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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획정에서 남북정상회담까지 ⑩

‘대한민국號’ 첫 선장 이승만과 미국의 동상이몽

  • 백운선 호남대 교수·정치학 wpaek@honam.ac.kr

‘대한민국號’ 첫 선장 이승만과 미국의 동상이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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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제헌국회에서는 국가 형성 수단에 대한 갈등적 쟁점이 다루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상대적 진보로부터 보수에 이르는 다양한 노선과 세력 간의 경합이 벌어졌다. 말하자면 제헌국회는 당시 현실적으로 유일한 정치적 경쟁의 장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치적 비중에도 제헌국회는 그 형성 배경에서 구조적이고 정황적인 한계를 피할 수 없었다. 우선 제헌국회는 의회정치의 경험과 자생적 기반이 전혀 없는 가운데 외부에서 이식됐다는 점에서 비서구 사회의 의회정치가 지니는 일반적 한계에 직면했다.

이에 더해 분단에서 비롯된 한계도 안고 있었다. 광복 후 정치적 요구는 보수우익과 급진좌익을 양극으로 다양하게 분화하면서 표출됐다. 그러나 단독정부 수립과 이에 따른 정권 창출과정에서 남한 지역에서는 보수우익 이외의 요구나 이를 대표하는 세력은 자연히 배제됐다.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에서도 좌익세력이 원천적으로 배제됐다. 남북 협상파 등 반(反)단정 우익세력과 중도세력도 총선거에 불참했다. 분단국가 형성에 따른 제약이 의회 구성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따라서 제헌국회는 정치세력 포용이나 통합된 지도계층 형성이라는 면에서 제약성을 띨 수밖에 없었다.

한편 제헌국회 구성 이전에 이미 국가기구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고,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피선됨으로써 정치적 지배력을 독점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이승만은 지배력을 완전히 독점하기 위해 의회 안에 확고한 지지 세력을 구축하려 했다.

의회 장악 실패한 이승만



이승만은 표면적으로 정당무용론, 혹은 시기상조론을 내세우면서 초당적 입장을 강조했지만 내심으로는 집권 초기부터 강력한 집권당을 조직해 의회를 장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윤치영, 장택상 등이 중심인 국회 안의 태백구락부, 한민당(한국민주당) 탈당파, 민족청년단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정통파, 그리고 대통령 무조건 추종파 등을 규합하는 한편, 명제세·배은희·유진산 등에게 민간조직을 구성하라고 비밀리에 지시했다.

정부 수립 직후인 9월7일, 대통령 관저에서 여당 추진운동과 관련해 신석우, 배은희, 백성욱, 신익희, 지청천 등이 회동해 주목을 받았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자신의 측근 올리버에게 보낸 서한에서 “국민회(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가지고 정당을 하나 조직할 계획이고 신익희, 지청천, 그리고 약간의 다른 인물을 영입할 계획”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력에도 제헌국회 회기 내에 집권당 형성은 실패했다. 그런가 하면 당시 최대 정파인 한민당 세력은 이승만 정부의 조각(組閣) 과정에서 소외되면서 상당기간 여(輿)인지 야(野)인지 불분명한 정치노선을 띠었다.

제헌국회의 정당 및 단체별 분포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55명, 한민당 29명, 대동청년단 12명, 조선민족청년단 6명, 대한 노동총연맹 1명, 대한독립촉성 농민총연맹 2명, 기타 단체 10명, 무소속 85명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속 정당이나 단체의 통제가 전혀 없었고 개인 차원에서 입후보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같은 범(汎)정당적 조직에는 각종 정당과 사회단체가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선 당시의 소속 분포는 제헌국회의 정파 구성을 설명하는 데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따라서 원내 정파 간의 세력 판도가 어느 정도 구체화된 것은 제헌국회가 개원한 이후였다. 개원 이래 복잡한 정파 간의 이합집산에도 제헌국회는 대체로 ▲한민당 세력 ▲이승만 지지 세력 ▲무소속 구락부 결성을 계기로 결집한 세칭 소장파, 3개 세력의 정립(鼎立) 구도를 보였다.

이와 같은 3파 정립 구도는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소장파 세력이 붕괴할 때까지 지속됐다. 한민당은 개원 후 독촉국민회와 무소속의 친한민계 인사를 규합해 소속 의원을 60여 명으로 늘렸으며, 독촉국민회와 한민당의 일부가 태백구락부라는 친목단체를 결성했다. 독촉국민회 잔여 의원과 대동청년단 일부는 3·1구락부를 형성했고, 무소속 의원들은 무소속 구락부를 결성해 이 두 구락부가 통합, 통합체 무소속 구락부를 만들었다. 그후 헌법 심의를 계기로 통합체 무소속 구락부 소속의원 중 일부가 이탈해 이정회를 결성하고 이승만 지지 세력의 주축이 됐다.

최대 과제는 국가안전보장책

이러한 한계와 정파 구성의 여건에서 제헌국회는 국회를 단원제로 구성하고 권력구조를 대통령제로 하는 헌법을 제정해 공포하고, 정부조직법 등 정부 구성을 위한 제반 법규를 제정했다. 또한 제헌국회는 헌법에 따라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을 선출했고 국무총리 임명을 승인했다. 그리고 광복 3주년이 되는 1948년 8월15일 미군정 종식과 함께 정부수립을 선포함으로써 대한민국이 출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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