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덩실덩실 춤을 추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빠르고 강한 발차기로 상대를 제압한다. 그러고선 마주 선 두 사람은 다시 가락과 바람에 몸을 맡긴다. 승자와 패자,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지 않는 배려의 무술. 우리네 조상이 만든 동작 하나하나에 몸과 마음을 비워내는 지혜가 담겨 있다. 공격이 수비요, 수비가 공격이니 그저 양보할지어다!
말은 그렇게 해도 희곡작가 김대현(金大鉉·50)씨의 온화한 눈빛과 부드러운 목소리는 ‘20단 무술인’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러나 택견 시범에 들어가자 그의 표정과 몸짓은 금세 날카롭게 변했다.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옆 잔디밭에서 벌어진 택견 겨루기 한 판. 상대는 김씨가 대표로 있는 극단 ‘창작마을’ 소속 배우 한서영씨가 맡았다. 가까이 마주 선 두 사람은 서서히 리듬을 타더니 한 차례씩 발공격을 주고받는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다리 선과 사선을 그리는 팔동작이 웬만한 춤사위 못지않게 아름답다.
“택견은 신라 때부터 시작된 민족 고유의 무술입니다. 조상들이 몸으로 체득해 내려왔기 때문에 한국적인 특성이 강하지요. 다른 무술과 달리 홀수 리듬을 타고, 수직-수평이 아닌 사선을 그리는 동작이 주를 이룹니다. 김구 선생도 택견 기술을 사용해 일본 헌병을 맨손으로 메다꽂으셨죠.”
택견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빠르고 높은 음성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택견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쇠락했지만 1990년대 중반에 현대 택견을 주도하신 이용복 큰선생님의 노력으로 다시 활기를 되찾았죠. 이제 택견 인구가 100만이 넘지만 더 많은 이가 택견을 알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 작가는 택견으로 몸을 단련하고 독서로 정신을 가다듬는다. 어린 시절 품은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 절반은 이뤄진 듯하다. 이따금 배우들과 함께 산에 올라 화합을 다지기도 한다.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3년 전부터 명창 옥당 이등우 선생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그 인연으로 이등우 선생은 택견을 주제로 한 작품 ‘택견아리랑’의 주연을 맡게 됐다.
그의 택견 사랑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 고유의 무술’이라는 점에 강하게 끌렸다고 한다. 택견뿐 아니다. 그는 우리네 이야기를 담은 희곡을 주로 쓰고, 국극과 창극 등 전통극에도 조예가 깊다. 우리것에 대한 그의 애정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지금은 누구보다 전통을 소중하게 여기지만, 한때 한국이 싫어 한국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1984년 학연, 지연 그리고 경쟁 없이 살기 힘든 이 나라에 한계와 염증을 느껴 도미(渡美)했죠. 그러나 1년간 미국에서 지내다 보니 그간 보지 못했던 내 땅, 내 나라의 장점이 절절히 다가오더군요. 귀국한 뒤부터 풍물, 국악 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는 너무 익숙해서 소홀히 여기는 귀중한 문화가 많아요.”
고등학교 문예반 시절 시부문 학원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문학계에 발을 내디뎠다. 이후 시와 소설을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하다 1994년 희곡에 도전하게 된다.
“문예반의 한 선배가 ‘희곡은 마지막 장르’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시를 배우는 것조차 벅차 ‘왜?’라고 묻지 못했지만 그 말을 줄곧 마음에 품었지요. 그리고 어느날 문득 구어체로 된 희곡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첫 작품 ‘라구요’를 썼고, 그 작품으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습니다.”
요즘은 택견을 주제로 한 작품 ‘택견아리랑’을 준비하고 있다. 13년 전 이용복 큰선생님으로부터 “택견 작품 하나 만들어야지”라는 말씀을 들은 뒤 줄곧 품어온 꿈이다. 이 작품을 준비하면서 ‘인생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기쁨과 함께 얻은 또 다른 수확이 있다. 국극(國劇)의 대모인 명창 옥당 이등우 선생에게서 판소리를 배운 것.
“국극은 소리, 춤, 연기가 어우러진 ‘한국의 뮤지컬’입니다. 중국의 경극, 일본의 가부키와 같이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극이죠. ‘택견아리랑’에는 택견, 국극, 풍물, 검무, 탈춤 등 우리 문화가 총출동합니다. 우리것만으로도 재미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꼭 증명해 보이고 싶습니다.”
국극 ‘택견아리랑’의 포스터와 연습 광경. ‘택견아리랑’은 택견뿐 아니라 탈춤, 대검 쌍무, 풍물 등 전통문화를 담고 있다. 김 작가는 “국극은 뮤지컬만큼 재미있다”며 “우리 이야기를 담은 공연을 활성화하기 위해 ‘스테이지쿼터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