨는 거예요. ‘나 배우 안성기인데 공 선생님이 그냥 들어오라고 하셨다’는 말을 못 하는 거죠. 남들처럼 어디 가서 배우입네 나서는 일을 딱 질색하는 사람이에요. 국민배우답죠.”

    -배창호 감독의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도 같이 출연하셨죠. 이 영화에서 이미숙씨도 연기궤도에 올랐고요. 이장호 감독과 배창호 감독의 연출 스타일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비교해주세요.

    “이 감독님이 ‘바람불어 좋은 날’을 할 때 조감독이 배창호 감독님이셨어요. 제가 원래 남의 말을 잘 못하는데…. (웃음) 배창호 감독은 우직하죠. 영화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그 열정이 사실 알고 보면 이장호 감독한테서 배운 측면이 있어요. 저와 이 감독님은 ‘바람불어 좋은 날’ 딱 한 편만 같이 했지만 워낙 작품을 잘 만들었어요. 그때부터 ‘영상파’라고 이른바 작가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했죠. 저만 해도 그런 특별한 분이 부탁을 하니 동참하기로 했던 거고요.

    아마도 두 분을 비교하는 데는 장미희씨가 훨씬 더 적임자일 것 같네요. 두 감독님과 훨씬 일을 많이 했으니까요. 앞서도 말했지만 저는 한 배우가 한 감독과 대부분의 작품을 같이하는 분위기에는 반대였어요. 물론 그랬다면 더 큰 배우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단지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할까요. 윤희나 미희, 저는 그렇게 각각 달랐던 거예요. 요즘 젊은 후배들이 들으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되겠지만.

    영화 ‘피막’을 하고 나서 칸영화제에서 오라고 계속 연락이 왔어요. 결국은 제가 가는 대신 그 쪽에서 기자들이 찾아왔죠. 겁이 났어요, 세상이 너무 험악하니까. 나중에 파리에 가서 ‘그때 내가 칸에 갔으면 나나 한국영화가 다른 쪽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겠다’ 하는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죠.

    ‘피막’은 찍으면서도 뭔가 달랐어요. 예전부터 무녀라는 역할을 하고 싶었거든요. 밤샘촬영을 하는 동안 무녀들이 쓰는 채를 잡았는데, 정말 나에게 신기가 있구나 싶더라고요. 똑같은 높이로 밤새도록 뛸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 걸 느끼며 영화를 찍으니 화면도 강렬했겠죠. 돌아보면 가장 아쉬운 부분이 그거예요. ‘피막’을 찍고 나서 좀더 진취적으로, 스스로를 깨나갔으면 뭔가 달라졌을 텐데 하는 때늦은 후회죠. 그걸 이루지 못한 거예요. 그러니까 어쩌면 유지인이라는 사람은 연예계랑 잘 안 맞는 사람인지도 모르죠.”

    “차라리 초청하지 마라”

    -고은아씨도 똑같은 말을 하시더군요. 항상 영화계를 떠나고 싶었다고.

    “지금도 영화계 어른들이 저보고 무언가 당부를 하시면 무척이나 힘들어요. 속으로 ‘아닌데, 나는 언제나 사표를 가슴속에 넣어 갖고 다니는 사람인데’ 하는 생각이 들죠. 예전에도 그랬어요. 언제든 떠날 준비가 돼 있으니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산 거예요. 당시에는 큰소리치는 배우가 별로 없었어요,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런데 저는 걸핏하면 ‘아, 됐어, 안 해, 그만둬’ 그러고 다녔으니 특이하긴 특이했겠죠. 자존심만 대단하고.

    간혹 청와대에서 금테 두른 초청장이 나오면 신원조회를 하고 복잡하거든요. 저는 대뜸 ‘대한민국에 살고 대한민국에서 배우를 했으니 내가 누군지는 잘 알 것 아니냐, 차라리 초청을 하지 말아라’ 그랬어요. 그걸 그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는 거죠. 북한에서 누가 귀순을 했다며 저보고 꽃다발을 전달하래요. 싫다고 버텼죠. 그 사람하고 나하고 무슨 관계냐면서.

    처음에는 이상하게 보던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 특이한 애, 건드리기 힘든 애라고 생각하더군요. 나중에는 선배들이 오히려 저를 많이 보호해주셨어요. 일종의 대리만족, 자신들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존재 비슷하게 된 거죠. 그러니까 저는 점점 더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게 되고요.”

    16년 만의 귀환

    뛰어난 감독들과 함께한 다양한 작품들. 그렇듯 연기생활을 질주하던 유지인은 1986년,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른 ‘아주 평범한 남자’와 결혼하며 연기생활을 접는다. 그후 16년 가까이 가정주부의 역할에 충실하며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을 의식적으로 멀리했던 그녀는 2002년 이혼과 함께 본격적으로 방송활동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

    -한때는 모든 남자가 원하는 여자, 마음만 먹으면 누구와도 결혼할 수 있는 여자였는데 왜 남편을 택해 결혼했는지 궁금합니다. 예전 인터뷰를 살펴봐도 그런 이야기는 전혀 없더군요. 어떤 분들은 자신이 젊었을 때 얼마나 따라다닌 남자들이 많았는지 자랑 삼아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말이죠.

    “아니 뭐, 배인숙씨 자서전도 아니고…. (웃음) 그런 사람들도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 이야기는 안 하겠죠. 거꾸로 따라다녔던 남자들은 그걸 보고 얼마나 싫겠어요. 상처가 될 수도 있죠, 옛이야기가.

    요즘은 배우의 신상이 지나치게 공개돼 있는 세상이에요. 적당한 신비감도 전략일 수 있어요. 저는 결혼을 하면서 예전 사진을 한 장도 안 가져갔어요. 다 버렸죠. 이제부터는 유지인을 버리고 이윤희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제 새로운 공간에서는 이전의 나와는 다른 새 삶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죠.

    대신 은퇴라는 말을 섣불리 하지 않은 것은 언젠가 나이 들어서라도 내 마음에 꼭 맞는 역을 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완전히 물러나고 싶지는 않았던거죠. 너무 오래 쉬면서 감이 떨어지는 걸 느끼니까 큰 역이든 작은 역이든 다시 연기를 해야겠다 싶어서 방송을 다시 하게 된 거죠.”

    -한때는 신화적인 여배우였던 사람이 다시 평범한 조연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특히 영화의 경우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테고요.

    “내가 더 빨리 부서져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물 흐르듯 따라가야 하는데 아직 버리지 못한 게 너무 많거든요. 예전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고, 그럴 때 받는 상처도 다른 사람들보다 크고, 반면 너무 망가지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고. 그러다 보니 이래저래 못 하는 일이 참 많아요.”

    장미희, 정윤희, 유지인이라는 트로이카 여배우의 이후 삶은 각기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한 사람은 결혼하지 않은 채 독립적인 전문직 여성으로, 또 한 사람은 세상에 전혀 드러나지 않는 전업주부로 살고 있고, 마지막 한 사람은 처음에는 모범적인 가정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혼을 하고 다시 연기자로 돌아왔다. 이른바 신화적인 여배우들도 보통 여자들과 비슷한 고민을 하다 각기 다른 선택을 하고 전혀 다른 결과를 얻었다는 것이 드라마틱하지 않을 수 없다.

    -세 분의 현재 모습을 보면, 1970년대가 여배우들에게 준 억압과 그들이 그 억압을 뚫고 나가는 여정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두 사람은 똑똑하고 현명한 데 비해 저는 약간 우매한 거죠. (웃음) 예전에는 내가 가장 현명하게, 똑똑하게 결정했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보니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었죠. 한 사람은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하면서 살았고 한 사람은 자유분방하게 살았고 또 한 사람은 너무 여러 가지 것들에 얽매여 살았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렇지만 결국 어떻게 될지, 나중에 어떻게 바뀔지는 또 모르는 거죠.”

    “그들은 똑똑하고 나는 우매한 거죠”

    -중요한 건 유지인씨가 배우로 돌아온 게 정말 스스로 원하는 삶이었느냐 하는 거겠죠.

    “이제 틀 밖으로 나와서 보니까 정말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사는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어릴 때는 물론이고 결혼해서 예쁜 딸도 낳고, 지금은 이렇게 나와서 내가 일하러 가고 싶을 때 일하고 자고 싶을 때 실컷 자고, 누구도 나를 귀찮게 하지 않고, 아이들은 곱게 잘 자라고 있고…. 그러니까 이제는 감사할 일밖에 없죠. 이래도 되는 걸까 싶을 만큼. 그 중에서도 가장 고마운 건 역시 아이들이죠. 요즘에는 곧잘 결혼 안 한 친구들에게 ‘그래도 아이는 하나 낳으라’고 얘기할 정도라니까요.

    예전의 나 같으면 상상도 못할 얘기죠. 그렇지만 살면서 터득하게 되는 것이… 옛날에는 이해가 안되는 상황을 견딜 수 없었지만 지금은 이해하지 못 해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나이를 먹는 게 그렇게 행복할 수 없다 싶고요. 지금 내가 얼마나 충실한지, 지금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가 중요해지니까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예요. ‘뭐든지 너희들이 원하는 것, 하면서 즐거울 수 있는 것, 행복한 것을 하라’고 끊임없이 얘기하죠. 아이들이 똑똑해서 금세 알아듣더라고요.”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고 보니 영화 속 이미지와 실제 유지인씨가 많이 다르다는 느낌이 남습니다.

    “전혀 여성스럽지 않죠? 그렇지만 사실 저는 겁이 많고 연약해요. 그걸 남한테 들킬까봐 강인하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뿐이죠. 대학 진학도 하기 전에 너무 일찍 세상에 나가서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무섭고 연예계가 싫었던 거죠. 발을 완전히 담글 수도 없고 뺄 수도 없으니 양쪽에 한 발씩을 걸쳤던 셈인데, 그게 더 힘들었어요.



    탈출하고 싶었지만 결국은 돌아오잖아요. 이제 나이를 먹으니까 그런 두려움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때는 가정이라는 틀 안에서그 삶이 최고라고 생각했지만 지나치게 정체됐던 것 같아요. 나도 있으면서 다른 삶도 있었어야 하는 건데, 나를 다 버렸다는 게 너무 무모했던 거예요.”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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