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앞서 8월 말 ‘신동아’는 국내 정보기관과 대북 정보통을 통해 북한에서 유포되고 있다는 또 다른 반북 유인물을 입수했다. ‘룡천역 폭발사건은 김정일 자작극’이라는 제목으로 A4용지 10쪽 분량이었다.
고위층 출신 탈북자와 정보기관 관계자에게 유인물 내용의 검토를 의뢰한 결과, 북한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답변을 들었다. 북한에서 사용하지 않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고, 문장형태도 북한보다는 오히려 남한의 것에 가깝다는 설명이었다.
그런데 ‘신동아’가 최근 입수한 ‘김정일, 김일성을 죽이다!’라는 제목의 유인물은 앞의 두 유인물과는 내용과 형식이 사뭇 다르다. 컴퓨터나 타자기로 작성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 직접 쓴 필사본이고, 문장이나 단어, 문장부호 등이 전형적인 북한식인 것.
한 대북전문가는 “문장이나 단어가 완벽한 북한식이고, 내용과 문장력, 선택한 어휘 등으로 미뤄보건대 북한 내부 사정에 정통한 지식인의 솜씨로 보인다. 웬만한 지위에 있는 인물이 아니고는 북한 사정을 이 정도로 알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북한 정보기관 출신의 한 탈북자는 “문체가 매끄러울 뿐 아니라 북한 맞춤법상 오·탈자가 전혀 없다. 또한 이 글은 하루아침에 쓴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고심하고 수정한 끝에 나온 작품일 것”이라며 “작성된 시점이 7월인데, 7월 초에 평양에서 벌어진 상황을 자세히 기술한 것을 보면 북한 내부에서 작성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1993년에도 평양에서 정권을 비방하는 유인물이 살포돼 보위부에 한바탕 비상이 걸린 적이 있다. 당시 유인물도 필사본이었는데, 보위부는 필체를 조사하기 위해 모든 인민의 필적을 취합하려 했으나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사건도 유야무야됐다고 한다.
통제가 제아무리 심한 북한 사회라지만 불법 유인물을 제작, 유포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
北 고위층 아니면 알기 힘든 내용
고위층 출신 탈북인사도 이 유인물에 대해 신뢰할 만하다는 평가를 내놨다. 이 탈북인사는 국내에 몇 안 되는 최고위급 탈북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유인물은 북한식 문장과 문장부호로 작성됐고, 모든 서술(내용)이 사실과 대부분 일치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문장부호의 경우 ‘?!’는 북한에서만 사용하는 것으로 순 의문이 아닌 감탄이나 비꼬는 뉘앙스를 포함할 때 쓰고, ‘《 》’는 김일성의 교시나 말을 인용할 때 반드시 붙이는 부호인데, 이 유인물에서는 단 한 번도 사용례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 유인물의 내용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김일성 사망 당시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죽음과 관련해 어떤 언급도 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때문에 고위층 인사들도 대부분 북한 정권에서 공개적으로 발표한 내용 이상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당시 해외에 있던 나는 출장 온 북한 상층부 인사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해줘 김일성의 죽음에 의구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때 들은 내용이 이 유인물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이 탈북인사는 특히 유인물 내용 가운데 ‘김일성이 심장발작으로 쓰러진 당시 기상악화로 의료진을 태운 직항기가 회항했고, 산사태로 구급차가 되돌아갔다’는 부분을 지적했다. 그는 “여러 차례 들은 이야기인데 정말 어이없다. 김일성이 죽게 생겼는데 기상악화나 산사태를 이유로 의료진이 되돌아갔다는 게 말이 되느냐. 누구라도 당연히 목숨을 걸고 김일성에게 갔어야 했다”며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직항기 회항이나 구급차를 되돌리라고 지시할 수 있는 사람은 김정일밖에 없다”고 유인물에서 제기한 것과 같은 의문을 제기했다.
이 탈북인사는 필사본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과거엔 누구의 글씨인지 확인이 가능했고, 복사기도 마음대로 쓰지 못했기 때문에 불법 유인물을 제작, 유포하다가 적발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며 “그러나 19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완벽한 통제가 어려워지고, 내부 불만세력이 커지면서 소규모지만 상층부와 연결된 ‘지하삐라조직’이 활동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1980년 중반 평양건설대 교원이 ‘김일성에게 보내는 10가지 충고’라는 제목의 글을 중앙당에 투고했다가 적발된 적이 있다. 당시 이 교원은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글을 써 필체를 조작했지만 당국이 필적을 끈질기게 추적해 결국 발각됐다.
1990년 초반에는 평성이과대학 학생 10여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삐라조직’이 적발되기도 했다. 당시 북한에는 비슷한 규모의 몇몇 삐라조직이 있었지만 당국의 감시와 통제가 극심해 조직적이고 정상적인 활동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최근 북한의 내부 감시와 통제기능이 약해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최근 북한은 형법을 개정해 불법유인물 관련 조항을 신설했다. ‘사회주의 문화를 침해한 범죄’조항으로 반국가 목적이 없어도 공화국을 반대하는 방송 청취 및 유인물 수집, 보관, 유포시 최하 2년 이하의 노동단련형, 최고 5년 이하 노동교화형으로 처벌케 한 것.
이 조항이 만들어진 것은 미국 상·하 양원에서 북한인권법이 만장일치로 통과된 이후 미국의 대북방송이 강화된 때문이기도 하지만, 북한 내부에 각종 불법유인물이 난무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또 북한 정권이 그만큼 긴장하고 있다는 방증인 셈이다.
‘신동아’는 여러 정황상 문제의 유인물이 현재 북한에서 유통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고, 내용의 진위를 명확히 확인할 수는 없지만 상당 부분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해 전문을 싣기로 했다. 다음은 유인물 전문이다.
◇ 김정일, 김일성을 죽이다!
2004년 7월8일, 평양체육관에서는 김정일이 참석한 가운데 김일성 ‘서거’ 10돐 《중앙추모대회》가 진행되였다. 김정일은 김영남이 장문의 추모사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시인 김만영의 표현대로 주석단 한복판에 ‘무겁게’ 앉아있었다. 텔레비죤에 비친 ‘위대한 령도자’의 억지스러운 모습은 엄숙하다 못해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때 김정일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들(김정일)에게 공화국의 모든 권력을 세습해주고도 부족한 것만 같아 온나라 전체 인민에게 《나를 받들어 모셔왔듯이 김정일 조직비서를 잘 받들어 모시라》고 죽는 날까지 훈계하였으며, 1992년 2월에는 《광명성 찬가》라는 송시까지 자기에게 지어바쳤던 애비 김일성의 하늘같은 사랑을 회고했을까?!
아니면 80고령의 김일성에게 ‘우리인민의 행복상’과 ‘남조선혁명의 승리’를 끝없이 거짓보고를 해오다가 그것이 드러나게 되자 어쩔 수 없이 김일성을 죽이게 된 자신의 죄악을 참회했을까?!
리유야 어떻게 되였든지 간에, 1994년 김일성이 죽을 당시 중앙과 지방의 적지 않은 간부들과 각 분야 지식인들이 직감한 것과 같이 김일성의 죽음은 김정일과 깊은 련관이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김일성은 김정일에 의해 죽었다.
김정일이 김일성을 죽였다는 근거의 첫째는 김일성이 1994년 7월7일까지 ‘만수무강’할 정도로 매우 건강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80고령 로인의 생사는 장담할 수 없지만 ‘온나라 인민의 행복’인 김일성의 경우는 달랐다. 당시 텔레비죤에도 방영되였지만, 김일성은 묘향산특각에서 죽기 직전인 1994년 7월5일 재미교포 손원태를 접견했었다. 그때 김일성은 손원태와 손을 잡고 산책을 하였는데, 손원태는 김일성의 손에서 건강한 사람의 따스한 체온을 느끼고 《주석님의 손이 따스한 것을 보니 아주 건강하신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했고, 김일성은 이에 대해 《나는 김정일 조직비서가 잘 보살펴주고 있기 때문에 지금 아주 건강합니다. 김정일 조직비서는 정말 효자입니다. 나는 한 100살은 넘어 살 것 같습니다.》라고 호언장담하였다.
김일성은 1994년 7월7일 오전에도 묘향산특각에서 시종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짓고 ‘인민생활향상을 위한 경제부문 일군회의’를 지도하는 등 정열적인 활동을 벌렸다.(조선중앙텔레비죤에 방영) 또 그 시기에 김일성은 남조선괴뢰도당인 김영삼을 평양에 끌어다놓고 무릎을 꿇어앉힐 희열에 도취되여 있었다.
그런 김일성이 7월8일 새벽 2시에 《심근경색으로 인한 심장발작》(당시 조선중앙통신 대외공포보도)으로 급사하였다. 이것은 누가 김일성에게 고의적인 엄청난 충격을 가하지 않는 한 거의 불가능한 비상사고였다.
사실 그 당시 김일성의 급작스러운 죽음을 두고 중앙기관의 적지 않은 일군들은 암암리에 《김일성이 갑자기 대노》해서 심장발작을 일으켰다고들 말하였다.
그러면 누가 ‘지도자동지의 지극한 효성’에, ‘인민의 행복’에 도취해있던 ‘인민의 어버이’ 김일성에게 야밤삼경에 심장발작으로 죽을 정도의 충격을 주었겠는가?!
2004년 7월8일 북한 평양체육관에서 열린 김일성 주석 사망 10주기 중앙추모대회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가운데) 등 주석단 참석자들이 묵념하고 있다.
그 외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직책이 높은 사람이라 해도 김정일의 직접적인 승인이 없이는 한밤중은 물론 대낮에도 김일성이 있는 곳에 마음대로 찾아들어갈수 없으며, 전화도 절대로 걸수 없다. 더구나 김정일이 《수령님께서 늘 기쁨과 만족속에서 말년을 보내도록 해드려야 한다》고 하면서 전당과 온사회에 《수령님께 심려를 끼쳐드릴 수 있는 보고는 그 어떤것도 올리지 못하도록》 엄격한 규율을 세워놓았는데, 누가 감히 ‘위대한 령도자’의 지상의 명령을 어기고 야밤삼경에 김일성을 대노시켜 죽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김일성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철두철미 김정일과 직결되여 있다. 즉 김정일이 가장 음모적인 방법으로 ‘만고의 빨찌산’이라고 자처하던 김일성조차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주어 그를 죽게 만들었던 것이다.
김정일이 김일성을 죽였다는 근거의 둘째는 ‘세상에 둘도 없는 지극한 효자’(김일성 교시)인 김정일의 애비 김일성이 구급치료조차 변변히 받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김일성이 급사할 당시, 모든 강연제강들에 소개되였던 내용들을 하나하나 다시 되짚어보자!
김일성이 심장발작을 일으켰을 당시 그의 곁에는 주치의사가 한명밖에 없었다는 것, 그래서 김정일이 긴급명령을 내려 강력한 의료진과 의약품을 실은 직승기를 급히 묘향산특각으로 급파했는데 한치 앞도 가려볼수 없는 기상조건으로 인해서 되돌아 왔다는 것, 그래서 또 김정일이 륙로로 그것들을 실어보냈는데 이번에는 산사태로 길이 막혀서(1시간 정도 걸으면 도달할수 있는 거리를) 되돌아 왔다는 것-이것이 그 당시 김일성을 살려내지 못한 리유들이라는 것이였다.
김정일은 1992년 4월17일 다음과 같이 력설하였다.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을 모신 끝없는 영광과 행복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수령님을 해와 달이 다하도록 충성과 효성을 다해 높이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김정일 선집》 제13권 51p)
김정일의 력설에 비추어볼때 김일성이 구급치료 한번 변변히 받지 못하고 급사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또 ‘세상에 둘도 없는 지극한 효자’가 ‘위대한 지도자’로 군림해있는 우리나라에서 김일성 사망당시 그의 곁에 부차적인 이비과 주치의사 한 사람만 딸랑 있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리고 좌표에 의해 리착륙한다는 김일성의 제1호 직승기가 《눈을 감고도 찾을수 있는》 묘향산특각을 찾지 못해서 되돌아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마지막으로 묘향산특각 가까이에 호위국부대들과 당시 지하갱도공사에 동원된 인민군 공병부대가 있었는데 왜 그들을 불러서 구급차를 통과시킬수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가?! 이것이 과연 《수령님의 안녕과 만수무강은 우리인민의 최대의 의무이며, 의리》라고 력설하면서 온나라 인민들을 달달 볶아댄 김정일의 평시처사와 맞는 것인가?!
사실 1994년 7월8일 김일성 급사당시 그의 곁에 새로 임명된 젊은 이비과 담당주치의사만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봉화진료소》 의사들조차도 《도저히 납득할수 없는 일》이라고들 했다.
김정일이 김일성의 안녕과 만수무강을 위해 바친 ‘지극한 효성’에 대한 이야기들은 모든 학습제강, 강연제강, 출판보도물들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선전되였다.
김정일이 《수령님의 안녕은 조국의 운명이며 우리인민의 운명》이라고 하면서 세계 일등급의 만수무강연구소를 내오고 최상급의 의료진이 김일성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수행하면서 순간도 놓치지 않고 그의 건강을 돌보도록 조치한 이야기. 김정일이 《수령님의 안녕과 만수무강에 관해서는 단 한치의 착오도, 실수도 없어야 한다》고 력설하면서 어느 경기장 주석단에 비칠 직사광선까지 념려하여 국제관계를 무시하고 주석단 위치를 옮기도록 한 이야기. 김정일이 김일성의 시력을 념려하여 그에게 올리는 보고서의 활자체와 크기까지도 세세히 규정해주고, 김일성이 회의를 지도하면서 자주 《앉았다, 일어섰다》하는 것을 념려하여 전자지시봉을 급히 수입해서 드린 이야기 등등… 그런 김정일이 김일성 사망당시에는 뭘 했단 말인가.
더구나 묘향산특각은 김일성의 특각중에서도 가장 큰 특각으로서 그곳에는 현대적인 큰 병원에만 있는 모든 최신 치료설비들이 그하게 갖추어져 있다고 《봉화진료소》 소장 리락빈이 간부강연회에까지 출연해서 자랑을 했었다. 그런 곳에 하루 이틀도 아니고 6월 말부터 나가있는 김일성 곁에 인체에서 가장 중요한 심장담당 주치의사가 없었다는 것은 김정일의 직접적인 조치가 아니고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우의 모든 정황을 분석해볼때 김정일은 야밤삼경에 음모적인 방법으로 김일성의 화를 돋구어 심장발작을 일으키게 하고 인의적으로 구급치료를 지연시킴으로써 그를 죽게 만들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김정일이 김일성을 죽였다는 근거의 셋째는 1994년 7월8일 새벽 김일성의 비명급사로 ‘우리인민과 인류를 깊은 슬픔’에 잠기게 하고 ‘주체혁명위업에 커다란 손실’을 끼친 관계자들에 대한 어떠한 처벌도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김일성의 죽음이 공포된 후 당, 정권기관, 군대, 인민보건성은 물론이고 많은 중앙기관 간부들과 각분야의 지식인들은 애도분위기속에서도 그 죽음에 책임있는 ‘관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처벌과 숙청’ 바람이 틀림없이 불어닥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김일성이 누구인가?! 온나라 전체인민이 충성과 효성을 다해 ‘해와 달이 다하도록’ 하느님처럼 받들고 만수무강시켜야 할 ‘주체혁명위업의 개척자’이며, ‘사회주의의 시조’이며, ‘혁명의 태양’이며, ‘인류해방의 구성’이며,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며, ‘인민의 위대한 어버이’가 아닌가!
김정일은 또 어떤 자인가?! 김일성과 자신에 대해서는 안녕과 신변안전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불순한 언행을 한 사람까지도 ‘반당반혁명분자’의 감투를 씌워 무자비하게 처형하는 희대의 악한이 아닌가! 어느 항일투사가 사석에서 《김일성이 8.15 해방당시 쏘련군 대위로 개선했다》는 말을 했다고 해서 본인은 물론이고 온가족까지도 《정치범수용소》에 종신토록 구금하도록 한 것도 김정일이다. 김일성의 건강에 해가 된다면서 1980년대 초부터 김일성과 그 부인 김성애를 전혀 동침을 못하도록 갈라놓은것도 바로 김정일이다.
김일성사망과 관련해서 《봉화진료소》 의사들이 말한데 의하면 당시 김일성이 심장발작을 일으켰을때 곁에 있던 이비과 주치의사는 구급치료는 고사하고 그 자리에서 거품을 물고 까무라쳤었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김정일이 무서웠으면 그랬겠는가?!
그런 관계로 김일성 사망당시 간부들은 물론, 일반주민들까지도 《기상조건이 나쁘다》고 해서 죽어가는 김일성을 그냥 두고 되돌아온 직승기 비행사들, 돌사태가 나서 되돌아왔다는 구급차 의사들과 그 관련일군들은 물론이고 김일성 곁에 이비과 주치의사 한 사람만 딸랑 있도록 조치한 《봉화진료소》 소장 리락빈 등 이와 관련한 모든 자들을 대역죄로 총살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20여만의 무고한 주민들을 정치범으로 몰아 처형 또는 《정치범수용소》에 넣고 짐승이하의 멸시와 고역을 들씌우면서 그 3대까지 멸족시키고 있는 김정일의 잔인한 행적에도 꼭 맞는 짓거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령님(김일성)을 위해서는 살아도 영광, 죽어도 영광’인 ‘김정일 조국’에서 조건타발, 환경타발을 하면서 김정일의 지상의 명령을 무조건 철저히 집행하지 않은 관련자들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그 길이 죽어가는 김일성을 살리는 가장 ‘영광스러운’ 길일진데 무엇을 더 따지겠는가?! 그들은 목적지에 가지 못하게 되면 스스로 목숨을 버려야 했을 것이다. 서해바다에서 폭풍에 배가 침몰할 때 살아있는 김일성도 아닌, 그의 초상화를 몸에 품고 날바다에 빠져죽은 사람까지도 ‘영생’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그들의 처사는 그 어떤 리유로도 도저히 용서될 수 없는 ‘대역죄’였다.
그래서 김일성 사망당시 평양시민들은 《봉화진료소》에 돌을 마구 던져 병원의 유리창들을 다 깨버렸었고 리락빈은 맞아죽을까봐 무서워서 출근도 못하였다.
하지만 김정일은 잔인무도한 그답지 않게 《봉화진료소》 리락빈 소장은 죄가 없다는 상식밖의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주체혁명위업에 만회할 수 없는 손실을 끼친’ 김일성의 뜻밖의 급사에 대한 책임을 그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다.
오히려 김정일은 죽은 김일성의 피가 채 식기도전인 8월 중순 《모든 인민들이 김일성에 대한 슬픔을 혁명적 락관으로 전환하여 명절같은 분위기로 살며 일할데 대한》 지시를 내렸다. 김정일은 죽은 김일성을 억지로 ‘잊지 못해’(물론 김정일의 지시로!) 일도 안하고 마냥 울기만 하고 있는 인민들에 대해 주체할 수 없는 질투를 느꼈던 것이다.
그 당시 김정일의 이런 ‘공화국 상식’에 벗어난 처사로해서 중앙기관은 물론 각계층 인민들, 지어 고등중학교 학생들까지도 뒤에서 《김정일이 김일성을 죽였을 것》이라고 《쉬! 쉬!》하면서 말들을 하였다.
김일성의 사망과 관련해서 중앙당 관계부문 일군들과 호위국, 국가안전보위부 일군들만 알고 있는 충격적인 사건 하나를 더 이야기하련다.
김일성이 죽기 전인 1994년 5월초 어느날 김일성은 평양시 모란봉구역의 호위총국을 현지지도하게 되여있었다. 김일성의 현지도착시간을 앞두고 의례히 호위국청사구내에 대한 3차에 걸친 대대적인 검색이 진행되였는데 1차, 2차 검색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던 폭발물이 김일성 도착직전에 진행한 제3차 검색시에 발견되였다. 결국 김일성은 호위국청사로 향하던 도중 급보를 받고 되돌아갔다.
그런데 김일성에 대한 이런 엄중한 테로행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호위국내에서는 그 누구도 문책을 당하지 않았다. 그 죄는 고스란히 호위국 청사주변의 고층아빠트에서 살고 있던 재일동포들에게로 돌아갔다. 사실 그들은 북새거리 건설당시 막대한 일본 돈을 김정일에게 바치고 그 아빠트에 들어 살게 된 사람들이였다. 김정일은 그런 재일귀국동포들에게 모든 혐의를 뒤집어씌워 하루아침에 광복거리에 있는 호위국아빠트에 내몰고 그곳에서 살던 호위국 가족들은 재일귀국동포들이 살던 아빠트에 끌어들이도록 조치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김일성에 대한 암살음모가 이미 김일성이 급사하기 몇 달전부터 김일성의 가장 가까이에서 암암리에 준비되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김정일은 이미 70년대에 《충신도 곁에 있고 간신도 곁에 있다》는 ‘명언’같지도 않는 명언을 즐겨쓰면서 ‘음모군, 간신배’들을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고 력설을 해왔는데, 김일성은 ‘애석하게도’ 그 자신이 숨이 넘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칭송하던 김정일이라는 ‘효자’의 손에 죽은 것이다.
《민심은 천심》이다! 김일성이 죽은직후 절대다수의 인민들이 《김정일이가 김일성을 죽였다》고 직감했던 사실은 바로 그 천심의 예고였던 것이다.
그러면 왜 김정일이 김일성을 죽였겠는가. 김정일이 김일성을 죽이지 않으면 안되였던 리유는 우선 그가 인민생활에 대해 김일성에게 장기간에 걸쳐 엄청난 거짓보고를 했기 때문이였다.
김정일은 그 자신이 정치를 잘못해서 1980년초부터 인민경제가 헤어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1989년부터는 지방인민들에게 여러달 째 식량배급을 주지 못해 주민들이 굶어죽는 사태가 속출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 《수령님께 심려를 끼쳐드리면 안된다》고 하면서 철저히 김일성에게 보고하지 못하도록 조치하였다.
김정일의 거짓보고 덕에 김일성은 죽기 직전까지 우리인민이 ‘수령님의 은덕으로 기쁨과 행복만을 누리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식석상에 나올 때마다 《김정일 조직비서가 모든 국사를 맡아서 아주 잘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아무 근심걱정도 없다》고 듣기에도 거북한 자랑을 계속 해댔다.
그런 김일성이 1994년 7월초 묘향산특각에 머무르던 어느날 저녁 차를 타고 향산군 일대를 돌아보다가 묘향산 일대 지하갱도건설에 동원된 인민군 군인들이 다해진 군복을 걸치고 길게 늘어져서 무질서하게 주둔지로 돌아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였다. 그날 밤 김일성은 수행부관들에게 그 광경에 대해 《어떤 군인은 상의를 입지 않고, 또 어떤 군인은 바지를 벗어던지고, 삽자루를 질질 끌며 길게 늘어져가는 군인들의 모습이 꼭 거지떼 같았다》고 말했다.
그날 이후 김일성은 ‘우리인민의 행복한 생활’에 대해 직접 료해하기 위해 김정일과 토의도 없이 자기의 수행부관들을 ‘암행어사’격으로 평안북도와 함경도 일대에 파견하였다. 그들은 1994년 7월7일 오후에야 묘향산특각으로 돌아왔는데, 그들이 가져온 기막힌 소식들은 김일성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 당시 김일성의 놀라움과 책임추궁은 7일 오후에 진행되였던 경제부문 일군회의에서 한 그의 ‘교시’들에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그때 김일성은 쌀이 없어서 인민군 군인들에게 통강냉이를 삶아서 먹이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는 《나는 빨찌산 때에도 대원들에게 통강냉이를 먹이지 않았다. 우리는 그 어려운속에서도 통강냉이를 꼭 갈아서 강냉이밥을 만들어 대원들에게 먹였다.》고 추궁하였으며, 지방 인민들이 식량배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지방 인민들이 여러달째 식량공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데 그것이 사실인가?! 나는 믿지 못하겠으니 다시 구체적으로 료해하라》고 다그쳐댔다. 그리고 천이 없어서 인민군 군인들에게 군복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고 있는 실태를 보고받고는 회의에 참가한 경공업담당 부총리 김복신을 불러세우고 《무슨 대책이 없는가?》고 안타깝게 물어보았다.
김정일 같은 것을 믿고 《국내사업은 다 그에게 맡기고 나는 대외사업만 하면서 조직비서를 돕겠다》고 했던 김일성은 그때에야 비로소 자기가 김정일에게 속히우고 있었다는 것을 다소나마 알아차렸으며, 그것을 간파한 김정일은 그런 그에게 7월7일 밤 다시한번 큰 충격을 가하여 심장발작을 일으키게 하였다.
김정일이 김일성을 죽이지 않으면 안되었던 다른 하나의 리유는 ‘남조선혁명의 승승장구’에 대한 김정일의 기막힌 거짓말 때문이였다.
우의 문제와 관련해서 김일성 사후 모든 강연들에서 선전되였던 교양자료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김일성은 급사하기 전에 8월초 서울에서 진행하게 되여있는 북남최고위급회담 준비 때문에 기쁨속에서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날 김일성은 김정일에게 《서울에 가게 되면 서울시민들에게 무슨 말을 먼저 하면 좋겠는가?》하고 물었다. 이에 대해 김정일은 《수령님, 남조선 인민들은 지금 수령님께서 서울에 개선하시기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수령님께서 서울에 나가시면 남조선 인민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 것입니다. 그때 수령님께서는 ‘백두산호랑이가 서울에 왔다!’고 선포하십시오. 그러면 통일은 다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말을 했다. 김일성은 김정일의 ‘수령님의 위대성에 의한 남조선혁명의 승승장구’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김정일은 이렇게 제 아버지를 철저히 속였다.
1989년 평양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남조선 전대협대표로 참가한 림수경을 담당했던 중앙당 대남사업부 일군은 언젠가 사석에서 《지금 우리인민들이 림수경이 온 것을 두고 남조선 인민들이 한결같이 수령님을 흠모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림수경만 보더라도 여기 와서 ‘통일해야 한다’는 말만 했지, 체제찬양이나 수령찬양 발언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조선중앙통신사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림수경이 평양에 온 것에 대해 남조선의 대다수 인민들은 《철없는 아이의 철없는 행동》이라고 비난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 남조선 인민들은 김일성을 흠모하는 것이 아니라, 6.25 동족상잔의 원흉으로 확고히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김정일에 대해서는 제 애비보다 더 지독한 독재자라고 규탄하고 있다.
최근 대남관계부문 일군들 속에서 나온 말에 의하면, 남조선 일각에서는 김정일의 서울방문설에 대해 《만일 김정일이 서울에 오면 그를 체포해서 재판에 넘겨야 한다》는 식으로 준렬히 규탄하고 있다고 한다. 김정일이 그런 남조선에 대해, 북남최고위급회담이 코앞에 다가온 마당에 엄청난 거짓말을 했으니 김일성을 살려둘 수 있었겠는가.
김정일은 ‘충신, 효자’ 행세를 하면서 김일성을 《귀머거리에 소경》으로 만들고, 인민생활을 도탄에 빠뜨리고, ‘조국통일의 구성’이 되려고 한 김일성의 ‘평생념원’을 우롱한 대역죄를 회피하기 위해, 자신을 낳아 키워주고 나라의 모든 권력과 부를 대물림해주고, 팔십평생 온갖 기만술책과 철권통치로 노예처럼 부려먹은 우리인민까지도 아들(김정일)에게 고스란히 물려준 김일성을 암살하였던 것이다.
《불나비는 불에 타죽는 법》이다. 력사는 권력과 야망을 위해 애비를 살해한 놈 역시 그 더러운 피를 물려받은 아들의 손에 죽게 된다는 허다한 사례들을 기록하고 있다. 아니! 독재체제 유지를 위해 수백만 인민들을 굶겨죽이고, 룡천역 폭발사고를 조작하여 무고한 주민들을 대량 폭파시킨 김정일같은 살인악당은 제 아들의 손에 죽기전에 인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같은 놈이다. 아들의 손에 죽은 김일성은 물론 김정일도 더 이상 우리와 한 하늘을 이고 살수 없는 우리 인민의 불구대천의 원쑤이다. 앞으로 김정일이 인민의 재판을 받게 되는 날, 우리인민은 그가 저지른 모든 범죄행위들과 함께, 김일성을 살해한 죄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게 될 것이다.
김정일 정권 붕괴의 날을 기원하며…
2004년 7월 평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