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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적’ 이창호 시대는 가는가

방패 대신 창검 들다 불의의 일격

  • 글: 정용진 바둑평론가·타이젬 바둑웹진 이사 sodol@tygam.co.kr

‘천하무적’ 이창호 시대는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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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 9단의 바둑을 이 정도라고 말한다면 과장일까?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들을 위해 ‘엽기 바둑해설자’로 유명한 김성룡 8단의 말을 여과 없이 적는다.

“한마디로 말해 이세돌의 바둑은 현대바둑 기술의 집산체라 할 수 있습니다. 초반 포석, 중반 전투, 종반 끝내기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출중한 실력을 가진 존재지요. 조훈현, 유창혁, 그리고 이창호의 장점을 모두 아우른, 구체적으로 말해 승부욕에서는 전신(戰神) 조훈현을, 파괴력에서는 유창혁을, 끝내기에서는 신산(神算) 이창호에 버금간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기력만 가지고 얘기하자면 바둑사에 참으로 대단했던 기사가 많다. 여기에 성취한 업적까지 보태자면 이세돌 9단은 찬란한 금자탑을 쌓은 이창호 9단이나 조훈현 9단보다 훨씬 아랫길이다. 그럼에도 이세돌 9단을 ‘대단하다’고 말하는 까닭은 이렇다. 이창호 9단보다 선배대열인 조훈현 9단이나 유창혁 9단 단 두 명을 제외하고는(이 두 사람도 궁극적으로는 이창호와의 백년전쟁에서 참패했다고 봐야 한다) 동년배나 후배기사 대열에서 그 누구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이창호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거침없이 열어젖힌 첫 번째 주자였던 것이다. 이세돌은 이창호를 향해 떠난 숱한 도전자들이 하나같이 함흥차사일 때 ‘이창호라는 실타래’를 쾌도난마(快刀亂麻)처럼 풀어 젖히고 살아 돌아온 유일한 생존자였다.

‘昌世棋’에서 드러난 이창호의 약점

바둑사에서 이창호와 이세돌을 거론할 때 2001년과 2003년, 두 번에 걸쳐 펼쳐진 LG배 세계기왕전 타이틀 매치 얘기로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창호의 첫 이름자 창(昌)과 이세돌의 세(世)를 따 ‘창세기(昌世棋)’란 신조어까지 탄생시켰던 2001년과 2003년의 LG배 결승5번기.



2001년 바둑계는 이창호라는 서슬 퍼런 칼날에 지금보다 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때만 해도 이세돌은 다크호스였을 뿐 선입마 대열에 끼일 만큼 인정받지는 못했다. 미완의 대기였다고나 할까. 그런데 예상을 뒤엎고 LG배 결승1·2국에서 이창호 9단을 연파해 파란을 일으켰다. 한 판 이기기도 어려운 이창호에게 두 판을 내리 이겼으니 바둑계가 발칵 뒤집혔을 것은 뻔한 일. 그러나 한 달 뒤 재개된 결승3·4·5국에서 이세돌은 내리 세 판을 지며 뼈아픈 대역전패를 당했다.

그렇지만 이때 이세돌은 그 나름대로 이창호에 대한 해법을 찾은 듯하다. 그것은 먼저 실리를 확보해놓은 뒤 이창호의 두터움을 치열한 전투로 격파하는 전략이었다.

‘이창호 바둑’은 강태공을 떠올리게 하는 기다림, 느긋함의 바둑이다. 정밀한 형세판단과 계산력으로 초중반보다는 후반 끝내기로 승부하는 바둑이라고 할까. 그렇기에 초중반에 눈에 띄는 우세를 잡지 못하면 대국자는 그에게 따라잡히기 일쑤다.

이창호는 세계 일인자인 만큼 모든 부분에서 골고루 강하지만 상대적으로 포석과 전투에 약한 면을 보인다. 이세돌은 바로 이 점을 집중 공략했다. 싸움이라면 ‘천부적인 파이터’ 소리를 듣는 이세돌이었고 번개처럼 빠른 수읽기는 이미 소문이 자자하던 터수였다. 이 점에서 요즘 뜨고 있는 최철한 7단 역시 마찬가지다. 이 공통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복싱으로 치면 이창호 9단은 아웃복서이다. 그런데 그를 상대로 싸우면서 탐색도 거치지 않고 초반부터 세차게 몰아붙이며 난타전을 벌이면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전투)을 끄는 게 급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특기인 계산바둑이 힘을 발휘할 여지가 줄어들게 된다.

이 점을 가장 먼저 간파한 것은 사실 조훈현 9단이었다. 숱한 사제대결에서 제자에게 일패도지(一敗塗地)하면서 터득한 대응법이었으나 이세돌이나 최철한과는 두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싸움에 관한 한 ‘전신(戰神)’으로까지 불리는 조훈현 9단이다. 특히 그의 ‘흔들기’ 수법은 태산도 요동치게 할 만큼 날카롭기 그지없다. 그렇지만 조훈현도 이미 50줄에 접어들어 체력이 예전만 못하다. 체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집중력에서 문제를 드러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훈현 9단은 계산력, 즉 끝내기 공력이 후배기사들만 못하다. 그래서 좋은 형세를 만들어놓고도 뒤에 가서 뒤집히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세돌이나 최철한은 달랐다. 바둑을 시작할 때부터 ‘타도 이창호’의 기치를 걸고 매진한 ‘이창호 세대’답게 이들은 계산이나 끝내기에 관한 한 이창호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니 뒷심 걱정은 없었다. 바로 이 점이 이창호 9단으로서는 괴로운 일이다. 게다가 무시 못 할 요인이 한 가지 더 있다.

【부담감】

이상하게도 이창호 9단은 처음 만나는 상대에게 곧잘 지고 만다. 그 상대가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무명 기사일 때 더 그렇다. 이는 그만큼 심적인 부담을 갖는다는 얘기다.

국제대회에 참가해 선배인 고바야시(小林光一) 9단이나 가토(加藤正夫), 녜웨이핑(攝衛平) 9단에게 졌을 때는 그가 아직 커가는 시기라 그럴 수 있다고 본다지만 세계 정상에 우뚝 선 뒤 2001년 후지쯔배 1회전에서 무명인 일본의 60세 노장기사 이시이(石井邦生) 9단에게 덜미를 잡힌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전쟁터의 장수에게 승패는 늘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 세계 일인자라는 명성에 크게 금가는 패점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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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용진 바둑평론가·타이젬 바둑웹진 이사 sodol@tyg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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