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식 입시 영어’와 ‘본고장 영어교육’의 괴리
- ‘한영사전식 영어’부터 내다버려라
- 파란 눈에 노란 머리만 진짜 원어민 강사?
- 영국 교실에 ‘공부’ 잘하는 아이는 없다
- 영국의 능력별 수업, 거부감 갖는 부모 없어
- 때로는 무식한 엄마가 성공한다
영국 워릭(Warwick)대학교 부설 영어교사 교육센터(The Centre for English Language Teacher Education)는 100여 개 나라에서 모여든 전현직 영어교사 및 영어교육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효율적인 영어교수법을 가르치는 ‘교사들을 위한 교육기관’이다. 이 센터 석·박사 과정에 재학 중인 한국인 세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셋 다 ‘사교육 1번지’ 서울 강남에서 영어 강의로 억대 연봉에 버금가는 수익을 올리던 유명 강사 출신. 내로라하는 강남 영어강사들이 영어의 본고장에 유학 와서 몸으로 느낀 ‘코리안 영어’의 한계와 가능성을 진단했다. 참석자 : 김인경, 장혜진, 한수남 |
사회 : 오늘 모이신 분들은 한국에서 10년 넘게 영어를 ‘가르치다가’ 영어의 본고장인 영국에 와서 영어를 ‘다시 배우고’ 있습니다.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 보니 한국의 영어교육 현실이 어떻게 보이던가요.
김인경 : 지난 2년 동안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한국의 입시제도가 가장 문제라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됐어요. 언어 습득에 있어 아이에게 필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영어의 본고장에서 체계적으로 배우고 여러 가지 실험도 해보았지만 결국 입시제도를 따라가야 하니 선생님들도 어쩔 수가 없는 거죠.
장혜진 : 입시는 단기간에 제한된 시간을 투자해서 얼마나 거둬들이느냐가 관건이거든요. 가능한 한 머리에 많이 ‘우겨넣고’, 패턴을 이해한 뒤에 수능에서 변형된 패턴이 나오더라도 수험생이 적응할 수 있게끔 ‘트레이닝’ 시키는 작업이죠. 제가 한국에서 하던 일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3등급 아이를 1등급으로, 4등급 아이를 2등급으로 끌어올리는 것이에요.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한국식 입시 영어’와 ‘본고장 영어교육’의 괴리를 절실하게 느낍니다.
한수남 : 제가 일하던 학원은 입시 영향을 크게 받지는 않았어요. 주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니까요. 그런데도 담당 강사의 계획대로 수업을 진행하다 보면 “옆 반 아이들은 벌써 몇 단계 책을 배우니 그 반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조르는 부모가 많아요. 심지어는 “내가 가르쳐서 그 반에 들여보낼 테니 교재나 내놓으라”는 부모들도 있어요.
‘무조건 1등’ 노이로제
사회 : 영어 전문강사로서 무력감을 가질 때가 많겠군요.
한 : 답답하죠. 텍스트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어떤 상황을 미리 경험하게 하고 교재에서 배울 단어들을 몸으로 익혀보도록 하는 게 제 목표인데, 그런 건 다 무시하고 단어만 달랑 외우게 해서 그 반으로 밀어넣겠다니 말이죠.
장 : 특히 강남 엄마들은 자신의 학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요. 그래서 자신이 직접 가르쳐 한 달 만에 자녀를 상급반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요.
김 : 성적제도에도 문제가 있다고 봐야죠. 영국의 교육현장에서는 목표등급을 정해놓고 학력수준을 올려주는 게 가장 중요하거든요. 현재 3단계의 실력이면 5단계 정도로 타깃을 설정해놓고 이 목표를 달성하도록 도와주는 거죠. 그런데 한국은 무조건 등수로만 평가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어요. 현재 수준이 어느 단계이든 간에 무조건 1등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죠.
사회 : 학원에서는 그룹별로 레벨 테스트를 하지 않습니까.
한 : 물론 레벨 테스트를 하지요. 3개월 단위로 평가해서 일정 레벨이 되지 않으면 반을 옮겨주기도 하고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평가의 목적이 뭐냐는 거죠. 어떻게 해서든지 최상위 그룹에 집어넣는 게 목표라면 과연 그렇게 하고 난 다음의 목표는 뭐냐는 질문에 부딪힐 수밖에 없지요. 영국 초등학교에서도 평가를 하지만 아이들에게 더 좋은 교육의 기회를 주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우리처럼 그 자체를 목표로 삼는 건 아니에요.
김 : 한국은 모든 평가가 점수로 매겨지게 돼 있어서 모두 100점이 나와야만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영국에는 100점이라는 게 아예 없어요. 우리 아이가 배울 수 있는 범위를 제시하고 그 범위 내에 들어가거나 그 범위를 뛰어넘는 걸 목표로 하는 거죠.
<b>…김인경(41)</b> 압구정동 Yn 어린이 영어교육연구소장. 율동, 영어노래 등 어린이 영어교수법 개발 전문가로 ‘우리 아이가 영어 동화에 푹 빠졌어요’를 펴내기도 했다. “경제력은 몰라도 정보력만큼은 자신 있다”는 자칭 ‘강남 엄마’다.
김 : 한 학급 안에 수준별로 여러 그룹이 나뉘어 있어요. 중학교 다니는 우리 아이 수업내용을 들여다보니까 ‘로미오와 줄리엣이 첫날밤을 보내고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를 주제로 에세이를 써오라는 거예요. 천차만별의 답이 나올 수 있는 이야기죠. 그리고 그중에서 제일 잘 쓴 아이의 습작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쓰면 A+를 받는다고 가르치는 거예요. 반면 실력이 못 미치는 아이들에게는 그것보다 쉬운 과제를 내줍니다. 물론 불만이 있겠지만 이 아이들에게도 잘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자극받을 수 있게 기회를 주는 거죠. 한국의 경우 학교는 평균 레벨에만 맞추고 학원은 수준별로 따로 묶어 그 아이들끼리만 모아 가르치잖아요. 그러니까 아이들은 여기서도 못 따라가고 저기서도 재미를 못 느끼는 거죠.
장 : 한국과 같은 환경에서 영국처럼 능력별 반편성을 하면 아마 학부모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우리 아이도 상급반에 집어넣으면 해낼 수 있는데 왜 옮겨주지 않느냐”고 당장 항의할 거라는 말이죠. 학원에서도 반을 나눠놓으면 엄마들이 전화를 해요. “우리 아이는 수학과 과학은 모두 A그룹인데 영어만 좀 뒤떨어져서 B그룹이니까 영어도 A그룹으로 옮겨달라”는 거죠. 일단 동네 사람 보기 창피하고 친척들한테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거죠. 이러다 보니 김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영국식 교실운영을 한국에 도입하는 것은 학교에서도 힘들 테고 학원에서는 아예 불가능하다고 봐야죠.
사회 : 화제를 좀더 실질적 문제로 돌려볼까요. 얼마 전 ‘워싱턴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에 13만명의 한국인이 총 2030만달러의 전형료를 내고 토플을 치렀지만 정작 한국인 평균 성적은 148개국 가운데 103위를 기록했다죠. 한국인의 영어는 왜 늘 이런 수준에 머물러 있을까요.
‘영어 그릇’부터 갖춰야 하는데…
장 : 넓게 보면 영어가 늘지 않는 결정적 요인은 역시 입시제도입니다. 듣기와 말하기는 물론이고 심지어 읽기도 마찬가지예요. 읽기 교육을 하다 보면 지문의 내용 자체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이 지문을 바탕으로 출제되는 문항들을 얼마나 빨리 정확하게 풀 수 있을지에만 관심을 갖거든요. 생산적인 방향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거죠.
한 : 한국에서는 토익 교재와 문법 참고서를 끼고 살아도 입이 안 떨어지더니 영국에 와 살면서 실제로 부딪치니까 어느 정도 영어가 통하는 경험을 했어요. 결국 영어도 모국어를 쓰듯이 자주 사용할 기회를 줌으로써 살아 움직이는 언어로 만들 수 있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정확한 구문만 익히도록 강요하는 경향이 강하죠. 언어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잖아요. 아이들이 먼저 넓고 깊은 그릇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면 (거기서 밥을 퍼먹는) 도구는 나중에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장 : 공교육과 사교육을 막론하고 생산적 교육을 하기 위한 인프라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형편이에요. 그러니까 가야 할 방향이 정해져 있다고 해도 그걸 뒷받침할 선생님과 새로운 방침을 지지해줄 학부모가 없는 거죠. 학부모들 역시 1970, 80년대에 영어교육을 받은 세대라 말로는 “살아 있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럼 빨리 ‘Vocabulary 22000’부터 외워” 이렇게 되는 거죠. 아이들은 21세기를 살아가는데 부모나 선생님은 여전히 20세기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에요.
김 : 그런 면에서 보면 그나마 입시와 관계없이 선생님들이 신념을 갖고 영어교육 이론대로 소신껏 지도할 수 있는 시기는 어린이일 때밖에 없어요. 문제는 영어가 우리나라에서 ‘외국어’라는 거예요. 교실 안에서만 영어를 사용한다는 말이죠. 그러다 보니 영어의 쓰임새와 아이들의 실생활 사이에 연관관계가 없어요. ‘모비딕’ 같은 영어소설이 요즘 한국 아이들에게 인기 있다고 하지만, 결국 이것도 실생활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내용이거든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아이들이 생활 속에서 느끼는 주제를 다룬 만화를 읽히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요. 우리는 추상적인 데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사회 : 그래서 요즘은 아예 교과내용을 영어로 가르치면서 자연스럽게 영어를 익히도록 하는 이른바 몰입교육을 도입하는 학교도 늘어나고 있다지요?
한 : 그렇습니다. 우리말도 정작 문법 지식은 중학교에 가서나 배우잖아요? 마찬가지로 영어만을 떼어내서 ‘언어지식’을 가르치는 것보다는 하나의 교과목을 영어로 가르친다면 지금처럼 주어진 문장을 외우는 방식을 지양할 수 있겠죠.
김 : 맞아요. 미술 강의나 과학실험을 영어로 진행한다면 영어의 쓰임새는 쓰임새대로 배우고 해당 분야의 지식은 지식대로 배우는 거죠. 하지만 몰입교육을 한꺼번에 도입하면 학생들이 부담을 느낄 수 있으므로 신중할 필요도 있어요.
사회 : 먼저 읽기와 쓰기에 논의의 초점을 맞춰보지요.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다른 나라에서 온 학생들과 비교해 한국 학생들의 읽기와 쓰기 능력은 어느 정도이던가요.
열쇠는 ‘생각하는 힘’
<b>…장혜진(34)</b> 서울 강남을 주무대로 중1부터 고3 입시 영어는 물론 해외유학 중 일시 귀국한 중고생 대상 속성 문법지도까지 안 해본 것이 없는 입시 영어 베테랑 강사. 특히 ‘점수 올리기’ 영어교육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 학원가에서 ‘미다스의 손’으로 불린다.
김 : 그렇다고 한국 교육이 무조건 잘못된 것만은 아니에요. 특히 13세 이후에 영어학습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죠. 문법이나 어휘력이 뒷받침된 읽기 능력이 없었다면 제가 여기서 박사과정을 하면서 아마 과제물도 제대로 못 냈을 거예요(웃음).
장 : 우리나라 입시에서 읽기에 주안점을 두니 쓰기나 말하기에 비해 읽기 성적이 좋은 것은 사실이에요. 그런데 짧은 문장을 해석해내는 건 잘하지만 대학 가서 원서를 읽을 때 요구되는 종합적인 읽기 능력(extensive reading)이 달리는 게 가장 큰 문제죠. 아는 단어는 많은데 문맥에 정확하게 맞는 단어를 사용할 줄 모르는 것도 문제고요.
한 : 저희 학원에서는 외국 어린이들이 보는 책을 그대로 가져다가 교재로 사용하거든요. 그런데 이런 방식에 대한 부모님들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나요. 어떤 부모들은 밑줄을 박박 그어가지고 와서 “선생님, 이 단어는 저도 모르는 거예요. 어떻게 이런 단어를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죠?” 하고 따져요. 그런데 또 어떤 부모는 “어머, 신기해요. 아이한테 단어의 뜻을 물어보면 전혀 모르는데 전체적인 스토리를 다 꿰고 있네요”라며 고맙다고 하죠. 전체를 다 알지는 못하지만 일단 덤벼들어서 30%를 얻어내는 아이와 “30%나 모르니까 난 못해” 하고 포기하는 아이는 결승점에서 큰 차이가 난다고 보면 됩니다.
사회 : 문법이나 어휘력 면에서만 보면 한국 학생을 능가할 사람이 많지 않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왜 여전히 에세이를 써보라고 하면 한국 학생들의 실력이 달린다는 소리를 듣는 걸까요.
김 : 사실 한국 학생들이 어휘를 몰라서 고생하는 것은 아니에요. 어휘도 많이 알고 영어도 꽤 잘한다고 생각하는 학생도 정작 부딪히는 문제는 ‘생각하는 힘’이에요. 영어의 문제가 아니라 논리적 사고력의 문제죠. 결국 막판에 가면 ‘생각하는 힘’이 강한 아이들이 영어를 잘하게 돼 있습니다.
한 : 우리말로 글을 써보라고 했을 때 ‘나는 교회에 갔다. 재미있었다’, 이렇게밖에 못 쓰는 아이들은 영어로 수업하면서 똑같은 과제를 내줄 때 ‘I went to church. I had fun’이라고밖에 못 쓰거든요. 아무리 많은 단어를 머릿속에 집어넣고 있어도 정작 필요할 때 그걸 끄집어내지 못하는 거죠. 조기유학을 다녀와서 영어가 유창한 아이들과, 영어는 달리지만 사고력과 논리력 훈련을 한 비유학파 아이들에게 똑같은 수준의 글을 써보라고 하면 비유학파 아이들이 오히려 더 좋은 문장을 써내거든요. 그런 면에서는 자신감을 가질 필요도 있다는 거죠.
“Are you OK?” “…”
사회 : 하지만 읽기와 쓰기는 웬만큼 하는 학생도 정작 외국인 앞에서 쉽게 입을 떼는 경우는 드문 게 현실이죠. 한국 학생들이 말하기에 이렇게 자신감을 잃은 이유는 뭘까요.
장 : 현행 수능 영어시험에 형식적으로는 읽기 쓰기 듣기 말하기의 4가지 영역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하지만, 결국은 읽기 중심으로 치우쳐 있는 게 현실이거든요. 물론 마지막에 말하기 능력을 묻는 문제가 2~3문항 들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다음 중 이 대화에서 B가 해야 할 말을 고르시오’ 식의 문항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이러니 정작 학생들은 이걸 말하기 문제가 아닌 독해 문제로 받아들이는 거죠. 다섯 개 중에 정답을 하나만 찍으면 되는 거니까.
김 : 영국에 온 뒤로 가장 놀란 것이 영어로 인사하는 법이에요. 만나는 사람마다 날 보면 “Are you OK?”라고 물어보는 거예요. (우리가 배운 대로) “How are you?”라고 안 묻고. 그럴 때마다 아주 곤혹스러워요. 어디 아픈 데도 없는데 자꾸 “Are you OK?”로 물어보니까(웃음). 그러면 또 그냥 배운대로 “Fine”이라고 해야 할지 “It’s OK”라고 해야 할지 헷갈리는 거예요. 솔직히 전 지금도 상대방이 “How are you?”라고 하면 “I am fine, and you?”가 자연스럽게 나와요. 그런데 정작 제가 “How are you?”라고 인사하면 “fine” 어쩌구 하는 사람 단 한 명도 못 봤어요. 내가 “Thank you!”라고 하면 “You are welcome”이라고 받는 사람도 거의 없고요. 우리나라 말하기 교육은 바로 이게 문제예요. “How are you?”라고 물었을 때 “I am fine”은 맞고 “That´s OK”하면 틀리다는 거잖아요.
장 : 수능 영어과목 모의고사에 보면 가끔 “That´s OK”라는 대답이 나오기는 해요. 그러면 그걸 답으로 골라야 하는데, 교과서에 실린 공식대로 안 나오니까 학생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죠. 그러니까 모의고사에서는 이런 문제를 볼 수 있어도 정작 수능에서는 이런 문제를 내기가 힘들죠.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을 보면 외국인을 앞에 놓고 “왜 저 자식은 ‘I am fine. Thank you’라고 안 하고 딴소리 하는 거야?”라며 불평하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아직까지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 이런 수준인 것 같아요.
<b>…한수남(35)</b> ‘사교육 1번지’ 대치동 정상어학원의 인기 영어강사. 초등학교 고학년을 대상으로 10년 동안 학원 현장에서 갈고 닦은 실력으로 교육실습 나간 영국 초등학교에서 대치동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영국에 살면서 버버리 핸드백 쇼핑보다 영어동화책 사들이는 게 더 신난다는 ‘대치동 악바리’.
김 : 문화적 맥락도 크게 작용하지요. 영국 엄마들과 수다를 떨다 보면 상대방이 제가 한 질문의 취지와는 동떨어진 대답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제가 적재적소에 필요한 단어들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이거, 영어로 박사학위 따겠다는 사람이 원(웃음).
장 : 한국에서는 말할 필요를 못 느끼니까 안 하는 거죠. 학생들로서는 24시간을 어떻게 배분해서 성적을 올리느냐가 관건인데, 말하기 훈련할 시간에 수학과 사회탐구를 공부하면 더 높은 점수를 받으니까요.
“Can I solve my shoelace?”
김 : 특히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을 비교해보면 재미있어요. 영국에서 한날 한시에 학교생활을 시작했는데도 딸아이 영어 느는 게 아들녀석보다 훨씬 빠르거든요. 영국 친구들이 집에 놀러오면 아들 녀석은 게임이나 체스만 해요. 그런데 딸아이는 달라요. 무슨 수다를 그렇게 많이 떠는지…. 잘못된 표현을 하면 친구들이 고쳐주기도 하고요.
한 : 우리나라 엄마들은 존대말을 처음 배우는 자녀들이 ‘했다요’ 같은 실수를 하면 ‘귀엽다’고 칭찬해주잖아요. 그런데 영국에선 영어 표현에서 비슷한 실수를 하면 옆집 아이들과 비교하면서 나무라요. 이런 게 문제죠.
김 : 저는 영국에서 프랑스어도 배워봤어요. 우리나라에서라면 알파벳부터 가르치고 ‘be동사’부터 가르치겠죠? 그런데 여기서는 ‘내 이름은 ○○입니다’ ‘△△가 먹고 싶어요’ 같은 회화부터 가르칩니다. 4개월쯤 지나고 나서야 알파벳을 가르치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쓸 줄은 몰라도 말은 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처음부터 문법을 가르쳐놓으면 실수할까봐 말하기를 꺼리게 되거든요.
원어민 교사의 명암
사회 : 그래서 ‘살아 있는 영어교육’을 내걸고 영어마을이나 원어민 교사 초빙 같은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요즘 일선학교에서는 ‘스피치 콘테스트’도 자주 연다고 하던데요. 이러한 방식은 얼마나 효과를 내고 있다고 봅니까.
한 : 영어마을의 취지엔 공감해요. 그런데 실력이 천차만별인 아이들을 모아다가 “너희들 관심사가 뭔지 모르겠지만, 이 방에서는 빵 사는 흉내를 꼭 내야 돼!”하고 가르치는 게 과연 들이는 시간과 돈에 비해 얼마나 효율적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김 : 영어마을과 같은 시설은 분명 효과가 있어요. 상대방이 내 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그 사람이 알 수 있는 언어로 소통하자는 게 기본 취지거든요. 그렇게 하다 보면 자신감이 생기죠. 물론 스피치 콘테스트처럼 등수를 매겨서 상을 주는 건 문제지만.
한 : 학원에서 스피치 콘테스트를 하면 엄마들이 와서 “우리 아이 원고 좀 써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많거든요. 물론 아이들이 직접 원고를 써보는 게 중요하지만, 아이들이 쓴 원고로는 입상권에 들기가 어려우니까 엄마들이 욕심을 부리는 거죠.
김 : 웅변대회로 전락한 스피치 콘테스트보다는 토론 경연대회 같은 게 정작 필요하죠. 그런데 그것도 선발기준이 모호하다는 게 문제예요. 대부분 담당교사 마음대로 한 명 찍어서 대회에 내보내고….
사회 : 원어민 교사 제도는 잘 활용되고 있다고 봅니까.
장 : 강남의 한 명문고에 다니던 학생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할까요. 영어를 곧잘 하는 학생인데, 발음이 약간 ‘동남아 스타일(?)이었던가 봐요. 그런데 원어민 교사가 발음이 안 좋다고 하면서 시험에서 점수를 깎더래요. 이런 걸 보고는 ‘도대체 기준이 뭔지 모르겠다’면서 아이들이 속상해 하더라고요.
한 : 원어민 교사들은 아이들에 대한 기대가 낮은 것 같아요.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영어로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많은데 외국인 교사들은 한국 아이들에 대해서 ‘How are you’밖에는 못하는 걸로 미리 단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거죠. 학생들과 교감하는 데는 성공했다고 해도 한국 선생들처럼 옆에서 독려하고 때로는 ‘얘는 이 정도는 해야지, 좋은 학교 다니니까’ 하면서 밀어주려는 교사는 없는 것 같아요.
김 : 결국 원어민 교사의 자질과 관련된 문제라고 봐요. 원어민 교사가 한국 학생들이 잘 틀리는 표현들을 바로잡아주고 적극적으로 수업에 개입하면 학생들은 그만큼 발전하게 돼 있어요. 그런데 원어민 교사 중 상당수는 학생들에게서 원하는 대답만 들으면 그냥 넘어가거든요.
영국에서는 보조교사를 많이 활용해 아이들 수준에 맞는 그룹별 수업을 한다.
김 : 한국에서 강의하는 원어민 교사들이 미국인 일색인 것도 문제예요. 저도 미국식 영어에만 익숙해서인지 처음 영국에 왔을 때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말을도대체 알아듣지 못하겠더라고요.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보니까 영국 영어, 유럽 학생들이 하는 영어, 홍콩이나 싱가포르 영어, 인도 영어 등등이 아무 문제없이 통용돼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원어민 교사를 데려올 때도 반드시 노란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미국인만 선호하잖아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국제화한 언어로서의 영어를 더더욱 접하기 어려운 거죠.
사회 : 그렇다면 요즘 학부모들의 최대 관심사인 조기유학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여기 계신 분들도 이제 ‘유학파 영어강사’인데, 조기유학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조기유학 환경
장 : 영국 유학생활을 시작한 뒤에 좀더 일찍 오지 못한 걸 후회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우리 부모님이 중3이나 고1때 나를 혼자서 유학 보냈으면 지금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조기유학은 단순히 언어 습득에만 국한시켜 볼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한 : 물론 조기유학을 통해 영어 사용과 문화체험 기회를 동시에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긍정적 측면이 있지요. 그런데 사춘기에 꼭 필요한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특히 부모 없이 혼자 와 있는 아이들이 외국 아이들과 대등하게 어울릴 수 있을지는 솔직히 걱정이에요. 언어는 하나의 도구인데 그걸 위해서 모든 걸 다 희생해야 하는지 생각한 뒤에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봐요.
김 : 부모들 간에도 개인차가 있는 것 같아요. 영어로 성공한 부모는 조기유학 보내라고 하고, 뭔가 문제가 있는 부모는 보내지 말라고 해요. 그런데 영어만 놓고 보면 조기유학은 반드시 효과가 있어요. 저는 전적으로 찬성하는 편이에요. 정서적으로 얼마나 편안한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는지도 고려돼야 하겠지만, 영어 습득이라는 목표를 놓고 보면 영국에서 1년 공부한 게 한국에서 10년 한 것보다 효과가 좋은 건 사실이거든요. 특히 아이들이 언어에 민감한 시기에 3년 정도 외국생활을 하면 개인간 의사소통능력은 완벽해진다고 봐요.
사회 : 결국 영어 자체보다는 조기유학 환경이 더욱 중요하다는 얘기군요.
김 : 사춘기를 전후해 조기유학을 떠나는 아이가 많은데 바로 여기서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거죠. 기숙사에 살면서 원만한 교우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아이들은 별문제가 없지만,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 이건 부모도 선생님도 해결할 수가 없어요.
한 : 맞아요. 한국에서 교우관계가 좋은 아이는 외국으로 유학 가서도 별 문제없이 적응하는데, 한국에서 교우관계에 실패한 아이를 막연히 ‘외국 가면 좋아지겠지’ 하는 생각으로 조기유학을 보내면 실패하는 거죠.
김 : 사춘기 아이들일수록 문화가 다르고 표현방식이 다르니까요. 그 또래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게 우정인데, 한국 아이들은 이걸 영국식으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거든요. 당장 우리 아이들만 해도 이런 문제 때문에 잠 못 자고 괴로워하면서 눈물 흘리거든요.
한 : 한국에서는 보통 단짝 친구가 있으니까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 친구에게만 의지해도 문제가 풀리거든요. 그런데 영국 아이들은 달라요. 자기는 단짝 친구라고 생각해서 걔만 바라보고 있다가는 더 큰 상처를 받기 쉬운 거죠.
김 : 친구와 싸우고 나면 다음날 영국 아이로부터 ‘너 나랑 친구 할래, 안 할래’ 소리를 듣는 경우도 많더군요. 한번 다투고 나면 우정도 헌신짝처럼 버리기 일쑤고…. 한국에서 배우고 겪은 ‘우정’과는 개념 규정 자체가 다르니까.
warmless person
사회 : 영국 초·중등학교의 영어교육 시스템도 눈여겨봤을 텐데요. 우리나라 영어교육에 시사점을 줄 만한 것들로는 어떤 게 있던가요.
한 : 우선 한국처럼 교과서를 정해놓고 ‘한 권 다 끝냈다’는 개념이 없어요. 한국이 ‘한 권이라도 완전히 외우고 가자’는 식으로 접근한다면 영국은 엄청난 양의 다양한 독서 리스트를 정해놓고 돌아가면서 읽게 하는 거죠. 또 같은 학급 내에서도 실력별로 그룹을 정해 앉혀놓고 능력에 맞는 과제를 나눠주고 풀게 해요. 그런데 더욱 신기한 것은 이러한 ‘차별’에 대해 상처받는 아이도 없고 항의하는 부모도 없다는 거예요.
김 : 왜냐하면 가령 역사수업시간에는 B그룹이지만 수학시간에는 A그룹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죠. 영국 교실에서는 ‘토니는 수학을 잘하는 아이’ ‘존은 음악을 잘하는 아이’ 이렇게 불리거든요. 한국처럼 뭉뚱그려서 ‘공부 잘하는 아이’가 훌륭한 아이라는 사고방식 자체가 없는 것 같아요.
한 : 우리는 실력이 출중한 아이건 다소 뒤떨어지는 아이건 간에 무조건 평균점을 정해놓고 가르치잖아요. 그런데 영국은 달라요. 물론 담임교사 외에도 늘 2~3명의 보조교사가 수업에 함께 참여하니까 이런 수준별 학습이 가능하겠지만요.
장 : 한국의 입시교육 현장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얘기네요. 우린 언제나 정답만 요구하잖아요. 하지만 우리 입시에서도 문제유형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사고방식과 유연한 태도를 가진 학생들이 좋은 점수를 얻게 마련이에요. 변화의 과정에 있는 거죠.
김 : 여기서도 영어를 잘하는 아이들을 보면 비결은 무조건 다독(多讀)이에요. 책을 많이 읽는 아이들은 심지어 자기가 단어를 만들어내기도 해요. 한번은 아들 녀석이 ‘따뜻한 마음이 결여된 사람’을 표현하고 싶은데 단어를 모르니까 영어사전에도 없는 ‘warmless person’이라는 단어를 썼대요. 그러니까 선생님이 ‘좋은 표현’이라면서 오히려 치켜세워주더랍니다. 한국의 교실에서 그런 표현을 썼다면 그건 그냥 ‘오답’일 뿐이잖아요.
한 : 어린이들만큼은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실험이 얼마든지 가능하거든요. ‘우리는 안 될 거야’ 하고 끝낼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사회 :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할 시간입니다. 우리 영어교육 환경을 바꾸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이야기해주시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할까 합니다.
조급증에서 벗어나야
장 : 우선 조급증에서 벗어났으면 좋겠어요. 제가 일하고 있는 입시현장은 조급증을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교육에서 부모가 조급증을 내서 성공한 경우는 별로 없거든요.
한 : 공교육에서 가장 큰 문제는 수준별 수업이 불가능하다는 점이에요. 자원봉사자건 예비교사건 간에 보조교사를 활용할 방안을 찾아서 그룹별 수업을 할 수 있다면 좀더 내실 있는 영어교육이 가능하겠죠.
김 : 저는 지금도 서울 강남의 교육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모르는 정보가 없어요. 전형적인 강남 엄마죠. 그런데 영국에 온 뒤로 가장 답답했던 게 영국교육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점이었어요. 아이한테 잔소리를 할 수가 있나 그렇다고 과외선생을 붙여줄 수가 있나. 결국 아이 스스로 헤쳐 나갈 수밖에 없었던 거죠. 엄마의 기대치가 아예 ‘제로’니까 오히려 그게 아이들한테 격려가 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은 때로는 ‘무식한’ 엄마가 되는 게 애를 잘 키우는 길인 것 같다는 생각도 합니다.
사회 : 오늘 해주신 말씀이 자녀의 영어교육 문제로 고민하는 많은 부모에게 작으나마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