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전 대표는 깨끗한 경선승복 연설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고집스레 원칙과 예의를 지켰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졌다. 곁에서 지켜보니 정말 질 때 지더라도 ‘곧이곧대로’ 사는 사람이었다. 박 전 대표의 경선 과정 1년을 되돌아 봤다.
패배의 기운은 며칠 전부터 감지되고 있었다. 검찰의 도곡동 땅 관련 수사 발표에 나름의 기대를 갖고 있었지만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팽배했다. “일주일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이라는 캠프 관계자들의 토로가 들려왔다. 이들의 어깨를 무엇보다 무겁게 누른 것은 언론사 여론조사. 이 전 시장과 박 전 대표 간 선거인단 지지도 격차가 줄지 않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투표 당일, 이 전 시장 지지세가 높은 서울 지역의 투표율이 예상외로 높았다. 불안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윽고 경선 결과에 포함될 여론조사 결과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한 자리수 차이라는데….”
어쩌면 될 수도 있겠다는 희망과, 힘들겠다는 비관이 매순간 교차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맞이한 개표. 막상 패배가 현실화하자 의원과 캠프 실무자들에겐 충격이 커 보였다. 선거인단 투표에선 이겼다. 1.5% 차의 석패였다. 표수로 환산해 2452표 차이.
‘자기절제’의 ‘박근혜다움’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1.5%포인트 차 패배는 어쩌면 기적이었다. 기자가 1년 여 박근혜 캠프를 출입하면서 경선 과정을 지켜본 결론은 그랬다. 박근혜 캠프는 경선 승리를 위해 좁게 난 지름길을 찾아 가지 않았다. 원칙과 정도를 지켰고, 그래서 그 정도 격차까지 따라 붙은 것이 오히려 기적 같은 결과라는 것이다.
경선 방식을 정하는 과정과 경선 운동 과정을 복기해 봤을 때 박 전 대표는 철저히 원칙을 지켜 승부했다. 그리고 그의 원칙은 경선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졌다. 깨끗한 승복 연설로 마무리한 것이다.
그날 이 전 시장의 승리가 선언될 때 박 전 대표의 얼굴에선 미세한 떨림 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지독한 레이스의 끝이었지만 ‘놀라울 정도의 자기 절제’가 트레이드마크인 ‘박근혜 다움’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는 정도로 걸어왔다는 자신감에 따른 여유로 보였다.
선거에서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박 캠프의 한 관계자는 “만약 박 전 대표가 경선에서 승리해 한나라당 후보가 됐다면 과거 탄핵역풍에서 한나라당을 구했을 때처럼 빠른 속도로 분열되어 있던 당을 안정화시켰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표님, ‘원칙’ 지키시죠”
박 전 대표에게 ‘원칙’은 알파와 오메가였다. 그는 원칙에 고집스레 매달렸다. 박 전 대표가 원칙을 깨는 경우는 폭탄주가 돌아가는 술자리뿐이라는 얘기가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폭탄주는 ‘제조자’가 먼저 먹어야 한다”는 ‘룰’이 있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폭탄주를 먹지 않는다. 입에만 댔다 뗀다. 한번은 기자들과의 술자리에서 박 전 대표가 폭탄주를 제조해 기자들에게 돌렸다. 한 기자가 “대표님, 제조자가 먹는 원칙을 지키시죠”라고 말했다. 그러자 박 전 대표가 빙긋이 웃으며 받아넘겼다. “예외 없는 원칙이 어디 있나요.”
박 전 대표를 이해하기 위해 넘어야 할 고비가 이 대목이다. 그는 복선을 깔지 않는다. 그의 언명은 깔끔했다. 그리고 그대로 실천하고자 하는 행동이 뒤따랐다.
다른 정치인과는 다른 점이었다. 처음엔 이해하기 힘들었다. 정치인의 말엔 대개 복선과 배경이 있다. 그래서 감안하고 듣는다. 그런데 이런 습관으로 박 전 대표를 만날 때면 그의 말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의 말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 8월27일 서울 종로구 하림각에서 열린 캠프 해단식에 참석해 참석자들의 인삿말을 듣고 있다.
박 전 대표의 사무실은 2006년 가을, 문을 열었다. 당시 박 전 대표의 사무실은 대선 캠프라기보다는 확대 비서실 정도였다. 그는 좀체 경선 운동에 나서지 않고 있었다. 조직 활동도 없었고, 언론에도 나서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경선이 너무 일찍 과열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박 전 대표 측 의원들이 경선 패인의 핵심적 이유로 꼽는 게 이 시절이다. 당 대표직을 내놓은 뒤 박 전 대표는 2006년 6월에서 9월까지 대략 4개월가량 언론에서 사라져 있었다. 활동이 없었다. 그 시기 이명박 전 시장의 활동은 정반대였다. 이 전 시장측이 조직 장악에 박차를 가한 것이 이맘때였다. 당시 박 전 대표에게는 “이러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측근들의 건의가 쇄도했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움직이지 않았다.
“강 대표에게 예의가 아니다”
박 전 대표가 이 시기에 손을 놓아 버리고 언론에서 사라진 이유는 또 있었다. 박 전 대표는 ‘강재섭 대표가 한나라당의 새 대표로 선출돼 막 활동을 시작한 마당에 이전 대표가 너무 언론에 노출되고 돌아다니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 시기 박 전 대표 측의 활동 공백은 이후 조직 경쟁에서 이 전 시장 측에 밀리는 결정적 원인이 된다. 결국 추석을 전후해 이 전 시장과 박 전 대표간의 지지율 격차가 거의 2배 가까이 벌어지는 원인이 됐다. 후에 따라잡는데 그만큼 힘이 들었고 결국 턱 밑까지 와서 패배하고만 것이다.
당권과 대권을 분리한다는 혁신안도 결과적으로 박 전 대표의 발목을 잡았다. 그것은 박 전 대표의 대표 시절 만들어졌다. 그는 2006년 6월 당 대표직을 내놓는다. 이는 한 관계자의 말처럼 “바보 같은 짓”이었다.
위기의 한나라당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그가 대선을 1년6개월이나 남겨두고 당권을 스스로 내놓을 이유는 없었다. 내놓는다 해도 대통령 선거 1년 혹은 6개월 전에 내놓으면 될 일이었다.
2005년 만들어진 혁신안의 금과옥조 같은 조항이 당권 대권 분리였다. 의도는 이랬다.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총재는 유력 대선 후보인데다 당권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제왕적 총재였다. 이런 상황이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대선 후보와 당권과의 거리를 띄우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명분’만 그런 것이었다. 당시 혁신안을 만든 주체들에게는 당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박근혜 전 대표를 끌어내리려는 의도가 더 강했다. 2006년 6월에야 시장과 지사직을 내놓고 퇴임하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 손학규 전 지사와 박 전 대표가 공정한 경쟁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정 경쟁을 위해 박 전 대표도 비슷한 시기 당권을 내놓고 사퇴하라는 얘기였다. 어찌 보면 억지스러운 주장이었지만 박 전 대표는 두 말 없이 받아들인다.
7월19일의 검증 청문회는 박 전 대표 측 처지에서는 무척 아쉬운 순간이었다. 그는 “5·16에 대해 평가해 달라”는 질문에 “구국 혁명”이라고 답했다. 고 최태민 목사에 대해서도 변호로 일관했다. 많은 이가 “박근혜의 한계를 보는 듯하다”고 평했다. 중도층으로 하여금 등을 돌리게 만드는 완고함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결국 ‘이 같은 이미지로는 외연을 넓힐 수 없다’ ‘본선 경쟁력이 떨어진다’ ‘제2의 이회창이 될 수 있다’는 논리가 확대재생산 됐다.
“나에 대한 정치공세”
사실 그는 고집과 강단으로 살아왔다. 18년의 삶을 그렇게 버텼다. 고집과 강단이 없었다면 지금의 이 자리에 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는 청문회 때 쉬운 길을 알았다. 아버지에 대한 평가나 최 목사에 대한 평가에 집착하지 않으면 됐다. 그런데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인혁당 재건위 재심 결과가 무죄로 나왔을 때였다. 박 전 대표의 캠프에서 참모회의가 열렸다. 공식 반응을 어떻게 내놓을지를 결정하는 자리였다. 결론은 “피해자들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 법원의 판단을 존중한다”였다. 회의 결론이 박 전 대표에게 전달됐다. 박 전 대표는 고개만 끄덕였다고 한다.
이어 일주일 시차를 두고 긴급조치 위반 사건 판결 판사의 명단이 공개됐다. 한 기자가 박 전 대표에게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그의 첫 마디는 “나에 대한 정치공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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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공세’. 이 네 글자는 순수한 그의 작품이었다. 그는 참모들의 조언보다 한 걸음 더 나갔다. 다른 문제와 달리 박 전 대표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본인의 판단을 우선한다.
1979년 10·26부터 1998년 정계입문 때까지 18년 동안 박 전 대표는 야인으로 살았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5공 정권은 박 전 대통령을 격하했고, 추모제도 못 지내게 했다. 충성을 맹세하던 많은 측근이 한 순간에 돌아섰다. ‘영부인 대행’에서 ‘처녀가장’으로 전락한 박 전 대표는 아버지의 세월을 외롭게 되새김질 했다. 세상의 외면 속에서 홀로 아버지를 지킨 것이다. 현충사 추모제를 갖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기념관을 지겠다며 성금모금도 벌였다. 외로운 투쟁이었다.
그리고 국민의 70%가 박 전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세상이 됐다. 박 전 대표 처지에선 여권만이 유신 시절 각종 과거사를 헤집으며 정면으로 옥죄어온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결연하게 맞섰다.
“왜 여권은 야당 대표를 상대하지 않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이야기하는가. 시대가 어느 때인데 돌아가신 분과 싸우겠다는 것인가.”
아버지에 대한 공격은 몸을 던져서라도 막겠다는 강한 결기가 느껴졌다. 사실 박 전 대표는 박 전 대통령의 유산을 통째로 껴안은 상속녀다. 1979년 10월26일 이래 고독과 소외, 어둠 속에서도 끝까지 이어져온 박 전 대표의 ‘아버지 지키기’를 알지 못하면 검증청문회 때 그의 태도를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옛날 기사 찾아 보시죠”
그는 2004년 7월 한나라당의 대표가 되면서 박정희 대통령과의 단절을 요구 받았다. 여당은 집요하게 공세를 폈다. 당내에서도 단절하라는 목소리가 거셌다. 이재오 의원은 “독재자의 딸”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럴수록 더욱 강하게 반발했다. 당당히 맞받아쳤다. 2004년 8월 연찬회에서 박 전 대표는 이 의원을 향해 “당을 떠나라”고 했다. 그 기운에 눌린 의원들의 표정이 기자의 눈에 아직 생생하다.
기자회견 때 박 전 대표는 “아버지 시절에 대해 사과할 용의가 없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날카롭게 맞받아친다. 그러나 기자들은 다음에도 또 같은 질문을 한다.
박 전 대표가 2006년 9월 독일을 방문했을 때였다. 수행기자단과의 간담회가 열렸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이날 박 전 대표는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참여하겠다”며 대선 출마를 사실상 처음으로 선언했다. 그런데 질의 답변 과정에서 한 수행기자가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실 용의가 없냐”고 물었다. 박 전 대표는 싸늘하게 반응했다.
“옛날 기사 한번 찾아 보시죠.”
참석자들은 난감해 했고 분위기 좋던 간담회장은 얼어 붙어버렸다.
“대충 과오를 인정하고 넘어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박 전 대표는 얼렁뚱땅 넘어가고 싶지 않은 듯 했다. ‘건건마다 사과하고 뒤로 물러서면 아버지 시대는 둑이 무너지듯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는 완고하기만 하지는 않다. 박 전 대표의 머리 모양새를 두고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박 전 대표의 바뀐 헤어스타일에 불만(?)이 많던 허태열 의원은 부산지역 미용사들을 모아 박근혜 지지 행사를 열었다. 허 의원은 박 전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연설을 하다 “여러분들이 전문가인데 박 전 대표 머리모양이 과거와 지금 중 어느 것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즉석 질문을 던졌다. 대다수가 예전의 올림머리가 좋다고 손을 들었다. 박 전 대표는 두말 하지 않고 예전 스타일로 돌아갔다.
여론조사는 박 전 대표측이 참으로 아쉬워하는 대목이다. 박 전 대표 측은 꾸준히 선거인단을 상대로 자체 여론조사를 해왔다. 두 주자간 격차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언론사들이 실시한 선거인단 대상 여론조사에선 두 주자간 격차가 7~14%로 꽤 벌어져 있었다.
그러나 투표 결과 박 전 대표 캠프의 여론조사가 오히려 정확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여론조사 기관의 시뮬레이션 조사는 허용 오차 범위를 넘어선 최악의 실패작이었다.
엉터리 여론조사의 파괴력
여론조사기관들의 조사에 오류가 많았던 원인은 박 전 대표 캠프에서 분석한 대로였다. 한나라당 선거인단의 성향은 각 당원협의회(옛 지구당)별로 큰 차이를 보인다. 대구에서도 박 전 대표 측 유승민 의원 지역구인 동구와 이 전 시장 측 이명규 의원의 북구 선거인단은 서로 다른 성향을 보인다. 따라서 표본 추출을 당협 별로 해야 정확한 조사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럴 경우 표본이 엄청나게 커지고 비용이 많이 들게 된다. 이 때문에 여론조사기관의 조사는 지역별로 몇 명씩을 뽑아 물어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니 결과가 엉터리일 수밖에 없었다.
엉터리였지만 영향력은 막대했다. 경선 막판 중립지대에서 서 있던 당협위원장들 중 상당수는 “이명박 전 시장이 7~15%의 차이로 이기고 있다”는 언론 보도를 접한 뒤 이 후보 쪽으로 옮겨갔다. 만일 선거인단 지지도 격차가 1~2%밖에 되지 않는다는 게 알려졌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박 전 대표는 경선에선 패했지만 ‘원칙의 지도자’ ‘큰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얻었다. ‘신뢰 상실’의 시대, ‘신뢰’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쟁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