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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증산이 세상에 온 까닭은?

“이름 없는 사람, 이름 없는 땅이 기세를 얻으리라”

  • 이상환 경북대 교수·경영학

강증산이 세상에 온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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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증산이 세상에 온 까닭은?

강증산이 태어난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 멀리 보이는 산이 ‘시루산’이다.

증산도에서는 ‘상제 강증산’의 인간세상 ‘강세(降世)’를 예정된 일이라고 해석한다. 그들에 따르면 “1000년 훨씬 전인 고대의 신앙(신교)에서부터 터를 잡고, 불교의 미륵신앙을 통해 강세를 예고했던 우주의 주재자(증산)는 이제 막 등장한 근대 서구를 껴안으며, 대혼란에 빠진 한국 땅에서 천지공사를 집행해 상생의 세계일가(世界一家) 문명을 열기 위해 육화(肉化)” 했다. 이것이 강증산이 하필이면 한국 땅에 강세한 역사적, 종교적 의미라는 게 증산도의 설명이다.

증산의 삶에서 세상과의 가장 의미 있는 마주침은 대도통(大道通) 이전 청년시절(24세 때)에 겪은 동학농민혁명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강증산의 생애는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천재 소년의 탄생

그 첫째는 탄생 후 2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의 성장기다. 이때 증산은 동학혁명에 충격을 받고 고뇌한다. 증산은 이를 계기로 이 나라 백성들의 삶을 살피기 위해 천하를 돌아다니며(周遊天下) 본격적인 수행에 돌입한다. 이것은 증산 생애의 두 번째 매듭인 수행기와 연결된다. “천하의 대세가 종전의 모든 법술로는 세상을 건질 수 없다”는 통절한 자각과 함께 수행을 결심한 것이다.

전주 모악산 대원사의 칠성각은 인간으로서 그가 조화권능(造化權能)을 쓰기 시작한 첫 수행처였다. 21일간 수도 끝에 천문과 지리에 통달하고 인간의 도리에 통해(中通人義) 인류 구원을 성취할 궁극의 경지에 오른 시점이 31세. 이후 증산은 전북 김제 구릿골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천하창생의 구원을 위한 공적인 생애를 전개한다. 이때가 바로 천지공사(天地公事)에 전념하던 제3의 시기다.



증산은 1871년 음력 9월19일 진주 강(姜)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일순(一淳), 아명(兒名)은 학봉(鶴鳳)으로 증산도에서 부르는 도호(道號)인 증산(甑山)은 19세 때 스스로 지었다. 아버지 강흥주(姜興周)와 어머니 권양덕(權良德)은 어느 쪽으로도 가산이 넉넉지 못한 빈농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독선생을 들여 증산을 가르쳤다.

증산의 성장기와 관련해서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신태인 마을에서 이름 있는 훈장으로 증산의 독선생을 맡은 황씨는 어린 증산을 쉽사리 대하지 못했다. 6세의 나이인데도 행실이 범상치 않았기 때문. 황씨가 천자문 첫 대목을 가르칠 때였다. 증산은 “하늘 천, 따 지”를 집안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읽고는 곧 입을 닫아버린다. 독선생은 의아했다. 왜 그러느냐고 채근하자 어린 증산은 “하늘 천에 하늘 이치를 알았고 땅 지에 땅 이치를 알았으니 더 배울 것이 어디 있사옵니까?”라고 했다 한다.

생이지지(生而知之)라고나 할까. 어렵게 고생해 배워 아는 것이 보통의 경우지만, 어떤 이는 태어날 때부터 생득적(生得的) 차원의 경지를 보이는 일이 간혹 있다. 이즈음 서당에서 소년 증산이 지은 시문(詩文)들이 바로 그런 사례다. 훈장으로부터 ‘놀랄 경(驚)’자 운(韻)을 받은 증산은 대뜸 이렇게 썼다.

“멀리 뛰려 하니 땅이 무너질까 두렵고(遠步恐地坼), 크게 소리치려 하니 하늘이 놀랄까 두렵구나(大呼恐天驚).”

“말로라도 전봉준을 해하지 말라”

증산의 학업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가난 탓이었다. 서당을 나온 10대 소년 증산은 세상 공부를 선택했다. 이때 수년간 각지를 유랑하며 인정과 세태를 경험했다. 정읍군 거슬막에서는 머슴살이를 하고, 장성군 부여곡에서는 벌목노동에 참가했다. 수행과 천지공사 이전에 그를 가르친 것은 구한말이라는 시대상이었다.

증산은 결혼 전후에 처가가 있는 김제 내주평에서 서당을 열고 인근 학동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훈장 노릇은 잠시간 방편이었을 뿐, 세상을 살펴 민초들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한 광구창생(匡救蒼生)의 큰길을 찾는 데 진력했다. 1894년에 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이미 대세를 살핀 그는 ‘불필요한 죽음’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당시는 서울에 개화파 정부가 막 들어서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고, 일본이 그들을 후원하기 시작하던 과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증산은 농민전쟁의 앞날을 훤히 내다보았다.

‘도전’ 1편 43장의 기록에 따르면, 하루는 전봉준이 증산을 찾아왔다. 당시 증산은 전봉준과 나이차는 많이 났으나 교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보인다. 전봉준이 “내가 민생을 위해 한번 거사를 하려 하니 그대가 나를 도와주시오”라고 하자, 증산은 그 앞길이 순탄하지 못함을 알리고 “때가 아니니 나서지 말라. 성사도 안 되고 애꿎은 백성만 많이 죽을 것이라” 하고 경계했다.

개화파 정부와 일제에 맞선 물리적 전면전은 백성의 에너지를 이끌어내는 데는 성공할지 몰라도 종국에는 민중의 참화로 끝날 것이라는 게 증산의 생각이었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동학에 들지 말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전봉준이 선택한 방향과 증산의 길은 사뭇 달랐던 것이다. 이때 증산이 친구 안필성에게 남긴 말이 있다.

“나는 동학에 종군하러 온 것이 아니라, 대세를 살펴보러 온 것이로다.”(도전)

그러나 새로운 세상을 갈구하는 동학의 비원(悲願)에는 누구보다도 공감했다. 훗날 증산은 전봉준을 일러 평하길 “그는 진실로 만고의 명장으로 능히 천하를 움직였다. 말로라도 그의 이름을 해(害)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전봉준의 위업을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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