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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기행

마지막 ‘동래기생’, 구음(口音) 명인 유금선

“봄날에 사랑은 가고 늙은 소리만 남았소”

  • 이미숙 동아일보 주간동아 아트디렉터 leemee@donga.com

마지막 ‘동래기생’, 구음(口音) 명인 유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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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음도 예악(藝樂)이라”

“소리는 이화중선이처럼 해야 소리제. 상성에 가서도 듣는 사람 귀에 좋은 소리라야 하는 기라. 요새 테레비에 소리한다고 나오는 아-들은 엔간하믄 다 떡목이라. 소싯적에는 이 사람 소리도 이화중선이 못지 않았제. 인자는 기침병 때문에 옛날만 못해도 아직도 청음인 기라.”

맑고 곱고 애원하는 듯한 소리를 ‘천구성’이라고 하는데, 소리 하는 이들은 이를 제일로 친다. 소리가 거칠고 탁하면 ‘떡목’이라 하고, 맑기만 하고 깊이 없는 소리는 ‘양성’이라 해서 격에 쳐주지 않는다. 노 명무는 유금선의 목을 두고 ‘천구성’을 얘기하지 싶다.

문옹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 동래야류 예능보유자이자 부산민속보존협회 이사장으로 동래의 민속예술 보존과 발전을 위해 일생 살았다 해도 넘침이 없을 인물이다. 그가 없었으면 동래가 꼽을 무형의 문화재들 곧 동래야류, 동래학춤, 동래지신밟기, 동래고무(鼓舞), 이 네 종목의 전통예술은 복원이 어려웠을 것이다. 젊어 놀고 보아왔던 춤들을 선배동료들과 되살리는 데 일생을 내놓았다. 고무 복원은 유금선의 외사촌 석국향(釋菊香)의 고증이 한몫을 했다. 1993년 ‘동래학춤 구음 예능보유자’로 유씨를 적극 추천해 그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는 데 큰 힘을 쓴 이도 문 이사장이다.

흔히 ‘입타령’으로도 부르는 구음(口音)은 전통악기 소리를 흉내내는 국악의 한 분야다. 단순히 악기의 소리만 묘사하는 의성(擬聲) 영역에 그친다면 예(藝)라 할 수 없을 터. 글자 그대로 악기 대신 입으로 낸 소리로 가락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세계 여러 민족의 음악에서 다양한 형태의 구음을 발견할 수 있으나 우리 구음이 유독 두드러지는 까닭은 그 절절함에 있다. 감정이 흐드러진 민족이기에 가슴에 차고 넘어 더는 담아둘 수 없는 애별리고(愛別離苦)를 말로는 모자라 음으로 흥얼거려 달랬던 것이다.



악기만으로는 미진해 갈급한 2%의 그 무엇을 구음이 이끌어 관객을 젖어들게 만드는 애조. 그중에도 절절이 한 맺혀 숙고사 물겹저고리에 피 배어나는 듯한 살풀이는 또 어떠리. 살풀이마냥 듣는 이의 단장을 감아 잡는 맛은 아니더라도 학춤 구음에도 오직 그만이 부를 수 있는 사무침이 묻어 나온다.

구음은 악기들과 아우러지는 합주나 독자적인 소리연주 외에 교육 차원에서도 쓰인 지 오래다. 구음이라고는 하나 통용되는 법칙이 있어서 어떠한 선율이라도 적지 못하는 게 없다. 구음이 처음 악보로 등장한 것은 금합자보(琴合字譜)의 거문고보와 적보(笛譜)부터다. 이후 수많은 고 악보에 사용되어왔다. 이 점에 착안해 오늘날까지 기악교육이나 악보 기보의 방편으로 활용해오고 있다.

구음의 표현은 관악기와 타악기 현악기에 따라 다른데 관악기는 ‘나·누·루·러 같은 ㄴ·ㄹ 계열의 자음으로, 타악기는 ‘덩·떵·쿵·덕 된소리나 파열음 계통의 자음을, 현악기는 ‘당·동·징’ 등 ㄷ·ㅈ 계열의 자음을 사용하여 구음한다. 이들 자음은 음성학적으로 볼 때 악기가 내는 소리와 닮아 있다. 이렇게 구음을 읽는 방법과 규칙을 구음법이라 하고 문자로 기록한 기보법을 육보(肉譜)라고 한다. ‘세조실록(世祖實錄)’은 고려시대부터 구음이 전해왔음을 기록하고 있을 만큼 예악(藝樂)으로서의 역사도 깊다.

사람의 마음을 잔잔히 다독이다가도 흥에 겨워 어깨를 들썩이게 하고, 애잔하게 가슴을 문지른다 싶다가도 처절함에 등이 휘게 하고, 더운 피 도는 인간의 육성이다가 이내 신비스러운 피안의 소리가 되는 음악…. 사람의 소리는 소리이되 언어적 구체성을 완전히 배제한 기묘한 음색의 발성이 듣는 이를 최면 같은 몽환으로 잡아끄는 음악, 그것이 바로 구음이다.

소리는 불행과 함께 오다

유금선의 기침은 오래 묵은 병이다. 서너 살 적 앓은 홍역의 뒤끝이다. 호적에도 2년 늦게 올릴 만큼 약한 몸이었을까. 그녀의 말마따나 “토깐이 괴기라도 고아 멕였으면” 탈이 없었으련만 계집애라 그 치레도 없었다. 젊어 힘 성할 때는 기침도 동무할 만했다. 천식은 소리로 먹고사는 그녀의 인생 후반부를 진저리치게 붙잡고 있는 것이다. 봄이면 가슴 설레기보다 날리는 꽃가루에 병원 갈 일이 더 태산 같다.

호적 탓에 1931년생이 된 그가 태어난 곳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권번(券番)이 있던 집이었다. 학소대(鶴巢臺) 고분으로 유명한 복천동에서 나고 첫 소리를 배웠다. 지금이야 복천동 하면 가야시대 무덤을 떠올리지만 그가 날 때는 그저 산이요 구릉이었다. 고분이 발견된 것은 1969년이다. 광복과 전쟁을 거친 남부여대(男負女戴) 인생들이 살 비비며 살기에 적당한 산이었기에 판잣집들이 빼곡했던 언덕으로 기억한다. 헌집들 사이로 새 집 짓겠다고 터잡다가 나타난 천년 무덤, 동래시장을 지나 동래여고가 있던 자리에 들어선 아파트 옆 경사로 모퉁이를 돌면 돌연 나타나는, 그 옛날 뛰놀던 그 동산이 가야시대 무덤일 줄 어찌 알았겠는가. 개발되기 이전의 복천동은 맑은 샘으로 더 잘 알려진 동네였다. 새미는 경상도 말로 샘이다. 복새미를 뜻하는 동네이름도 그렇거니와 옛무덤 곁자락에 있던 동래여고의 상징도 옥천, 그러니까 옥새미로 불렀던 게 어린 날 그의 기억이다. 밥 지으며 부지깽이로 장단 맞추다 밥 태워 욕 먹기 일쑤였던 때가 열한두 살 무렵이다.

춤이면 춤, 창(唱)이면 창, 못하는 것 없이 두루 갖춘 미색으로 유명했던 고모(유항앵)는 영남 일대에서 소문난 명기(名妓)였다. 자라면서 본 건 인력거에 화려한 옷, 뽀얀 분 화장이었고 들리는 건 오직 소리였다. 어린 그에겐 너무 예쁜 ‘독’들이었다. 소학교를 마치고 집에 들어서면 엄마 대신 자신을 맞던 동기(童妓)들의 소리가락…. 담 너머 들려오던 아릿한 타령조에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그래서 같이 불렀다. 봄나물 캐면서도 불렀고 오빠 생각 날 적에도 부르고 또 불렀다. 산천으로 헤매며 부른 가락, 그래도 내 소리는 그 아이들보다 월등 낫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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