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의 총탄보다 더 무서운 게 내부 권력투쟁이다. 6·25전쟁 중 남한에서 활동하던 빨치산들은 이를 온몸으로 겪었다. 당장 자신들부터 구빨치와 신빨치로 나뉘어 소모적인 노선투쟁을 벌였고, 북한 정권이 평양의 남로당 지도부를 축출하면서 ‘조국’으로부터도 철저하게 버림받는 운명이 됐다. 그 와중에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2개 군단의 막강 전력이 대대적인 지리산 토벌에 나서자 총 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을 ‘세 가지 각오’를 했다는 빨치산들도 궤멸할 수밖에 없었다.
지리산 빨치산을 이끈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
신록이 우거진 덕유산 송치골에 빨치산 지도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남한에서 활동하는 6개 도당의 지도자들이 이곳에서 긴급 회동한 이유는 그동안 빨치산 투쟁을 하면서 쌓은 서로의 경험을 교환하고 향후의 투쟁 방침을 확정하기 위해서다.
“중국도 휴전에 응할 용의가 있는 것 같소.”
속칭 남부군으로 불리는 빨치산 독립제4지대를 이끌고 있는 이현상이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쟁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한국군과 유엔군은 후퇴했고 급기야 1월4일에 다시 서울을 내주고 말았다. 평택과 원주를 잇는 선까지 후퇴했던 국군과 유엔군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반격에 나서 3월22일에 서울을 재탈환했지만 중국군의 춘계대공세로 또 한 차례 위기를 맞았다. 이후로 유엔군과 공산진영 양측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전선은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 고착됐다.
전선이 고착되고 전투가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휴전 논의가 오가기 시작했다. 양측 모두 힘으로 완승을 거둘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의 휴전 제의를 중국 당국이 수락하면서 양측은 7월10일 개성에서 예비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휴전은 한반도가 다시 남과 북으로 갈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남한에서 투쟁하고 있는 빨치산은 어떻게 되는 건가. 빨치산 지도자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휴전회담을 지켜보았다.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면 투쟁을 가일층 강화해야 할 것이오. 그러기 위해서는 부대를 대단위로 재편할 필요가 있소.”
“찬성할 수 없소. 전선이 소강상태로 돌아서면 남조선은 대규모 토벌대를 편성할 것이오. 그에 대비하려면 부대를 소규모로 전환할 필요가 있소. 앞으로의 투쟁은 아성공격(牙城攻擊)보다는 인민들 속으로 침투해서 장기투쟁을 꾀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오.”
이현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준표가 반대하고 나섰다. 교사 출신으로 모스크바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전북도당을 이끌고 있는 사람이다. 전북도당은 남부군 못지않게 강한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도 방준표 동지의 의견에 찬동하오. 이제부터는 지역별로 분산해서 소단위 투쟁에 치중해야 할 것이오.”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이 방준표의 의견에 동의하고 나섰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속칭 ‘전평(全評)’ 간부 출신으로 방준표와 마찬가지로 모스크바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자다. 방준표와 박영발은 사사건건 이현상을 물고 늘어졌다. 빨치산을 통합해 강력한 제2전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이현상과, 오히려 소규모로 분산시켜 인민들 속으로 파고들어야 한다는 방준표·박영발이 날카롭게 대립하면서 회의장에 터질 듯한 긴장감이 흘렀다.
舊빨치와 新빨치의 갈등
빨치산에는 두 종류가 있다. 전쟁 전부터 좌익활동을 하던 속칭 구빨치, 그리고 낙동강 전선에서 낙오한 인민군들과 북한 점령하에서 공산당에 협력한 사람들로 구성된 신빨치가 그들이다. 빨치산 부대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평양의 남로당 지도부에서 직접 파견한 이현상의 독립제4지대이고, 다른 하나는 지역별로 조직된 도당 유격대다.
두 종류의 빨치산 부대는 지금 휴전을 앞두고 헤게모니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현상은 남로당 대남총책 이승엽으로부터 직접 임명받았다는 사실을 내세워 전체 빨치산을 통괄하려 했는데 박영발과 방준표는 순순히 그의 밑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방준표와 박영발도 본래는 남로당 출신이지만 북한군이 호남 일대를 점령했을 때 북로당에 의해 각각 전북도당과 전남도당 위원장으로 선출되면서 북로당과 직접 선이 닿아 있었다.
평양의 남로당 지도부는 휴전에 대비해 남한에 강력한 근거지를 마련해둘 필요가 있었다. 남한에 강력한 빨치산 부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남로당 지도부가 평양에서 큰소리를 낼 수 있는 힘의 원천. 그래서 6개 도당의 유격대를 이현상의 독립제4지대 지휘 아래에 두기로 한 것인데 현지 도당 위원장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방준표와 박영발이 강력 반발하고 나서자 충남도당과 충북도당, 경북도당, 그리고 경남도당 위원장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양쪽을 번갈아 쳐다봤다. 독립제4지대와 전남, 전북도당 유격대는 빨치산의 주력을 이루는 부대다. 그런데 지금 어느 쪽도 쉽게 물러서려 하지 않고 있었다.
“이현상 동지는 이승엽 동지로부터 미해방지구 투쟁에 관해 전권을 위임받았소. 이현상 동지가 통합지휘를 결심한 이상 마땅히 각 도당은 직할 유격대를 그에게 넘겨야 할 것이오.”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 남부군 정치위원 여운철이 발언을 하고 나섰다. 공산국가 군대에서 정치위원의 권한은 절대적이다. 정치위원이 당의 결정을 들먹이며 이현상의 편을 들고 나서자 방준표와 박영발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한발 물러섰다.
“정치위원의 말이 옳다고 봅니다.”
경남도당의 김삼홍이 거들고 나섰다. 경상도 만석꾼의 아들로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그는 평소에도 이현상에게 호의적이었다. 다른 도당 위원장들도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어 이현상은 빨치산의 총수가 되었고 독립4지대의 별칭이던 남부군은 남한 전체 빨치산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남부군의 거점을 지리산으로 옮기겠소. 각 도당은 휘하의 유격대를 서둘러 지리산으로 집결시키고 연락책과 비선을 새로 조직해서 도시로 침투시키시오.”
이현상은 지리산으로 돌아갈 것임을 공표했다. 지리산. 그곳은 구빨치들에게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봄날은 가고
빨치산의 유래는 일제강점기 야산대에서 비롯된다. 그렇지만 본격적으로 무장을 갖추고 투쟁에 나선 것은 여수·순천 10·19사건(이하 여순사건) 이후부터다. 남로당 간부로 평양에 머물며 모스크바 유학을 준비하던 이현상은 여순사건 소식을 듣고 급히 남쪽으로 내려왔다. 여순사건은 남로당 지휘부의 지시 없이 현지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한때 여수와 순천을 점령했던 반군은 진압군이 출동하자 곧 패퇴했고 여순사건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현상은 패주병들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전부터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던 남로당원들을 규합해서 빨치산을 조직했다. 이현상은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고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평양의 남로당 지도부는 이현상을 지원하기 위해 인민유격대를 차례로 남파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인민봉기는 일어나지 않았고 인민유격대는 모조리 토벌되면서 지리산 빨치산들은 이 골짜기 저 골짜기로 쫓겨 다니는 신세가 돼버렸다.
그런데 가물가물하던 불씨가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불타올랐다. 토벌대에 쫓겨 덕유산을 헤매던 이현상은 그곳에서 북한군이 이미 서울을 점령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은 것이다. 마침내 조국해방의 그날이 온 것인가. 용기백배한 빨치산들은 인민군 부대로 달려갔고 무장을 새로 지급받고서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어 활발하게 유격전을 전개했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국토완정의 대업을 이룰 것 같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국군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면서 전세가 일시에 역전된 것이다.
김병진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받았다. 안진규는 김병진에 앞서 북에서 내려온 밀사다. 그런데 안진규는 도중에 국군에게 체포되어 전향을 했다. 방준표와 박영발은 전향한 채 지리산에 온 안진규를 의심했지만 이현상이 감싸준 바람에 그냥 넘어갔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안진규가 도주를 한 것이다.
“어쨌거나 한번 종결된 사건인데 이제 와서 다시 거론하는 것도 그렇고….솔직히 이현상이 남로당 지도부를 비판할지 의문이오.”
방준표는 죽을 맛이었다. 북에서는 몰아붙이면 다 되는 줄 알고 있지만 현지 사정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았다. 북에서 빨치산을 외면한 마당이다.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에게 대든다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럼 중앙당 지령을 무시할 셈이오?”
김병진이 언성을 높였다.
“그럴 리가 있겠소.”
방준표가 허둥대자 김병진이 표정을 찡그리며 대안을 제시했다.
“정 그렇다면 이현상을 영웅으로 만드시오.”
“그게 무슨 말…?”
방준표가 깜짝 놀라며 김병진을 쳐다봤다. 그러나 김병진은 입을 다물었고 방준표도 더 묻지 않았다. 그 이상의 질문은 우문일 것이다.
“북의 방침이 그렇다면 아무튼 9월10일 전에 다시 회의를 소집하도록 하겠소.”
잠시 사이를 뒀다가 방준표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김병진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충분히 이해한 것이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소. 가능하면 기일을 앞당기도록 하시오.”
할 말을 마친 김병진은 몸을 일으켰다. 남로당은 이미 뿌리가 뽑힌 마당이다. 그렇다면 한 사람쯤 영웅으로 남는 것도 크게 나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살아 있는 영웅은 필요 없지만.
“하면 박영발 동지와 연락해서 이현상을 일단 평당원으로 강등시키도록 하겠소.”
방준표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굴러들어온 ‘떡’
1953년 9월17일 새벽 5시. 용강 서전경사 제2연대장실.
서남지구전투경찰사령부 제2연대장 차일혁 총경은 쉽게 판단이 서질 않았다. 정보를 종합해보건대 두 사람의 진술이 거짓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선뜻 출동을 결심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뜻밖의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예하 618부대가 쌍계사 부근에서 보급투쟁에 나선 빨치산 두 명을 체포했는데 뜻밖에 김지회부대원들이었다. 이현상의 친위대인 김지회부대원들이 별다른 저항 없이 순순히 투항한 것도 이상한 마당에 두 사람이 이현상 생포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김지회부대원이 이현상 생포를 자처하고 나서다니, 함정일까. 그렇지만 빨치산은 이미 함정을 파고 기습할 능력도 없는 상태였다.
“내부에서 뭔가 문제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수색대 김용식 경사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전향 빨치산 출신인 그는 당연히 그쪽 사정에 정통했다. 차일혁 총경도 그리 짐작하고 있었다. 어쩌면 남로당 지도부의 몰락과도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자세한 것은 아직 파악되지 않았지만 얼마 전부터 산을 내려오는 빨치산이 크게 늘어났다.
“거짓 투항은 아닌 듯합니다.”
김용식 경사가 출동지시를 재촉했다. 꾸물대다간 남 경사에게 공을 넘기는 수가 있다. 지금 빗점골에선 남 경사 소속의 56연대가 대대적인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정보가 확실하다면 괜히 대병력을 동원해서 소란을 떠는 것보다 소수 정예병을 길목에 매복시키는 게 효과적일 것이다. 문제는 역정보일 경우 몰살을 당할 우려가 있다는 것인데…. 차일혁 총경은 고심했다. 진술에 따르면 이현상은 9월6일 개최된 도당 위원장 회의에서 채택된 결정서 10호에 따라 평당원으로 강등된 상태다. 박영발의 발의로 채택된 결정서 10호로 이현상의 직할 세력인 제5지구당 요원들과 직속 김지회부대원들은 전부 각 도당에 분산 배치됐다고 했다.
“그럼 이현상은 지금 호위병도 없이 돌아다닌다는 말인가?”
“평당원에게 호위병이 있을 턱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김지회부대원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진 마당입니다.”
잠시 생각하던 차일혁 총경은 결정을 내렸다. 상황이 묘하게 전개되는 것 같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전후관계의 윤곽이 드러나는 것이다. 어쩌면 두 사람의 김지회부대원은 이현상을 살리기 위해서 투항한 것일지도 모른다.
“출동이다.”
차일혁 총경은 더 생각하지 않고 출동명령을 내렸다. 차일혁 총경은 나중에 아무도 이현상의 시신을 인수하려 하지 않자 적장에 대한 예우를 갖추고 시신을 화장한다.
이현상의 최후
시계는 벌써 2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새벽 5시에 출동했으니 그 사이에 18시간이 흐른 것이다. 김용식 경사가 지휘하는 2연대 수색대원 38명은 빗점골로 통하는 길목 6곳에 분산 배치 중이었다. 투항한 김지회부대원들의 정보에 의하면 17일 밤부터 18일 새벽 사이에 이현상이 경남도당으로 이송될 것이라 했다.
그러나 상당한 시간이 흘렀건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언제까지 매복하고 있어야 하나. 정보가 정확하다고 해도 어느 길로 갈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수색대원들은 나머지는 천운에 맡기기로 하고 빗점골에 매복해 있었다.
천하의 이현상이 평당원으로 강등되어 도당으로 끌려가다니. 틀림없이 박헌영과 이승엽을 비판해야 하는 굴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김용식 경사는 투항을 한 김지회부대원들의 심정이 이해되었다. 이현상을, 동지를 고발하는 굴욕으로부터 지켜주고 싶은 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충성일 것이다.
김용식 경사는 무명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이 샐 때까지 쉬지 않고 순찰을 돌 생각이었다. 이상 없이 매복하고 있음을 확인하는데 갈미봉 방면에서 사람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수색대원들은 일제히 자세를 낮추고 사격 자세를 취했다.
과연 조금 있다가 일단의 사람들이 종대로 늘어서서 조심스레 걸어오고 있었다. 모두 몇 명일까. 매복하고 있는 수색대원은 4명에 불과했다. 아직 인원을 확인하지 못했는데 매복을 눈치 챈 것일까. 다가오던 일행이 걸음을 멈췄다. 거리는 15m 정도 떨어졌다.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피던 일행이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발각된 것 같았다. 수색대는 일제사격을 했고 응사가 이어지면서 조용하던 빗점골에 총성이 울려 퍼졌다. 김용식 경사는 수색대원들을 독려하며 정신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교전은 오래가지 않았다. 도주를 했는지 응사가 멈췄다. 놓친 것일까. 수색대원들은 눈에 불을 켜고 부근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총을 맞고 죽은 시신 한 구를 발견했다. 나머지는 도주한 모양이었다. 김용식 경사는 입맛이 썼다. 생포는 못해도 전원 사살했어야 했는데…. 아무튼 상부에 보고해야 한다. 김용식 경사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야광시계는 9월18일 오후 11시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날이 밝으면서 차일혁 총경이 현장으로 달려왔고 투항한 김지회부대원들이 피살된 사람이 이현상임을 확인했다. 평생을 공산당 활동에 바쳤고 5년의 세월을 풍찬노숙하며 빨치산을 이끌던 이현상은 그렇게 파란 많은 생을 마감한 것이다.
지리산에 총성은 멎었어도…
그날 빗점골에서 교전이 벌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현상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군은 교전 중에 사살된 것이 아니고 군 수색대에 의해 그 전날 이미 사살됐다고 주장했다. 군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현상의 사망일자는 1953년 9월17일이 된다.
군과 경찰이 서로 공을 다투자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개입했다. 그리고 경찰의 손을 들어줬다. 그렇게 되어 이현상의 공식적인 사망일자는 9월18일이 됐다. 그런데 평양 애국열사릉의 이현상 묘비에는 9월17일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에 근거해서 이현상은 경찰도, 군도 아니고 뒤에서 쏜 총에 피격됐을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공식 발표대로 9월18일 경찰과 교전할 때 죽은 것인지, 아니면 남 경사의 주장대로 그 전날의 교전에서 이미 사살된 상태였는지, 또 일부의 추측대로 뒤에서 쏜 총에 맞은 것인지 이제 와서 그 이상 상세한 것을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이현상으로서는 어느 쪽에서 쏜 총이든 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 것이다.
이현상은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물론 시신이 묻혀 있지 않은 가묘다. 비록 평당원으로 강등되어 이송되던 중에 죽었지만 그래도 간첩으로 몰린 박헌영과 이승엽에 비해 행복한 사후를 맞은 셈이다. 나머지 빨치산 간부들도 1953년 말과 1954년 초에 걸쳐서 차례로 최후를 맞았는데 대부분 신념을 지킨 채 토벌대에 의해 사살됐다. 그 후에도 제법 오랫동안 지리산을 헤매고 다닌 빨치산들도 있지만 좀도둑에 불과한 망실공비(亡失共匪)일 뿐이었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지리산 골짜기만큼이나 많은 사연을 안고 쓰러져갔다. 그들 중에는 신념을 가지고 입산한 사람보다는 이념이 뭔지도 모르고 휩쓸렸던 사람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지리산에서 총성이 멎으면서 한반도는 비로소 평온을 되찾게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정전(停戰)에 불과했다. 남과 북은 계속해서 첨예한 대립을 이어갔다.
태백산과 지리산 일대의 공비를 소탕하기 위해 1950년 12월 창설된 전투경찰사령부.
남부군의 임무는 중국군의 참전으로 퇴각 중인 국군과 미군의 후방에 제2전선을 형성하고 교란작전을 펴는 것. 제2전선을 형성하려면 국군과 미군보다 먼저 남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이현상은 남부군을 인솔해 서둘러 남하했고 속리산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그리고 후방 부대를 기습하고 보급로를 차단하며 적지 않은 전과를 올렸다. 1951년 3월에는 청주를 점령하는 개가도 올렸는데 도청 소재지가 빨치산의 수중에 떨어진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당시 남부군은 재귀열이라 불리던 발진티푸스가 창궐하면서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래도 이때가 남부군에는 전성기였던 셈이다. 빨치산은 당시까지 국토완정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봄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중국군의 춘계공세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전선은 교착되었고 휴전회담이 거론되면서 남부군의 앞날에 짙은 먹구름이 끼었다. 휴전이 되면 국군은 대규모 토벌대를 조직할 것이다. 멀어져간 통일의 꿈과 눈앞에 닥친 냉혹한 현실. 빨치산 지도자들은 향후 투쟁 방향을 정하기 위해 덕유산 송치골에 모였고 그 결과 도당 유격대는 모두 이현상의 지휘를 받게 된 것이다.
덕유산을 출발한 남부군은 1951년 8월에 지리산으로 들어왔다. 1년 반 만이었다. 지리산에는 낙동강에서 후퇴할 때 낙오된 이영회부대가 먼저 들어와 있었는데, 이어서 송치골회의에 따라 각 도당 유격대가 속속 지리산으로 들어오면서 남부군은 대부대로 재편됐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격전장으로 변한 지리산
전에 쫓겨 갈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인원에 신식 무기로 무장을 하고 있지만 여건은 그때만 못하다는 사실을 이현상은 잘 알고 있었다. 빨치산과 주민은 물과 고기의 관계다. 그만큼 현지 주민의 협조가 절대적이다. 그런데 주민들이 예전 같지 않았다. 그들도 휴전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초모(招募)사업과 보급투쟁이 어려움을 빚었다. 더 이상 제 발로 입산하는 자는 없었고 제 손으로 식량을 내놓는 주민도 거의 없었다. 강제로 끌고 가고 빼앗는 과정에서 주민들은 차츰 등을 돌렸다. 더욱이 신빨치들은 남쪽에 따로 연고가 없는 마당이다.
그렇지만 남부군은 열심히 싸웠고 지리산 일대는 그야말로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인 세상이 됐다. 남부군이 활발하게 투쟁하면서 평양에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연락부가 창설됐다. 대남사업 비서는 사법상 이승엽이 겸했고 부장은 배철이 맡았다. 임화와 이강국, 설정식 등 남로당 출신들이 요직을 장악했다. 남부군은 남로당의 소중한 자산이었다.
그렇게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지리산에 제2전선을 구축하고서 소규모 해방구를 조직해가던 가운데 여름과 가을이 지나고 다시 찬바람 몰아치는 겨울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국군의 본격적인 토벌전이 시작됐다. 총성이 뜸해진 전선을 대신해 눈 덮인 지리산이 격전장으로 변한 것이다.
‘쥐잡기작전’ 카운트다운
1951년 11월30일. 지리산 상공.
난기류를 만난 듯 L19 연락기가 심하게 요동쳤다. 남원을 이륙한 연락기는 성삼재를 지나고 반야봉을 넘어 운봉을 향해 비행하고 있었다. 백야전사 사령관 백선엽 소장과 참모장 김점곤 대령, 정보참모 유양수 대령이 작전 개시를 앞두고 현지정찰에 나선 것이다.
간간이 작은 부락이 보이고 계단식 논이 눈에 들어왔지만 내려다보이는 광경은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원시림 그대로였다. 저 넓고 깊은 산속에 숨어 있는 빨치산을 어떻게 찾아낸단 말인가. 지형지물을 살피던 백선엽 소장은 걱정이 됐다.
전선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밴플리트 8군사령관은 후방을 교란하는 빨치산을 본격적으로 토벌하기로 하고 그 임무를 백선엽 장군에게 맡겼다. 백선엽 장군은 빨치산 토벌을 전담할 백야전사를 새로 창설하고 수도사단과 8사단을 백야전사에 배속시켰다. 그동안 빨치산 토벌을 맡고 있던 서남지구전투사령부도 백야전사 휘하로 편입되었고, 또 전투경찰로 구성된 태백산지구전투사령부와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도 백야전사의 통제를 받게 되면서 백야전사는 3개 사단과 4개 전투경찰 연대를 휘하에 둔 2개 군단 규모의 막강한 전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제부터 빨치산은 여태까지의 군경들과는 전혀 다른 막강한 토벌대를 상대해야 한다.
“제법 큰 마을인데 아이가 한 명도 보이지 않습니다.”
참모장 김점곤 대령이 쌍안경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비행기가 날아오면 호기심 왕성한 아이들이 뛰쳐나오게 마련이다. 그런데 저렇게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것은 필시 빨치산이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규모에 비해서 밥 짓는 연기가 많이 나는 마을도 일단 의심해야 한다.
연락기는 운봉에서 방향을 틀어 남원 사령부로 향했다. 지리산 토벌작전-쥐잡기작전(Operation Rat Killer)-의 D데이 H아워는 12월2일 오전 6시. 원활한 작전 수행을 위해 12월1일 0시를 기해서 부산과 대구를 제외한 대전 이남 전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될 예정이었다.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걸로 봐서 아직 정보가 새지 않은 듯합니다.”
유양수 대령이 말했다. 쥐잡기작전의 성패는 기동타격대를 맡을 송요찬 준장의 수도사단과 최영희 준장의 8사단 등 2개 사단을 여하히 은밀하게 이동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속초에 주둔하던 수도사단은 해군 LST를 타고 여수로 이동해 지리산 남쪽에 집결했다. 영천의 8사단은 김천과 전주를 거쳐 지리산 북쪽으로 이동해왔다. 토벌부대는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낮에도 커튼을 내린 채 막사에서 꼼짝도 않고 있었다. 빨치산에게 우호적인 현지민들이 작전을 빨치산에게 알리는 것을 막기 위해 민간인 전화선은 이미 절단했다. 작전 내용이 사전에 새어나가면 빨치산들이 소규모로 분산해서 깊은 산골짜기로 숨을 것이다.
정보참모는 정보가 새지 않았다고 보고하지만 백선엽 장군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무려 2개 사단이 이동했다. 아무리 조심해도 그만한 대규모 인원이 움직이다보면 적의 정보망에 포착되게 마련이다. 그리고 비행장을 닦고 포로수용소를 세우느라 현지 주민들을 동원하면서 이런저런 소문이 떠돌았을 테니 유능한 지휘관이라면 머지않아 대규모 토벌이 있을 것이란 사실을 눈치 챘을 것이다. 정보가 새면 빨치산들은 소규모로 분산해서 더 깊은 산속으로 도주할 것이고 그러면 쥐잡기작전은 별 성과를 올리지 못할 것이다.
토벌대 우습게 보다 궤멸
그런데 백선엽 장군의 우려는 사실로 판명이 났지만 결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빨치산들은 대규모 토벌을 간파하고도 깊은 산속으로 도주하는 대신에 과감하게 정면승부를 걸어온 것이다. 전북도당과 충남도당은 300여 명을 지리산에 파견하며 남부군을 도왔다. 한마디로 토벌대를 우습게 본 것인데, 이는 빨치산들은 그동안 제대로 된 토벌대를 상대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빨치산 토벌은 현지 경찰이 주도했는데, 관할구역 개념이 강한 현지 경찰은 빨치산을 추격하다가도 그들이 자신의 관할구역을 벗어나면 미련 없이 추격을 중단했다. 이를 잘 아는 빨치산은 관할구역을 넘나들며 토벌대를 손쉽게 따돌렸다. 그러니 그간 토벌대는 빨치산들에게 그리 두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얘기가 달라질 것이다. 전방에서 차출된 정예 2개 사단이 기동타격대가 되어 끝까지 추격하고 지역 정보에 밝은 전투경찰이 예상 도주로에 매복하고 있다가 패주하는 빨치산을 덮치는 것이 쥐잡기작전의 요체다. 쥐잡기작전이 개시되면서 강릉에 주둔하던 한국 공군의 F51 머스탱 편대도 사천으로 이동해서 지상작전을 지원했다. 빨치산들은 이제 하늘로부터도 쫓겨야 할 판이다.
지리산이 온통 횃불로 일렁였다. 토벌대들이 추위를 녹일 목적으로 횃불을 피운 것이다. 매복전에서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키는 행위는 절대 금물임에도 횃불을 밝힌 것은 그만큼 토벌대가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지리산 자락을 환하게 밝히며 포위망을 좁혀오는 횃불을 보며 빨치산들은 비로소 공포의 실체를 똑똑히 체험하게 되었다. 그동안 상대하던 현지 경찰과는 차원이 다른 토벌대였다.
백야전사는 주민 선무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전에는 빨치산들에게 쌀 한 톨, 김치 한 쪽만 줘도 통비(通匪)분자로 몰렸다.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입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리고 포로도 관대하게 처분해서 강제로 끌려갔거나 죄가 가벼우면 훈방조치했다. 그것은 체포되면 무조건 죽는 걸로 알고 있었던 빨치산들에게 적지 않은 혼란을 불러왔다.
1951년 11월29일에 시작된 쥐잡기작전은 1952년 3월14일부로 종결됐다. 100여 일에 걸친 작전이 종료되면서 남부군은 피살 7000여 명에 포로 6000여 명이라는 엄청난 타격을 입고 재기불능 상태에 빠졌다. 그러면서 남부군은 후방의 안보를 위협하는 존재에서 지역의 치안을 교란하는 존재로 의미가 격하됐다. 그렇지만 남부군은 여전히 명맥을 이어갔고 지리산에서는 총성이 그치질 않았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모진 겨울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빨치산들은 정전협상에서 자신들의 북송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실망해야 했다. 국토완정의 꿈을 버린 지는 이미 오래. 오지의 주민들도 갈수록 비우호적이었다. 남은 희망은 북으로 돌아가는 것. 당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을 것이다. 빨치산들은 그 희망 하나로 힘든 현실을 참아냈다.
세 가지 ‘죽을 각오’를 했건만
1952년 4월 초. 지리산 대성골.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야 할 텐데…. 하늘을 올려다보며 걱정하던 이진범은 인기척을 느끼고 얼른 자세를 낮췄다. 일본군 부사관 출신인 그는 여순사건 이후 빨치산이 되어 투쟁에 앞장서왔다.
“날세.”
송관일이 보급투쟁에 나섰던 동지들을 인솔하고 달려왔다. 표정이 어두운 것으로 봐서 보급투쟁이 신통치 못한 모양이었다.
“갈수록 인민들이 비협조적이야.”
송관일이 불만을 토로했다. 그도 이진범과 마찬가지로 여순사건을 주도한 14연대 부사관 출신이다. 쥐잡기작전 이후로 우호적인 주민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화전민들도 대놓고 빨치산을 멀리했다. 보급투쟁에 나선 빨치산들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사람도 있었다. 초모사업도 큰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다. 자진해서 입산하는 사람은 이제 없다. 강제로 끌고 와도 틈만 나면 도망치기 일쑤였다. 이제 지리산은 더 이상 빨치산의 고향이 아니었다.
인지상정. 누굴 탓할 것인가. 이미 대세가 기운 마당이다. 이진범은 패자 편에 서지 않으려는 주민들을 탓할 마음이 없었다. 겨우 감자 두 포대로 보급투쟁을 마친 빨치산들은 대성골 아지트를 향해 무거운 발길을 옮겼다. 조금 있으면 인근 세석평전은 온통 철쭉으로 붉게 물들 것이다. 계절은 분명 봄이건만 빨치산에게 봄은 아직 먼 것 같았다. 이진범은 어쩌면 영원히 봄이 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다시는 인공기가 휘날리던 해방구를 볼 수 없을 것인가. 태평양전쟁에도 참전했던 이진범은 패전의 징후를 잘 알고 있었다.
“수고들 했소.”
1953년 서남지구전투경찰사령부 제2연대장으로 이현상 체포작전을 지휘한 차일혁 총경. 그는 아무도 이현상의 시신을 인수하려 하지 않자 ‘적장’에 대한 예우를 갖추고 시신을 화장했다.
여성 빨치산들이 재빨리 싸리나무로 불을 때기 시작했다. 싸리나무는 연기가 나지 않아서 산중 취사에는 안성맞춤이다. 대원들은 허기진 얼굴로 밥 짓는 걸 멀거니 쳐다보았다. 빨치산이 되려면 세 가지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총 맞아 죽을 각오, 굶어 죽을 각오, 그리고 얼어 죽을 각오. 지리산의 겨울은 혹독하다. 밤이면 체감온도가 영하 30℃까지 떨어진다. 골짜기를 스치고 지나가는 매서운 바람과 계속되는 토벌, 그리고 굶주림. 언젠가는 토벌대를 피해 얼음구덩이 속에 들어가서 반나절을 버틴 적도 있다.
주야로 계속되는 정치학습과 걸핏하면 열리는 오락회. 그 와중에도 산 생활은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빨치산에게도 무서운 것이 있었다. 희망 없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세 가지 죽을 각오를 한 빨치산들에게도 그것은 너무도 두려운 존재였다.
씨가 말라간다
저 아래로 마을의 불빛이 차가운 공기에 깜빡깜빡 흔들리고 있었다. 왜 갑자기 집 생각이 나는 것일까. 산 생활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고하는 것일까. 보급투쟁을 마치고 돌아온 이진범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여순사건에 가담했다가 입산한 것이 1948년 10월. 정신없이 남북을 오가며 전투를 벌이다 다시 지리산에 돌아온 지도 1년이 넘었다. 언제까지 이런 생활이 이어질까. 고향이 여기서 멀지 않다. 죽기 전에 고향땅을 다시 밟아볼 수 있을까. 왠지 자신이 없었다. 죽는 것을 두려워해본 적은 없다. 빨치산이 된 것을 후회한 적도 없다. 그렇지만 갈수록 가슴 한가운데가 허전한 것이 사실이었다.
식사를 받아든 이진범은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하고 있는 대원들 틈에 끼었다. 보급투쟁이 어려워지면서 먹는 게 형편없었지만, 그래도 빨치산들에게는 식사 때가 제일 즐거운 시간이다. 빨치산들이 식사하는 모습은 특이하다. 손과 동시에 발도 부지런히 움직인다. 동상을 예방하려면 쉴 새 없이 발가락을 꼼지락거려야 하는데 그것은 총을 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진범은 나중에 북쪽과 연락하기 위해 북으로 가다가 월악산 부근에서 토벌대에게 사살된다.
“회의를 합시다.”
정치위원 여운철이 묵묵히 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현상에게 다가왔다. 이현상이 고개를 끄덕이고 간부들을 소집했다. 부대를 이끌고 있는 이진범과 송관일, 김홍복, 이영회, 그리고 조복애가 모였다. 쥐잡기작전이 끝나면서 조금 여유를 얻었지만 토벌이 재개되기 전에 안전한 곳에 아지트를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당장 시급한 것은 머지않아 개최될 6개 도당 전원회의에 대비하는 것이다.
남부군 간부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박영발과 방준표를 위시한 도당 위원장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쥐잡기작전은 지리산에 국한된 게 아니었다. 토벌대가 회문산과 백운산, 운장산, 내장산, 덕유산 그리고 민주지산을 휩쓸고 다니면서 전북도당과 전남도당, 충남도당, 경남도당도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애초부터 제대로 된 병력이 없었던 충남도당은 아예 씨가 말라버렸다.
그에 비하면 지리산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 남부군 직속인 81사단과 92사단은 그런대로 건재했다. 물론 사단이라고 해봤자 정규군 대대에도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병력이지만.
도당 위원장들의 불만은 극에 달해 있었다. 그들은 이현상이 실정을 무시하고 부대를 대단위로 재편하는 바람에 훨씬 큰 피해를 봤다고 생각했다. 빨치산이 겁 없이 백야전사에게 정면대결을 시도했다가 피해를 키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이현상이 못마땅하던 차에 도당 위원장들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 또 생겼다. 쥐잡기작전이 한창이던 1952년 초에 흔히 ‘94호 결정서’라고 불리는 노동당 중앙정치위원회 명의의 ‘미해방지구에 있어서의 당 사업과 조직에 대해서’라는 문건이 지리산에 전달된 것이다. 94호 결정서는 휴전에 대비해서 남한을 5개 지구로 나누고 기존의 도당 조직을 새로 조직된 지구당에 이관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서울과 경기도를 제1지구로, 울진군을 제외한 강원도를 제2지구로, 논산군을 제외한 충청남북도를 제3지구로, 경상북도와 울진군 및 낙동강 이동의 경남지역을 제4지구로, 그리고 전남·전북과 경남의 낙동강 이서 지역 및 논산군, 제주도를 제5지구로 나누어 새롭게 투쟁을 전개하라고 지시했다.
빨치산의 씨가 마르다시피 한 제1, 제2, 제3지구는 별로 문제 될 게 없다. 누가 주도하건 새로 지구를 정비해야 할 판이다. 그리고 제4지구는 당연히 경북도당의 박종근 위원장이 승계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거물급 빨치산 지도자들이 즐비한 제5지구다. 누가 제5지구당 위원장을 맡을 것인가. 일단은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유력하지만, 전남도당 박영발과 전북도당 방준표가 이번에도 순순히 조직을 내놓을지는 의문이었다.
이현상의 불안한 헤게모니
그렇게 무거운 기운이 지리산을 내리누리는 가운데 마침내 6개 도당 전원회의가 열렸다. 회의가 시작되자 예상했던 대로 박영발과 방준표는 94호 결정서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격렬하게 반발했다. 그들은 94호 결정서가 작성된 것은 쥐잡기작전이 개시되기 전인 1951년 8월31일로, 그 사이에 상황이 크게 변했음을 들어 현실과 어울리지 않는 조치임을 주장하고 나섰다. 나머지 도당 위원장들도 이현상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평양의 남로당 지도부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현실과 동떨어진 지침을 내렸다며 이현상은 물론 대남사업 비서 이승엽과 정치위원 여운철까지 싸잡아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헤게모니 쟁탈전은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지리산에서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팽팽하게 대치하던 회의는 북로당에서 파견한 부정치위원 차일평과 중앙민청 부위원장 오운식이 도당 위원장들의 편을 들고 나서면서 이현상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렇지만 이현상은 맥없이 물러나지 않았다. 이현상이 강력한 주장을 펼치면서 6개 도당 전원회의는 이현상이 제5지구당 위원장, 박영발이 부위원장을 맡는 것으로 절충했다. 위상이 예전만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현상은 여전히 빨치산의 상징이었고 박헌영, 이승엽과 직접 이어지는 선은 아직도 권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어 이현상은 구빨치 시절의 제2병단장에 이어 독립제4지대장, 남부군 사령관을 차례로 거치고 제5지구당 위원장이 되었다. 일단 남로당 지도부의 뜻은 관철됐지만 여태까지의 지도자적인 위상과는 달리 다른 도당 위원장들과 대등한 처지에서 상호견제를 감수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제5지구로 새롭게 체제를 갖춘 빨치산은 군사조직도 개편했다. 남부군 직속의 81사단과 92사단은 각각 김지회부대와 박종하부대로 개편됐고 전북도당은 패주병들을 끌어 모아 항미연대와 복수연대로 재편됐다. 휴전에 대비해서 소부대 체제로 전환한 것이다.
실낱같은 희망도 사라지고
토벌대에 쫓기며 지리산 일대를 전전하는 가운데 계절은 어김없이 흘러 여름, 가을이 지나고 다시 겨울이 돌아왔다. 겨울은 빨치산에게 가장 힘든 계절이다. 그야말로 맞아 죽고, 얼어 죽고, 굶어 죽기 딱 좋은 계절이다. 그렇지만 사람 목숨만큼 모진 것도 없다고, 빨치산들은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 속에서 풍찬노숙을 하며 짐승과도 같은 생존본능을 이어갔다. 토벌대의 추격을 피해 차가운 얼음물에 뛰어들기를 예사로 하며 지리산 골짜기를 누비는 사이에 해가 바뀌어 1953년이 되었다.
새해의 아침이 밝았다. 빨치산들은 구름을 뚫고 떠오르는 해를 보며 소원을 빌었다. 여태까지 모질게 생존을 이어온 1500여 빨치산의 소원은 살아서 북쪽으로 돌아가는 것. 무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빨치산들에게 생존은 최우선 과제였다.
이 무렵부터 빨치산들은 ‘사찰유격대’라는 새로운 적을 상대하게 되었다. 전향한 빨치산들로 구성된 사찰유격대는 빨치산 전술에 익숙한 데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악착같이 토벌에 나서는 바람에 빨치산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지원도 끊긴 마당에 주민들은 등을 돌렸다. 거기에 이제는 옛 동지들과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처지가 된 것이다.
세석평전에 철쭉이 만발할 무렵에 기쁜 소식과 암울한 소식이 동시에 들려왔다. 기쁜 소식은 곧 휴전이 될 것 같다는 것이고, 암울한 소식은 유엔군이 제안한 빨치산의 북송에 대해서 북한이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휴전이 성립되면 당연히 북으로 돌아갈 줄 알고 있던 빨치산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회담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 당에서 대책을 마련할 것이다. 지리산 빨치산들은 구월산 등지에서 활약하고 있는 반공유격대와 맞교환될지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힘든 세월을 이겨나갔다.
그렇지만 그 실낱같던 희망도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조인되면서 절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북은 끝내 빨치산 송환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빨치산에게 남은 선택은 둘. 투항하는 것과 신념을 지켜서 끝까지 싸우다 죽는 것이다. 당에서는 개별적으로 도시로 잠입해서 장기투쟁에 대비하라고 했지만 그것은 이미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연고가 있는 구빨치들도 내려가는 족족 체포되고 있었다.
참담한 심정으로 대책을 마련하던 이현상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도 같은 소식이 또 전해졌다. 이승엽을 비롯해서 평양의 남로당 지도부들이 줄줄이 체포된 것이다. 이강국과 임화는 미국 간첩이라는 혐의로 체포됐고 대남사업비서 이승엽도 철직되어 조사를 받고 있었다. 부수상 박헌영은 간신히 체포는 면했지만 언제 끌려갈 지 모르는 처지였다.
조선공산당의 법통을 이은 남로당이 어떻게 이리 허망하게 몰락한단 말인가. 이현상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에 망연자실했지만 남로당 지도부의 몰락은 휴전과 더불어 예견된 것이었다. 호언했던 국토완정이 실패로 돌아간 데 대해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울 필요가 있었던 북한 지도부에게 눈엣가시와도 같았던 남로당은 제격이었다. 평양 남로당 지도부의 몰락으로 인한 후폭풍은 조만간 지리산에도 미칠 것이다. 이현상은 토벌대에 포위됐을 때보다 더한 공포에 휩싸였다.
“조직적, 사상적 총정리 책임을…”
1953년 8월26일 지리산 빗점골.
휴전 이후 처음으로 제5지구당 지도부가 한자리에 모였는데 예상대로 회의는 험악한 분위기에서 시작됐다.
“반당분자 박헌영과 이승엽은 종파주의 사상에 입각해서 남반부의 실정을 무시하고 94호 결정서와 111호 결정서를 남발함으로써 무수한 전사를 죽음으로 내몰았고 각 도당의 혁명 역량을 소갈시켰소.”
깡마른 몸에 눈매가 날카로운 박영발이 독기를 뿜으며 남로당 지도부를 비판하고 나섰다. 아직 정식으로 재판에 회부되지도 않은 박헌영까지 공공연하게 반동분자로 몰았지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박헌영을 향한 화살이 궁극적으로는 이현상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현상은 94호 결정서와 ‘미해방지구에 있어서 우리 당사업을 더욱 강화하는 데에 대해서’라는 이름의 제111호 결정서에 의해 명목상이나마 각 도당을 통괄하는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있었다.
이현상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섣불리 남로당 지도부를 옹호했다가는 반당분자로 몰리게 될 판이다.
“반당분자의 술책에 속아 동지들을 죽음으로 내몬 데 대해 나부터 자아비판하겠소. 그리고 부위원장을 사퇴하고 평당원으로 돌아가겠소.”
박영발이 사퇴선언을 하며 이현상을 몰아붙였다. 지도부의 시선이 일제히 이현상에게 쏠렸다. 박영발의 사퇴는 당신도 위원장에서 물러나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부위원장이 평당원을 자처한 마당에 위원장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이현상은 박영발과 방준표, 김상홍, 김선우, 남경우와 조병하, 노영호 등 참석한 지도부의 얼굴을 차례로 쳐다보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정치위원 여운철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이현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도 책임을 통감하고 있소. 그래서 부위원장과 마찬가지로 평당원으로 돌아가서….”
“당연히 자아비판을 해야겠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상황을 수습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전남도당 부위원장 겸 인민유격대 사령관 김선우가 이현상을 제지하고 나섰다. 그는 틈만 나면 독서를 하는 학구풍의 사람이다.
“그렇소. 부위원장이 사퇴를 한 마당에 위원장까지 자리에서 물러나면 혼란만 가중될 것이오. 수습이 우선이오.”
노영호가 거들고 나섰다. 서울대 공대에서 건축을 전공한 노영호는 와세다대학 출신으로 경남도당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삼홍과 더불어 온건파로 분류되는 사람이다.
반발하고 나서려는 박영발의 팔을 방준표가 슬며시 붙들었다. 강성으로 따지면 박영발에 뒤지지 않는 그다. 하지만 너무 몰아붙이는 것도 좋지 않다. 사실 북로당이라고 지금 무조건 큰소리를 칠 마당도 아니었다. 빨치산의 북송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에 대해서 불만이 고조된 마당에 북로당 출신으로 사사건건 남로당을 견제하고 구빨치들을 무시했던 부정치위원 차일평은 토벌군에게 체포된 후 전향해서 투항방송을 하고 다녔다.
“그럼 이현상 동지는 9월10일까지 제5지구당의 조직적, 사상적 총정리를 책임질 대책을 마련토록 하시오.”
방준표가 발언하고 나섰다.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되어 빗점골회의는 ‘반당, 반국가적 파괴 암해분자, 종파분자인 박헌영, 이승엽 반역도당의 잔재와 영향을 근절, 청소하기 위한 제반 대책’이라는 긴 이름의 결정서 9호를 채택하고 해산했다.
“산을 내려가시오”
이현상은 암담한 심정으로 일어섰다. 남과 북 모두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일까. 죽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다. 그렇지만 나 하나만을 믿고 여태까지 따라온 저들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현상은 퀭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빨치산들을 애써 외면하며 골짜기로 향했다. 결정서 9호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모든 책임을 자기에게 떠넘긴 것이다.
골짜기 위로 불어오는 바람이 계절이 바뀌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현상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와서 존경하는 박헌영 선생과 이승엽 동지를 비판해야 한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이현상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쟁은 끝났고 인민해방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더 이상의 무모한 희생은 막아야 한다. 이현상은 원하는 사람은 모두 하산시키기로 결심했다. 오로지 나 하나만 믿고 여기까지 따라온 사람들. 그들에게 의미 없는 죽음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눈을 감자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둘씩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남부군 전성시절을 이끌던 용장 박종하와 이진범, 송관일, 그리고 여장부 양봉순, 더 멀리 제2병단 시절의 김지회와 지창수의 얼굴이 그 뒤를 이었다. 모두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다. 옛 동지 중에 아직까지 살아 있는 사람은 경남도당으로 배속된 이영회 정도다.
“선생님.”
고개를 돌리니 하수복이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간호사 출신으로 빨치산에 합류한 하수복은 이현상의 ‘산중처’-내연의 여인-로 통하고 있었다.
“내 말을 잘 들으시오.”
이현상이 소리를 죽이며 하수복에게 다가갔다.
“기회를 봐서 지시를 내릴 테니 그때 저들을 따라 산을 내려가시오.”
이현상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주위를 살피고 있는 호위병 두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산을 내려가라는 말은 투항하라는 뜻이다. 하수복이 깜짝 놀라며 이현상을 쳐다봤다.
“예전과 달리 하산하는 빨치산을 관대하게 다룬다고 들었소.”
이현상은 아직은 어린 하수복을 허무하게 산속에서 죽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이현상은 부들부들 떠는 하수복에게 아무 말하지 말라고 이르고 두 호위병에게 가까이 올 것을 지시했다. 이현상의 호위를 책임지고 있는 김지회부대 소속의 두 사람은 잔뜩 긴장해서 다가왔다.
‘죽은 영웅’ 만들기
“9월10일이면 너무 늦은 것 아니오?”
회문산 전북도당 아지트에서 방준표를 기다리던 김병진은 결정서 9호 내용을 듣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이현상을 숙청하기 위해서 북에서 급파된 사람이다.
“이현상은 아직도 빨치산에게는 상징적인 존재고 김지회부대도 무시할 수 없소.”
김병진이 몰아붙이자 방준표가 불만을 드러냈다.
“그렇지만 마냥 꾸물댈 수는 없소. 중앙당에서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오.”
“잘 알고 있소.”
김병진이 중앙당을 들먹이자 방준표는 정색을 했다.
“우선 제5지구당을 해체하고 이현상을 평당원으로 강등시키시오. 그리고 박헌영과 이승엽을 비판토록 하시오. 또 김지회부대도 해체하고 부대원들을 각 도당에 분산시키시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오. 김지회부대원들은 이현상의 말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자들이오. 무리해서 몰아붙이면 아무리 중앙당 지령이라고 해도 반발할지 모르오.”
방준표가 신중히 행동할 것을 권했다.
“안진규 사건을 적극 내세우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