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정묘지’로 한국 시의 지평을 넓힌 것으로 평가받는 조정권 시인. ‘천상의 누각’에 도달하기를 꿈꾸던 그의 거침없는 시세계는 깨달음을 얻은 성자처럼 세상 곳곳을 에돌더니 물이 다 차서 고요한 연못이 되고 그곳에서 아름다운 연꽃을 피워 올린다.
잠자리가 다시 날아갈 때까지 나는 나뭇잎처럼 조용히 숨을 쉬었다.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잊고 지낼 때가 있다. 그때 이런 잠자리들은 내가 움직이는 뜨거운 생명임을 알려준다. 한참을 움직이지 않으니 잠자리의 날개마저 무겁다. 이러한 무거움이 삶이다. 투명하게 하늘이 높아가는 계절에 나는 정말 오랜만에 조정권(趙鼎權·58) 시인의 어깨에 잠자리처럼 내려앉아 그의 시를 연못의 연꽃을 바라보듯이 보았다.
조정권 선생을 뵌 지 10년은 넘었을 것이다. 가을날이었던 것 같은데, 종로 혜화동에 있는 마로니에공원에서 시인 남진우와 함께 뵌 기억이 선명하다. 당시 나는 등단한 지 얼마 안 되는 신인이었고, 젊었다. 선생은 이미 ‘산정묘지’로 유명했는데, 가깝게 피어 있는 꽃과 같았다. 선생을 꽃으로 비유한 것은 그 때 햇살이 좋았고, 선생의 외모가 준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들은 주로 문학과 음악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다.
그리고 다시 선생을 찾아가는 길이다. 일산에서 석계로 가는 길은 차라리 춘천이나 원주 같은 곳으로 가는 것보다 험하고 어려웠다. 내부순환도로를 타고 월곡 램프로 내려오면 된다는 이야기만 듣고 덤벙대면서 시동을 걸었다. 내부순환도로에서 월곡 램프를 지나친 것이 화근이었다.
마장 램프로 빠지는 바람에 완전히 길을 잘못 들었다. 마장 램프에서 내려오자 청계천이다. 좌회전이 전혀 허용되지 않는 우라질 도로였다. 청계천을 일주하고 그대로 그 길을 되돌아와서 다시 순환도로를 타고 가다가 제일 가까운 램프로 내려가 또 좌회전이 안 되어, 불법 유턴을 해서 순환도로를 다시 탔다. 옆 차가 경적을 울리자 내가 도리어 화를 내면서 노려보았다.
그렇게 순환도로를 다시 탔지만, 또 길을 잘못 들어 강남으로 빠지는 바람에 영동대교를 타고 강남으로 조금 들어갔다가 다시 유턴을 해서 영동대교를 타고 동2로, 동1로를 거쳐 태릉 쪽에 도착했다. 태릉 사거리를 지나자 솔직히 조정권 시인이고 뭐고 그냥 돌아가버리고 싶었다. 이런 것이 일상이다.
길은 막히고 늦여름 더위는 에어컨 바람을 비웃었다. 등으로 땀이 흘러내리고, 십수년 전에 본 선생의 아름다운 모습은 멀어지고, 만일 또 전화로 길을 가르쳐주신다면 못 찾겠다고 하고 그냥 돌아갈 생각이었다. 극도로 신경질이 난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차를 세우고 가까이에 있는 빵집에서 우유 한 잔을 마셨다.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횡설수설하자 선생이 말했다.
“내가 나갈 테니까 그 자리에 차 세우고 계세요. 근처에 큰 건물이 뭐가 있지요?”
나는 농협과 웬 불고깃집 간판을 말하고는 차에서 내려 담배를 피워 물었다. 더운 날씨라 사람들도 그렇게 덥게만 보였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 무척 짜증스러웠지만 선생이 나오신다니 기분이 풀렸고, 그렇게 드디어 선생을 다시 만났다.
회색 그랜저에서 내린 선생은 별로 변하지 않으셨다. 허우대만 멀쩡한 나를 보고 무척 고생했다며 태릉 아이스링크 근처에 있는 카페로 데리고 간다. 지난해인가, 모 잡지사의 의뢰로 태릉 아이스링크에서 김연아 선수를 만난 적이 있다는 말을 하면서 조정권 선생과 근처의 카페로 갔다.
시와 삶의 균형감
이탈리아 식당 카페에서 선생과 마주 앉았다. 오후 4시경이었다. 3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한 시간이 늦었다. 일산에서 3시간 걸려 만났다. 선생은 남부순환도로를 타고 오다가 북부순환도로로 빠져서 월곡 램프로 내려오라고 한 것이었는데, 나는 북부순환도로를 지나치면 월곡 램프가 나온다고 잘못 알아들었다.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의 삶도 문학도 길을 잘못 들면 고생만 하고, 신경질만 나며, 거리에서 거의 벌거벗고 다니는 여자를 보고 위안이나 얻는 그런 꼴이 되어버린다. 선생이 하는 말을 잘 새겨들어야 하고, 좋은 선생을 만나야 방황하는 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
우선 간단하게 선생의 근황을 들었다. 선생은 화려한 이력에 비해 문단활동이랄까 바깥 활동이 거의 없는 분이다. 늘 고요한 선생의 일상은 그렇게 덜 움직임으로써 더 깊어지는 세계를 추구한다. 20년 넘게 근무한 문예진흥원 시절, 선생은 거의 출퇴근 코스만 밟았을 뿐 광화문이나 인사동 같은 곳에서 문우들과 어울려 노는 시간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수년 전에 문예진흥원에서 퇴직하고 지금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데, 대학과 집만을 오가는 생활을 하신다.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이 두 공간, 그리고 공간이동은 시와 삶의 이동으로 보인다. 시인에서 생활인으로 넘어가는 삶의 이동은 매일매일 이뤄지기에 특별한 경계선이 없다.
움직이는 동안 저절로 그 공간에 맞는 스타일이 갖추어진다. 양 어깨에 물통을 메고 걸어가듯이 삶의 걸음걸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균형’ 혹은 ‘균형감’이다. 선생의 이러한 단순한 생활방식은 삶의 균형을 중요시하는 데서 온다. 직업을 가지고 있기에 생계수단인 그 직업과 시인으로서의 삶,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생활이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직장에서는 직원들과 어울려야 한다. 특히 선생의 한평생 직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문예진흥원은 우리나라의 모든 예술가가 모인 곳이고, 선생은 그곳에서 예술행정을 비롯한 많은 일을 했다. 조화롭게 어울리지 못한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어울림이 기둥이거나 이파리라면, 그 뿌리는 홀로 있음이다. 젊어서부터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품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혼자 있다는 것. 옛 선비들은 ‘신독(愼獨)’이라는 ‘대학’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혼자 있을 때 몸가짐을 바르게 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람들은 온 우주와 연결된 존재이지만 그 근원은 바로 혼자, 자기 자신이다. 부처도 삶의 첫 탄성이 바로 ‘천상천하유아독존’이었다. 혼자 있어 편하고 좋은 경지는 천성도 있겠지만, 절차탁마를 통한 결과일 수도 있다.
무서운 고요의식
인간은 어울려 다니길 좋아한다. 선생 역시 인생의 스승을 만나기 전까진 적어도 시적으로는 매우 방황한다. 그러다 36세 되던 해인 1985년 김달진 선생을 만난다. 한국의 대표적인 은둔 시인, 한학자, 불교학자인 김달진 선생과의 만남을 통해 무섭게 고요하고 깊은 세상을 만난 것이다. 시집 ‘산정묘지’로 올라가는 여정을 여기에서부터 둔다고 했다. 그분을 추억이라도 하는 듯이 나지막하게 두 분의 인연을 이야기했다.
“그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수유리에 있는 선생 댁을 찾아다니면서 내가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의 방향을 본 거죠. 아니, ‘올라야 할 길’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네. 선생은 전형적인 은둔시인이죠. 밖의 세상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았어요. 생전에도 선생 이름이 문단주소록에 작고(作故) 문인으로 기록된 적이 있을 정도니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선생은 그저 웃기만 하셨지요. 그런 분입니다. 저는 그것을 ‘무서운 고요의식’이라고 합니다. 선생의 칩거생활은 단순히 세상으로부터 외롭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선생은 커다란 고요를 품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거죠. 격리가 아닌 삶의 포용이었고, 그것이 매우 크고 고요하기 때문에 그 조용함이 저희들에게는 외롭게 보이는 거죠.”
그분으로 말미암아 시인은 선시(禪詩)와 한시(漢詩)의 세계를 만난다. 때론 단 한 문장으로 삶의 비의를 드러내고 깨어버리는 그 무서운 고요함의 세계. ‘산정묘지’의 정신은 거기에서 움트고 자란다. 계속해서 선생은 말한다.
“1980년대가 얼마나 소란스러웠어요.”
그렇다. 전두환과 광주로 시작된 1980년대는 우리 현대사의 살점이 떨어져 나간 아픈 시절이기도 하다. 마치 전쟁을 치르고 난 것 같은 황량함 속에 귀신처럼 돌아다니던 번거로움들. 싸움은 싸움을 낳고, 서로의 주장으로 한여름의 매미처럼 당장이라도 죽어버릴 것처럼 울어대서 마침내 온몸을 텅 비워버리는, 영혼이 말라비틀어져버린 소비적인 외침들이 얼마나 거칠던 시절인가.
필자 역시 이 시절에는 한구석에 틀어박혀 막걸리를 마시고 살았다. 그리고 다른 세상을 꿈꾸었다. 바슐라르나 에밀리 디킨슨을 통해 이런 세상에도 끝내 살아가야 할 신비스러운 곳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시는 근본적으로 서정이다. 그것이 서사를 갖추고 있어도 서정이다. 그런 시절에 만난 김달진 선생. 그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선생은 고요히 있었다.
“저렇게 무서운 사람도 있구나 싶었죠. 저게 시인의 삶이 아닌가 반문하면서 그 소란스러운 1980년대에 저토록 고요한 세계를 만난 거지요. 그러나 그것은 관념이나 사상이 아니라 실제로 수유리에서 거처하며 사시는 모습이었어요. 책이 아니라 사람 말입니다. 그 어른을 통해서 나는 보고 배웠습니다. 그분이 내 시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분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쩌면 적당히 쓰다가 말았을지도 모르지요.”
獨樂堂 對月樓
1991년 펴낸 시집 ‘산정묘지’에 실린 자서(自序)는 이러한 과정에서 저절로 익어 떨어진 감과 같은 시다.
獨樂堂 對月樓는
벼랑꼭대기에 있지만
예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셔버린 이.
‘독락당 대월루’는 조선 선비 이연적이 경주 근처 시냇가에 지어놓은 작은 정자다. 그래서 벼랑꼭대기에 있다는 말은 산문적인 의미에서는 오기(誤記)다. 시냇가와 벼랑꼭대기를 어떻게 산문적인 논리로 풀어낼 수 있는가. 이것은 선생이 이 시집을 풀어 나가는 은유다. 시냇가에 있는 작은 정자를 벼랑꼭대기에 세워놓고 길을 지워버린 어떤 존재. 그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면서 내려오는 길을 차단한 이는 누구일까. 스승인가 자기 자신인가. 이것 역시 정답이 없다.
필자는 뭐라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냥 가슴에 담아둔다. 명색이 나도 시인이라서 경거망동하기 싫은 모양이다. 벼랑 끝에 은거하는 이가 바로 이 글을 읽는 당신이면 어떤가. 세상을 살자면 숨을 곳이 있어야 한다. 그런 마음속에 정자를 짓고 살아야 가끔 쉬면서 재충전을 할 수 있다.
나는 선생에게 아주 상식적인 질문을 하나 던졌다. 이런 질문은 대선배에겐 버릇없는 짓이지만, 어쩔 수 없이 조심스럽게 빗방울 같은 궁금증을 선배의 연못에 떨어뜨린다.
“시란 무엇이며, 1980년대 같은 시대의 아픔을 같이 체험하고 느끼고 살아낸 삶의 방식을 어떻게 보십니까?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선생을 혹시 관념적인 세계만 추구하는, 현실감각이 없는 안일한 사람으로 치부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선생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시란 자기를 견디는 방법이자 시대를 견디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다른 방법으로 견디는 것이지요.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인종이나 다른 부족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서로 모여서 같이 견디고, 난 그냥 혼자 견디는 겁니다. ‘집단 개성’ 속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거죠. 집단 개성 속에서 벗어나고 싶은 시적 자아랄까, 그런 것이죠. 모두들 다르게 살잖아요.”
그런 자유가 없다면 선생은 이 삶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을 들으면서 나는 영화 ‘미션’의 로드리고 신부와 가브리엘 신부의 대사를 떠올렸다. 1750년경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그리고 브라질의 국경지대에서 스페인 침략군이 평화롭게 살고 있는 원주민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실제 사건을 영화화한 ‘미션’에서 착한 사람들이 사는 조용한 마을에 무장한 스페인 군대가 밀고 들어오자 그곳에서 선교를 하던 두 신부는 자기의 방식으로 신의 사랑을 찾아간다. 그것은 자신을 견디는 방법으로 봐도 무관하리라.
로드리고 신부는 침략군에 대항해 칼을 들었고, 가브리엘 신부는 십자가 아래서 묵상하고 기도한다. 서로 다른 생각과 사랑의 방법을 제시하는 두 신부. 칼을 차고 가브리엘 신부에게 다가간 로드리고 신부는 이제 신의 사랑을 실천하고 죽어갈 자신에게 축복을 내려달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가브리엘 신부의 입에서 이러한 말이 흘러나온다.
“그럴 수 없어…. 만일 당신의 행동이 옳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오. 만일 그르다면 내 축복이 무슨 소용이 있겠소. 무력이 옳다면…, 이 세상에 사랑이 설 자리는 없을 것이오. 아마 그럴 거요…아마도. 하지만 나는 그와 같은 세상을 살아갈 힘이 없소. 로드리고. 나는 당신을 축복할 수가 없소.”
그러나 이 말을 하고선 자신의 목에 걸고 있던 십자가 목걸이를 걸어주고 잠시 로드리고를 응시하는 가브리엘 신부는 수천 마디의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진정으로 성숙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면서도 서로의 방식으로 사랑과 축복을 내리는 이 사람들. 고독과 은둔의 신부와 행동하는 신부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은 사랑이라는 저 미묘하고도 깊은 세계를 드러나게 했다. 1980년 광주는 스페인군에게 침략당한 원주민 마을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그 상황에서 우리 시대의 가브리엘과 로드리고는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살았고, 사랑했을 것이다. 조정권 선생은 아마도 가브리엘의 방식을 선택했을 것이다.
아직 더운 늦여름이었다. 선생과 나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정원처럼 꾸민 카페 야외 테이블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여름에 자연은 정말 열심이다. 숲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를 배경으로 뜨거운 햇볕을 받아들이는 나뭇잎에서부터 매미들의 울음소리, 마치 한여름이 생애의 전부인 것처럼 모든 것이 쉬지 않고 자신의 세계에 몰두하고 있었다.
작가들 중엔 매일매일 꾸준하게 조금씩 쓰는 스타일이 있고, 몰아서 한꺼번에 미친 듯이 쓰는 스타일이 있다. 선생은 ‘뜨거운’ 한여름과, ‘차가운’ 한겨울에 글을 몰아 쓴다. 일단 글쓰기에 들어가면 최대한 집중하기 위해 거의 물만 먹으면서 집필하는 것이다.
천상의 누각
“시를 쓰기 전에 머릿속이나 마음에 떠오른 생각들을 이리저리 굴리는 시간이 필요하지요.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리고 집중적으로 집필합니다. 한여름이나 한겨울에 주로 작업하는데, 아마도 뜨겁고 차가운 그 감각적인 자극이 시를 자극하는 것 같기도 해요. 그리고 시가 써지기 시작하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죠. 쓸 때는 허기져서 쓰는 것입니다. 그동안의 삶이 허기져서 글이 나오는 것이죠. 이 허기가 나오는 계절이 바로 여름과 겨울입니다.”
걸신들린 자가 밥을 먹는 것처럼 그렇게 시를 먹고, 우리는 그의 그러한 모습을 ‘산정묘지’에서 볼 수 있다. 그 세계는 기존의 우리네 시세계와는 다른 공간이었다. 뜨겁고, 차갑고, 무섭고, 고요하고, 휘몰아치고, 머무는 공간이었다. 관념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구절도 그 뜨겁고 차가움으로 용솟음치는 힘이 넘치는 시였다. 한여름에 이런 시를 읽는 시간은 태양 속에 얼어붙어 있는 한 조각의 얼음 정신을 바라보는 시간이다.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山頂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天上의 누각을 꿈꾸어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의 일각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山頂墓地 1’의 첫 연에서
겨울 산의 결빙은 인간의 정신이 도달할 수 있는 한 정점이기도 하다. 보석과 같은 그 차가운 결빙, 시인의 눈에 그것은 자신이 도달해야 할 정신의 결정체로 보인다. 그것은 한 조각의 얼음일 수도 있고, 수만년 동안 땅속에서 만들어진 보석일 수도 있다. 시란 그런 얼음조각이나 빛나는 보석이리라. 그래서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한다고 되뇌면서 겨울 산을 올라가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정신의 올라감이 아니라, 시를 쓰는 몸을 그곳으로 밀고 올라가게 하는 것이다.
두 발로 산정을 걸어 올라가면서 더 높은 정신의 세계를 꿈꾼다. 시인 조정권은 인간의 정신이 어디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 알고 싶다. 그러한 마음이 결빙이 된 이 시편들은 모두 차갑게 빛난다. 그리고 이 시편들을 출발로 선생의 시적 사고가 수직의 상상력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세계가 형성된 것은 선생의 설명에 따르면 고 김달진 선생을 만나고부터라고 했지만, 어쩌면 그 인연은 필연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하루에도 알게 모르게 수없이 많은 인생의 스승을 그냥 지나친다. 어린아이일 수도 있고 노인일 수도 있고, 친구나 직장 동료일 수도 있다. 만난다는 것은 깨어 있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 김달진 선생을 만나기까지 선생은 두 눈을 뜨고 깨어 있었다. 이 정신의 결정체인 ‘산정묘지’에 대해서 선생은 이런 말을 독자에게 남긴다.
“한국 시의 답답한 틀을 깨고 싶었죠. 우리 시의 단형주조인 그 ‘틀’을 말입니다. 아마도 내가 산정묘지를 쓰면서 욕심을 낸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한국 시의 정신적인 스케일을 깊게, 넓게, 높게 하고 싶었던 것이죠. 그것이 어디까지 가능한가. 스스로 물어보면서 높이 올라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시집 출판 이후, 국내 문단의 호평도 호평이지만 프랑스의 좌파 언론인 ‘리베라시옹’에서는 불어로 번역된 ‘산정묘지’를 대서특필했다. 이 시집으로 적어도 유럽에서는 조정권 시인이 옥타비오 파스와 더불어 세계 15대 대표시인으로 꼽혔다.
단박의 깨달음
이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날이 온다. 그 가을날에 땅을 향해 수직으로 떨어지는 나뭇잎들이 거주했던 곳은 지상이 아니라 천상의 누각이다. 첫 연을 읽다보면 잘 조탁된 언어가 회화적인 이미지로 다가온다. 읽은 이는 그림처럼 보이는, 그래서 관념적이지 않은 저 어렵고도 어려운 산정의 이미지를 느끼게 되는 거였다.
이러한 시세계는 문예진흥원에 근무하기 전, 즉 선생의 젊은 날의 직장인 건축예술잡지 ‘공간’에서 만든 시의 공간이다. ‘공간’지 편집장으로 6년을 근무하면서 화가와 작곡가들을 만나고 그들의 세계와 교감하는 시기를 거쳤다. 당시 이만방 선생, 작곡가 강석희 선생 등과 교분을 나누었다. 이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시는 창조적인 작업이지요. 시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적인 작업은 그 주변에 있는 자매예술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민감하게 느껴야 합니다. 그것은 손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손가락이 다섯 개인데, 한 손가락을 쓴다면 손 기능의 약간만을 사용하는 거지요. 모든 예술이 정신에서부터 손으로 흘러나오는 것인데, 다섯 손가락을 다 이용하기 위해서는 항상 자매예술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인지 선생은 미술평론을 하기도 하고, 특히 고건축을 비롯한 우리 전통건축에 일가견이 있다. 그 예술 분야에 깃들여 있는 ‘조형적 사고’를 본다. 그리고 그것을 시로 응용한다. 시를 한자로 풀어 설명하면, 역시 언어로 만들어진 집이라는 뜻이 아닌가. 그 사원에 거주하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다. 조정권 시인의 산정누각은 바로 시의 본연에 가장 가까운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것은 살아 숨쉬는 생명이다. 김달진 선생을 만나기 전에는 이러한 세계관이 그를 지배했다. 시적 사고나 음악적 미술적 사고의 차이가 뭔가? 공통점은? 한국 시에서 주변 예술에 일관되어 있는 조형적인 사고는? 그러한 물음은 자연스럽게 동양정신 쪽으로 가까워졌고, 부싯돌이 부딪쳐 불꽃이 살아나듯이 김달진 선생을 만남으로 선생은 비로소 시인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보았다고 했다. 그 깊고 깊은 동양정신의 바닷속으로 빠져 들어 촌철살인, 도끼로 장작을 패는 것 같은 단박의 깨달음의 세계에서 한 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 다음의 삶은 여행이다.
‘수직적 사고’에서 ‘수평적 사고’로
“산정묘지 이후 10년간은 해외여행을 많이 다녔습니다.”
조심스러운 비유이긴 하지만 시인의 삶은, 깨달음을 얻은 자들이 깨달음 후에 하는 여행과 닮아 있다. 부처는 6년 고행 이후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고해와 같은 생을 걸어서 길 위를 다니다가 열반했다. 예수 역시 광야에서 시련을 견디고 어부와 같은 그 시대의 가난한 자들과 함께 여행했다.
머물고 흐르는 것은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물이 차면 흘러넘치고, 모라라면 고이는 법. 조정권 선생은 고여 있는 삶이 흘러넘치자 흘러다니듯 여행을 한 것이다. 체코의 프라하를 비롯해 유럽은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이고, 특히 독일에서는 한동안 체류하기도 했다. 그리고 ‘베를린 통신’이라는 시를 우리에게 보내주었다. 시인은 머무는 곳이 바로 시가 되기 때문이다. 그 정신의 변화가 구체적이고, 일상적으로 내려온다. 산정에 머물렀던 얼어붙은 정신이 산 아래로 내려와 녹아 흐른다.
저녁 네 시,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브란덴부르크 광장 동쪽 구역
터키계 노점상들이 죽은 불빛을 켜놓고
도깨비시장을 연다
피에 젖은 자유의 벽 조각
소련 군모, 사회주의 털모자들이
눈발을 쓴 채 거래되고 있다.
-‘베를린 通信’ 중에서
산정묘지에서 인용한 시와 비교해본다면 시인의 변화된 모습을 금방 느낄 수 있다. 구체적이고 일상적이며, 가까이 오고, 이야기를 걸어오는 시들. 이전의 세계와는 확연히 다른 시세계가 펼쳐진다. 향 싼 종이에서 향내 나고, 생선 엮어놓았던 새끼에서 비린내 나는 법. 법구경의 첫 장은 영원한 진리다. 삶의 비린내는 역하지 않다. 아니 어떤 이는 이것을 삶의 향기로 느끼기도 한다. 삶은 더럽고 치사하고 구차하고 역겹다. 문학은 그것을 연꽃으로 피워내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산정묘지의 세계는 ‘수직적인 사고’였는데, 그 후 10년은 ‘수평적인 사고’의 시절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수직적인 상승을 꿈꾸던 시인이 수평적인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이 시에 녹아 있고, 내면에 상처가 있기 때문에 숭고한 것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햇볕이 땅으로 떨어지듯이, 그 땅에 있는 모든 상처를 드러내 보이면서 눈물자국을 마르게 하듯이, 알게 모르게 고여 있는 진흙탕과 같은 내면의 상처들. 세상의 그 누군들 그런 상처 없이 살 수 있을까. 같은 상처라도 숭고한 것을 바라보고 있는 자는 그 상처에 소금을 뿌려가면서 견디고 견뎌내는 것이다. 선생은 조용히 움직이는 시인이다. 지금도 1년에 보통 20여 편의 시를 발표하고, 이미 시집을 엮을 만큼의 시는 있지만 아직 시집을 내지는 않을 생각이다. 더 생각하고 더 골라내는 과정을 거친 다음 시집은 나올 것이다.
“시는 양보다는 질이죠. 특히 나이 들어서 시집을 낸다는 것은 더 신중하게 해야 될 일이라고 봐요.”
잠의 바쁨
“선생님은 어쩌다가 글을 쓰셨어요?”
작가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의외로 깊은 대답이 나온다. 한강의 발원지인 태백산 검룡소를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조정권의 시원은 어디인가? 그 신성한 숲의 가운데 솟아오르는 물방울들, 그것은 시냇물로 이어지고, 거대한 강줄기를 이루고, 기어이 바다, 화엄의 세계를 이룬다. 선생이 양정중학교 3학년이던 시절이었다. 후암동에 있는 일본 적산가옥에서 살았는데 집 건너편에 삼영고아원이 있었다.
“그 고아원 아이들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어요. 이 세상에는 물과 햇볕을 받고 싱싱하게 자라는 나무가 있는가 하면, 시든 채로 자라는 풀도 있지 않습니까. 내 또래 아이들이 시들시들 자라는 것을 보면서 연민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 아이들과 어울려 놀면서 처음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죠. 그 아이들의 슬픈 이야기들을 쓰고 싶어서, 당시 다니던 학교 교지에 산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읽은 책이 릴케의 ‘말테의 수기’였는데, 아주 감동적으로 읽었고 그 스타일을 모방해서 산문을 썼죠.”
그 산문을 읽고 문예반 지도교사이던 김상억 선생님이 “너는 시를 쓰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양정고등학교에서 하던 ‘월계문학의 밤’에 매년 목월 선생이 오셨는데, 그때 목월 선생을 만났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목월의 추천으로 21세에 등단한다. 이쯤에서 선생의 문단 이력을 한번 정리해본다.
조정권 시인은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나 양정중·고등학교를 거쳐 중앙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70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시편’ ‘허심송’ ‘하늘이불’ ‘신성한 숲’과 최근에 ‘떠도는 몸들’을 냈다. 이러한 일련의 시 작업으로 녹원문학상, 한국시협상,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요즘의 선생은 산정도 여행도 아니다. 그것은 연못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한군데 고여 있으면서 그 상태로 머물러 있고 싶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잠을 자는 것 같은 거죠. 그처럼 고요한 시간은 없죠. 저는 요즘 잠자는 것을 갈망하고 잠의 세월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재우려고 하는 그런 일은 아직 젊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잠의 최고 경지는 열반인데, 그것은 아직 멀었고….”
이런 말을 하면서 다시 김달진 선생을 떠올렸다.
“그분이 그런 분이셨죠. 잠의 바쁨이 있는 분이죠.”
잠의 바쁨? 무슨 말인가 싶었다.
“김달진 어른은 사시는 게 매일 주무시는 것 같았는데, 아무것도 안 하시는 것 같은데 매우 바쁘신 거죠. 그걸 잠의 바쁨이라고 한번 말해본 겁니다.”
水性의 삶
동양정신을 김달진 선생을 통해 만났다면, 조정권 시인에게 다가온 서양의 스승이 있다. 시인 휠덜린을 읽는 시간은 충격적이었다. 장영태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인 ‘휠덜린’을 읽은 것이었다. 휠덜린은 34세에 걸린 정신분열증으로 40년 동안 세상에서 유폐된 삶을 산 불우한 시인이다.
“그건 아마도 무시무시한 삶이었을 겁니다.”
선생은 휠덜린의 흔적을 독일 튀빙겐에서 더듬었다. 시 ‘튀빙겐 가는 길’의 시작 노트에 선생은 이렇게 썼다. 휠덜린에 대한 선생의 마음이 잘 읽히는 글이어서 조금 길게 인용한다.
“튀빙겐은 전형적인 중세 낭만도시, (…) 12세기 오래된 민가, 후기 고딕식의 교회, 종교개혁 후 신학교로 사용되어온 수도원들, 성들, 헤르만 헤세가 점원으로 일하던 고서점이 있고, 헤겔과 휠덜린이 같이 다니던 신학교도 있고, 휠덜린이 정신착란으로 근 40년을 얹혀살던 목수의 집, 휠덜린 탑도 있다. 이곳의 겨울은 오후 4시부터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여 6시면 밤이 온다. 햇빛보다 어둠이 오래 지배하는 도시. (…) 밤의 튀빙겐은 흔들이다 빛나는, 대지 위의 성배 같다. 그 성배를 지키는 수호기사들은 이곳의 하얀 어둠, 밤, 침묵, 눈일 것이다.
그럼에도 욕망의 힘은 인간을 인간의 영원한 원천으로 이끌어가려 한다. 그러나 그 욕망은 현재의 삶에 의해 절단돼 있다. 튀빙겐으로 가는 길은 신성으로 가는 길이지만 건너갈 다리가 없다. 휠덜린이 건너간 다리는 사실 주행선이 아니라 갓길일 뿐, 그의 길은 사면에 암벽도 면벽도 없는 암자 같은 길이 아니었을까?”
김달진 선생에게서 동양의 정신을, 휠덜린에게서 서양의 정수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 두 세계는 그의 시세계를 형성하는 음과 양의 세계로, 그 조화로움의 근본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이런 묘사를 하다보면 현실감각이 떨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조정권의 많은 시는 가까이 있는 친구나 이웃처럼 다정하다.
그중에서도 지금은 석계역으로 가는 길목이 되어버린 공원에 자리잡고 있던 한 대폿집이 있다. 경희대 최동호 교수, 고 박정만 시인과 함께 다니던 곳이었다. 어느 여름날 소나기를 피해 그 대폿집으로 최 교수와 함께 들어가 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대폿집 주인인 과부가 박정만의 시집을 두어 권 들고서는 아는 시인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여기에 밤늦게 자주 오셨는데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봤다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외롭게 세상을 견딘 시인 박정만이 그 외롭게 지친 날들의 늦은 밤을 그곳에서 보낸 것이리라.
말로 할 수 없어 그 말의 가장 예민한 시를 쓰는 사람들. 언어예술은 차라리 침묵의 회화나 번역될 수 없는 음악의 멜로디를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리고 조정권 선생은 결국 시 ‘굴다리 밑’으로 박정만과 그 대폿집, 눈물을 글썽이던 주모를 추억한다.
거기에는 박정만과 몇 사람의 흔적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차라리 고요한 한 장면이다. 긴장도 치열한 정신의 파편도 없지만 그렇게 보여줄 수밖에 없는 시인의 마음은 깊은 연못 같다. 그리고 역시 고인이 되신 김영태 선생님의 이야기. 선생은 말년에 쓸쓸하게 암 투병을 하다 돌아가셨다.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외로운 시절이었는데, 마침 조정권 선생의 따님이 잡지 일을 하면서 김영태 선생의 글을 받았다고 한다. 조 선생의 따님 이름은 혜린이다. 나중에 김영태 선생의 유고 시에서 이런 구절을 읽고 조정권 선생은 마음이 아팠다.
“오늘은 혜린이가 찾아오는 날…”
김영태 선생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나날을 견디다가 고독하게 돌아가셨다. 원고를 받으러 오는 혜린이를 기다리시면서 말이다. 선생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과거에 명성이 있어도 결국 갈 때에는 뒷모습만 남는 것이라며 쓸쓸하게 웃었다. 카페 주변 숲 속에서 새소리가 고독하게 울려 퍼졌다. 저녁이 오고 있다. 헤어지기 전에 다음 시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시가 고이고 모여 꽉 차면 내야지요. 그 시집은 아마도 고요한 시집이 될 것 같습니다. 소리 없는 연못 같은 고요한 그런 시집 말입니다.”
선생은 연못에 물이 덜 차면 시끄럽다고 했다. 그 연못을 채우기 위해 물이 흘러드는 소리로 소란스럽다. 하지만 물이 꽉 차면 소리가 없다. 고요하다. 그런 시집을 내시고 싶다는 말씀이다. 선생은 이제 수성(水性)의 삶을 꿈꾸고 있다. 아니 그렇게 살고 있다.
그리고 전날 새벽 2시부터 기독교 채널에서 방영해준 영화 ‘성 프란시스코’를 보느라고 잠을 설쳐서 피곤하시다고 했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 되었다는 시적 표현이다. 선생은 일어나기 전, 릴케의 한 구절을 이야기했다. 시인에게 언어란 문둥병자가 짚고 다니는 지팡이 같은 것이라는, 그래, 시의 언어는 그래야 되겠다면서 우리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었다.
물이 찬 연못은 고요하다
돌아오는 길은 선생이 직접 차로 길을 안내해주어 수월했다. 선생의 차를 뒤따라가면서 나는 육조 혜능의 일화를 떠올렸다. 육조 혜능은 스승인 오조 홍인에게 법을 전수받고, 어떤 사연이 있어 몰래 강을 건너게 되었다. 나루터에서 홍인이 제자를 건네주려고 손수 노를 잡자 혜능이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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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리석을 때는 스님께서 건네주셔야 했지만, 제가 깨쳤으니 스스로 건너야 합니다. 건넌다는 말은 같더라도 쓰는 내용이 같지 않습니다. 제가 변방에서 태어났고 말도 어눌하나 스님의 법을 이어받았습니다. 이제 깨쳤으니 당연히 자신의 참 성품에서 스스로 건너야만 합니다.”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조정권 선생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가고 있다. 그래도 이 짧은 인연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일산을 떠나 조정권이라는 큰 산을 보고 그 산자락에서 조금 머물렀는데도 마음이 이리 편안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제 정발산의 그 연못 자리를 걸어 나온다. 많은 사람이 걸어 다니는 모습이 잠시 환영처럼 너울거린다. 모두 바람 부는 연못 위의 꽃처럼 두둥실 떠다니는 것 같다. 저 사람들이 모두 시이고 꽃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