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7월31일 전·현직 대통령 부부 청와대 만찬에 참석한 손명순, 이순자, 이희호, 김옥숙 여사(왼쪽부터).
경무대 초대 정치비서관 박용만(朴容萬)씨는 이승만(李承晩·1875~1965) 대통령 집권 초기 난데없이 프란체스카(1900~92) 여사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았다. 박씨는 대통령을 찾았다. 박씨와 마주앉은 대통령은 “나는 그런 인사발령을 낸 적이 없다”며 경무대에서 계속 근무하라고 지시했다. 아내의 황당한 돌발행동에 적잖이 화가 난 대통령은 박씨에게 “결혼은 했느냐”고 물었다. 박씨가 고개를 가로젓자 대통령이 말을 이었다.
“자네, 결혼하면 알게 될 걸세. 저 사람은 내 마누라야. 저 사람이 하려는 일을 못하게 막으면 내가 견딜 수가 없어. 만약 말을 안 들어주면 나를 조르고 싸움하고. 저 사람이 부탁하는 일은 나도 어쩔 수 없어. 안 그러면 내가 정말 괴로워서 못 사니까.”
프란체스카 여사와 박씨는 평소 대통령의 일정 문제 등으로 갈등이 심했고 이를 참지 못한 프란체스카 여사가 일방적으로 ‘해고’를 통보한 것이다.
경무대에서는 한밤중에 종종 큰소리가 오갔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지나친 간섭 탓에 부부싸움이 벌어졌던 것이다. 대통령은 화가 나면 우리말로 큰소리를 질렀고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던졌다고 한다. 박살난 물건 중에는 국보급 보물도 몇 점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럴 때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침대에 엎드려 눈물을 펑펑 쏟았다. 대통령은 프란체스카의 언행이나 부탁이 신경에 거슬리면 역정을 내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들어주기도 했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가장 큰 관심사는 남편의 건강이었다. 그의 염려는 병적인 수준에 가까웠다. 그는 남편의 건강을 염려해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기울였다. 비서진과 자주 마찰을 빚은 것도 지독한 건강 챙기기가 원인이었다.
경무대 주방장은 종종 북엇국을 끓였다. 대통령이 퍽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란체스카 여사는 북어 머리와 껍질로 만든 북엇국을 보고 “개밥으로 주면 좋겠다”며 못마땅해했다. 그뿐이 아니다. 자신이 곰국을 먹고 체하자 대통령에게 곰국은 절대 주지 못하도록 해 경무대에서 곰국이 자취를 감췄다.
대통령 일정 먼저 검토
프란체스카 여사는 누군가 대통령에게 직언을 해 남편의 기분이 상하거나 심사가 불편해지면 가만있지 않았다. 대통령에게 누가, 왜,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따져 묻고 급기야 남편의 건강에 해를 끼친 당사자를 매장시켰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프란체스카 여사가 인사와 국정에 깊이 관여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대통령께서 낮잠을 주무셔야 할 시간입니다.”
국무총리를 비롯해 장관 등이 대통령을 만나 긴요한 국사를 논할 때 이야기가 좀 길어진다 싶으면 프란체스카 여사가 집무실을 찾아와 이렇게 면담을 중지시켰다. 담당비서관이 잡아놓은 대통령 일정은 프란체스카 여사가 먼저 검토했고, 대통령의 건강에 무리가 갈 정도의 일정이다 싶으면 빨간 볼펜으로 일정표에 불참할 행사나 회의를 체크했다. 경무대 비서진 사이에서는 대통령보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비위를 맞추는 게 더 어렵다는 불만이 쏟아졌다.
1933년 2월. 스위스 제네바 레만 호반에 있는 호텔 ‘드 라 뤼시’ 식당에서 이승만 박사와 프란체스카 여사가 마주앉았다. 프란체스카는 어머니와 함께 파리를 경유해 스위스 여행을 하던 중이었다.
“식당이 만석인데 동양에서 오신 손님 한 분과 합석해도 괜찮겠습니까.”
지배인의 말에 모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박사와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렇게 처음 만난 후 사랑에 빠졌고 이듬해 10월8일 뉴욕 몬트클레어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당시 이 박사는 59세, 프란체스카는 34세였다. 나이 차이가 스물다섯인 만큼 프란체스카 여사가 남편의 건강에 유난히 신경을 쓴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1953년 일본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
남편에게서 한국에 들어오라는 전갈이 있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먼저 날아든 소식은 이 박사와 임씨의 관계에 대한 낯 뜨거운 소문이었다. 소식을 접한 그는 대로(大怒))했고 한국행을 서둘렀다. 귀국 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남편과 임씨를 떼놓은 것이었다. 프란체스카는 임씨의 돈암장 출입을 금지했고 한국에서 임씨를 처음 만났을 때 찬바람이 일 정도로 냉랭하게 대했다.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미움을 산 임씨는 이 박사와 본의 아니게 멀어졌다. 그러나 프란체스카 여사의 마음에 꼭 드는 여성이 있었다. 이기붕씨의 아내 박마리아씨였다. 박씨는 미국 유학을 통해 유창한 영어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두 개의 경무대가 존재한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 박사가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이기붕씨는 정식으로 대통령 비서실장이 됐고, 박씨는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개인비서가 됐다. 박씨를 총애한 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프란체스카 여사였다. 박씨는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 영부인에게 세상 소식을 전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대통령의 정치 구상이나 생각은 프란체스카 여사를 통해 박씨에게 전달됐고, 반대로 박씨의 ‘뜻’은 영부인을 통해 대통령에게 즉각 전달됐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박마리아를 통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이 세간에 퍼졌다. 박씨가 영부인을 통해 대통령에게 전달하면 이루지 못 할 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두 개의 경무대가 존재한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였다. 하나는 실제 대통령이 기거하는 경무대, 다른 하나는 이기붕 비서실장과 박씨가 사는 서대문 관저였다. 그리고 두 관저는 프란체스카 여사와 박씨, 두 여자가 ‘쥐고 흔든다’고 소문이 났다. 이를 두고 당시 세간에 ‘자유당은 두 가지 암으로 죽어가는데, 하나는 프란체스카 여사이고 다른 하나는 박마리아’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재임 기간 중 가장 다루기 힘들어한 사람은 프란체스카 여사였다. 남편을 위한답시고 잔소리와 간섭이 심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부부싸움이 싫어 되도록이면 아내의 부탁을 들어주는 편이었는데, 이것이 갖가지 부작용을 유발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근검절약하고 헌신적이고 남편밖에 모르는 여자였지만 남편의 건강과 일상을 과보호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인의 장막을 쳤다. 이는 이 대통령의 심사를 거슬렀을 뿐 아니라 눈과 귀를 가로막는 결과로 이어졌다. 결국 대통령 부부의 주변에는 국정 운영 전반에 대해 직언이나 조언을 하는 사람이 사라졌고 “각하, 아무 일 없이 다 잘돼갑니다” 하는 아부성 발언이 난무했다.
“그분은 대통령이기 이전에 나의 남편이다.”
경무대에서 이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초대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남편의 건강을 위해 노력한 것은 장기 독재와 말년의 정치부패에 이어 망명생활을 초래한 원인이 됐다. 그는 “나는 정치에 관여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공언했지만, 결과적으로 누구 못지않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영부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요일마다 경무대 빠져나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자리가 바로 영부인이다. 하고 싶다고 해서, 죽어라 공부하고 노력한다고 해서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도 있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다. 윤보선(尹潽善·1897~1990) 대통령의 부인 공덕귀(孔德貴·1911~97) 여사가 그런 예다.
물론 윤 대통령이 정치·사회적 혼란기에 집권한 데다 내각제였기에 장면(張勉) 총리가 모든 정무를 맡고 대통령은 실권 없는 상징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힘없는 대통령의 부인, 어수선한 정국. 공 여사는 영부인이라는 자리를 썩 탐탁지 않게 여겼다. 경무대에 들어가 사는 것조차 싫어 서울 종로구 안국동 8번지 윤보선가(家)에 머물러 있고 싶어 했다. 그러나 주위에서 경호 때문에 경무대에 입주해야 한다고 조언해 어쩔 수 없이 이삿짐을 꾸렸다.
제2공화국은 4·19혁명 직후인 1960년 4월27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같은 해 8월13일 윤보선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시작됐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공 여사는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지만 취임식장에는 그가 앉을 자리가 따로 마련돼 있지 않았다. 당시 영부인에 대한 사회적인 대접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는 일화다.
1972년 1월1일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새해를 맞고 있는 육영수 여사.
인도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기를 꿈꿨던 공 여사는 노처녀 소리를 듣던 서른아홉 살 때 사별한 아내와의 사이에 23세, 19세의 자매를 둔 당시 서울시장 윤보선씨와 결혼(1949년 1월6일)했다. 사람들은 서울시장과 결혼해서 좋겠다고 했지만 주변사람들에 떠밀리다시피 결혼한 공 여사는 “마치 안국동으로 귀양살이하러 가는 기분이었다”고 훗날 토로했다.
공 여사는 1960년 8월부터 1962년 3월까지 경무대에서 생활했지만 새장 속 새처럼 단조로운 생활이 싫어 밖으로 뛰쳐나오고 싶어 했다. 윤보선 대통령의 사저인 ‘안국동 8번지’에서 1960년 9월부터 이듬해 초여름까지 1년 남짓 생활한 복진풍(69·전 환경관리공단 이사장)씨는 “공 여사는 주말마다 경무대를 빠져나와 아이들과 함께 안국동 집을 찾았다”며 “일요일에 집(사저) 앞에 있는 교회를 가기 위한 외출이었지만 실은 경무대 생활의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한 바깥 나들이였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마치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불편하게 여긴 영부인 자리에 1년7개월 남짓 앉아 있던 공 여사는 남편의 상전 노릇은 꿈도 꾸지 않은 채 짧은 경무대 생활을 마쳤다.
대통령의 ‘귀’
지금도 우리 국민 중에는 ‘영부인’ 하면 가장 먼저 육영수(陸英修·1925~74) 여사를 떠올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단아한 미소에 곱게 쓸어 올린 머리칼. 자애롭기 그지없는 인상의 육 여사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세상을 쥐락펴락한 박정희(朴正熙·1917~79) 대통령의 가장 가까운 지지자이자 대통령이 상대하기에 가장 ‘어려운’ 사람이었다. 대통령 앞에서 죄다 머리를 조아리며 “예”라고만 대답하던 시절 “아니오”라고 제동을 건 사람은 육 여사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육 여사는 “나는 청와대의 야당”이라고 공언할 만큼 남편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야당이긴 하지만, 조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권을 차지하기 위함도 아니다”는 말로 청와대 내 야당활동을 계속했다.
‘듣기 좋은 소리도 삼세 번’이라는 속담이 있듯 아내에게 칭찬보다 쓴소리를 자주 들었던 박 대통령은 아내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높은 편이었지만 불만도 적잖이 갖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육 여사의 눈두덩이가 퍼렇게 된 적이 있어요. 대학생들의 격렬한 데모가 끊이지 않고 저항이 계속되자 육 여사가 1968년 11월 한국외국어대를 시작으로 고려대, 공주사대, 한양대, 숙명여대 등지를 직접 돌아다니면서 대학생들을 만나 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대통령에게 민의(民意)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한 대학 순방이었던 셈이죠. 어느 날 육 여사가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를 가감 없이 대통령에게 전달했는데 그 과정에서 열을 받은 박 대통령이 ‘임자가 뭘 아냐’면서 주먹을 날렸다고 합디다.”
한 정치인의 회고다. 육 여사가 훌륭한 아내이자 내조자였다는 데 딴죽을 거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통령에게 항상 직언하려고 애를 쓴 육 여사는 매일 새벽 조간신문을 꼼꼼히 읽으며 세상 물정을 파악했고, 남편이 대통령이라는 권위에 눌려 바깥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할까봐 다양한 통로를 통해 여론을 수집했다.
많은 사람이 육 여사의 치적 중 첫 번째로 ‘대통령의 귀’가 된 점을 손꼽는다. 대통령의 막힌 귀를 대신했기 때문이다. 육 여사에게 정보를 주는 일등공신은 영부인의 공식 업무를 담당하는 청와대 제2부속실. 육 여사는 비서진에게 “어떤 정보든 가감 없이, 숨김없이, 세상에 떠도는 확인 불가능한 유언비어까지 보고하라”고 강조했다.
육 여사의 정보력은 때로 중앙정보부장보다 낫다는 평을 들을 정도였다. 박 대통령이 육 여사의 말에 귀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살아 있는 정보’이기 때문이었다는 것. 육 여사가 전해들은 숱한 정보 중 가장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대통령의 여성편력이었다. 돌부처도 시앗을 보면 돌아앉는다는 말이 있듯 조용한 성격에 현모양처인 육 여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청와대 집무실의 밀회
2003년 늦가을. 필자는 취재를 통해 알게 된 한 여배우로부터 밤늦게 전화를 받았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50대 중반이던 그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자살 충동을 견디지 못해 죽음을 선택할 것 같다”며 울먹이는 그의 집을 찾았을 때는 자정이 가까웠다. 그는 당시 자신을 힘들게 했던 개인적인 문제를 털어놓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 지금 그분이 생각나”하고 중얼거렸다.
필자가 “그분이라뇨?” 하고 되묻자 그는 조심스럽게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대답했다.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필자의 반응을 살폈다. 이윽고 그의 긴 고백이 시작됐다.
그는 1970년대 초반 대학 4학년 때 박 대통령을 처음 만났다고 한다. 그때는 연예인이 아닌 대학생 신분이었다. 서구형 미인인 그는 어느 날 같은 대학에 다니는 친구와 함께 인왕산 인근에 놀러 갔다. 다방에서 친구와 수다를 떨고 있는데 한 남자가 이들에게 다가와 무슨 일을 하는지 물었다.
1983년 7월 전두환 대통령과 함께 이산가족 찾기운동을 펴고 있는 KBS를 방문한 이순자 여사.
그날 저녁 그는 검정색 승용차를 타고 어딘가로 향했다. 그곳이 ‘궁정동 안가’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됐다고 한다. 그는 만찬장에 들어가기 전 한 남자에게 ‘특별한’ 교육을 받았다. 그때서야 소문으로만 듣던 대통령 모시는 자리에 참석했음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날 만찬장에서 그는 대통령 옆에 앉았다. 대통령 외에 남자 3명이 있었는데, 그들 옆에도 여자가 한 명씩 앉았다.
“몹시 당황했지만 대범한 척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나더러 노래 한 곡 부르라’고 하더라고요. 자리에서 일어나긴 했는데 도무지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할지 난감하데요. 우물쭈물했더니 빨리 부르라고 눈치를 줬어요. 당시 유행하던 가요 한 소절을 부르다가 그만 목소리가 갈라져서 ‘아이, 더는 못 부르겠어요’ 하고 앉자 한 남자가 ‘감히 각하 앞에서 노래를 중단하냐’고 눈을 부라리더라고요. 그런데 각하가 ‘괜찮다’고 하면서 ‘내가 대신 부르지’하면서 제 등을 토닥였어요.”
박 대통령에 대한 첫인상은 딱딱했지만 그런대로 매력적이었다고 그는 당시를 회고했다. 박 대통령과의 첫 만남 이후 그의 ‘안가’행은 잦아졌고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일이 벌어졌다.
“주로 궁정동을 비롯한 안가에서 만났는데, 하루는 대낮에 각하가 찾았어요. 가 보니 청와대 집무실이었어요. 그곳에서 각하와 단둘이 몇십분 있었을까, 갑자기 비서가 후닥닥 뛰어들어와 ‘육 여사가 집무실 쪽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어요. 두 사람은 긴장했고 박 대통령은 제가 숨을 곳을 찾았어요. 잠시 후 육 여사가 집무실에 들어오자 태연하게 박 대통령이 ‘임자가 여긴 웬일이냐’고 물었어요. ‘아니, 아니 그냥요’ 하고 대답한 육 여사는 집무실을 휘 둘러본 후 밖으로 나갔죠.”
“네 누나 어디 갔어?”
박 대통령은 이날 그에게 “큰일날 뻔했다. 앞으로 조심해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해 자신과 대통령의 관계 등에 대해 육 여사에게 보고하는 중앙정보부측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는 대학 졸업 직후 영화감독의 눈에 띄어 영화배우가 됐다. 당시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대통령과의 밀회는 계속됐다. 그가 영화배우가 된 이후에도 육 여사의 ‘뒷조사’는 멈추지 않았다.
“네 누나 어디 갔어?”
어느 날 건장한 남자들이 그의 집을 덮쳤다. 당시 그의 매니저 일을 도맡았던 남동생이 “며칠 전 누나를 부산에 데려다 주고 올라왔다. 그곳에서 영화촬영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한 남자가 권총을 꺼내들고 동생의 입에 총구를 겨눴다.
“잔말 말고 제대로 말해? 각하 만나러 갔지? 거짓말하면 너 죽어.”
잠시 후 그들은 부산 촬영장에 그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 철수했다. 그의 고백을 들은 지 1년여가 지났을 무렵 그의 남동생을 만났다.
“누나가 (대통령을) 만나는 줄 알고 있었어요. 그날 누나가 촬영 중이었기에 망정이지 어디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면, 아니, 각하와 함께 있었다면…. 어휴, 상상도 하기 싫어요.”
당시 그의 동생은 공직에 몸담고 있었다. 필자는 여러 차례 두 사람에게 공식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그들은 거절했다. 박 대통령의 자녀들이 살아있는데다 장성한 자신의 자식들에게도 부담을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영웅호색(英雄好色)이라고 했던가. 박 대통령 주변에는 여자 소문이 끊이지 않았고 그 때문에 육 여사의 가슴도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육 여사는 정치·사회적인 문제 외에 항간에 떠도는 여배우와의 염문설에 대해 대놓고 남편에게 따져 물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이 이를 반길 리 만무했다.
“궁정동을 거쳐간 박정희의 여자가 200명이 넘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한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자신을 변호한 안동일(安東壹·67) 변호사에게 털어놓았다는 말이다. 김 전 부장이 대통령을 ‘제거’한 이유 중 하나로 ‘여자 문제’를 언급할 만큼 박 대통령 주변에는 많은 여자가 있었다.
1992년 11월 중국 방문길에 오른 노태우 대통령 부부.
1960년대 후반 데뷔 2년차(당시 19세)이던 그가 생방송 출연 직전 긴급 호출을 받고 간 곳은 대통령과 장관이 참석하는 파티였다. 김씨의 팬이던 박 대통령은 “우리나라 민요의 대중화에 앞장서줘서 고맙다”며 그에게 ‘국보’라는 애칭을 붙여줬다. 이후 국빈급 만찬에 자주 참석했던 그는 박 대통령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어느 날 방송국에 갔더니 한 간부가 저를 불러 ‘미안하지만 상부의 지시 때문에 오늘부터 방송출연이 금지됐다’고 통보하더라고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격이었죠. 제가 대통령과 가깝게 지낸다는 이유 때문에 그런 조치가 내려졌나 봐요.”
그는 “육 여사측이 직·간접으로 그런 명령을 내린 것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방송 출연 금지 통보를 받은 직후 ‘가수 인생도 이것으로 끝났구나’ 하고 몹시 낙담했다. 집 근처 약국을 돌아다니면서 모은 수면제로 자살을 기도했는데, 위 세척 후 겨우 살아났다. 수면제 사건이 일어난 지 이틀 후 고위관계자 K씨가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평소 안면이 있는 K씨에게 방송 출연 정지 사실을 알렸다. 다음날 방송 출연 금지는 없던 일이 돼버렸다.
‘저 사람이 내 남편인가’
원하지 않은 영부인 자리에 올라야 했고 어느 날 갑자기 그 자리를 떠나야 했던 최규하(崔圭夏·1919~2006) 대통령의 아내 홍기(洪基·1917~2004) 여사.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대통령의 자리는 ‘법대로’ 최규하 국무총리에게 넘어갔다. 헌정사상 249일이라는 최단 기간 영부인 자리에 있던 홍 여사는 청와대로 들어가기 전 기자회견에서 영부인으로서의 구상을 묻는 질문에 별다른 답을 하지 못했다.
당시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이 그 질문에 답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였다. 영부인으로서 대외활동이 거의 외부에 드러나지 않은 홍 여사. 청와대 입성에 앞선 인터뷰에서 “살림이 취미인 구식 여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그는 역대 영부인 중 가장 영향력 없는 영부인이었다.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보이던 홍 여사는 당시 정치적인 상황에 맞춰 영부인 직을 수행하려고 노력했기에 조용히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홍 여사는 ‘궐 밖’으로 나간 이후 서울 마포구 서교동 집 근처 망원동 시장에 반찬거리를 사러 다니는 등 역대 다른 영부인이 누리지 못한 자유를 만끽하면서 생활했지만, 정치적인 혼란기에 영부인 자리에 올라 ‘조용히’ 보낸 것이 과연 잘한 일인지는 후세가 판단할 몫이다.
1980년 8월27일, 전두환(全斗煥·76) 대통령 취임식은 이 땅의 민주화를 애타게 기대하던 국민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 날이다. 이날 대통령의 고향인 경남 합천에서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는 경축잔치가 마련됐지만 그것은 ‘그들만의’ 축제로 끝났다.
마흔두 살이라는, 역대 영부인 중 가장 젊은 나이에 청와대에 입성한 이순자(李順子·68) 여사. 이 여사는 컬러 TV시대 개막에 걸맞게 화려한 색상의 옷을 즐겨 입었다. 역대 영부인 중 이 여사만큼 여론과 국민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던 영부인도 드물다. 외국 순방길에 입은 금박 두른 한복 때문에 ‘사치하는’ 영부인으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이 여사의 성격은 솔직담백한 편에 속한다. 이런 성격은 대통령 취임식 직후 이뤄진 인터뷰에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차를 타고 (대통령 취임식장에 가기 위해) 광화문을 지나가면서 대통령의 취임을 축하하는 무지개 모양의 아치를 보고는 뛰어내려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기뻤다. 그뿐이 아니다.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엄숙하게 서 있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저 사람이 내 남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정인을 구속해서는 안 된다”
영부인이 된 자신의 들뜬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직성이 풀리는 이 여사. 그는 남편에게 자신의 의사를 솔직하게 표현하고 관철하려 했던 영부인으로 평가받는다.
1981년 1월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전 대통령 내외와 수석비서관 및 1급 이상 비서관들이 모여 신년하례식을 가졌다. 하례식을 마친 박철언(朴哲彦· 65) 정무비서관이 이상주 교육문화수석과 함께 소회의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전 대통령과 이 여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 대통령은 두 사람에게 “새세대육영회에 대한 기본 취지 및 기금관리 정관 등을 연구해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새세대육영회에 대한 전 대통령의 애착은 매우 컸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이 여사의 ‘애착’이었다. 전 대통령은 “새세대육영회는 빈곤지역부터 파고들어 여성운동을 통해 여성을 조직화하고 결국 전 국민에게 혜택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통령의 ‘발언’은 이 여사의 ‘뜻’을 전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2000년 10월 서울 이화여고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전국여성대회에서 치사를 하고 있는 이희호 여사.
전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의 딸 박근혜(朴槿惠·55·전 한나라당 대표)가 이끌었던 ‘새마음봉사단’의 경우 최태민을 둘러싼 여러 가지 부정이 있었지만, 새세대육영회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필요한 것이므로 영부인이 회장을 맡아 책임지고 운영하도록 하고 조용한 가운데 전국적으로 조직화해 국민운동으로 만들라”고 군 지휘관과 같은 명령조로 잘라 말했다. 전 대통령의 지시는 “한번 검토해보라”가 아니라 “꼭 해야 한다”였다.
결국 1981년 5월21일 새세대육영회 창립총회가 열렸고, 영부인이 회장에 취임했다. 유아 조기 교육기관인 ‘새세대육영회’와 심장환자를 돕기 위한 ‘새세대 심장재단’의 기금 마련과 공격적인 운영과정에서 보여준 거침없는 당당함이 국민의 눈에 좋게 보일 리 없었다. 남편이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대통령에 오른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이 여사는 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새세대육영회를 활용하려 했다.
이 여사는 육 여사와 마찬가지로 활동적인 내조를 펼친 편이다. 그러나 대통령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육 여사와는 반대로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새세대육영회와 새세대심장재단은 이른바 5공 비리를 언급할 때마다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 여사는 경기여고를 거쳐 이화여대 의대에 진학한 수재지만 대학 1학년 때 결혼과 동시에 학업을 중단했어요. 그는 꿈이 원대한데다 활동적인 성격의 소유자예요. 의사가 되고자 한 자신의 꿈을 접은 이후 잘나가는 군인의 아내로 살았지만 뭔가 채워지지 않은 허전한 구석이 있었던 거죠. 새세대육영회 등은 그의 빈 가슴을 채우기 위한 사업의 일환이었다고 생각돼요.”
5공화국에서 요직을 두루 거친 한 정치인의 말이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1982년 5월17일, 청와대 본관 서재에서 수석비서관 회의가 열렸다. 의제는 이철희·장영자 부부의 사기사건. 전 대통령은 이날 “정치적 속죄양을 만들기 위해 특정인을 구속해서는 안 된다”며 “의연한 자세로 이 사건을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특정인’은 대통령의 처삼촌인 이규광씨를 뜻했다. 당시 친정 식구가 이 사건에 연루됐다고 알려지자 이 여사는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언급된 전 대통령의 ‘주문’은 이 여사의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미 들끓고 있는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이씨의 구속은 불가피했다. 아무도 대통령의 지시를 거스르지 못한 상황에서 박철언 정무비서관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았다.
같은 날 오후 5시. 전 대통령과 박 정무수석이 마주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10여 분이 넘도록 깊은 침묵이 흘렀다.
“각하, 용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박 정무수석이 먼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굳게 다문 대통령의 입에서 “그래! 구속해”라는 말이 어렵게 떨어졌다. 박 정무수석은 “각하! 뼈아픈 용단에 감사드립니다”라는 말을 남긴 채 서둘러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이튿날인 5월18일 이규광씨는 이철희·장영자씨로부터 1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전 대통령은 처삼촌 이씨의 구속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작년(1981년) 추석 전에 내자(이 여사)가 (이규광씨에게) 강력하게 주의를 환기시켰다”면서 “(처삼촌이) 검은손의 왕초로 보도되는 것을 보니 실력자 행세를 하고 다닌 것이 분명해 보인다. 1억원 수수 사실만 입건하지 말고 다른 건도 조사해 입건하라. 앞으로 (대통령 친인척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라도 (처삼촌의) 하수인까지 모조리 잡아서 조사하라”고 강력히 지시했다.
‘작은아버지가 곤경에 처하지 않도록 좀 봐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이 여사는 대통령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압력’을 행사했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결국 고심 끝에 아내의 청을 거절한 것으로 전해진다.
1987년 12월16일. 사상 최초로 직선제 선거를 통해 민정당 노태우(盧泰愚·75)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돼 이듬해 2월25일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6공화국이 출범했다. 노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김옥숙(金玉淑·72) 여사가 ‘조용한’ 내조를 펼쳤다는 점이다. 대선 기간에 보여준 내조의 틀은 영부인이 된 이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김 여사가 외부에 드러나지 않은 그림자 내조를 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이순자 여사의 영향이었다. 이 여사가 새세대육영회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치는 과정에 국민의 원성을 사고 여론의 뭇매를 맞았기 때문이다.
“여보, 철언이 공을 잊어선 안 돼요”
노 대통령은 김 여사에 대해 “유난히 수줍음을 많이 타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남 앞에 절대 나서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했고, 톡톡 튀는 행동으로 늘 화제를 몰고 다닌 이순자 여사와는 다르다는 점을 은연중에 내비쳤다. 하지만 김 여사의 ‘이미지’는 대선 과정에서 홍보전략팀이 만들었다는 게 정치권의 정설이다.
“대통령 부인이라는 위치는 참으로 묘한 자리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공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인으로서 개인적 자유를 갖기도 힘든 자리입니다.”
김 여사가 영부인 자리를 떠난 뒤 모교인 경북여고의 교지 ‘백합’에 기고한 내용 중 일부다.
김 여사는 자신이 영부인이 아닌 ‘대통령의 부인’으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에 따라 청와대의 공식문서와 서신에는 ‘대통령 부인’이라는 표현이 등장했고 언론도 ‘대통령 부인’이라고 표기했다. 권위주의 탈피를 주장한 김 여사는 겉으로는 대통령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고 간섭하지 않은 것으로 비쳤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6공화국도 친인척의 문제가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5공화국이 대통령의 형제와 처가식구 등 양쪽 집안이 각종 이권(利權)에 관련된 반면 6공화국은 주로 김 여사 친인척의 정치 참여가 문제가 됐다. 5공화국을 거울 삼아 노 대통령이 친인척의 정치활동을 막겠다고 공언하자 김 여사는 이에 반발하는 오빠 김복동씨에게 눈물로 호소했다.
“오빠, 옛날 같으면 삼족이 멸하는 지름길이에요. 제발 (정치할 생각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주세요.”
이렇듯 친인척의 정계진출에 결사반대했던 김 여사가 유일하게 밀어준 사람은 다름 아닌 고종사촌 박철언 전 체육청소년부 장관이었다. 박 전 장관이 6공화국의 황태자로 불리며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데는 그의 뛰어난 능력 못지않게 사촌누나인 영부인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여보, 철언이의 공을 잊어서는 안 돼요.”
대통령 취임식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김 여사가 노 대통령에게 건넨 말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대로 박 전 장관은 6공화국 내내 대통령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이었고 그의 뒤에는 김 여사가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었다.
김 여사에 대해 ‘그림자 내조로 일관한 조용한 영부인’이라고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사실 김 여사는 어느 영부인보다 베갯머리송사에 능했다는 게 정치권 인사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민원이 있으면 대통령비서실보다 영부인 업무를 관장하는 제2부속실을 통하는 것이 훨씬 빠르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김 여사가 대통령에게 끼친 영향력은 이순자 여사보다 한 수 위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군인들 사이에 남편이 별 한 개면 아내는 별 두 개라는 우스갯소리가 떠돌잖아요. 오랫동안 군인의 아내로 살아온 5·6공화국의 청와대 안주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대통령 위에 군림하는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5·6공화국 비리 양산에 일조한 것도 사실이고요.”
김영삼(金泳三·80) 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관으로 근무했던 모씨의 말이다.
“됐다, 마”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부인 손명순(孫命順·78) 여사는 역대 영부인 중 가장 비정치적이고 소극적인 영부인으로 손꼽힌다. 중학교 때부터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간직한 남자와 결혼한 죄(?)로 30여 년 동안 묵묵히 정치인 아내의 길을 걷다 영부인이 된 손 여사. 그는 남편 앞에 나서는 법이 없었고 남편이 하는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청와대에 들어가서도 내조 방식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손 여사는 서울 동작구 상도동 자택에 찾아오는 기자나 손님에게 때가 되면 밥상을 차려줬고 인사를 나눴을 뿐 정치 현안이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손님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거실보다는 외부인의 간섭을 전혀 받지 않는 안방에 있기를 즐겼다. 손 여사는 ‘대통령 상전은 영부인’이라는 주제에 가장 부적합한 인물이었다. 자기 목소리를 내는 일이 거의 없었고 대통령의 결정에 영향을 끼치는 언행을 삼갔기 때문이다.
이런 손 여사가 딱 한 번 대통령에게 ‘생떼’를 쓴 적이 있다. 문민정부 당시 ‘소통령’이라는 소리를 듣던 차남 현철씨가 1997년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될 때 남편에게 “구속만큼은 면하게 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부탁한 것이다. 입술을 꾹 다문 채 손 여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 대통령은 “됐다, 마”라는 한마디로 아내의 청을 거절했다. 남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 손 여사는 청와대 비서진에게 “오늘은 바깥 날씨가 춥지 않냐”고 묻는 것으로 구치소에 있는 아들 걱정을 표현했다고 한다.
결혼 전 여성운동가로 활약한 김대중(金大中·81)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李姬鎬·85) 여사는 역대 영부인 중 최고의 학력을 지녔다. 이화여대, 서울대 사범대 교육학과 졸업 후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58년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에 위치한 스카렛대 대학원에서 사회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엘리트 여성이다. 이화여대 강사, YWCA 총무를 역임한 화려한 이력만큼이나 자기 목소리와 주장이 강한 편에 속한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의 아내이기에 앞서 정치적 동지다. 1971년 김대중 살인음모사건과 1973년의 납치사건, 1975년 선거법위반 재판,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1980년 5월17일 사형 구형 등 이 여사는 남편과 더불어 숱한 고난과 시련을 견뎌냈다.
이 여사는 청와대에 입성할 당시 “대통령을 감시하고 잘못한 일에 대해 조언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똑똑한’ 이 여사는 정치뿐만 아니라 남편의 ‘모든 것’에 관여하고 참견하는 편이었다고 알려졌다.
“무슨 그런 색깔을 매고 가냐”
1992년 초여름 동교동 사저 거실. 김대중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이 지방에서 개최하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김포공항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이때 이 여사가 남편을 배웅하기 위해 안방에서 거실로 나왔다. 비서진이 “비행기 탑승시간이 다 됐다”고 재촉하는데, 이 여사가 남편의 붉은빛 넥타이를 보더니 “무슨 그런 색깔을 매고 가냐”고 투덜댔다. “어? 이거. 전문가인 코디네이터가 골라준 건데….” 이 여사는 남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코디네이터에게 넥타이 꾸러미를 갖고 오라고 시켰다. 코디네이터는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양 얼굴이 붉어졌고 김 최고위원은 안절부절못했다.
“정치적인 동지로는 적합할지 모르지만 아내로서는, 글쎄요. 남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스타일은 결코 아니죠. 자기 주장 강하고, 남편의 말에 또박또박 자신 의견을 개진하고. 남편이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일을 하려고 할 때는 끝까지 딴죽 걸고 넘어지고. 동지로는 괜찮았지만, 아내로서는 좀….”
김대중·이희호 부부가 살아가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본, 문민정부 시절 청와대 요직에 있던 한 정치인의 소회다.
“김대중 정부 시절 이 여사에게 줄 서는 사람이 많았어요. 대통령 못지않게 영부인의 파워가 막강했기 때문이지요. 이 여사와 사회운동을 함께 한 재야인사와 여성계 인물의 등용에는 대체로 이 여사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의 말대로 이희호 여사는 역대 영부인 중 대통령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영부인으로 꼽힌다.
이번 취재 중 만난 정치인과 일반인에게 “대통령이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은 누구일 것 같냐”고 물었다. 정치인들은 100% “마누라, 즉 영부인”이라고 답했고 일반인 중에서도 상당수가 “영부인”이라고 답했다. 다음은 한 전직 장관의 대답이다.
“대통령이라고 뭐 별거 있나요. 한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이기 이전에 한 여자의 남편이잖아요. 마누라에게 책잡힐 일 하다 들켜봐요. 대통령도 별수 없이 마누라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용서를 빌 수밖에요. 천하를 주무르는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아내의 화를 돋우면 당연히 마누라에게 닦달당하지요. 성격에 따라 부부싸움의 강도와 방법이 다를 뿐이죠. 부부가 사는 것, 대통령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아요. 장관도 마찬가지예요. 밖에 나가서는 머리 숙일 일이 별로 없는데 마누라에게는 ‘미안하다’고 빌어야 할 일이 종종 벌어진다니까요. 마누라가 이혼하겠다고 박박 우겨봐요. 정치인으로서 그것보다 더 큰 타격이 어디 있겠어요. 정치인의 아내는 ‘의전용’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정치권에 떠돌아다녀요. 어쨌든 마누라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게 정치인으로 성공하는 첫 번째 수칙이지요.”
대통령에 대한 영부인의 영향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힘과 파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영부인은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제1참모’이기 때문이다. 이 핵심 참모가 어떤 소임을 감당하고 수행하느냐에 따라 대통령의 성공 여부가 가려진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