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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아나키스트, 단주 유림의 불꽃 인생

‘최대한의 민주주의에서 다 같이 노동하고 사상하는 세계’를…

  • 김영천 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회장 kaone@kaone.co.kr

전설의 아나키스트, 단주 유림의 불꽃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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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 때 ‘忠君愛國’ 혈서 써

전설의  아나키스트,  단주  유림의  불꽃  인생

2005년 11월17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단주 유림과 아나키즘 학술대회 참가자 기념사진.

1898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유림의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본명은 유화종(柳花宗)이었으나 1919년 3월6일 유화영(柳華永)으로 개명했다. 그는 1931년 만주에서 독립투사 양성기관인 ‘의성숙(義誠塾)’을 설립하고 동아일보에 학생모집의 글을 실을 때부터 유림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독립운동 과정에서는 고상진(高尙眞), 고자성(高自性), 고삼현(高三賢), 김영진(金永鎭)이란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의 호는 월파(越坡)였으나 ‘부산 정치파동’ 이후부터 단주(旦洲)라는 호를 사용했다.

유림의 친가와 외가는 향촌의 지주로 안동의 전통적인 양반가였는데 유림이 물려받은 경제적 토대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 ‘의성숙’을 설립할 때 결정적인 기반이 됐다. 유림은 9세에 사서삼경을 아버지로부터 익혔으며 신식 중등교육기관인 ‘협동학교’ 수학 중이던 1910년, 한일강제합방이 되자 ‘나라를 되찾겠다’며 ‘충군애국(忠君愛國)’이라는 혈서를 쓰기도 했다. 전통적 학문 배경을 갖고 있는 유림이 일찍부터 현실 문제에 대한 자각과 근대적 애국계몽 및 구국항쟁의 의지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은 협동학교에서의 수학이 중요한 계기가 됐다.

협동학교를 졸업한 유림은 1915년에 대구에서 정진탁 등과 각지 청년들을 규합해 ‘부흥회’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하다 대구경찰서에 구금됐다. 1917년에는 김용하 등과 ‘자강회’를 조직해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할 청년들을 모집하다 대구경찰서에 재구금됐으며, 이러한 일련의 활동을 통해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을 모아 1918년에는 일제에 대한 대규모 암살파괴운동을 계획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 선포에 사전부터 협력했고, 3·1운동이 개시되자 이운형(서로군정서 특파원)과 함께 가담했으며, 향리인 안동군 임동면 편항장터 시위에 참여했다.

이후 만주로 탈출한 유림은 이상룡, 김동삼 등과 협의한 후 서로군정서 비밀특파원이 되어 국내에 두 차례 들어왔다. 1920년 말경에는 베이징으로 가 신채호, 김창숙, 김정묵, 남형우 등과 순한문 잡지 ‘천고’를 발행하는 데 관여했다. 1921년 상하이로 건너간 그는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에 가담한 후 중국 각지를 순회하며 각국 혁명가들과 교류하고 혁명 이론을 연마했다. 당시 이동휘, 김만겸 등과 연계했으나 그들의 공산주의 이론에 만족할 수 없어 결별했다. 이때 유림은 이미 공산주의 이론에 대해 비판하는 수준을 넘어 이념적으로 공산주의에 대항하고, 극복하는 높은 수준의 아나키스트가 되어 있었다.



문호 바진과의 인연

유림은 1921년 중국 청두(成都)에서 대문호 바진(巴金·1904~2005)을 만나 그에게 에스페란토어를 가르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진에 의하면 자신이 당시 청두의 ‘반월보’에 ‘세계어(Esperanto)의 특징’이란 글을 발표하자 고씨 성을 가진 조선인이 찾아왔다고 한다.

“그는 에스페란토어를 배운 사람이었고 어떻게 하면 에스페란토어를 보급시킬 수 있을까를 상의하러 왔던 것입니다. 나는 그로부터 에스페란토어를 배웠으나 몇 번으로 끝나버리고 결국 보급 활동은 하지 않았지요.”

바진은 생전에 일본의 바진 연구가 시마다 교코(嶋田恭子)에게 유림과의 만남을 이야기하면서 “고자성(高自性)이 최초의 친구지요, 그러나 교류는 많지 않아서 그는 바로 청두를 떠났지요”라고 말했다 한다. 고자성, 그가 곧 유림이다.

또한 바진은 시마다와 한 대담에서 “나와 그의 교류는 많지 않았으나 나는 조선인이 중국인과 같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들의 의리, 인정이라든가 예의, 관습을 그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나의 천박한 인상에 지나지 않지만 그들은 성실하고 착실하며 솔직하고 자존심이 강했다”고 말한 바 있다. 시마다는 “한국인에 대한 바진의 인상은 다분히 고자성, 즉 유림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1922년 봄 상하이에서 김두봉의 ‘깁더조선말본’ 발간을 돕던 유림은 그해 9월, 쓰촨성의 청두로 돌아와 국립성도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특허입교(特許入校)’로 수학하게 됐고 국립사범학교라 학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당시 청두에는 아나키즘 활동이 활발했는데 쓰촨성 출신의 저명한 교육자이자 아나키스트인 우위장(吳玉章)이 이 학교의 교장이었다. 그는 외국에 가서 일하면서 공부하자는 취지인 근공검학(勤工儉學)운동을 주도했다. 프랑스 유학의 중국 내 가장 큰 창구였던 쓰촨성의 청두는 프랑스 유학을 준비하던 유림이 공부하기에 가장 적당한 곳이었다.

유림은 1925년 8월경 국립성도대학교 사범부 문과를 졸업하고 국민정부 교무원 자격으로 남중국과 일본을 시찰하며 프랑스 유학 준비를 했지만 독립운동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던 관계로 도불(渡佛)은 실현되지 않았다.

학교를 졸업한 유림은 1925년에 상하이에서 ‘민중사(民衆社)’를 창설해 독립정신과 자유사상을 계몽 선전하던 중, 대구에서 신재모, 방한상 등의 아나키스트들이 ‘진우연맹(眞友聯盟)’을 결성하자 방한상에게 편지를 보내 “아나키스트 단체를 많이 조직하고 상하이에서 계획 중인 ‘원동무정부주의자총연맹’이 조직되면 여기에 가맹할 것”을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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