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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선생님

고전 통해 억압의 숨통 틔워준 스승

“해학과 운치로 금기 풍자한 선조들의 지혜를 배우라”

  • 이재만 변호사 ljmad52@hanmail.net

고전 통해 억압의 숨통 틔워준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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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통해 억압의 숨통 틔워준 스승

최상덕 선생의 수업 광경. 재미있는 강의 때문에 선생의 수업시간은 학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돌이켜보면 나와 동년배들의 고교시절은 근대화라는 자유로운 기운과 구질서를 유지하려는 정부의 강력한 통제가 충돌하던 때였다. 따라서 근대화 교육으로 습득된 자유를 향한 열망은 어느 세대보다 강한데 사회는 그런 분위기를 용인하지 않으니 그 틈바구니에서 우리들은 안타까운 몸짓을 했던 것 같다.

이때 우리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수업이 있었다. 그 시간만 되면 우리는 수업에 몰입하곤 했는데, 다름 아닌 고전(古典)문학 시간이었다. 고전은 학문이 높은 선비들이 세상과 인생을 논한 한문학이어서 지극히 점잖고 도도하며 청아한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우리들의 고정관념이란 참으로 한심한 것이었다. 인생에서 ‘이성(異性)’에 대한 부분이 절반이 넘는 비중을 차지한다는 걸 우리는 간과했던 것 같다. 옛날이라고 해서 ‘이성’에 대한 묘사나 문학적 언급이 없으란 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점을 일깨워주신 분이 최상덕 선생님이시다.

아무도 이성이나 성(性)에 대해 이야기해주지 않고 궁금해하는 것조차 금기시한 시절에 ‘옐로 페이퍼’도 아니고 고등학교 고전문학 수업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니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천에 백도라지 한두 뿌리만 캐어도 대바구니에 철철 다 넘는다~.’



도라지타령은 흔히 작자 미상의 타령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작사가는 선비였을 것이다. 이 선비가 이런 시문을 지은 본 뜻이 무엇이며 작문법상 어떤 방법론이 담겨 있을까. 선생님은 가끔 고전 중에서도 이런 시문을 택하셔서 우리의 잠든 머리를 깨우쳐주시곤 했다. 지금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이 백도라지 타령에 담겨 있었다.

선생님은 뜬금없이 “대바구니에 가득 찰 만큼 큰 백도라지가 있을 것 같냐?”고 질문을 던지셨다. 우리는 모두 어리둥절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뜬금없는 질문에 그저 머릿속으로 백도라지 크기를 가늠해볼 뿐이었다. 선생님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짐짓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것은 도라지가 아니라 은유적인 표현이다. 대바구니도 마찬가지로 은유적인 표현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학생들의 표정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잠시 후 한 녀석이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고, 한참 후에야 우리는 그 의미를 알고 반 전체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급기야 선생님도 흐흐 웃으시며 책상을 탁탁 치고는 “선비도 남자다. 조선시대는 이성에 대한 관심을 금기시한 유교적 전통이 기승하던 시대였다. 아마도 억눌린 이성에 대한 관심을 은근슬쩍 표현한 은유적인 시문일 것이다. 우리 선조들의 해학과 운치가 넘치는 작품이다”라고 하셨다.

당시로서는 자칫하면 ‘선생이 애들에게 음담패설이나 한다’고 오해를 살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런 오해를 감수하면서 우리들의 잠든 마음을 깨워주셨다. 요즘의 눈으로 보면 아무 얘기도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수업이었고 내용도 ‘성인등급’이라 할 수 있었다.

이보다 더한 성인등급의 수업 내용도 있었는데, 바로 그 유명한 ‘만전춘’이다. 만전춘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얼음 위에 댓닢 자리 보아 임과 내가 얼어 죽을망정 정든 오늘 밤 더디 세오시라!’

“마음으로 느껴보라”

세상에, 고전문학에 이렇게 파격적이고 노골적인 문장이 숨어 있다니. 지금 들어도 매우 적나라한 표현이 아닐 수 없는데, 당시 한창 예민한 나이에야 오죽했겠는가.

귀가 번쩍 뜨인 학생들은 한동안 고전문학 공부에 빠져들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사실 그때 열심히 했던 고전문학 공부가 나중에 고시공부를 할 때나 변호사로 일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옛날 선비들이 인생과 세상에 대해 논한 한 구절 한 구절이 새록새록 생각나면서 인생사를 정리해보는 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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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만 변호사 ljmad5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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