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림이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시대는 지났다. 각종 통계를 살펴보면 ‘살림에 전념하는 남자’가 꾸준히 늘고 있음이 나타난다. ‘살림이야말로 남자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고, “살림을 통해 삶의 새로운 행복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이도 적지 않다. 아직은 낯설지만, 우리 곁에 성큼 다가서고 있는 남성 전업주부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집에서 초등학교 3학년생 아들과 함께 쿠키를 굽고 있는 김국남씨(왼쪽). 10년간 가정 살림을 하고 있는 차영회씨.
사위 아버님, 여자가 능력 있으면 굳이 남자가 돈 벌 이유가 없잖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돈 잘 버는 마누라 그늘에서 고급 셔터맨 하는 것도 요즘 남자들의 로망 중 하나걸랑요.
장모 그래서!!! 자네, 평생 일 안하고 우리 미원이 등골 빼먹고 살 건가?
사위 장모님도 참…. 저는 주부 아닙니까. 미원이 대신 주부로서 최선의 삶을 살겠습니다. 성공하는 여자 뒤엔 남편의 희생적인 외조가 반드시 있는 거걸랑요.
7월 초 MBC 주말연속극 ‘민들레 가족’에 등장한 대사다. 대화 중 ‘사위’인 노식(정우 분)은 처가에 살면서 어린이 공부방을 운영하는 아내 미원(마야 분) 대신 집안 살림을 돕는 인물. 최근 노식처럼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며 일명 ‘남성 전업주부’로 살아가는 사람이 늘고 있다. 백수는 아니어도 잘나가는 아내를 위해 가사와 육아를 도맡으며 외조하는 남성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초등학교 6학년생과 다섯 살배기 두 딸을 둔 박찬호(44) 한국폐기물협회 사무국장은 올해로 주부 경력 14년차다. 아내 배순희(40)씨는 지난해 벤처기업 북큐브네트웍스를 창업한 CEO. 1997년 9월 결혼 당시 배씨는 대덕연구단지 대기업에 근무하는 직원이었다. 환경부 산하기관에 근무하던 박 국장은 아내와 주말부부로 지내며 서울에서 가족의 보금자리를 지켜야 했다.
“청소하고 음식 만들고 설거지하는 게 다 제 몫이었죠. 재미있게 잘 했어요. 하지만 빨래는 성가시고 귀찮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습니다. 주말마다 아내가 올라와서 했지요. 지금도 아내는 김치를 못 담그고 음식도 잘 못해요.”
“아내의 행복이 곧 가정의 행복”
199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남성이 집안일을 하는 건 금기처럼 여겨졌다. 신혼 시절 직장 상사들은 박 국장에게 ‘마누라 군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곤 했다. 절대 주방에 들어가지 마라, 주말에는 집에 있지 말고 목욕탕에 가서 시간을 보내라는 식이었다. 친구들이나 직장동료와의 술자리에서 멋모르고 집안일과 관련된 말을 꺼내면 무안을 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는 자연스럽게 주부의 책임을 맡았다. 살림살이에 필요한 정보는 장모를 통해 얻었다. 처음엔 “뭘 그런 걸 물어보냐”며 어색해 하던 장모가 요즘은 앞장서 그에게 살림 코치를 한다.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문제가 생긴 적도 있다. 바쁜 아내를 대신해 급식당번을 하러 간 그에게 아이가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것이다.
“다른 애들 아빠도 많이 온다는 아내의 말을 철썩 같이 믿고 갔는데, 전교생 중 아버지가 온 사람은 우리 아이밖에 없었어요. 다행히 반 아이들이 나를 신기해 하면서 잘 따르니까 딸아이 마음이 좀 풀렸죠. 지난달에는 일일교사로 학교에 가서 환경에 대한 강의를 해줬어요. 이제는 딸아이도 아빠가 학교에 오는 걸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합니다.”
아내와 함께 생활하는 요즘도 아침 식사 준비는 여전히 그의 몫이다. “주말이면 아내는 피곤하다고 계속 잠만 잔다. 내가 아이들 아침을 만들어 먹이고 아내한테 방해되지 않도록 데리고 나가서 놀아준다. 아내 얼굴이 평화로워지는 게 좋아서다. 엄마의 표정이 밝으면 아이들 얼굴도 덩달아 밝아진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조금 피곤하고 힘들어도 집안 살림을 내가 맡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박 국장의 고백이다.
남편이 살림을 도맡을 경우 ‘주부 우울증’에 빠지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박 국장과 같은 남성은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지난해 KBS 프로그램 ‘퀴즈 대한민국’에서 퀴즈영웅에 올라 상금 4300만원을 받은 강요성(45)씨는 전업주부다. 그의 ‘영웅’ 등극은 2005년 9월 개봉한 유선동 감독의 영화 ‘미스터 주부 퀴즈왕’의 현실화라는 점에서 화제가 됐다. 지난 2월엔 시중 은행이 남성 전업주부 백모씨에 대해 “남자는 주부로 볼 수 없다”며 카드 발급을 거절했다가 국가인권위원회의 시정 권고를 받아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인권위는 “가사(家事)가 전업인 남성의 신용카드 발급자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차별행위”라며 “‘여성의 경제활동이 확대되고 직업과 소득에 따라 배우자 역할이 바뀔 수 있음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후 시중 은행들은 내부 규정을 바꿨다.
“저는 사회생활보다 집안 살림 체질이에요”
통계청이 발표한 비경제활동인구 통계에 따르면 가사를 전담하는 남성 인구는 지난 2월 현재 17만9000명에 달한다. 여기에 육아 인구까지 포함하면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는 남성의 수는 더욱 늘어난다. 연도별로 살펴보면 2003년 10만6000명에서 2009년 15만2000명으로 6년 새 4만6000명(43.4%)이 늘었다.
변화하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듯 인터넷에는 ‘집에서 살림하는 남자들의 모임’ ‘살림하는 남자-전업주부들의 속삭임’ 같은 이름의 카페나 블로그가 속속 생겨나 청소하는 법, 이유식 만드는 법 등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2002년 1월 개설된 카페 ‘김전한의 살림하는 남편일기-남자 전업주부의 세상사는 이야기’에 가입한 회원 수는 7월8일 현재 2324명이다.
인터넷 세상에서 남성 전업주부를 보는 시선은 찬반으로 명확히 갈린다.
“제 꿈은 집안 살림하는 건데요, 남자라서 그런지 주변에서 말도 안 된다며 그러면 무시당한다고 말립니다. 내년에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는 자기는 괜찮답니다. 요즘은 솔직히 남자보다 돈 잘 버는 여자도 많고, 솔직히 저는 사회생활보다 집안 살림이 체질인 것 같아요. 집에서 아기도 돌보고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면 너무 행복할 것 같아요. 살림하는 남자는 능력 없어 보이나요?”
한 남성이 비공개로 올린 글 아래에는 수많은 찬반 댓글이 달렸다.
“남자가 살림 잘하는 건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아예 주부들처럼 책임과 의무를 도맡는 것은 사회 통념상 무리라고 생각합니다.”(청신단)
“요즘은 남자들이 집안 살림하는 것 흉이 아니라고 봅니다. 집안일은 노동에 가까워서 남자들이 오히려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센스)
“우리 집은 아내가 가장입니다. 전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정말 다른 여성주부들에 비하면 많이 부족함을 느끼지요. 사회 인식도 이제 좀 바뀌었으면 합니다.”(후하하)
벼랑 끝 선택 아닌 자발적 결정
우리 사회에 ‘남성 주부’의 존재가 알려진 건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부터다. 당시 직장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다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전업주부가 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2000년대 초·중반 이후부터는 자발적으로 전업주부 대열에 합류하는 남성이 많아지는 추세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08년 6월과 2009년 6월의 고용동향을 비교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자발적 실업 상태의 남성 가운데 ‘육아를 위해 직장을 구하지 않았다’고 응답한 이의 수는 이 기간 0명에서 518명으로 급증했다.
2009년 4월 회사를 그만두고 자칭 전업주부가 된 프리랜서 잡지 편집기획자 이원덕(34)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이씨는 야근과 철야도 모자라 주말까지 출근해야 하는 숨 막히는 직장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사표를 썼다고 한다.
“세 살 난 딸 아이 얼굴 한 번 제대로 볼 시간이 없을 만큼 바빴고 몸도 힘들었습니다. 몸이 약한 아내 대신 가사와 육아를 하며 프리랜서 생활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집에서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아내도 선뜻 응원해줬어요.”
가사와 육아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딸아이는 잘 때만 예뻐 보일 정도로 극성맞았다. 어느 날은 이씨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헤어드라이어에 아이 손등이 데이는 사고까지 나자 부모는 “애 하나 제대로 못 돌보면서 무슨 살림이냐”고 혼을 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도 부담으로 다가왔다.
“동네 문화센터 동화 구연 모임에 딸아이를 데리고 가면 주부들이 수군댔다. 평일 낮에 놀이터에 가도 또래 엄마들이 힐끗힐끗 쳐다봤다. 처음엔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자상한 아빠로 여기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실업난이 심각하다’는 얘기였다. 스스로 자꾸 움츠러드는 것 같아 3개월 만에 다시 일자리를 구해야 하나 고민했다.” 이씨의 고백이다.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동네 젊은 엄마들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자 조금씩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린이집 학부모 모임에도 스스럼없이 참석해 주부들과 친분을 나누는 수준이 됐다. 육아에도 점점 재미가 붙었다.
“목욕을 시킨 후 딸아이가 예쁘게 웃어줄 때, 뭘 해주든 내가 만들어준 요리를 맛있게 잘 먹을 때, 동화책 읽어달라고 조를 때, 함께 동네 놀이터에서 공놀이 하고 아내 몰래 아이스크림을 함께 먹을 때 뿌듯한 보람과 재미를 느꼈습니다. 아이와 함께 놀아주고 뭔가를 해줄 수 있다는 것, 특히 직장 시간에 구애하지 않고 원하는 순간에 바로 그걸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 전업주부 시절 느낀 가장 큰 행복이에요.”
이씨는 1년간의 전업주부 생활을 끝내고 두 달 전 다시 직장을 구했다. 프리랜서 부부로 생활하다보니 경제적으로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전업주부 시절이 그립다고 했다.
여성 주부 능가하는 ‘프로 살림꾼’
‘인천댁’이라고 불리는 차영회(53)씨는 ‘딱 한 달만’이라는 마음으로 전업주부가 됐다가 그 생활에 만족해 이제는 ‘천직’이라 여기게 된 14년차 베테랑 주부다. 2000년 ‘나는 오늘도 부엌으로 출근한다’는 책을 펴내며 전업주부임을 세상에 공개한 그는 유명 출판사 편집장으로 근무하다 식당 개업의 꿈을 품고 사표를 썼다.
“1997년 4월의 일이에요. 마흔 살이었는데, 툭하면 야근하고 주말에도 일해야 하는 출판사 생활을 접고 다른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얼마 뒤 외환위기가 닥쳐올 줄 모르고 다들 경기가 좋다고 할 때였지요. 언론에서도 40대 이후 의사가 요리사가 된다든지 하는, 전문직 종사자가 새로운 직종에 도전하는 사례를 많이 소개했고요. 그런데 식당 자리를 물색하러 다니던 중에 IMF 사태가 터져 계획이 무산됐어요.”
큰딸이 다섯 살, 둘째아들은 세 살 때였다. 퇴직금을 다 쓰고, 적금까지 해약해 생활비를 댔지만 얼마 버티지 못했다. 아내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리기 시작한 뒤에도 한동안 차씨는 아내가 아침밥을 지어놓고 나가면 아이들 뒤치다꺼리 좀 하다가 비디오를 보며 시간을 보내는 생활을 계속했다. 매일 설거지와 빨래거리가 가득 쌓이자 아내와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날 ‘딱 한 달만 집안일을 하자’고 결심한 이유다. 일을 하다보니 자식을 잘 키우는 것도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이고 보람된 일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는 아예 자발적 전업주부가 됐다.
“손으로 물 높이를 재서 압력솥에 밥을 하고, 색깔별로 옷을 구분해 세탁기를 돌리는 일이 처음에는 무척 힘들었어요. 수없는 시행착오를 거쳤죠. 반찬을 만들고, 집안 대소사를 챙기고, 아이 생일상을 차리고, 숙제와 준비물 봐주는 일, 세금 내는 일 등 모든 살림살이를 빈틈없이 챙기는 데 5년 정도 걸렸습니다.”
집안 살림과 달리 자녀교육은 적성에 맞았다. 공부 잘한 아이들의 성공담 자료를 찾아 요약해서 설명해주고, 입시에 도움이 될 만한 신문 기사도 스크랩해줬다. 덕분에 딸은 올해 서울대에 진학했다. 두 살 터울의 고교 2학년생 아들은 대안음악학교에서 전자기타를 전공하고 있다.
“가정은 가족 전체가 책임지고 가꿔야할 공동체예요. 남자가 가정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소홀히 여기면 아내가 아무리 완벽하게 가정을 돌봐도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 때는 그런 걸 가르쳐주는 곳이 없어 실직자가 되거나 졸지에 전업주부가 된 남자들이 어려움을 많이 겪었지요. 초등학교 때부터 남녀 불문하고 가정과 가족의 가치, 부부의 역할 등에 대해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봅니다.”
차씨는 양성평등 강의를 하고 주부 대상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살림노하우를 전수하면서 ‘프로주부’ ‘주부도 경쟁력’이라는 신조어를 퍼뜨렸다. 그는 스스로 운이 좋은 전업주부라고 말한다. 보통 주부들은 30~40년씩 살림을 해도 그걸로 돈을 벌기 어려운데, 자신은 단지 ‘남자 주부’라는 이유만으로 대접받고 돈도 벌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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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하는 남편, 아이 보는 아빠
차씨를 비롯해 오랫동안 전업주부를 해온 남성들은 몇 년 전부터 자신들과 같은 남성 주부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조금씩 변화되고 있음을 느낀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해 ‘마이크로의 눈으로 트렌드를 읽어라’는 리포트를 내놓은 LG경제연구원 박정현 책임연구원은 주목할 만한 마이크로 트렌드 가운데 하나로 ‘고정관념 타파’를 꼽았다. 전통적인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 남성 전업주부는 주요 사례 중 하나로 제시됐다. 박 연구원은 “한국고용정보원이 집계한 올해 남성 육아휴직자는 245명이었다. 사회 변화와 정부의 정책적 지원에 힘입어 앞으로 갈수록 남성 육아휴직자가 증가할 것이고, 남성 전업주부 역시 늘어날 것”이라고 진단했다. 한국트렌드연구소 김경훈 소장도 “마케팅 업계는 4, 5년 전부터 남성 전업주부에 주목해왔다. 남성 경제활동인구 대비 전업주부의 숫자가 아직은 그리 많지 않고 증가세도 폭발적이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갈수록 증가할 것이라는 점이다. 최근 TV 홈쇼핑이나 인터넷 쇼핑몰의 남성 구매자가 늘고, 그들을 겨냥한 제품들도 나타나고 있는 걸 봐도 알 수 있다”고 했다.
통계청이 2008년 4월 발표한 ‘2008 블루슈머 7’ 가운데 하나는 ‘요리하는 남편, 아이 보는 아빠’였다. 블루슈머는 경쟁자가 없는 시장을 의미하는 블루오션과 소비자의 합성어. 통계청 송진실 대변인은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 주요 통계를 분석해 선정한, 기업과 마케터 정부가 주목해야 할 키워드”라고 소개했다.
송 대변인에 따르면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는 남성을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실직과 가족해체 등으로 어쩔 수 없이 가사와 육아를 맡게 된 경우▲아내와 사별한 독거노인의 경우▲고소득 전문직 아내를 둔 남편들이 자발적으로 전업주부를 선택하는 경우다. 이 가운데 세 번째 유형은 아직 많지 않지만 ‘육아와 가사는 아내 책임’이라는 우리 사회의 역할 인식이 변화하면서 점차 늘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장수식문화연구회는 서울대 노화고령사회연구소와 이화여대 아시아식품영양연구소와 공동으로 ‘골드쿡(Gold Cook)’ 과정을 개설했다. 요리 과정을 만든 서울대 의대 박상철 교수에 따르면 음식 만들기는 남성들이 독립적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다. 전국적으로 지자체나 백화점 문화센터, 기업 등에서 남성 혹은 아버지를 대상으로 마련하는 요리강좌가 인기를 끌고 있다. 샘표식품에서 운영하는 지미원은 지난 3월부터 남성만을 위한 요리강좌를 열고 칼 잡는 법부터 가르치고 있다. 지미원 관계자는 “기러기 아빠를 비롯해 집안일을 하는 남성을 대상으로 매달 요리강좌를 열고 있다. 수강생 중 40~50대가 가장 많다”고 했다.
성 역할 고정관념을 넘어서
충남 공주시 농업기술센터도 2008년부터 ‘남성가정요리반’을 운영해 꾸준한 인기를 모으고 있다. 이곳에서는 밥, 국과 찌개, 반찬 만드는 법 등을 가르치고, 명절음식이나 생일상 차리기 같은 특별한 날 음식 만들기도 지도한다. 강의 초기에는 퇴직 남성이 주를 이뤘지만 요즘은 20대 젊은 남자들도 강의를 듣는다. 요리반을 담당하는 농업기술센터 농업육성과 김희영씨는 “올 4월에 열린 1기반에는 30~40대 직장 남성이 많았고, 곧 열릴 2기 수강생 모집에는 60대를 전후한 중년 남성이 많이 몰렸다. 세대를 초월해 많은 남성이 관심을 갖고 참여한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아내를 대신해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는 남편을 ‘트로피 남편(Trophy Husband)’이라 부른다. 2000년대 중반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Fortune)’은 ‘포춘이 선정한 영향력 있는 미국 여성 사업가 50인’ 중 3분의 1이 ‘트로피 남편’을 가졌다고 소개했다. 또 자사가 주관하는 세미나에 참석한 각계 정상급 여성의 30%도 남편이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고 있다고 전했다.
국내에서도 고소득 전문직 아내를 둔 남성들이 전업주부 역할을 하고 있음을 짐작케 하는 통계가 최근 발표됐다. 국세청이 2008년 종합소득세 신고자를 분석한 결과 여성의 비율은 2004년 34.6%에서 2008년 40.3%로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특히 2008년 여성 신고자 가운데 배우자 소득공제를 받은 비율이 26만2000명으로 18.2%에 달했다. 100명 중 18명의 남편은 연간 소득금액이 없거나 있다 해도 합계액이 100만원 이하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 국세청은 “남편의 소득금액이 없다는 것은 남편이 전업주부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여성의 사회진출 증가에 따른 현상으로 앞으로 이런 추세는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모든 남성 전업주부가 행복한 건 아니다. 주부우울증을 앓는 사람도 적지 않다. 자신의 블로그와 여성가족부 포털사이트 위민넷에 ‘또바기 일기’를 연재 중인 김국남(42)씨는 공부와 사회적 성취에 욕심이 많은 아내를 대신해 자발적으로 가사와 육아를 선택한 10년차 전업주부다. 남녀 성역할 구분 등 세상의 편견과 선입관 깨기가 육아 철학인 그는 열 살 아들이 바느질에 소질을 보이자 무형문화재 자수(刺繡)장에게서 직접 사사하게 할 정도로 열린 아빠다. 4남1녀 중 막내로 어릴 때부터 집안 살림을 거들었기에 가사가 자연스러웠고, 육아 역시 “군대 생활보다 힘들지만 하루하루 보람 있고 행복하다”고 말할 만큼 좋아하는 그도 전업주부 2년차 때 주부우울증을 앓았다. 태권도 4단 유단자일 만큼 운동을 좋아하고 터프한 그에게 갓난 아들을 돌보는 일은 무척 답답하게 느껴졌다. 외출도 마음대로 하지 못 하고 밤잠까지 설치는 일이 반복되자 ‘내가 뭐가 못나서 아이와 씨름하며 기저귀를 갈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설거지를 하다 갑자기 눈물을 뚝뚝 떨굴 만큼 우울증이 심해졌다.
“친구나 예전 직장 동료들이 잘나가는 모습을 볼 때면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옛날엔 나도 잘나갔는데 싶은 생각이 자꾸 들고 앞날이 불안했지요. 어느 날 아내가 ‘당신 친구는 과장이 됐는데, 이제 아이가 좀 컸으니 당신도 돈 좀 벌게 일 해야지’ 했을 때는 허탈하고 서운했어요. 하지만 절대 남과 비교하지 말자, 육아나 가사는 그 가치를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거다 하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차영회씨는 교육 전문가가 되는 것으로 우울증의 위험을 이겨냈다. 그는 “한 사람이 5년, 10년 똑같은 일을 하면 기술이 향상되게 마련인데, 방 닦는 일은 아무리 오래 해도 제자리다. 거의 모든 집안일이 마찬가지다. 얼마 동안은 그게 지겹고 끔찍했다. 그래서 아이들 교육에 눈을 돌렸고 책도 썼다. 14년 동안 아무 하는 일 없이 집안에만 갇혀 있었다면 아마 우울증으로 폭발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최근 자녀 교육 경험을 담은 책을 출간했다.
가정경영연구소 강학중 소장은 여성과 마찬가지로 전업주부 남성도 똑같이 주부우울증을 겪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부부가 함께 전통적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각자의 능력과 취향에 따라 합의하에 가사와 육아를 어느 한쪽이 맡아야 한다. 남편이 주부 역할을 할 경우 아내는 전업주부 남성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 곱지 않음을 인식하고 남편의 마음을 헤아려줘야 한다. 강 소장은 “정기적으로 친구나 옛 직장동료를 만나면서 사회 활동을 할 시간을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언제까지 남편이 전업주부 생활을 할 건지 부부가 미리 합의하고, 직장인 아내도 가사와 육아 분담에 신경 쓰면 훨씬 행복한 가정이 될 것”이라고 충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