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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책 하고 놀자’

탐미적 문체로 쓴 빛, 소리, 냄새의 소설 ‘현의 노래’

  • 글: 장석주 문학평론가 kafkajs@hanmail.net

탐미적 문체로 쓴 빛, 소리, 냄새의 소설 ‘현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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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우륵이나 그의 제자 니문이 금(琴)에 의탁해 세상에 나아갔으나 금과 함께하는 삶의 굴곡과 음영을 그리는 데 태만하다. 그들은 소설의 중심에서 비켜서 있다. 소설의 전반부는 가야의 늙은 왕 곁에서 시중을 드는 시비(侍婢)인 아라가 초점 인물이다. 아라는 늙은 왕이 죽으면 순장될 제 운명에 거역해 궁을 빠져나와 도주한다.

소설의 전반부는 아라의 도주 동선(動線)을 따라 힘차게 굽이친다. 병 들고 노쇠해 죽음을 앞둔 왕과 쇠멸의 기미를 드러내는 가야 왕국의 꺼져가는 국운은 한데 겹쳐진다. 국가에 불복종하며 제 생을 저 낯선 시간 속으로 밀고 나아가는 아라는 생기로 빛난다. 그 생기는 산 자를 죽은 자와 함께 매장(순장)하는 전근대적 국가의 야만성에 맞서 산 자의 본능에 내장된 강령의 신성한 굳건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아라는 우륵과 니문 일행과 우연히 만나 떠 있는 제 삶을 땅의 중력으로 끌어당겨 정착하려고 할 즈음, 돌연 붙잡혀 병들어 죽은 태자와 함께 순장됨으로써 소설 무대에서 퇴장한다.

소설의 후반부를 잇는 것은 신라 장수 이사부이다. 이사부는 군대와 병장기에 의존해 가야의 여러 고을을 쓰러뜨리고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쳐 신라의 영토를 넓혀간다. 많은 세월을 전장에서 보내지만 이사부는 우주의 섭리와 자연의 변화 속에서 나고 죽는 일을 반복하는 생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전장의 철학자다.

하지만 가야에서 신라로 귀순하는 악사 우륵은 살리되, 같은 처지에 있는 대장장이 야로 부자(父子)는 부하를 시켜 칼로 베어버리는 대목에서 칼의 진리에 제 생을 의탁하는 무신의 비정함이 드러난다. 왕이 중심인 국가에서 전장은 변방이며, 지리적 이격(離隔)의 소외감에 순응하며 전장에서 늙는 이사부는 운명적으로 변방의 인물이다. 이사부는 기질적으로 변방의 운명에 이끌리는 소설가의 편애와 지지를 받는다. 앞선 소설에서 그려낸 이순신의 현신이며, 그 변주라 할 만하다.



서사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끊겨 있다. 이 불연속적 단절을 가야의 늙은 악사인 우륵과 니문, 혹은 가야의 풍부한 쇠로 병장기를 제조해서 이사부의 군사를 돕는 야로 부자의 이야기들이 가까스로 접합하며 이어간다.

어쩌면 ‘현의 노래’를 이끌어가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빛과 소리와 냄새인 것처럼 보인다. 빛과 소리와 냄새들은 그것들의 본디 있던 자리에서 질펀하게 번져나와 사람의 감각 기관에 비벼대며 이야기의 현전(現前)을 이끌고, 서사에 실감과 부피를 불어넣는다. 김훈은 이렇게 쓴다.

“비화의 날숨에서는 자두 냄새가 났다. 잠에서 깨어나는 아침에, 비화의 입속에서는 단감 냄새가 났고, 잠을 맞는 저녁에는 오이 냄새가 났다. 귀 밑 목덜미에서는 잎파랑이 냄새가 났고 도톰한 살로 접히는 겨드랑이에서는 삭은 젖 냄새가 났다. 바람이 맑은 가을날, 들에서 돌아온 비화의 머리카락에서는 햇볕 냄새가 났고 비 오는 날에는 젖은 풀 냄새가 났다. 비화의 가랑이 사이에서는 비린내가 났는데, 그 냄새는 초승에는 멀어서 희미했고 상현에는 가까워지면서 맑았고 보름에는 뚜렷하게 진했고 그믐이 가까우면 다시 맑고 멀어졌다.”

우륵의 처인 비화는 냄새의 생생함 속에서 살과 피를 얻는다. 소리가 그러하듯 냄새 역시 한번 사라지면 가뭇없다는 점에서 생의 덧없음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덧없는 것에 실감을 부여하려는 소설가의 몸짓은 허망하다. 그 허망함을 글로써 증명하려는 게 소설의 운명이다.

김훈의 소설은 대체적으로 미학적 소명이 서사의 규범에 우선한다. ‘현의 노래’는 인물과 인물 사이에 인과론적인 핍진성이 희박하고,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의 종속과 대등절의 헐겁고 느슨한 이음이 독백의 넘침으로 읽힌다. 인물과 인물 사이, 혹은 이야기와 이야기의 단절된 틈으로 잠언들이 흘러간다. 이를테면 이런 잠언. “소리는 제가끔의 길이 있다. 늘 새로움으로 덧없는 것이고, 덧없음으로 늘 새롭다.”



김훈 소설이 드러내 보이는 서사 구조의 불균형함에도 잘 읽히는 것은 잠언들과 문체에 구현된 소설가의 도저한 미적 자의식이 얼개의 성김을 넘치게 메우는 까닭이다. 독자들은 서사구조의 성김에 투덜거리기 이전에 김훈 문체의 놀라운 탐미성과 활력으로 보상받는다.

※‘책벌레 최성일의 논쟁적 책읽기’는 필자의 사정으로 중단하고, 이번 달부터 시인·문학평론가·소설가인 장석주씨의 칼럼을 시작합니다(편집자).

신동아 200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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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장석주 문학평론가 kafka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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