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자리가 다시 날아갈 때까지 나는 나뭇잎처럼 조용히 숨을 쉬었다.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잊고 지낼 때가 있다. 그때 이런 잠자리들은 내가 움직이는 뜨거운 생명임을 알려준다. 한참을 움직이지 않으니 잠자리의 날개마저 무겁다. 이러한 무거움이 삶이다. 투명하게 하늘이 높아가는 계절에 나는 정말 오랜만에 조정권(趙鼎權·58) 시인의 어깨에 잠자리처럼 내려앉아 그의 시를 연못의 연꽃을 바라보듯이 보았다.
조정권 선생을 뵌 지 10년은 넘었을 것이다. 가을날이었던 것 같은데, 종로 혜화동에 있는 마로니에공원에서 시인 남진우와 함께 뵌 기억이 선명하다. 당시 나는 등단한 지 얼마 안 되는 신인이었고, 젊었다. 선생은 이미 ‘산정묘지’로 유명했는데, 가깝게 피어 있는 꽃과 같았다. 선생을 꽃으로 비유한 것은 그 때 햇살이 좋았고, 선생의 외모가 준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들은 주로 문학과 음악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다.
그리고 다시 선생을 찾아가는 길이다. 일산에서 석계로 가는 길은 차라리 춘천이나 원주 같은 곳으로 가는 것보다 험하고 어려웠다. 내부순환도로를 타고 월곡 램프로 내려오면 된다는 이야기만 듣고 덤벙대면서 시동을 걸었다. 내부순환도로에서 월곡 램프를 지나친 것이 화근이었다.
마장 램프로 빠지는 바람에 완전히 길을 잘못 들었다. 마장 램프에서 내려오자 청계천이다. 좌회전이 전혀 허용되지 않는 우라질 도로였다. 청계천을 일주하고 그대로 그 길을 되돌아와서 다시 순환도로를 타고 가다가 제일 가까운 램프로 내려가 또 좌회전이 안 되어, 불법 유턴을 해서 순환도로를 다시 탔다. 옆 차가 경적을 울리자 내가 도리어 화를 내면서 노려보았다.
그렇게 순환도로를 다시 탔지만, 또 길을 잘못 들어 강남으로 빠지는 바람에 영동대교를 타고 강남으로 조금 들어갔다가 다시 유턴을 해서 영동대교를 타고 동2로, 동1로를 거쳐 태릉 쪽에 도착했다. 태릉 사거리를 지나자 솔직히 조정권 시인이고 뭐고 그냥 돌아가버리고 싶었다. 이런 것이 일상이다.
길은 막히고 늦여름 더위는 에어컨 바람을 비웃었다. 등으로 땀이 흘러내리고, 십수년 전에 본 선생의 아름다운 모습은 멀어지고, 만일 또 전화로 길을 가르쳐주신다면 못 찾겠다고 하고 그냥 돌아갈 생각이었다. 극도로 신경질이 난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차를 세우고 가까이에 있는 빵집에서 우유 한 잔을 마셨다.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횡설수설하자 선생이 말했다.
“내가 나갈 테니까 그 자리에 차 세우고 계세요. 근처에 큰 건물이 뭐가 있지요?”
나는 농협과 웬 불고깃집 간판을 말하고는 차에서 내려 담배를 피워 물었다. 더운 날씨라 사람들도 그렇게 덥게만 보였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 무척 짜증스러웠지만 선생이 나오신다니 기분이 풀렸고, 그렇게 드디어 선생을 다시 만났다.
회색 그랜저에서 내린 선생은 별로 변하지 않으셨다. 허우대만 멀쩡한 나를 보고 무척 고생했다며 태릉 아이스링크 근처에 있는 카페로 데리고 간다. 지난해인가, 모 잡지사의 의뢰로 태릉 아이스링크에서 김연아 선수를 만난 적이 있다는 말을 하면서 조정권 선생과 근처의 카페로 갔다.
시와 삶의 균형감
이탈리아 식당 카페에서 선생과 마주 앉았다. 오후 4시경이었다. 3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한 시간이 늦었다. 일산에서 3시간 걸려 만났다. 선생은 남부순환도로를 타고 오다가 북부순환도로로 빠져서 월곡 램프로 내려오라고 한 것이었는데, 나는 북부순환도로를 지나치면 월곡 램프가 나온다고 잘못 알아들었다.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의 삶도 문학도 길을 잘못 들면 고생만 하고, 신경질만 나며, 거리에서 거의 벌거벗고 다니는 여자를 보고 위안이나 얻는 그런 꼴이 되어버린다. 선생이 하는 말을 잘 새겨들어야 하고, 좋은 선생을 만나야 방황하는 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