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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기자가 만난 사람

고려대 명예교수 김용준

“노 대통령에겐 대통령이라는 자각(自覺)이 없다”

  •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 사진·김성남 기자

고려대 명예교수 김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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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이 만든 EBS 다큐멘터리 10부작 ‘한국독립운동사’는 봤습니까.

“좌익 계통의 독립운동사라고 하더군요. 나는 보지 않았어요. 걔 책도 별로 읽은 게 없습니다. 이때까지 가려졌던 부분을 파헤쳤다고 칭찬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어떤 사람은 김일성이 안창호보다 더 독립투사라고 했다고 욕하는 사람도 있어요. 모르겠어요. 내가 직접 안 봐서. 걔 거는 일단 안 봐요.”

-도올이 쓴 ‘나의 큰형, 김용준’이라는 글에 경기중학교를 나온 형에 대한 콤플렉스 같은 것을 토로한 대목이 있더군요.

“용옥이가 내 큰아이와 6개월 차이죠. 내 아들 셋이 경기를 나왔단 말이에요. 나까지 합하면 넷이 경기를 나왔죠. 경기 나온 셋 중 둘이 서울대를 나오고 한 아이는 외국어대를 나왔죠. 그런데 용옥이는 어떻게 하다 보성에 들어갔거든. 그러니까 어려서부터 그런 게 있었는지도 모르죠. 어려서부터 걸작 같은 면이 있었어요. 대학교 다닐 때도 방학이면 없어져요. 산속에 들어가 거의 거지 중 꼴이 돼서 돌아와요. 걔 태권도가 몇 단인지 아세요? 걔한테 얻어맞으면 죽어요. 그런 얘예요.”

-기인(奇人)이군요.



“네. 동양학을 하버드에서 했지 않습니까. 나는 국학이나 동양학 한 사람들이 메서돌러지(methodology·방법론)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냥 공자왈 맹자왈 암기식으로 나가고, 학문적 방법론이 부족하죠. 용옥이는 어떻든 양쪽을 다 했거든요. 그러니까 영미의 현대 학문 조류와 동양학이 합류해 미지의 세계를 개척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죠. 자기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그러겠죠. 그런데 인기가 너무 올라가니까 거기서 오는 병폐도 있잖아요. 내가 어디 가면 도올의 형으로 소개될 때가 많죠.”

-동생 김숙희 교수는 김영삼 정부 때 어떤 인연으로 교육부 장관으로 입각했습니까.

“걔가 지금도 독신이죠. 집은 앞뒷집이지만 같이 밥 먹고 함께 살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내가 큰오빠니까. 걔가 YWCA에서 일할 때 어느 지방에 가서 ‘이제는 그래도 대학 나온 사람이 대통령을 하는 게 좋겠다’고 몇 번 얘기했더래요. 그 말이 지방 사람들에게 꽤 먹히더래요. YS가 대통령 취임하기 전에 만나자고 해서 입각 교섭을 받았는데 거절했어요. 내가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정무장관이나 여성부 장관은 하지 말라고 했죠. 이회창씨가 국무총리 된 후에 YS가 또 만나자고 하더니 교육부 장관 하라고 하더래요. 이회창씨는 어떻게 여자가 교육부 장관을 하냐고 반대했대요. 장관 하면서 월남 파병을 용병(傭兵)이라고 했다가 재향군인회에서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쫓겨났죠.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얘기지요. 월남 파병이 용병이 아니면 뭐예요.”

충실한 황국신민으로 자라

-‘나의 젊은 시절’이라는 글에서 ‘소학교 다닐 때 자정 무렵 역에 나가 지나(支那·중국)로 가는 출정군인(出征軍人)들을 전송하면서 일장기를 손에 들고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짖었던 추억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고 썼더군요. 중학교 5학년을 마칠 무렵엔 가네미쓰 요슝(金光容俊)으로 창씨개명을 했다지요.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창씨개명을 안 하고 버틸 수는 없었던 겁니까.

“우리 집은 광산(光山) 김가라 가네미쓰(金光)라고 지은 거죠.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한 분들도 있죠. 그러나 창씨개명 여부로 친일(親日) 반일(反日)을 가릴 수는 없어요. 항일운동가도 창씨개명을 안 했지만 친일파 중에도 창씨개명을 안 한 사람이 있어요. 한상용(韓相龍)씨 같은 친일 거두도 창씨개명을 안 했어요. 보통 사람들은 창씨개명을 않고는 견디기 어려웠죠. 압박이 너무 심했으니까요. 학교에서도 계속 창씨개명하라고 독촉하고, 사회에서도 불이익이 그대로 쏟아지니까 안 하고 배길 수 있나요. 어떻게 보면 그때 창씨개명을 안 한 것이 애브노멀(abnormal·비정상)이고 창씨개명한 것이 정상적인 거죠. 못 견뎠으니까….”

한상용은 매국노 이완용의 조카로 중추원칙임참의(中樞院勅任參議)를 15년간 중임하고 1941년 중추원 고문이 됐다. 각종 친일단체에 참가해 1916년 대정친목회(大正親睦會) 평의장을 지냈다.

-‘친일 문인’ 이광수를 옹호한 대목이 흥미롭더군요.

“경기중학교가 종로구 화동 꼭대기에 있었어요. 학교에서 안국동을 거쳐 종로로 나가면 화신상회(현재 삼성증권 자리) 4층에 서적부가 있었습니다. 집에서 돈이 올라와 서적부를 어슬렁거리다 춘원이 쓴 ‘그의 자서전’이란 소설책을 샀습니다. 친구 부인과 간도(間島)로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이는 스토리죠. 간도의 한국사회는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의 본거지였죠. 춘원이 나 같은 놈을 생각해 쓴 것은 아니겠지만 어떻든 그 책에서 전혀 다른 세계를 발견한 겁니다.

학교 가면 황국신민(皇國臣民) 선서를 낭송하고 천황이 계신 곳을 향해 동방요배(東方遙拜)했습니다. 일본말로 쓴 일기장을 제출해야 했죠. 그야말로 충실한 황국신민으로 자랐죠. ‘덴노 헤이까(천황 폐하)’라는 말이 나오면 벌떡 일어서서 차려 자세를 취했습니다. 천황 폐하의 적자(嫡子)로서 생명을 새털같이 버리는 게 남아(男兒)의 영광스러운 일생이라고 교육받았으니까요.

‘그의 자서전’ 이후 춘원의 역사소설을 모조리 읽었어요. 그때는 일본 역사를 배웠습니다. 우리는 정식 학교에서 한국 역사를 못 배운 세대거든요. 춘원의 소설을 읽은 후로 우리글로 일기를 썼죠. 광복이 되고 나서 춘원을 친일파다 뭐다 하지만 어떻든 나는 춘원이라는 사람을 욕할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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