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호

창립 110주년 맞는 한국 최장수 기업 동화약품

활명수, 판콜, 후시딘… 연타석 안타 끝에 터뜨린 ‘글로벌 신약’ 홈런

  • 최영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ftdog@donga.com

    입력2007-10-08 10: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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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상호로 똑같은 제품을 만들며 시장 1위를 달리는 기업이 있다. 서울 중구 순화동에 자리 잡은 동화약품. 1897년 동화약방으로 문을 연 이래 ‘활명수’ ‘부채표’와 더불어 110년. 그 긴 시간, 동화약품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항일 민족기업으로 출발해 세계적 제약사의 문턱에 다다른 동화약품 1세기를 들여다봤다.
    창립 110주년 맞는 한국 최장수 기업 동화약품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은 어디일까. 기네스북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면 국내 최초의 제조회사 및 제약회사는 1897년 동화약방으로 시작한 동화약품(대표·윤길준, www.dong-wha.co.kr)이다. 그리고 기네스북에 기록된 국내 최초의 등록상표는 동화약품의 ‘부채표’이며 최초의 등록상품은 ‘활명수’다. 동화약품은 이렇게 모두 4개 부문에서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2005년 한국신용평가가 국내 1584개 상장 기업(거래소 702개, 코스닥 882개)을 조사 분석한 결과 내놓은 ‘한국의 장수기업’에서도 동화약품은 국내 최장수 기업으로 꼽혔다. 설립일을 기준으로 부여된 동화약품의 KOSPI 기업 고유번호는 00020. 같은 해 탄생한 조흥은행의 00010 다음이다.

    1896년 서울 배오개시장(현 동대문시장)에 문을 연 포목점 ‘박승직 상점’이 두산그룹의 시원(始原)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광복 이후 두산그룹 어느 계열사에서도 포목 중개업의 자취를 찾아보긴 힘들다. 두산그룹의 역사에서 현실에 비추어 그 모태적 형태를 찾아볼 수 있는 기업은 1933년 일본 기업 소화기린맥주를 광복 후 인수해 만든 동양맥주다.

    독자적인 자기 브랜드를 갖지 못한 기업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동화약품은 창업 이후 한 세기가 훌쩍 지났지만 개업과 동시에 생산 판매한 활명수가 아직도 시장지배 상품으로 위력을 떨치고 있다. 그리고 그 기나긴 세월 제약업 외에는 손을 뻗지 않았다. 국내 최고령 기업인 두산을 제쳐두고 기업 분석 전문가들이 동화약품을 국내 최초의 기업으로 꼽는 것은 이 때문이다.

    동화약품이 9월25일로 창립 110주년을 맞았다. 동화약품은 1897년 창업 이래 한자리에서 동일 상호를 내걸고, 동일 제품을 100년 이상 생산해온 국내 유일의 기업이다. 창업 당시 동화약방의 소재는 현재의 서울시 중구 순화동 5번지, 동화약품은 지금도 이곳을 본사로 쓰고 있다. 창업자 민병호 선생은 당시 궁중 선전관이었는데, 한성부 서소문 차동에 있던 자신의 집에 ‘동화약방’ 간판을 내걸었다.



    동화약품이 위치한 순화동은 조선시대에는 서대문에 인접해 숙박시설이 많고 관청의 수레들이 모여들었다 해서 수렛골 또는 차동(車洞)이라 불렸다. 현재 서대문 사거리 인근 경찰청 맞은편 뒷골목의 동화약품 본사 자리는 1667년 4월23일 숙종대왕비인 인현왕후가 태어난 곳이며, 일제 강점기 상해임시정부의 국내 비밀 연락기관인 서울연통부가 있던 곳이다.

    ‘민족이 합심하면(同和) 잘살 수 있다’

    약방 이름이 왜 ‘동화(同和)’였을까. 민병호 선생은 그 이름에 ‘민족이 합심하면 잘 살 수 있다’는 민족화합의 정신을 담았다고 한다. 동화약품이 쥘부채(접었다 폈다 하는 부채)를 상표로 선택한 것도 많은 부챗살이 한데 결속돼 부채를 만들 듯 ‘합심하면 잘살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후 동화약방은 1909년 통감부에 ‘부채표’ 및 ‘활명수’를 상표등록하고, 1931년 동화약방을 ‘주식회사 동화약방’으로 법인화하면서 본격적인 제약업소의 면모를 갖췄다. 기업명과 상표에서 드러나듯 동화약방은 경술국치 이후 민족기업의 길을 걸으며 일제에 항거한다. 이 회사 직원들은 수많은 시련을 이겨내며 민족의 역사와 함께한 동화약품의 역사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 민족의 건강은 우리 손으로 지킨다’는, 요즘 기업에선 보기 드문 내용의 사시(社是)를 그들은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동화약품 본사 인근에는 초대 사장인 민강(1883~1931) 선생과 동화약품의 항일정신을 상징하는 기념비가 우뚝 서 있다. 서울연통부(聯通府) 기념비가 바로 그것. 연통부는 1919년 7월 상해임시정부가 국내와 국외를 연결할 목적으로 만든 비밀 연락부서로 각 시, 도, 군, 면까지 조직을 갖춘 행정조직이다.

    민병호 선생의 아들인 민강 선생은 이 연통부를 당시 동화약방 내에 설치했다. 그리고 연통부를 통해 각종 정보와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결국 연통부는 1922년 일제에 적발됐고, 이로 인해 민강 선생과 동화약방은 갖은 고초를 겪었다. 1995년 8월15일 서울시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연통부의 그 같은 활동을 기념하기 위해 현재의 동화약품 본사 담벼락 옆에 연통부 기념비를 설치했다.

    창립 110주년 맞는 한국 최장수 기업 동화약품

    동화약품 본사 부지 인근의 서울연통사 기념비. 옛 동화약방 자리다.

    1913년 90여 종의 제품을 내놓고 전국에 186개소의 특약판매소를 설치하고 멀리 만주에까지 지점을 여는 등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가던 동화약방은 민강 사장의 열혈 독립운동으로 사세가 점점 기울어간다. 민 사장은 1919년 3·1운동 이후 한성임시정부수립운동에 관여하는 한편, 비밀결사조직인 대동단(大同團)에도 가입했다. 대동단은 제1차 거사로 의친왕 이강을 상해로 탈출시켜 임시정부조직에 참가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로 끝난다. 이 일로 대동단 간부들은 거의 다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민강 사장도 이때 1년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민 사장은 그 후 계속된 독립운동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르다 1931년 11월4일 건강이 악화돼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한국 약업계의 선각자였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였다.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으며, 그의 시신은 현재 국립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이윤 100% 재투자

    민강 사장이 옥고를 치른 후 동화약방은 크게 위축됐다. 일제는 ‘검사’ 혹은 ‘실험’이라는 명목으로 약을 마음대로 빼앗아갔다. ‘감시원이 약품을 무상으로 가져올 수 있다’고 규정한 총독부의 ‘약품 및 약품 취체령’에 따른 조치였다. 결국 민강 사장이 유명을 달리하고 사세가 계속 기울자 1937년 민씨 일가는 풍전등화 처지의 동화약품을 민족기업가이자 독립운동가이던 보당 윤창식(保堂 尹昶植·1890~1963) 선생에게 넘겼다.

    당시 거의 파산 지경에 이르렀던 민씨 일가가 보당에게 기업을 받아달라고 한 것은 그가 기업 운영과 독립운동의 양쪽에 모두 재능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1890년 경기도 고양에서 태어난 보당은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상과를 졸업한 뒤인 1915년 3월 국산품 애용과 민족경제 자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항일비밀결사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奬勵契)를 조직하고 총무로 활동하다 일본 경찰에 발각, 옥고를 치른 인물. 그는 국내 독립운동 단체인 신간회(新幹會)의 간부를 맡기도 했다. 광복 뒤에는 서울시의원과 숙명여자중·고등학교 후원회 이사장과 자선사업단체인 보린회(保隣會) 창립자 등으로 활동했다.

    동화약품 제5대 사장에 취임한 보당은 가내수공업 수준에 머물던 동화약품을 현대적인 대량생산체제로 바꿔 나갔다. 이 때부터 110년 전통의 부채표 ‘활명수’는 본격적인 황금시대를 맞는다. 당시 활명수는 선금을 예치하고도 제품을 구입하기가 힘들 정도로 공급 부족 사태를 빚기도 했다. 활명수는 해외로도 진출한다. 1937년 만주국에 해외 상표등록하고 이듬해에는 만주국 안동시에 동화약방 지점을 설치했다. 이후 활명수는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한다.

    그러나 동화약방은 광복과 함께 이북과 만주국 시장을 상실하고, 뒤이은 6·25전쟁으로 순화동 공장이 완전 파괴되는 등 시련을 겪는다. 전쟁이 끝난 후 동화약방은 ICA(국제협조처) 자금을 받아 쓰러진 공장을 복구하고 재기에 나선다. 당시 보당은 “동화는 비록 폐허의 터전에 서 있다 해도 민족자존의 긍지를 버릴 순 없다. 민족기업의 긍지는 순수민족자본으로 재건될 때만 지킬 수 있다”고 역설하며, 약품을 팔아 생긴 이윤을 완전 재투자하는 독특한 경영방식을 구사한다.

    결국 동화약방은 옛 명성을 되찾고 1962년 동화약품공업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한 뒤 본사와 순화동 공장을 신축하고 1972년에는 안양공장을 준공하는 등 발전을 거듭한다. 동화약품은 현재 ‘까스활명수’ ‘후시딘’ ‘판콜’을 비롯한 400여 종의 의약품과 30여 종의 원료의약품을 생산해 국내는 물론 세계 40여 개국에 공급하는 굴지의 제약기업으로 성장했다.

    민족기업의 전통은 지금도 동화약품의 회사 분위기를 지배한다. 동화약품의 최고참 직원이자 최고위직 사원인 조창수 부사장은 “우리 임직원은 내가 다니는 회사가 민족의 역사와 함께 시련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우리 민족의 건강은 우리 손으로 지킨다’는 사명감과 긍지로 꿋꿋하게 성장과 발전을 거듭해온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좋은 약이 아니면 만들지 말라. 동화는 동화 식구 전체의 것이요, 또 이 겨레의 것이니 온 식구가 정성을 다해 다 같이 잘살 수 있는 기업으로 이끌라.”

    ‘윤리경영’ 벤치마킹 사례

    민족기업가 보당의 이 유훈은 동화약품의 경영이념이자 경영철학으로 자리 잡았다. 보당의 아들인 윤광렬(1924~) 현 회장도 광복군 출신이다. 윤길준 사장은 “우리의 자본으로, 우리의 제약기술로, 우리의 노동력으로, 일제에 항거하는 영세 중소기업 민족자본을 육성해야 한다는 선조들의 강력한 메시지를 지금도 미래에도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동화약품은 ‘좋은 약이 아니면 만들지 말라’는 보당 선생의 유훈을 바탕으로 윤리경영의 모델을 만들어냈다. 동화정신 4개 조항이 바로 그것.

    창립 110주년 맞는 한국 최장수 기업 동화약품

    왼쪽부터 동화약품 초대사장 민강 선생, 5대 사장 보당 윤창식 선생, 현 윤광렬 회장.

    ‘동화는 좋은 약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봉사하고 그 효험을 본 정당한 대가로 경영되는 회사다. 동화는 정도(正道)를 밟고 원리원칙에 의하여 경영되는 회사다. 동화는 젊어서 정당하게 땀 흘려 일하고 노후에 잘살아보려는 동화 식구의 회사다. 동화는 동화 식구가 업무수행 중 잘못이 있을 경우 이를 솔직히 시인할 줄 알고 고쳐서 전화위복이 되게 하는 회사이다.’

    동화약품은 이를 준수할 것을 모든 조직 구성원에게 요구한다. 실제 동화약품은 동화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써왔다. 1973년 국내 최초로 ‘희귀의약품센터’를 설치했고, 불우이웃돕기 등 사회봉사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각종 장학금 지급, 국가 재난시 방역약품의 긴급지원, 올림픽 때 풍토병 예방 의약품 구입, 대전 엑스포 행사 공식 지원, 르완다 난민 구호의약품, 인도차이나 무의촌 의약품 지원, 국내 무의촌 의약품 지원, 북한 의약품 보내기, 낙도 보건사업 등.

    이는 세계 최우수 제약 기업들이 추구하는 행동 윤리 강령과도 일치한다. 크로스경영연구소 대표이사 최재윤 박사는 ‘윤리경영이 경쟁력이다’는 책에서 이렇게 분석한다.

    “동화약품의 경영사례는 정치, 경제, 사회 등 외부 환경의 작은 변화에도 기업의 부침이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 기업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 기업의 태생적, 정신적 가치가 어떻게 각각의 경영활동에 구체적 행위 및 가치체계로 자리매김해 장수기업으로 기록되게 만들었는지, 또 오늘날에도 그 정신적 가치와 이념이 어떻게 온고지신(溫故知新)으로 승화되어 기업 성장을 위한 밑거름으로 활용되고 있는지를 깨닫게 한다.

    따라서 많은 기업과 경영인들이 타산지석으로 활용할 만한 한국 기업사(史)에서 매우 찾아보기 힘든 소중한 사례라 생각된다. 특히 지식과 가치의 창조를 근간으로 하는 21세기를 맞이하여 국내에서도 ‘윤리경영’이 강조되는 현 시대적 조류나, ‘기업문화’나 ‘윤리경영’을 위한 벤치마킹 사례를 외국 기업에서 찾고자 해외 연수가 문전성시인 현실을 감안할 때 이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더욱 크다 할 것이다.”

    코카콜라 될 뻔한 활명수

    동화약품의 지난 110년은 활명수와 함께한 역사였다. 부채표 활명수는 기네스북에도 기록된 한국 최고(最古)의 브랜드이자 소화제의 대명사. 상품명 ‘활명수’는 1910년 12월16일 등록됐고, 상표 ‘부채표’는 1910년 8월15일 특허국에 등록됐다. 활명수는 1897년 9월25일 발매 이후 지금껏 79억병이 팔렸는데 이를 한 줄로 세우면 지구 23바퀴 반을 돌고 남는다. ‘생명을 살리는 물(活命水)’이라는 뜻의 활명수는 11가지 순수생약 성분으로 만들어져 지금껏 과식, 소화불량, 식체 등에 사용되고 있다. 한마디로 ‘국민 소화제’라고 할 만하다.

    세계 청량음료의 대표 브랜드인 코카콜라가 코카와 콜라 열매를 이용해 만든 두통 치료제이자 소화제로 출발해 아직도 그 제조 비밀이 공개되지 않는 것처럼 동화약품도 제조 방법을 모두 공개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동화약품은 활명수를 코카콜라처럼 청량음료로 전환할 것을 고민한 적이 있다.

    활명수는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던 1897년 당시 궁중에서 사용되던 생약 비방에 양약의 장점을 취해 만들어졌다. 활명수의 개발자인 민병호 선생은 당시 고종황제의 선전관으로서 궁중에서 사용되는 여러 가지 비방을 익히 알 수 있을 만큼 한약 지식에 능통했다. 선전관이란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비서실장 겸 경호실장. 그는 궁중 비방을 백성들이 달이지 않고 복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신약인 활명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활명수는 발매 초기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민병호 선생이 수많은 약 중에 유독 소화제인 활명수를 처음으로 만든 까닭은 당시 가장 흔한 질병이 위장장애, 소화불량, 급체였기 때문이다. 이는 소화가 잘 되지 않는 거친 음식을 먹던 서민의 식습관과 관계가 있다. 당시 세계적인 여행가 비숍은 “한국인은 못 먹는 것이 없을 정도로 잡식가”라고 묘사했으며 선교의사 에비슨은 “한국인은 많은 양의 음식을 매우 빨리 먹기 때문에 위장병이 많다”고 지적했다. 민병호 선생은 바로 이 점에 착안한 것이다.

    창립 110주년 맞는 한국 최장수 기업 동화약품

    활명수와 까스활명수의 변천사.

    이토록 소화불량이 흔했는데도 약이라고는 달여서 먹는 탕약밖에 없던 현실을 간파한 그는 궁중의 비방을 손쉽게 먹을 수 있는 드링크제로 바꿔서 판매에 나섰다. 활명수가 신통한 효험을 보이자 사람들은 이를 이름 그대로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고 불렀다.

    1910년대 60ml 활명수 1병 값은 50전으로 설렁탕 두 그릇에 막걸리 한 말을 살 수 있는 비싼 가격이었다. 현재 가격은 500원으로 대중화, 보편화했지만, 1910년대에는 보통 귀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활명수를 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만큼 소화불량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았다. 일제 강점기 활명수는 독립자금원으로도 쓰였다. 동화약품의 창업자인 민강 선생은 활명수를 판매한 금액으로 독립자금을 만들어 임시정부에 전달했으며 그 통로가 된 것이 당시 동화약방 내에 설치된 서울 연통부였다. 하지만 동화약품은 이 때문에 존폐위기에 몰렸다.

    발매와 동시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던 활명수는 일찌감치 ‘짝퉁 전쟁’에 시달렸다. 오랜 역사만큼 유사 제품도 많았던 것. 1910년대에만 활명회생수(活命回生水), 활명액(活命液), 생명수(生命水) 등 60여 종의 유사 제품이 난립했다. 1990년대까지도 활명수의 유명세를 등에 업고 유사품들이 우후죽순 생겨나자 보다 못한 동화약품은 1990년대부터 ‘부채표 캠페인’을 벌여 브랜드 차별화에 나섰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닙니다’라는 광고 카피는 연일 사람들의 귀와 눈을 때리며 금세 유행어로 등극했다. 캠페인 결과는 대성공. 국내 광고 역사에 기록될 만한 성공 캠페인이었다. 10년 넘게 진행된 캠페인 덕분에 소비자의 머릿속엔 ‘활명수=부채표=오리지널’이라는 공식이 자리 잡았다. 활명수의 역사는 유사품과 벌인 전쟁의 역사였고 그 전쟁에서 동화약품은 결국 승리했다.

    활명수는 지금의 ‘오십세주’처럼 칵테일을 만드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활명수가 빠른 소화력 때문에 숙취 해소에 좋다는 소문이 퍼졌고, 소주업계의 판매 경쟁이 치열하던 1960년대엔 진로소주에 활명수를 타서 마시는 게 크게 유행했다. 1990년대까지 선술집에서는 이런 풍경이 벌어졌는데 소주의 쓴맛을 없애주고 색깔을 노르스름하게 해 마치 양주를 마시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해 이를 ‘활명수 칵테일’이라 불렀다.

    타임캡슐에 보관된 후시딘

    활명수는 한국인의 식습관과 체질변화에 따라 변신을 거듭해왔다. 초창기 가내수공업 생산체제에서 생산되던 활명수는 이제 전자동 액제 생산라인에서 연간 1억병이 생산되고, 시장점유율이 70%(2006년 기준)에 달하는 ‘빅 브랜드’다. 아선약, 계피, 정향, 현호색, 육두구, 건강, 창출, 진피, 후박, 고추틴크, 엘멘톨 등 11가지 순수 생약성분으로 제조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만 배합면에서 변화가 있었다. 1966년에 기존 활명수에다 탄산가스를 첨가해 청량감을 보강한 ‘까스활명수’를 발매한 데 이어 1989년에는 ‘까스활명수-큐’를 선보였다.

    한국트렌드연구소장 김경훈씨는 ‘뜻밖의 한국사’에서 “활명수는 한국에서 가장 긴 역사를 가진 브랜드로 남아 여전히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대체의학이 양의학과 한의학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21세기의 새로운 의학으로 각광받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우리나라 궁중의 전통 비방과 양의학을 접목시켜 만든 활명수는 이미 100년 전에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고, 두 세기를 넘어 장수하고 있는 셈”이라고 했다.

    동화약품의 약 이야기를 할 때 결코 빠뜨릴 수 없는 또 하나의 히트 상품이 있다. 후시딘이 바로 그것. 1980년 발매된 후시딘은 ‘이명래 고약’과 ‘머큐로크롬액’(일명 ‘빨간약’ ‘아까징기’)이 주도하던 상처 치료제 시장의 판도를 완전히 뒤엎었다.

    가난하고 배고프던 시절 마땅한 의약품이 있을 리 없던 때 ‘이명래 고약’은 대중적 사랑과 부(富)를 동시에 누렸다. 30~40대 이상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은 사용한 경험이 있을 정도. 노란 기름종이에 고약을 납작하게 펴서 종기가 난 부위에 붙이면 고름이 쏙 빠져 질환을 치료하는 데 특효를 발휘했던 이명래 고약은 종기 치료제의 대명사였다. 하지만 치료 후엔 반드시 흉터가 남고 종기가 생긴 후에 치료할 수밖에 없는 ‘사후약방문’이라는 단점이 있었다.

    창립 110주년 맞는 한국 최장수 기업 동화약품

    1910년 매일신보에 실린 동화약품의 최초 광고(오른쪽)와 제약 역사상 최초의 애니메이션 CF인 활명수 TV CF 만화편(1959년).

    ‘머큐로크롬’은 자극성이 없고 점막, 구창 등 각종 상처소독약으로 널리 사랑받았지만, 살균력이 약하고 바르면 흘러내려 옷을 붉게 물들이는 등 사용상의 불편함 때문에 영화를 오래 누리진 못했다. 이밖에 감염증 예방과 치료에 쓰이던 겐타마이신, 테트라싸이클린, 바시트라신 제제 등 피부연고가 나왔지만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1980년 후시딘이 출시되면서 무주공산이던 창상, 감염증 치료제 시장에 폭풍이 일기 시작했다. 후시딘은 이명래 고약과 머큐로크롬의 단점을 동시에 해결하면서 고객의 욕구를 정확히 파악했다. ‘흉터 없이 치료한다’ ‘딱지 위에 발라도 덧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는 광고는 소비자를 파고들었다. 이후 뛰어난 약효가 입소문을 타면서 오늘날 상처 치료제 시장의 스테디셀러로 자리를 굳혔다.

    테라마이신 연고 등 1970년대에 유행한 항생제 연고시장도 후시딘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후시딘은 가격이 이들 제품보다 3배나 비쌌지만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피부감염증 원인균의 80% 이상인 포도상구균에 대한 항균력이 강력하고 침투력이 우수해 딱지를 떼거나 종기에서 고름을 짜내는 고통과 불편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화학구조가 독특해 내성균이 출현하지 않으면서 경구용 항생제보다 치료효과가 빠르다는 장점이 있었다.

    후시딘은 상처치료제 시장에서 단 한 번도 1등을 놓치지 않고 연간 500만 튜브 이상 생산되는 거대 품목으로 성장했다. 국민 1가구당 후시딘을 1~2개씩 상비하고 있는 셈이다. 후시딘은 1994년 서울 정도(定都) 600년 기념 행사에서 서울을 대표하는 상징물 중 가정상비약을 대표하는 제품으로 선정돼 타임캡슐에 보관됐다.

    ‘CF 스타 양성소’

    동화약품에는 또 다른 진기한 기록이 있다. 최초의 기업, 최초의 브랜드를 가진 만큼 제품을 홍보하기 위한 광고의 역사도 그만큼 길 수밖에 없다. 동화약품은 지난해 9월 홈페이지에 국내 기업 중 최대 규모인 1200여 편의 자사 광고자료를 공개했다. 까스활명수, 후시딘, 판콜 등 총 128개 품목에 TV 168편, 라디오 205편, 인쇄광고 827편이 그것이다.

    동화약품의 광고 역사는 올해로 109년의 전통을 자랑한다. 활명수가 나온 다음해부터 광고를 시작한 것이다. 동화약품이 확보한 최초의 광고물은 1910년 ‘매일신보’에 게재된 취지규례 광고. 방송 CF로는 1959년 국내 애니메이션 역사의 산증인인 엄도식씨가 제작한 활명수 애니메이션 광고가 있다. 중절모를 쓴 신사가 아픈 배를 움켜쥐고 약국으로 들어가 ‘부채표’가 붙은 활명수를 마시고 금세 낫는다는 내용. 약병이 신사의 키만큼이나 크게 표현된 것이 재미있다. ‘유사품에 주의하라’는 멘트로 보아 당시에도 활명수의 유사제품이 극성을 부렸음을 알 수 있다. 이 CF는 제약회사 최초의 애니메이션 광고이자, 국내 애니메이션 역사에 기록될 만큼 혁신적인 창작물로 평가받는다.

    1967년에는 애니메이션과 실사(實寫)가 조화를 이룬 광고가 제작되는데, 한국 가정에 초대를 받은 외국인이 양반 복장을 하고 과식으로 인한 복통으로 고생하다 활명수를 마시고 시원하게 낫는다 내용. 1974년의 광고는 ‘자연에서 비롯된 순수 생약 성분의 위장약’임을 소개하기 위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했는데, 활명수를 단순히 ‘약’으로 소개하지 않고 청량음료와 같은 시원한 느낌의 제품으로 광고했다. 이 무렵 동화약품은 활명수를 청량음료로 전환할 것을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그동안 동화약품이 생산하는 각 제품의 광고에 등장한 모델도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역대 TV광고 모델로 서수남과 하청일, 박원숙, 김형자, 김수미, 한진희, 전원주, 설운도, 장용, 임현식, 이순재, 이정재가 있고, 최근에는 인기그룹 신화의 멤버 김동완, 만능 엔터테이너 현영, 탤런트 이윤지까지 그야말로 연예계와 각계를 대표하는 쟁쟁한 스타급 연기자들이 동화약품 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동화약품의 CF는 1970~80년대 ‘스타 양성소’였다.

    광고자료 공개 프로젝트를 진행한 양규식 동화약품 홍보실장은, “자료의 보관상태가 좋지 않고, 옛 영상물을 재생하는 장비가 국내에 많지 않아 복원작업에 애로사항이 많다. 국내 최장수 기업인 동화약품의 장구한 기업광고 역사를 영구적으로 복원해 후대에 남길 수 있어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동화약품 윤길준 사장 인터뷰

    “전통 존중하고 윤리경영 해도 매출은 늘어납니다”


    창립 110주년 맞는 한국 최장수 기업 동화약품
    ▼ 제약사 사장의 건강 관리법이 궁금합니다.

    “아침에 우리 회사에서 생산하는 약을 7알씩 먹습니다. 씨이멕스, 헬민, 락테올, 글루코사민, 행심…. 이 약들 덕분에 이만큼이나마 건강을 유지하고 있으니 회사가 여러모로 저를 살리고 있는 셈입니다.”

    ▼ 골다공증 치료제 DW1350의 상용화를 좀더 앞당길 수 없습니까.

    “보통 7~8년까지 잡지만 P&G제약과 상의해 최대한 상용화 시기를 앞당기겠습니다. 결국 얼마나 빨리 임상실험 결과를 내고 판매 허가를 받는가의 싸움이므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요. 모든 게 착착 진행되면 그 안에 상용화할 수도 있을 겁니다.”

    ▼ 동화약품의 끈끈한 가족주의가 오히려 회사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저희 회사엔 계약직이 없고 정규직만 있죠. 그리고 구조조정은 없습니다. 퇴직 사원들에게도 다양한 혜택을 주고 있습니다. ‘동화는 동화 식구 전체의 것’이라는 보당 윤창식 선생의 유훈은 현재도 유용하고 미래에도 그럴 것입니다. 재교육을 통해, 또 회사 내부 경쟁을 통해 인력을 적절한 곳에 배치하면 매출은 자연히 늘어나죠. 우리는 지금껏 단 한 차례의 노사분규도 없었습니다. 노사의 개념보다는 가족의 개념입니다. ‘동화정신’처럼 젊어서 열심히 일하고 노후에 잘살게 해준다는 게 회사의 방침이죠. 공정한 성과 배분, 종업원의 안전과 복리 증진은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국내 최초의 전사원 월급제, 제약업계 최초의 우리사주조합 결성, 수혜품 추첨제, 퇴직사원 초청행사, 이 모두가 그 일환입니다.”

    ▼ 민족기업의 전통이 부담스럽지는 않은지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우리 동화가족 모두의 자부심입니다. 많은 기업이 친일정책을 통해 부귀를 누렸지만 우리는 결코 시류에 영합하지 않았고, 오히려 창업주를 포함한 역대 사장 3명이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그 때문에 한때 고난을 겪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 단단해졌다고 봐야 합니다.”

    ▼ ‘수혜품 추첨제’란 게 있다고 들었습니다.

    “임직원이 거래처로부터 받은 선물을 모두 모아 일련번호를 매겨두었다가 해마다 설과 추석에 추첨을 통해 전 임직원이 나눠 갖는 것이죠. 처음에는 선물을 일절 받지 않았으나 선물 보내는 사람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고마움의 표시로 받는데 어떠한 경우라도 개인적으로는 선물을 취하는 법이 없습니다.”

    ▼ 동화약품이 제약분야에만 집중하며 110년을 이어올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다고 봅니까.

    “‘좋은 약을 만들어 사회에 봉사하라’는 보당 선생의 기업정신을 굳게 신봉했고, 그 결과 건전한 기업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가르침이 있었기에 문어발 경영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에 전문화, 집중화에 사운을 걸 수 있었습니다.”

    ▼ 동화약품의 발전 방향과 향후 계획을 들려주시죠.

    “동화정신의 전통과 역사를 지속적으로 유지, 발전시키면서 세계적인 신약을 개발하겠습니다. 현재 기술수출한 신약물질의 조기 상품화를 통해 블록버스터급 의약품으로 발전시키자는 것이지요. 이를 통해 글로벌 제약회사로 거듭날 것입니다.”


    5억달러 기술수출 대박

    100여 년 전 활명수로 국내 시장을 장악했던 동화약품은 21세기에 들어서는 세계 시장의 장벽을 허무는 데 주력하고 있다. 독창적인 신약 개발로 제약업계와 증권가의 주목을 한몸에 받고 있는 것이다. 2001년 7월 세계 최초로 간암치료용 방사성 의약품인 ‘밀리칸주’를 개발했는데 이는 세계 제약사에 한 획을 그은 쾌거이자 동화약품을 첨단 의약품 메이커로 도약시킨 일대 사건으로 손꼽힌다. 밀리칸주의 개발로 동화약품은 대한민국 10대 신기술상, 대한민국 신약개발대상과 과학기술 포장을 받았다.

    지난 6월에는 자체 개발한 항균성 신약물질 DW224a(퀴놀론계 항균제)를 미국 ‘퍼시픽 비치 바이오사이언시스(Pacific Beach Biosciences)’에 기술 수출했다. 동화약품은 계약금을 포함한 5650만달러의 기술수출료와 매출에 따른 로열티를 받기로 했으며 임상약물 및 최종제품을 공급하기로 했다. 계약조건은 동화약품이 DW224a의 아시아 지역을 제외한 전세계 개발 및 판권을 퍼시픽 비치 바이오사이언시스에 양도하는 대신, 향후 신약개발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은 퍼시픽 비치 바이오사이언시스가 부담하는 것. DW224a는 그람양성균, 호흡기 감염균, 폐렴균 등 다양한 감염질환의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신규 퀴놀론계 항균제로서, 안전성과 내성균에 대한 유효성이 개선된 신약이다.

    창립 110주년 맞는 한국 최장수 기업 동화약품

    세계적 설비와 시설이 투입될 동화약품 충주 신공장 조감도.오른쪽은 최근 5억달러 이상을 받고 기술수출한 골다공증 치료 신물질 DW-1350.

    또 지난 7월에는 골다공증 치료 신물질 DW1350을 미국 P·G제약(P·G Pharmaceuticals, Inc)에 기술 수출했다. 개런티는 국내 제약 역사상 최대 규모인 5억1100만달러. DW1350 및 그 후속 물질은 새로운 개념의 골다공증 치료제로, 동화약품은 기술 수출료와 매출에 따른 로열티 수입을 올리는 대신 아시아 지역을 제외한 전세계 개발 및 판권을 P·G제약에 양도했다.

    5억달러가 넘는 기술 수출료는 110년 국내 제약 역사상 최고액으로 동화약품 2006년 당기순이익(77억원)의 61배, 매출(1487억원)의 3.1배, DW1350 연구개발비(200억원)의 23배에 달한다. 치료제가 발매되면 추가로 판매액의 일부를 로열티로 받는다. 기술 수출료는 P·G제약이 미국 등지에서 환자에게 투여할 적정용량과 효능, 부작용을 알아보는 임상 2상·3상 시험과 FDA의 시판 허가라는 관문을 성공적으로 통과할 때마다 나눠 받도록 되어 있다.

    P·G제약이 미국·유럽 등 아시아 이외 지역 특허 사용권 및 판매권을 가져가면서 이토록 거액을 주기로 결정한 것은 시판 중인 골다공증 치료제 ‘악토넬’의 특허가 조만간 만료돼 후속제품이 필요한 데다 DW1350의 시장 잠재력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1996년 개발에 들어가 11년 만에 결실을 본 DW1350은 투여하기에 간편하고 골 형성을 촉진시키며 부작용이 적어 3박자를 고루 갖춘 신약후보물질로 평가받고 있다.

    동화약품 중앙연구소 유재만 소장은 “‘포사맥스’ 등 기존 약물들은 오래된 뼈 조직을 흡수하는 파골(破骨)세포의 작용을 억제하는 데 그치는 반면 DW1350은 전임상시험과 유럽 임상시험에서 새로운 뼈 조직을 만드는 조골(造骨)세포의 활성도를 높여 질 좋은 뼈를 만들 수 있음을 보였다”고 설명한다.

    동화약품은 DW1350이 세계적 블록버스터 신약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무명의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가 위궤양 치료제 ‘오메프라졸’의 개발로 일약 세계적 제약기업으로 도약했듯 DW1350의 임상시험이 만족스러운 성과를 얻는다면 동화약품은 세계 10대 제약기업으로 급부상할 수 있다.

    현실로 다가선 블록버스터의 꿈

    동화약품이 이토록 시장성이 있는 신약을 신물질 상태에서 기술 수출하기로 결정한 것은 판매 허가를 얻기까지의 막대한 투자 비용 때문이다. 국내 제약사가 세계시장을 겨냥해 신약을 개발하려면 수천억원을 추가로 투입해야 하고, 기간도 5~10년이 소요되는데다 실패 가능성도 매우 높다. 신약 개발의 성공률은 보통 1만분의 1. 아니다 싶을 때는 하루빨리 중단하는 것이 오히려 이익이다. 동화약품은 이런 리스크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국내에서 임상 1상 및 전기 2상 시험까지 진행하고 다른 파트너를 찾는 길을 선택했다. 실제 동화약품은 지난 1996년부터 골다공증 치료제 개발에 착수해 몇 가지 후보물질을 개발했지만 사업성이 떨어져 포기한 아픈 경험이 있다.

    동화약품은 거꾸로 국내에서 개발된 신물질 기술을 사들여 신약 개발에 직접 뛰어들기도 했다. 고지혈증 치료제가 바로 그것. 현재 고지혈증 치료제 시장은 국내만 1600억원에 달하며, 세계 처방약 시장에서 매출 1위부터 5위 약품이 모두 고지혈증 치료제일 만큼 ‘황금어장’이다. 동화약품은 지난해 9월18일 한국생명공학연구원과 고지혈증 치료물질에 대한 기술이전실시계약을 체결했다. 이 물질은 생명연 김영국 박사팀이 과학기술부의 지원을 받아 국내 자생 식물에서 추출한 것으로 동물실험 결과 저밀도 콜레스테롤과 중성지방은 현저하게 감소하고 고밀도 콜레스테롤 농도는 증가하는 등 고지혈증 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보였다.

    한미 FTA(자유무역협정)의 타결로 제약업계는 이제 세계시장에 진출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에 놓였다. 동화약품이 안양공장을 두고 최첨단 시설의 충주 신공장을 건설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신약 개발과 기술 수출 성과를 발판으로 세계시장 진출을 꾀하기 위해서는 세계적 수준의 생산설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8만2650m2(2만5000평) 규모의 신공장에는 미국 우수의약품 제조기준(cGMP)을 충족시키는 설비와 시설이 들어가게 된다.

    우둔해 보일 만큼 윤리, 원칙, 의무에 매달리는 동화약품. 과연 그들은 ‘양약(良藥)이 아니면 만들지 말라’는 보당 선생의 유훈을 따르면서도 세계 블록버스터 제약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그 꿈은 한걸음씩 현실로 다가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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