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박물관’<br>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민음사/ 424쪽/ 1만3000원
대신 퐁피두 광장으로 들어서는 네 개의 통로 중 하나를 걸어가며 보았던, ‘마르마라(Marmara)’라는 낯선 단어와 함께 ‘이스탄불(ISTANBUL)’이라는 지명이 선명하게 뇌리에 박혀 있을 뿐이다. 그렇다. 나는 그날 아침, 평소 하지 않던 충동적인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퐁피두센터의 회전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처음 보는 ‘마르마라’라는 여행사의 유리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다음날, 이스탄불행 비행기에 올랐다,
여행지에서의 또 다른 여행
마르마라 해 연안의, 보스포루스 해협을 품고 있는 매혹적인 도시 이스탄불은 그렇게 돌발적으로 나에게 왔다. 비행기가 샤를 드골 공항을 이륙할 때 나는 비로소 눈을 감고 내가 지금 감행하는 무모한 여행의 근원에 대해 생각했다. 20년 동안 세계의 수많은 곳을 돌아다녔지만, ‘아직’ 이스탄불에 가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플로베르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스탄불에는 6개월 머물러야 한다네’라고 쓴 것처럼, 나는 그저 하루 이틀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닌, 헬레니즘 문화권의 핵심지로 ‘그곳’을 제대로 답사할 예정이었다. 그러니까 그날 아침 충동적으로 이스탄불행 비행기 티켓을 끊은 것은 오랫동안 꿈꾸어온 여행 계획에 대한 반칙이었다.
비행기가 안정적인 균형을 되찾았을 때, 나는 눈을 뜨고 기내 창밖으로 파란 창공을 바라보았다. 오직 이스탄불만을 위한 사흘. 은근한 설렘이 미세한 떨림으로 온몸을 감쌌고, 원래 파리에서 하려고 했던 일들은 까맣게 잊고 처음 가보는 낯선 도시에 대한 기대로 충만했다. 그러면서 몇 년 전 서울에서 만났던 오르한 파묵을 생각했다. 터키대사관의 초청으로 한남동의 대사관저에서 오르한 파묵과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나는 여느 외국 작가들과의 저녁 식사 때와 다르게 그와 유쾌하게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그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이 출간됐으나 읽지 않은 상태였고, 그의 도시 이스탄불은 마음에 품고만 있었지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파묵은 독일인 남성을 연상시키는 큰 키에 서구적인 외모였는데, 놀라울 정도로 영어를 유창하게 했다. 나는 그와의 대화보다는 대사 부인이 차려낸 터키 음식을 섬세하게 음미했고, 그는 그날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눈’이라는 소설의 첫 페이지를 열어 재밌는 일러스트 서명과 함께 내게 선물로 건넸다.
터키대사관저에서 오르한 파묵과 헤어진 뒤 나는 인쇄소의 온기가 느껴지는 신작 ‘눈’을 밀쳐두고, 그의 한국어 번역 첫 소설인 ‘내 이름은 빨강’을 읽었다. 이 작품은 16세기 이슬람 세계의 궁정 화단(畵壇)에서 옛것(전통)과 새것(서구), 개방과 폐쇄를 놓고 벌어지는 권력 암투를 그리고 있는데, 한 그루 나무, 새, 우물 바닥에 누워 있는 시체, 금화, 개, 빨강색 등 10여 가지의 다중 화자가 한 가지 사건을 조명하는 매우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다. 그의 작품들은 뉴욕과 파리 등 해외에 번역되어 뜨거운 호응을 얻으면서 그를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그는 터키 대사관저에서 만난 이듬해 ‘문화들 간의 충돌과 얽힘을 나타내는 새로운 상징들을 발견했다’는 평가와 함께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오르한 파묵의 도시
파묵은 세계의 독자와 소통할수록 태생지인 터키와 이스탄불을 작품에 적극 무대화하고, 그의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이스탄불의 골목골목과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 해에 대해 친숙해진다. 그리고 급기야 그의 도시 이스탄불을 가슴에 품고 만다.
내가 태어나기 102년 전에 이스탄불에 와서 도시의 복잡함과 다양성에 영향을 받은 플로베르는, 콘스탄티노플이 100년 후에 세계의 수도가 될 거라 믿는다고 한 편지에서 쓴 적이 있다.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여 사라지자, 이 예언은 정반대가 되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이스탄불은, 세상의 외관적 측면에서 2000년 역사에서 가장 나약하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변방이자, 가장 고립된 시기를 살아가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몰락의 정서와 가난 그리고 도시를 뒤덮은 폐허가 부여한 슬픔은, 나의 전 생애 내내 이스탄불을 표상하는 것들이었다. -오르한 파묵, ‘이스탄불 -도시 그리고 추억’
오스만 제국이 스러진 뒤 스며든 깊은 슬픔과 우울의 도시, 이스탄불. 파묵이 자전 에세이 ‘이스탄불’에서 고백한 것과는 달리 21세기 들어 이 고색창연한 도시는 미묘한 지정학적인 위치와 역사적 아우라를 넘어 바로 그 자신, ‘소설가 오르한 파묵의 도시’로 부활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폴 오스터에게서는 뉴욕을, 제임스 조이스에서게는 더블린을 그리고 박태원에게서는 서울을 연상하는 것과 같은 소설의 ‘노에마(noema·존재론적 의식의 대상)’가 된 것이다. 터키 소수 민족에 대한 내분과 폭력을 소설에 적나라하게 폭로했다는 이유로 조국에서 배척당하면서도 그는 옛 제국의 슬픔을 거느린 터키와 이스탄불을 끈질기게 소설에 호출해왔다. 그리고 올해 여름 누구도 시도한 적 없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국 독자에게 선보이고 있는데, 바로 그의 신작 장편 ‘순수 박물관’의 세계가 그것이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알았더라면 그 행복을 지킬 수 있었고,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르게 전개될 수 있었을까? 그렇다,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이해했더라면, 절대로, 그 행복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깊은 평온으로 내 온몸을 감쌌던 그 멋진 황금의 순간은 어쩌면 몇 초 정도 지속되었지만, 그 행복이 몇 시간처럼, 몇 년처럼 느껴졌다. -오르한 파묵, ‘순수 박물관’
지독한 사랑의 추억
파묵의 ‘순수 박물관’은 한마디로 30년간에 걸친 한 사내의 사랑 이야기다. 노벨상 수상 이후 그가 발표한 첫 장편으로, 남녀 간의 사랑에 초점을 맞춘 그의 첫 연애소설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사랑 이야기이되,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기발한 방식을 고안해내고, 의미를 창출해낸 점이다. 바로, 서른 살 남자가 열여덟 살 소녀와 44일 동안 나눈 사랑의 추억-사랑의 언어와 사랑의 몸, 사랑의 공간과 그 세부-들을 하나하나 모으고 복원해 이스탄불 한복판에 박물관을 만들어 ‘순수’라는 타이틀을 부여한 것. 결혼을 앞둔 서른 살 남자의 심리란 무엇일까.
케말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촉망받는 미래와 그에 어울리는 지적이고 아름다운 명문가의 약혼녀 시벨이 있다. 약혼녀에게 깜짝 선물로 안겨줄 핸드백을 사러 샹제리제 부티크에 갔다가 점원으로 일하던 퓌순이라는 먼 친척뻘의 가난한 사촌여동생과 만나고, 그녀가 더 이상 부유한 자신의 집에 일거리를 받으러 오던 친척 아주머니의 어린 딸이 아닌 매혹적인 여성이 되어 있음을 의식하면서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의 화염에 휩싸이게 된다. 어머니 소유의 오래된 빈 아파트에서 벌인 44일간의 일탈적 사랑. 그러면서도 안정적 결혼에 대한 자연스러운 감정. 케말은 결혼식을 치르는 동안 퓌순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깨닫지만, 그와 시벨의 행복한 결혼식을 목격한 퓌순은 종적을 감춘다. 이후 그에게 남은 것은 퓌순의 자취를 찾아 헤매고, 퓌순의 집을 드나들며 그녀에 관계된 모든 것을 몰래 수집하며, 퓌순을 일방적으로 바라만 봐야 하는 지독한 사랑의 추억이다.
세상의 모든 사랑은 편집증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퓌순을 잃기 전까지 케말의 사랑은 터키 상류층 부르주아 남성이 갖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쾌락에 가까웠다. 그러나 30년에 걸친 지속적인 사랑의 반추는 그가 속한 특정 부류에서 깨어나 진실한 사랑을 갈구하는 순수한 인간/남성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오르한 파묵은 이스탄불을 퓌순을 향한 케말의 30년에 걸친 지순한 사랑의 성소(聖所)로 만들고, 올여름 독자를 그곳, 소설 속 퓌순이 살던 집이자 작가가 실제 개관할 ‘순수 박물관’(2010년 8월말 개관 예정)으로 초대하고 있다.
나의 박물관은 퓌순과 나의 모든 인생이고, 우리의 모든 경험입니다. (중략) 지금으로부터 오십년 후 카이세리에서 버스를 타고 찾아올 발랄한 대학생들, 카메라를 들고 문 앞에 줄을 서 있을 일본 관광객들, 길을 좀 헤맨 후에 박물관으로 온 외로운 여자, 행복한 이스탄불의 행복한 연인들은, 퓌순의 옷, 소금 통, 시계, 식당 메뉴판, 예전 이스탄불 사진,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것과 똑같은 장난감 등 물건들을 보고 또 보며 우리의 사랑과 우리가 경험한 것들을 가슴 깊이 느낄 거라고 확신합니다. (중략) 퓌순과 케말의 사랑을 경외심과 존경으로 기억해줄 방문객들은, (중략), 단지 연인들뿐 아니라, 모든 세상, 그러니까 이스탄불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르한 파묵, ‘순수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