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때는 해방, 미군정 수립, 대한민국 건국과 같은 역사적 사건이 이어지던 격동의 시기였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학교 운동장에서 이승만, 여운형 등 정치인들이 연설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라디오에서도 정치 연설이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아버지께 “왜 저렇게 열심히 연설을 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저분들은 나라를 세우는 데 있어서 어떻게 하면 훌륭한 나라를 만들 수 있는지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시곤 했다. 나라가 있어야 내가 있고 나라가 부강해야 자손만대가 떳떳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 아버지의 주장이었다.
1948년 역사상 처음으로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됐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선거유세장을 따라다니곤 했다. 구름처럼 모여든 청중 앞에서 우렁찬 목소리로 연설하는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나도 저렇게 멋지게 연설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나 남모르게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일단 지식을 쌓기 위해서는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목청을 단련하기 위해 남산 꼭대기에 올라 소리도 질러보았다. 친구들과 운동할 때도 일부러 큰소리로 ‘빨리 던져’ 하고 외쳤다. 훈련을 거듭할수록 내 목소리는 크고 힘있게 변모해갔다. 그런 다음엔 내 자신이 머리를 짜내서 감동적인 글을 쓰려고 노력했다.
이런 준비를 거쳐 나는 각종 웅변대회에 출전하기 시작했다. 경기중·고교 시절에도 웅변대회 출전은 계속 이어져 각종 대회에서 1등상을 12번이나 거머쥘 수 있었다. 당시에는 웅변대회가 아주 유행이었는데 자그마한 체구에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웅변하는 내 모습을 보고 친구들이 ‘사과 반쪽’ 또는 ‘7대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아버지는 회사일이 바쁘셔서 대회장에는 직접 나오지 못하셨지만, 전국 청년학생웅변대회 서울시 대표로 출마해 상을 받아오자 누구보다도 기뻐하셨다. 축하주를 기울이며 내가 연설한 내용과 인생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던 기억이 난다. 나와 관련한 기사가 신문, 잡지에 실릴 때마다 어머니와 함께 스크랩을 해두는 일도 잊지 않으셨다. 그 덕분에 어린시절에 활동한 사진이나 자료들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경기중 2학년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중앙통신사 부사장이었던 아버지는 가족들도 미처 챙기지 못한 채 급하게 인민군을 피해 부산으로 내려가셨다. 그후 유엔군이 인천 상륙에 성공하여 서울을 탈환할 때까지 아버지와의 연락은 끊어졌다. 말로만 듣던 인공기가 거리에 휘날리고 총을 든 북한군이 서울 시내를 누비고 다녔다. 학교에는 휴교조치가 내려졌다. 나는 졸지에 어머니와 6명의 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소년가장이 되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장남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솟았다.
뚝섬강변의 얼음냉차 장사
그러나 공산 치하에서 우리 가족이 먹고 살 길은 막막했다. 이때 시작한 것이 뚝섬강변에서의 얼음냉차 장사였다. 그해 여름 내내 나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동대문으로 달려갔다. 얼음가게에서 얼음을 사다가 등에 지고 전차(일명 기동차)를 타고 뚝섬으로 갔다. 무더운 날씨에 등줄기를 타고 얼음이 줄줄 녹아내렸지만 참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동생 창원과 함께 얼음을 썰고 설탕을 타서 냉차를 팔았다. 웅변대회에서 갈고 닦은 목청으로 ‘시원한 얼음냉차’를 하루 종일 외쳤다. 저녁에 어머니께 돈을 갖다 드릴 때는 내 자신이 한없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9·28 서울수복 이후에도 아버지는 계속 부산에서 근무하셨다. 1951년 1·4 후퇴 때는 가족 모두가 대구로 피난을 갔다. 아버지는 틈날 때마다 부산에서 대구로 와서 우리 가족을 돌봐주셨다. 그나마 아버지의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에 천막 피난학교라도 마음놓고 다닐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공부와 운동은 나의 모든 시름을 잊게 해주는 정신적 육체적 해방구였다. 그렇게 피난중에도 학교생활에 몰두한 결과 나는 대구·서울 피난 연합중학교 학생회장과 학도호국단 대대장에 선출되었다. 덕분에 우리 학교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내려온 피난학교 전체의 학생회 일을 맡아보면서 경복고, 서울고, 중앙고, 양정고, 이화여고, 경기여고, 숙명여고 등에 다니는 친구들을 폭넓게 사귈 수 있었다. 지금도 그때 사귄 친구들과 가끔 만나서 옛 추억을 이야기하곤 한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온 뒤에도 아버지는 한동안 부산에 계셨다. 게다가 전쟁 직후 온 나라가 굶주림에 허덕일 때라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대구 피난 시절에 대구매일신문을 팔았던 경험을 되살려 경향신문사를 찾아가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신문배달을 할 때는 나름대로 기지를 발휘해서 도소매를 겸했다. 신문사 앞에서 신문을 받아 가판을 하는 학생들에게는 10~30부씩 더 나눠주기도 했는데, 아무리 추운 겨울밤이라도 마지막 한 부가 팔릴 때까지는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다 팔아야 이익이 남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하루하루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나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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