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중 눈길을 끌었던 건 마지막으로 내세운 7번째 지표, 즉 영화력이었다. 여기서 영화력이란 그 나라 영화산업의 크기, 제작 편수, 관객 점유율 등을 근거로 산출한 말 그대로 영화의 힘이다. 영화력이 국력을 측정하는 지표가 된 것도 놀랄 만한 일이지만 다른 6개 분야에선 순위에 오르지 못했던 한국이 영화력에서만큼은 9위에 올랐다는 사실이 더욱더 놀라웠다.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 가운데 영화의 대외 신인도가 다른 어떤 분야보다 높게 나타난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요즘 한국은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영화 강대국인 것처럼 느껴진다.
증강된 영화력을 반영하듯 한국영화의 국제적 위상은 지난 수십 년간의 성과를 뛰어넘는 괄목상대(刮目相對)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영화는 불과 2년 사이에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히는 칸과 베니스, 그리고 베를린영화제를 석권하며 세계 영화의 중심에 접근하고 있다. 이는 1950년대 일본영화나 1980년대 중국영화에 쏟아졌던 국제적인 관심을 상기시킨다. 공교롭게도 세 영화제 모두 감독상을 수상한 것도 이채롭다. 이들 영화제가 모두 감독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걸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제무대에서 한국 감독들이 부상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또 감독의 힘은 한국영화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영화는 감독의 예술
종합예술인 영화가 전적으로 특정 개인에게 속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는 인식이 깊이 뿌리내려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한국영화가 국내외적으로 거두고 있는 빛나는 성과 역시 감독의 능력에 의지한 바가 크다. 특히 유수의 국제영화제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영화가 아닌 감독임을 상기한다면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기예적 기질이 뛰어난 한국인이 거둔 쾌거 혹은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폭발적인 잠재력이 증명된 성과 등의 수사를 동원하며 흥분한다.
하지만 이 같은 상찬(賞讚)에는 다소간 거품이 끼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대한민국의 문화적 역량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는 걸 부인하는 건 아니다. 다만 단기간에 혁신이 어려운 문화 산업의 본성을 감안할 때 한국영화의 욱일승천(旭日昇天)을 순수한 문화적 역량의 힘이라고만 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개인의 능력과 시스템의 뒷받침이 충일한 시너지가 돼 동력으로 작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감독이 지니는 위치와 중요성은 어느 정도일까?
역사적으로 감독은 늘 문제적인 존재였다. 영화감독이 문제적이라 함은 음악에서의 작곡가나 회화에서의 화가와는 다른 의미다. 세계영화사에서 창작의 주체로서의 감독 혹은 작가에 대한 논란은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화감독의 존재를 전면에 부각시킨 것은 영화의 종주국인 프랑스였다.
작가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오퇴르(auteur)는 영화감독을 다른 예술 장르에서와 같은 예술가로 추인하는 역할을 했다. 이는 1950년대 일군의 프랑스 영화인들이 소위 작가주의를 주창함으로써 가능했다. 작가주의자들에게 있어 작가는 자신만의 개성과 스타일을 영화 속에 일관되게 관철시키는 예술가를 의미했다. 작가주의는 영화감독을 단순한 이야기꾼이나 테크니션이 아니라 예술적 영감과 독창적인 스타일을 구현하는 예술가로 간주했다. 그럼으로써 영화가 기능공이 만들어내는 상품이 아니라 정교하게 세공된 예술품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출발한 작가 개념은 후일 텍스트에 작용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간과한 감상적인 노선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한 편의 영화가 태어나기까지는 감독 외에도 무수히 많은 요소들이 관여되어 있으며 따라서 모든 결과를 감독의 것으로 귀속시키는 것은 감상적인 예술지상주의라는 비판이었다. 하지만 작가주의에 대한 맹렬한 공격에도 영화 제작을 관장하는 통제자로서 감독에 대한 인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최근 들어 작가주의자들이 부여한 신적 직위가 떨어지긴 했지만 텍스트의 주체이자 최종적 책임자로서 감독의 위치는 여전히 확고하다. 우리가 영화를 감독의 예술로 이야기하는 것 또한 전통적인 작가의식의 부산물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