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에서 초등학교 3학년생 아들과 함께 쿠키를 굽고 있는 김국남씨(왼쪽). 10년간 가정 살림을 하고 있는 차영회씨.
사위 아버님, 여자가 능력 있으면 굳이 남자가 돈 벌 이유가 없잖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돈 잘 버는 마누라 그늘에서 고급 셔터맨 하는 것도 요즘 남자들의 로망 중 하나걸랑요.
장모 그래서!!! 자네, 평생 일 안하고 우리 미원이 등골 빼먹고 살 건가?
사위 장모님도 참…. 저는 주부 아닙니까. 미원이 대신 주부로서 최선의 삶을 살겠습니다. 성공하는 여자 뒤엔 남편의 희생적인 외조가 반드시 있는 거걸랑요.
7월 초 MBC 주말연속극 ‘민들레 가족’에 등장한 대사다. 대화 중 ‘사위’인 노식(정우 분)은 처가에 살면서 어린이 공부방을 운영하는 아내 미원(마야 분) 대신 집안 살림을 돕는 인물. 최근 노식처럼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며 일명 ‘남성 전업주부’로 살아가는 사람이 늘고 있다. 백수는 아니어도 잘나가는 아내를 위해 가사와 육아를 도맡으며 외조하는 남성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초등학교 6학년생과 다섯 살배기 두 딸을 둔 박찬호(44) 한국폐기물협회 사무국장은 올해로 주부 경력 14년차다. 아내 배순희(40)씨는 지난해 벤처기업 북큐브네트웍스를 창업한 CEO. 1997년 9월 결혼 당시 배씨는 대덕연구단지 대기업에 근무하는 직원이었다. 환경부 산하기관에 근무하던 박 국장은 아내와 주말부부로 지내며 서울에서 가족의 보금자리를 지켜야 했다.
“청소하고 음식 만들고 설거지하는 게 다 제 몫이었죠. 재미있게 잘 했어요. 하지만 빨래는 성가시고 귀찮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습니다. 주말마다 아내가 올라와서 했지요. 지금도 아내는 김치를 못 담그고 음식도 잘 못해요.”
“아내의 행복이 곧 가정의 행복”
199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남성이 집안일을 하는 건 금기처럼 여겨졌다. 신혼 시절 직장 상사들은 박 국장에게 ‘마누라 군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곤 했다. 절대 주방에 들어가지 마라, 주말에는 집에 있지 말고 목욕탕에 가서 시간을 보내라는 식이었다. 친구들이나 직장동료와의 술자리에서 멋모르고 집안일과 관련된 말을 꺼내면 무안을 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는 자연스럽게 주부의 책임을 맡았다. 살림살이에 필요한 정보는 장모를 통해 얻었다. 처음엔 “뭘 그런 걸 물어보냐”며 어색해 하던 장모가 요즘은 앞장서 그에게 살림 코치를 한다.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문제가 생긴 적도 있다. 바쁜 아내를 대신해 급식당번을 하러 간 그에게 아이가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것이다.
“다른 애들 아빠도 많이 온다는 아내의 말을 철썩 같이 믿고 갔는데, 전교생 중 아버지가 온 사람은 우리 아이밖에 없었어요. 다행히 반 아이들이 나를 신기해 하면서 잘 따르니까 딸아이 마음이 좀 풀렸죠. 지난달에는 일일교사로 학교에 가서 환경에 대한 강의를 해줬어요. 이제는 딸아이도 아빠가 학교에 오는 걸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합니다.”
아내와 함께 생활하는 요즘도 아침 식사 준비는 여전히 그의 몫이다. “주말이면 아내는 피곤하다고 계속 잠만 잔다. 내가 아이들 아침을 만들어 먹이고 아내한테 방해되지 않도록 데리고 나가서 놀아준다. 아내 얼굴이 평화로워지는 게 좋아서다. 엄마의 표정이 밝으면 아이들 얼굴도 덩달아 밝아진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조금 피곤하고 힘들어도 집안 살림을 내가 맡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박 국장의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