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라를 잘못 만났다 할까, 시대를 잘못 만났다 할까.
- 북한 여성은 언제쯤 압제로부터 해방될까.
북한 보위부 취조실에서 보위부원이 북송된 탈북 여성을 발로 걷어차고 있다. 한 북한인권단체가 공개한 동영상의 한 장면.
“신의주 보위부에 들어오니 뽐뿌를 시켰어요. 자궁에 손까지 집어넣었고요. 장갑 끼고 자궁이랑 항문을 검열했습니다. 다리를 올려 세우고 자궁을 검사했어요. 남자가 들어와서 피 묻은 생리대까지 뜯어서 봤습니다.”
뽐뿌는 자궁에 숨긴 돈을 찾아내고자 옷을 벗기고 앉았다, 일어서기를 100회 반복시키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
“보위부에선 몸수색이 심해요. 높은 신발 뒤축도 다 뜯어보고, 화장품도 안을 다 확인해요. 생리대도 다 짜개고, 자궁 검사도 하고. 돈을 먼저 신고하면 나갈 때 조금 돌려주는데 숨겼다가 걸리면 모조리 빼앗겨요.”
보위부 구류장 수감자는 오전 5시30분에 일어나 밤 10시에 취침한다.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곤 하루 종일 무릎을 꿇거나 책상다리한 채로 고개 숙이고 부동자세로 앉아 있어야 한다. 몸을 움직이면 간수가 때린다. 성적 학대도 일상처럼 벌어진다. ○희정씨 증언을 들어보자.
“홀딱 벗겨놓고는 이 간나 중국 아새끼들하고 실컷 놀아먹은 간나라고 하면서 때리고 머리채 잡아당기고. 감옥 생활 하면서 매 안 맞으려면, 때리지 않고 생각해준다는 게 성노리개로 방에 데려다가 놀고, 말도 못하게 해놓고 노리개처럼 데리고 놀고.”
강제로 태아를 낙태하면 어떤 기분일까? 한 북한 여성이 구류장에서 겪은 일이다.
“임신 7개월이었어요. 구역 병원에서 7개월짜리는 낙태할 수 없다고 보안원한테 말했습니다. 아이를 죽게 하는 게 낫다고. 보안서에서 청진에 있는 병원에 데려가서 낙태를 시켰어요. 낙태하러 갈 때 보안원 셋이 동행했습니다. 낙태하러 가는지도 모르고 따라나섰죠. 몸에 감염이 생겨서 검사하러 간다고 둘러대더군요. 병원에 도착하자 보안원이 중국 아이는 조선에서 못 낳으니까 지우라고 했습니다. 배에다 큰 주사를 놓았어요. 주사 맞고 아기를 낳았습니다. 주사 맞고 죽은 아이를 낳은 거죠. 이튿날 노동단련대로 보내더군요. 아이 낳을 때 출혈이 심했던 데다 젖이 불어 너무나 힘들었어요.”
“아기 귀신이 무서워요”
여성 인권은 국가 인권 수준을 가리키는 바로미터다. 북한에서 여성은 은혜를 받는 대상으로서 국가와 남성에게 보답해야 할 존재다.
북한 헌법은 “공민은 국가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누구나 다 같은 권리를 가진다”(65조)고 규정한다. 현실은 정반대다. 출신성분, 사회성분에 따라 가치 실현 기회가 다르다. 성분이 나쁘면 하류 인생을 살아야 한다.
북한식 표현으로 토대가 나쁜 여성은 최하층으로 살아가는 걸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성분에 따른 차별에 더해진 성(性)에 따른 차별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박탈한다.
탈북 여성 고○순씨의 증언.
“아버지가 탄광에서 일하니까 나도 탄광에 가겠구나 생각했죠. 어릴 적부터 그렇게 교육받아서 의기소침하지도 않습니다. 똑같은 일을 해도 남자는 대접받죠. 같은 시간 일해도 남자는 세대주니까. 응당한 걸로 생각해서 차별로 여기지 않죠.”
문○○씨는 이렇게 말했다.
“북한에선 토대 나쁜 사람과, 토대 좋은 사람이 결혼하면 사랑해서 했더라도 파멸을 가져와요. 나처럼 여자가 토대가 나쁜데 남자가 군관이나 대학생이면 그 남자 앞길이 막히는 거예요. 입당도 안 되고, 간부 승진도 못하거든요.”
북한 체제는 김일성을 어버이로 부르는 대(大)가정을 지향했다. 북한에서 수령은 어버이면서 대가정의 가부장(家父長). 김일성 가족은 경배하는 조상 지위에 올랐으며 국가 제사의 대상이다. 전근대적 가부장제로 국가를 구축한 것이다.
북한에서 수령, 인민은 유기체적 관계다. 가부장에 의문을 제기하는 건 어버이를 버리는 비도덕적 행동. 수령은 주민에게 은덕을 베풀고, 주민은 수령에게 충성한다. 가정은 가부장적 위계질서로 구축한 국가의 미니어처다.
“법이 그래요. 남자가 여자 때리는 건 법적으로 문제시되지 않아요. 남자한테 말대꾸도 못하고.”(윤희○씨)
“북한은 이혼도 안 해주잖아요. 굽어지게 맞아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현○희씨)
수령을 정점으로 가부장적 질서를 통해 사회를 위계화한 북한에서 여성은 동원·착취 구조의 말단을 차지했다. 국가 목표에 복종하는 노동기계 출산기계 양육기계의 기능을 한 것이다.
북한은 모성 보호 조치도 전무하다시피하다. 생계가 다급해 낙태를 선택하는 여성도 많다. 고○순씨는 의사에게 팥 10㎏, 두부콩 10㎏을 뇌물로 주고 낙태 시술을 받았다.
“몸이 무거워 병원에 갔더니 임신 4개월이라는 거예요. 4개월이면 소파수술(낙태시술)을 못하잖아요. 2개월 더 키워서 중기 중절했습니다. 배꼽 아래에 주사를 놓아요. 주사 맞고 24시간 후에 아이를 낳았어요. 죽었더군요. 친정엄마가 거적에 싸서 묻었어요. 엄마가 두 달 후 얼음에 미끄러져 뼈가 부러졌습니다. 아기 귀신이 무서워요. 어린 생명이지만 생명이잖아요. 늘 죄스럽죠.”
1990년대 중반 식량난이 발생한 후 북한 여성은 생계를 도맡았다. 시장은 여성에게만 허락한 영역이었다. 북한에서 장사는 천한 일이다. 낯 뜨거운 일은 여성의 몫이었다. 남성은 국영기업소를 이탈하면 처벌을 받았다. 계획경제는 시장에 기생해 연명했고, 남성은 여성에게 빌붙었다. 장터는 여성만의 공간이면서 권력이 통제하는 대상이었다. 여성은 장사, 무역을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면서도 착취를 당했다. 고○순씨의 회고다.
천한 일은 여성 몫
“여행증이 있는데도 안전원이 한 사람씩 들어오라고 해요. 중국 물건을 갖고 괜스레 시비를 겁니다. 언니가 들어갔다 막 울면서 나와요. 헛손질을 막 했대요. 안전원한테 당한 거죠. 심하게 당했으니 울었겠죠. 열차 장사를 하면 여자 아랫도리는 안전원 거라고 해요. 그렇게 해도 문제 제기를 못 하거든요. 얼굴이 반반하면 여행증 없이 마음대로 활보하는 거고요.”
남성들이 공권력을 빙자해 여성에게 심리·물리적 폭력을 행사했다. 장숙○씨는 이렇게 말했다.
“여행증도 있고, 차표도 있는데 뇌물을 달라고 해요. 막 따졌더니 몸 한번 바치라고 하더군요. 열차에 안전원 칸이 따로 있거든요. 돈 주기 싫은 사람은 몸으로 때우는 거예요.”
탈북 후 중국 허베이성 산골마을에서 살고 있는 여성 J 씨가 자신의 집 마당에서 옥수수를 다듬고 있다. J 씨는 중국인 남편에게 팔려 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여성들의 탈북 러시는 기근이 발생한 1990년대 중반부터 일어났다. 중국이 수난받는 북한 여성을 끌어당겼다.
경제가 도약하면서 중국 농촌에선 성비(性比) 불균형이 발생했다. 중국인 브로커는 미혼남성에게 북한여성을 알선해주고 수수료를 챙겼다. 매매혼 인신매매가 일상화했다. 돈을 벌고자 국경을 건넌 여성도 많았다. 중국도 북한 여성에게 인권 사각지대이긴 마찬가지였다.
“제일 무서운 게 조선족이었어요. 조선족이 돈을 받고자 공안에 신고하니까.”(황○○씨)
국적 없는 삶은 고단했다. 인권을 유린당해도 항의할 통로가 없었다.
“먹고는 살지만 국적이 없으니 사람 사는 게 아닌 거예요.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못한 거죠.”(김○순씨)
성폭력 공포도 일상화했다.
“남자들이 옷 입은 거, 행동하는 거 보면 조선 사람이란 거 딱 알아맞혀요. 여기 사람 아니다 싶으면 성추행하려고 하잖아요. 집적거려도 신분이 없어서 맞설 배짱이 없어요. 식당주인이 여자였는데, 제부라고 해야 하나? 그 남자가 성추행하려다 안 되니까 공안에 신고해서 하얼빈으로 도망갔어요.”(○준희씨)
“조선 사람이니깐, 돈도 안 주고, 사람을 차별하죠. 일하는 집에 아들이 있는데 노골적으로 막 그렇게 하자고 그런단 말예요.”(윤희○씨)
공포가 일상화한 여성들은 북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지만 중국어를 익히더라도 억양에서 티가 났다. 길○○씨는 “나라를 잘못 만났다 할까, 시대를 잘못 만났다 할까. 원망도 못 하겠다”고 하소연했다.
“너 같은 건 개도 안 먹어”
북한을 오가면서 장사하는 중국 국적 남성이 탈북을 도와주는 브로커 노릇을 했다. 여성을 넘겨받은 중국 거주 브로커는 탈북여성을 한족이나 조선족 남성에게 알선하거나 성매매업소에 팔아넘겼다.
○준희씨는 “일자리를 구해주겠다”는 브로커 말을 듣고 호텔에 갔다가 봉변당할 뻔했다. 브로커는 한국인 사장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꼬였다.
“30대 초반 때 일이죠. 호텔로 오라고 해서 20대 아이 하나와 함께 갔어요. 호실로 찾아 들어가니 두 사람이 있더군요. 침대도 두 개고요. 실험기구 같은 호스가 늘어져 있었어요. 잘못 들어왔구나 싶었죠.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이 뛰었습니다. 나 때문에 같이 간 아이까지 잘못되겠다 싶더군요. 훗날 생각해보니 그게 마약이었던 것 같아요. 어항 비슷하게 생긴 건데 빨대처럼 호스를 연결해 그걸 빨더군요.”
북한 여성은 교육 수준이 높은 편이다. 북한은 의무교육이 12년(한국은 9년)에 달한다. 교육 수준이 낮은 중국 하류층에게 ‘노예 대접’을 받는 것도 고통이었다. 이○○씨의 회고다.
“매일 맞았어요. 부인이라고 말하면 안 되죠. 나를 노예 삼아, 성희롱 대상으로 삼아 학대하고, 천대했거든요. ‘너 같은 건 웅덩이에 묻어도 개도 안 뒤져 먹어’라는 식으로. 복종하지 않으면 팼어요. 삽으로 맞아서 양쪽 눈이 시커머니까 곰이라고, 얼룩 곰이라고 놀리는 거예요.”
○경희씨는 사춘기 소녀도 성적으로 유린당한다고 전했다.
“중국에 팔려간 거지요. 7000위안에 팔려갔는데, 그 집에서 8000위안을 받고 다른 집에 넘겼어요. 여기서 살기 싫으면 북한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다른 곳으로 팔려가는구나 싶었죠. 북한으로 보내주면 좋은데 그게 안 되니까 정착하기로 했어요. 중국에서 10년을 살았죠. 마을에 열여섯 살 북한 여자가 왔거든요. 열여섯이면 완전 아이죠. 생리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남자가 같이 자자고 요구하니까 황당했던 거 같아요. 어린애 같은 아하고 같이 자자니까. 몇 번을 도망치고 붙잡히고 그런 모양이에요. 나는 그런 용기가 없어서.”
값이 없는 몸
매매혼과 인신매매는 사람을 사고파는 야만적 행위다. 이○○씨, 박○○씨, 문○순씨, ○희정씨 기억이다.
“허베이(河北)성이라고 조선 사람 없는 곳으로 팔려갔어요. 키 145㎝ 몸무게 45㎏인 왜소한 사람이 들어왔는데 아들 같았어요. 그 사람 어머니는 허리가 굽어 바깥출입도 못했고요. 그런 집에 저를 팔아버린 겁니다.”(이○○씨)
“밤에 열댓 번씩 남자가 곁에 와도 항변 한마디 못하고 그걸 다 받아줘야 하고, 마지막엔 섹스를 하는지 마는지도 모를 만큼 몸을 바쳐야 하고.”(박○○씨)
“인신매매자가 그룹을 형성했더군요. 북한 여자 왔다니까 4~5명이 와서 짐승처럼 값을 흥정해요.”(문○○씨)
“중국 농촌에 장가 못 간 사람이 많아요. 환갑이 되도록 여자 맛 못 보고 사는 사람도 있고요. 중국 사람들이 여자들 데리고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팔아먹지요. 팔려가서 사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산단 말이에요. 중국은 북한보다는 먹고사는 게 괜찮아요. 한족이든, 조선족이든 살게 되는 거죠.”(○희정씨)
○명희씨는 중국에서의 처지를 ‘값이 없는 몸’에 비유했다. 북한 사람은 사람 취급을 못 받는 고통을 겪는다고 그는 말했다.
“사람이 살면서 어떻게 좋은 일만 있어요. 우린 싸우고 싶어도 싸우지 못해요. 사이가 나빠지면 신고하니까. 남한테 져주면서 사는 게 너무나 힘들었어요. 우린 값이 없는 몸이니까. 가족 내에서도 업신여기는 게 있어요. 아이를 낳고 살아도 사람 취급 안 하고 막 그래요. 그게 저뿐 아니라 다 겪는 고통입니다.”
그는 한국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백화점 바닥에 깔린 대리석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백화점이 나오는데 에스컬레이터에다가 바닥이 대리석으로 됐잖아요. 단속하는 사람 없이 물건이 진열돼 있고요. 제멋대로 가져가면 어쩌나 싶었어요. 한국의 발전상을 보고, 한국행을 결심한 거죠.”
○진순씨도 드라마를 본 뒤 “죽더라도가보자”고 마음먹었다.
“문화 수준이 높고, 바르고, 배려하고. 우리는 한국 사람 보면 적대 국가이다보니 우리처럼 총 들고 싸움하고 이런 생각만 했죠. 드라마에서 우는 장면 나오면 나도 눈물 흘리고 그러면서 우리랑 똑같은 사람이구나, 한국 사람도 같은 민족이구나, 차츰 생각이 달라지더군요. 목숨 걸고 가면, 죽지 않고 가면, 나를 받아주겠구나, 국적도 얻고 살겠구나, 가다 죽더라도 한번 가보자, 사람처럼 살지 못할 바에는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중국을 떠났습니다.”
○희정씨는 “칼을 쥐고 떠났다”면서 “목숨을 하늘에다 맡기고 잘 안 되면 자살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국에 들어오는 과정엔 한국인 브로커가 개입했다. 이들은 인권운동가로 위장한 탈북 장사꾼이라는 비판도 듣는다. 탈북 여성들이 이들을 원한다는 점에서 필요악(必要惡)이란 견해도 있다.
북한 여성은 한국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도 인권 유린을 당했다. 태국 캄보디아 몽골 등의 수용소에서 생활했던 시기를 ‘인생에서 가장 끔찍했던 때’라고 기억하는 이가 많다. ○영희씨는 캄보디아에서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일을 겪었다”고 말했다.
“북한 사람을 거두는 수용소가 있어요. 목사라는 사람이 운영하는데 좁은 공간에서 200명이 생활했습니다. 죽을 뻔했어요. 목사하고 어떤 남자가 우리를 인간 취급을 안 해요. 말이 쌍스럽고 막 저희들을…. 북한이 못살고, 중국에서 수모를 받아 왔다지만 우리도 인간이잖아요. 북한 거시기 이것들이, 탈북자 주제에, 이런 말들을 입에 달고 살아요.”
이유 없는 폭력에 시달리거나 배설까지 간섭받는 수용소도 있다. 누울 자리를 사고팔아 돈이 없으면 화장실에서 지내야 하는 곳도 있다.
“밤에는 문을 안 열어줘요. 밤 10시에 문을 잠급니다. 화장실이 복도 건너편에 있었는데, 쓰레기통에서 소변보는 겁니다. 이불에다 누겠어요? 그랬다고 여자 얼굴을 때리고, 사람 취급 안 하는 거죠.”(○진순씨)
“더우니까 몽땅 팬티하고 속옷 바람으로 앉아 있는데, 그 안에서 서로 막 생활이 지겹고 하니까 신경이 곤두서서 계속 다투죠.”(김○영씨)
“3일 만에 자리를 샀어요. 그런데 자리에 누우면 팔을 펴지 못해요. 오므리고 있어야 해요. 석 달을 그곳에 있었어요. 정말로 힘들었습니다.”(○숙희씨)
2등 국민
한국에 도착해서도 차별은 이어졌다. 한국 국민이되, ‘2등 국민’으로 대접받았다. 국정원 조사 때부터 수난을 겪는다.
“중국에선 다른 남자하고 살았어요? 제일 먼저 배꼽 맞춰본 사람이 누군가요?”
국가정보원 조사관이 북한을 탈출한 현○○씨에게 물었다. “국정원이 배꼽 맞춘 사람 물어보는 곳이냐”고 현씨가 되물었다. 조사관이 재떨이를 들어올려 깨뜨리는 시늉을 했다. “뭘 잘못했기에 그러느냐”고 현씨가 따졌다. “나가. 너 같은 거 조사 안 해”라는 고함이 들렸다.
“조사를 얼마나 무섭게 하는지. 진짜 완전히, 얼마나 독하게 말하던지. 우리가 무슨 죄인도 아니고, 한국에 잘못해서 온 것도 아닌데, 완전히 구박을 하더라고요. 발로 의자를 딱 밀면서 앉아! 그러는 거예요. 그 사람 지금도 국정원에 있어요. 배 아프다고 약 달라고 하면 밥 먹지 말고 다 누워! 침대에 누워! 그리고 자! 이렇게 소리 지르는 사람도 있었고요.”(현○○씨)
조사를 마친 이들은 탈북자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12주간 교육받은 뒤 한국 국적을 얻고, 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 제도에 따라 임대주택을 공급받아 각 지역에 정착한다.
한국살이는 만만치 않다. 3개월 교육으로 한국에서 사회활동을 온전하게 하는 건 무리다. 일자리를 찾기도 어렵다. ○창희씨는 “대학 졸업생도 들어가기 힘든 회사가 우리를 받아주겠어요”라고 반문했다.
“일한다는 게 식당밖에 없어요. 사정이 이러니까 20, 30대 젊은 아이들이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욕을 하지만 돈을 벌 수 있는 데가 그런 곳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 아파트에 탈북자가 마흔여덟 가구예요. 날이 어둑어둑하면 아이들이 노래방, 유흥업소로 가느라고 화장 진하게 하고 짧은 치마 입고 나와요. 걔네 말을 들어봐도 똑같아요. 우리가 어디를 가겠나, 기술도 없는데 받아주겠나. 유흥업소에서 일하면서 5만원을 벌든, 10만원을 벌든 돈을 벌어야 북한 있는 사람을 살릴 거 아니에요. 망가져도 할 수 없다, 그거예요. 걔네가 하는 말이.”
탈북 여성은 한국에서 차별받는 소수자다. 낙인으로 인한 상처는 아프다. 그래서 탈북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중국 동포로 행세하는 이가 많다. 조선족은 되는 일이 탈북자는 안 되는 경우도 많다.
“아르바이트할 때 새터민이라고 하면 안 받아준대요. 담당형사가 따라다니니까 회사 사람들이 불편하다고 하고요. 새터민은 안 받지만 조선족은 받아들인대요.”(○경희씨)
“일하면서 북한에서 왔다고 한 번도 말 안 했어요. 중국 교포라고 그러죠. 스트레스 받기 싫어서. 사람들이 이북 새끼, 북한이 포를 쏘고 어쩐단다, 이런 말을 하면 속으로 뜨끔해요.”(○진순씨)
탈북자 지원은 “나는 탈북자”라는 고백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낙인이 찍히는 걸 무릅쓰고 신분을 공개하긴 쉽지 않다.
“자격증 취득하고, 1년 일하면 550만원 줘요. 3년 일하면 500만원인가 더 줘요. 안 잘리고 계속 일하면 지원금 1300만원인가를 몽땅 탑니다. 그런데 돈을 타려면 노동과에 신청해야 해요. 그 순간에 회사에서 납작해지는 거죠. 북한 사람 아니라고 속였는데, 딱 정체가 밝혀지면 회사를 더는 못 다니는 거죠.”(이명○씨)
“나라를 잘못 만났다”
“나라를 잘못 만났다 할까, 시대를 잘못 만났다 할까. 원망도 못 하겠다”는 길○○씨의 말이 북한의 오늘을 함축한다.
“북한 호위사령부가 김정일 수명이 최장 3년이라고 결론 내렸다”고 열린북한방송이 7월9일 보도했다. 한 일간지는 이 미확인 보도를 인용하면서 “북 검진 결과 ‘김정일 길어야 3년 산다’고. ‘길어야 3년’이라니, 3년도 너무 길어요”라고 촌평했다.
지도자가 바뀌면 체제 또한 바뀔까. 시간이 얼마나 더 흘러야 북한 여성이 해방될까.
* 글에 소개된 여성들의 이야기는 국가인권위원회가 북한에서 살다 한국으로 넘어온 여성들의 구술을 받아 녹취한 기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