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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集安)에서 단둥(丹東)까지, 고구려 유적 답사기

1500년 전 대륙 호령하던 태왕의 기상을 만나다

  • 윤완준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zeitung@donga.com

지안(集安)에서 단둥(丹東)까지, 고구려 유적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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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4m. 아파트 5층 높이와 맞먹는다. 한 변의 길이가 3.3m나 되는 돌을 사각뿔 모양으로 차곡차곡 쌓아올렸다. 맨 아랫돌은 하나만도 5.5m나 된다. 그런 돌 1100덩이를 잘 다듬어 쌓았다.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모양이 웅대하다. 중국인들이 ‘동방의 피라미드’라 부른다는,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의 ‘장수왕릉’. 1500년 세월의 더께를 견딘 의연함이 자랑스럽다. 제2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우수자들과 중국 지안,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시 일대 고구려 유적을 답사했다.
지안(集安)에서 단둥(丹東)까지, 고구려 유적 답사기

답사단은 닷새 동안 백두산·지안·단둥 지역의 고구려 유적지를 차례로 답사했다.

중국에 도착한 지 사흘째인 8월16일. 마침내 장수왕릉 앞에 섰다. 현대 건축의 눈으로 보면 높이나 크기 다 보잘것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1500년 전이다.

쌓은 돌을 다 합치면 무게가 6000t이 넘는다. 철골로 기둥을 세우고 콘크리트를 쏟아 부어 만든 현대 건축물도 200년을 버텨내기 힘들다. 이 석릉은 무려 1500년을 견뎠다. 장수왕릉은 지안에 남아 있는 왕릉급 돌무지돌방무덤(積石石室墓) 중 가장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장수왕릉이 있는 곳은 룽산(龍山)의 기슭이다. 장수왕릉에 오르니 지안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 흐르는 압록강 건너 북한 자강도 만포시도 보였다. ‘왕릉에 올라 세계를 내려다보니’ 한순간 천하를 얻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필자는 제2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등급별 성적우수자 학생, 학부모, 역사 교사 30여 명과 지난 8월14~18일 중국 지안, 랴오닝성 단둥시 일대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했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주최하고 ‘동아일보’가 후원한다.

이번 시상에 신설된 가족상 부문 1위를 차지한 최하림(48)씨 가족, 대입수학능력시험이 채 100일도 남지 않은 최우석(18·순심고 3년)군 등 답사단의 면면은 다양했다. 고혜령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 등 위원회 직원도 답사에 동참했다. 역사 교사는 모두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출제자들. ‘역사’ 하면 자다가도 일어날 이들이기에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고구려 왕릉의 위용은 감탄 그 자체였다.



장수왕릉 축조의 비밀

지안(集安)에서 단둥(丹東)까지, 고구려 유적 답사기

중국 지린성 지안시 고구려 국내성 인근 환도산성(수도방어용 산성) 아래에 대규모로 자리잡은 고구려 무덤군.

답사단의 관심은 이 엄청난 규모의 석릉이 오랜 세월 제 모습을 끄떡없이 지켜낸 비밀로 옮아갔다.

첫 번째 비밀은 튼튼한 기초공사에 있었다. 왕릉 주위 바닥을 길이 1m 안팎의 큰 돌덩어리로 둘러쌓았다. 돌 사이 틈은 강돌로 다졌다. 이처럼 탄탄한 기초 덕분에 장수왕릉의 돌은 엄청난 무게에도 밀려나지 않았다.

그랭이 기법도 빠질 수 없다. 그랭이 기법은 가공하지 않은 자연의 돌 ‘덤벙주초’를 생김새 그대로 살려 쌓는 방법이다. 이 기법은 불국사 기단에도 쓰였다. 장수왕릉은 돌을 쌓을 때 돌과 돌을 원래 모양 그대로 완벽하게 접합해 무게를 견딜 수 있게 했다. 자연과 하나 되는 건축을 추구한 빼어난 멋을 보여준다.

층마다 조금씩 들여 쌓는 퇴물려 쌓기도 눈여겨볼 만하다. 고구려 특유의 축조 방식인 퇴물려 쌓기가 장수왕릉에도 사용됐다. 밑돌의 가장자리에 홈을 파고 그 홈에 맞춰 윗돌을 맞물리게 들여 쌓아 수직 압력을 견딜 수 있게 한 것이다.

장수왕릉에서 눈에 띈 것은 왕릉 사방에 기대어 세워놓은 커다란 자연석이다. 모두 11개로, 동서남쪽 면에 각 3개씩 있고 북쪽 면만 2개였다. 돌마다 어른 키의 두 배는 넘어 보였다. 가장 작은 돌 무게가 15t이라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장수왕릉의 기단 돌이 밀려나지 않게 쌓은 받침돌이라는 얘기가 있다. 십이지(十二支)를 상징하는 수호신이라는 말도 있다. 학자들이 연구해보니 받침돌 기능은 하지 못하고 왕릉을 세운 4~5세기엔 십이지가 전해지지 않아 신빙성이 없다는 얘기도 있다. 수수께끼의 돌이다.

답사단은 장수왕릉 주변을 한 바퀴 돌며 이 비밀들을 눈으로 확인했다. 널방으로 올라가면서 장수왕릉 곳곳에 숨은 축조의 비밀을 봤다. 널방은 4층 한가운데에 있었다. 한 변이 5m 정도이고 높이는 5.5m다. 널방 안엔 널받침 2장만 나란히 남아 있었다. 본래 장수왕릉과 왕비의 관이 놓여 있었으리라. 널방 안의 유물은 발견 당시 이미 도굴 당한 뒤라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장군총’이란 이름도 10여 년 전 장수왕릉을 발견한 중국인들이 ‘어느 중국 장군의 묘’라고 생각해 붙인 것이다. 유물이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널받침 위에는 중국 지폐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우리 지폐도 보였다. 관광객들이 이곳에서 소원을 빌며 던져놓은 것이다. 장수왕릉이 세계문화유산이란 점을 생각하니 눈살이 찌푸려졌다. 더 한심한 건 널방 곳곳에 습기가 가득 찼다는 점이다. 널방 입구에는 관리원으로 보이는 중국인이 2명 있었지만 그런 데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수수께끼의 돌이 하나 부족한 북쪽 면엔 돌덩이들이 무너져내린 곳도 있었다.

중국 정부는, 2004년 유네스코(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문화유산이 되기 전에는 널방은커녕 장수왕릉 근처에도 못 가게 했다고 한다. 비디오 촬영을 금하기도 했다. “그렇게 감추며 아끼는 시늉을 하더니…” 참가자들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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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완준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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