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최전선’ 로버트 카플란 지음, 이순호 옮김, 갈라파고스, 608쪽, 2만5000원
벤저민 플랭클린의 말이다. 현재 ‘대(對)테러전쟁’ 명목으로 전세계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는 미국이야말로 제국의 가장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비록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제트기와 인터넷으로 세계가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21세기에 전세계인의 문화를 정복하고 있는 미국이야말로 진정한 21세기형 제국일 것이다.
21세기형 제국, 미국의 속내
미국이란 나라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 반미(反美), 친미(親美) 그리고 용미(用美) 등 여러 용어가 난무하는 현시점에서 미국은 “그저 고맙기만 하던 형”에서 “너무 믿어서도 안 되지만 너무 멀리해서도 안 될 친구”로 마음속에 다시 자리를 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미순이-효선이’ 사건 이후 주한 미군에 대한 감정이 곱지만은 않은 우리에게 미국인의 속내를 보여주는 책이 한 권 있어 살펴본다.
스파르타인의 검은 짧았다고 한다. 적과 가까이 붙어서 싸웠기 때문이다. 용맹했던 스파르타인에 대한 동경이 이 책의 작가인 로버트 카플란에게 있는지 모르겠다. 카플란의 2004년작 ‘제국의 최전선’은 적과 가장 가까이 붙어 싸우는 최전선의 병사들에 관한 기록이다. 그러나 로버트 카플란의 시각은 언론인의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일선에서 싸우는 병사의 것에 가깝다. 바로 이 점이 이 책이 쉽게 읽히는 이유이며, 또한 공감과 반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원인이다.
이 책의 장점은 미국인이, 아니 미국의 ‘최전방’에 선 군인들이 어떤 생각으로 세상을 대하는지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현장의 증언을 모아놓은 녹취록이다. 다음 내용을 보면 명백하다.
“척추 뼈가 부러지도록 먼지 속에서 계속 앉았다 일어났다 반복하는 무장차량 지붕 위의 사수에게 야구모자를 쓰라고 해보세요. 얼마나 좋아하나. 그럴 때 그 대원의 사기는 하늘을 찌릅니다. 그 모자를 씀으로 해서 시스템을 엿 먹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죠.”
작가의 시각, 군인의 증언
카플란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필리핀, 콜롬비아 등 미국이 ‘전쟁’을 벌이고 있는 최전선을 직접 방문했다. 그리고 카플란은 군을 가장 현실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집단인 영관급 장교나 부사관들과 어울리면서 일선의 통찰을 이 책에 잘 반영했다.
또한 현장의 중대장이나 부사관이 펜타곤의 복잡한 관료체제를 거치지 않고 성공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을 짧게나마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 바로 이런 매력에 이끌려 카플란은 프로군인들이 활동하는 전장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각은 현장에는 한발 가깝고 수뇌부로부터는 한발 먼 위치에 있다. 전세계에 걸친 ‘미국 제국’의 최전선에 배치된 수많은 프로군인의 다양한 면모를 조명하면서, 21세기 아메리카 제국에 가장 이상적인 군인이 어떤 모습인지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제3장에 등장하는 ‘토마스 윌헴 중령’이다. 뛰어난 레인저 대원일 뿐만 아니라 훌륭한 군사외교관인 윌헴 중령은 몽골에 파견돼 칭기즈 칸의 후예들을 “미국 제국의 평화유지군”으로 만들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제국의 최전선에 선 지상군은 전투도 전투거니와 제국의 동맹군을 강화할 수 있는 군사외교관이어야 한다는 카플란의 ‘통찰’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불순한’ 세계관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국의 최전선’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장점은 다름 아닌 ‘미국인으로서의 솔직한 시각’이다.
그는 미군의 주둔이나 파병을 정당화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저 주어진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는 프로군인처럼, 카플란도 그저 제국의 최전선을 묘사하는 임무를 묵묵히 수행한다. 사실 그의 이런 시선과 통찰은 작가 자신의 것이라기보단 프로군인들의 입을 통해 나온 증언에 바탕을 둔 것이기에 훌륭한 기초 자료라고 할 수 있겠다.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은 미국 제국주의의 현 단계를 나타내는 것에 불과했다. 그런 반면 테러리즘은 예멘과 같은 나라들의 정치적 허약함의 원인이자 또한 그것을 나타내는 징표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미국은 현대화라는 매우 거추장스러운 과정과 싸우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개인적으로 미국인이나 미군을 만날 기회가 종종 있는데, 그때마다 표면상으로는 미국이 제국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카플란의 담론은 미국이 제국임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 책엔 그런 제국이 쇠퇴하기를 바라지 않는 제국시민의 솔직한 바람이 표현되어 있다.
이 책의 단점을 지적하는 의견도 여럿 있을 것이다. 일단 미국이 세계 각국에 정치적 혹은 군사적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혐오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그야말로 루시디의 ‘악마의 시’처럼 느껴질 수 있다. 미사여구나 은유 같은 여과장치 없이 직설적으로 뿜어대는 일선 군인들의 말이야말로 이 책의 장점이면서도 단점인 것이다.
특히 카플란의 세계관은 읽는 이로 하여금 거부감을 갖게 한다. 세상은 위협으로 가득 차 있고 부족과 문화의 갈등이 국경에 걸쳐 있는 상황에 미 제국의 병사들이 투입돼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세계관이다. 심지어 서문에는 그의 이런 ‘불순한’ 세계관과 의도가 다음과 같이 표현돼 있다.
“내가 국내외 기지에 주둔해 있는 미군에 관심을 갖는 부분은 전쟁과 정복이 아니다. 그들이 제국을 관리하는 방식을 알아보고 그 적용을 위한 일종의 관리 지침서를 만드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
또한 소수의 정예병사에 대한 작가의 동경은 자칫 오해받기 쉬운 측면도 있다. 그린베레나 해병들과 나누는 대화에서 그는 21세기 전쟁은 대규모 부대의 투입보다는 소수정예에 의한 군사작전이 해결책이라는 결론을 은연중에 도출하고 있다.
그러나 카플란은 군사전문가가 아니다. 미국이 성공적인 전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특수부대가 뛰어나고 ‘람보’ 같아서가 아니라 특수부대가 네트워크 전쟁(Network Centric Warfare)을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주체였기 때문이라는 점을 카플란은 간과하고 있다.
조용한 프로들의 낭만적 일상?
게다가 이 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런 “조용한 프로들(Quiet Profe-ssionals)”의 일상을 매우 낭만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비록 본인들이 그런 위험한 인생의 낭만을 즐긴다고 하더라도 어느 나라에서도 실제 군 생활이란 그리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바로 그런 부분에서 이 책은 한쪽의 진실만을 바라보는 측면이 있어 보인다.
그래서 이 책은 민감한 정치군사적 이슈를 다룬 책이라기보다는 미군 변방을 돌면서 쓴 여행기 같은 느낌을 감출 수 없다. 원래 로버트 카플란이란 작가의 삶 또한 전세계의 분쟁지역을 쫓아다니는 ‘낭만’의 연속이기에 프로군인들에 대한 동경이 배어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점은 번역이다. 번역가는 매우 장황했을 원어를 읽기 쉽도록 훌륭하게 우리말로 옮겨주었다. 그러나 문제는 다름 아닌 용어였다.
국내에서는 아직 군사분야 용어에 대한 번역 기준 같은 것이 제시돼 있지 않아서인지 ‘연합합동기동부대(JTF)’ ‘포사격기지(FOB)’ ‘기압을 조절하지 않는(unpressurized)’ 같은 번역은 눈에 거슬린다. JTF(Joint Task Force)는 합동특수임무부대, FOB(Forward Operating Base)는 전방작전기지 혹은 전방지휘소, Unpressurized(Cavin)는 ‘여압조절이 안 되는(화물칸 또는 객실)’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군사용어에 대한 정확한 번역이 따라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