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호

춥고 불편한 ‘진짜 영국 집’에서 새록새록 추억 만들기 시작!

  • 전원경│작가 winniejeon@hotmail.com│

    입력2010-08-04 11:0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우여곡절 끝에 이사 온 60년 된 2층집. 1층과 2층을 수도 없이 오르내려야 하고, 화장실은 춥고 멀고, 부엌엔 냉장고 놓을 자리도 없고, 복도는 거미줄투성이. 후유, 여기서 어떻게 살아?
    • 그런데 살아볼수록 새록새록 정이 솟는다. 관목 울타리 너머로 산책하는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아이들은 정원과 잔디밭에서 해 저물도록 뛰어논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 우리가 무럭무럭 자라던 시절의 정경 아닌가.
    춥고 불편한 ‘진짜 영국 집’에서 새록새록 추억 만들기 시작!

    정면에서 본 2층집. 대문이 없고 담은 1m 높이의 관목이 대신한다.

    몇 년쯤 전, 감성적인 선배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어릴 때는 큰 부자가 아니어도 애는 셋 정도씩 낳고 마당이 있는 집에서 개를 키우면서 살았잖아. 그런데 요즘에 서울에서 애 셋 낳고 마당 있는 집에서 개 키우고 산다면 굉장히 잘사는 집 아닌가? 그런 거 보면 국가 전체는 30년 전보다 잘살게 된 게 사실이지만, 과연 우리 개개인의 삶은 높아진 생활수준만큼 행복해진 게 맞나 의심스러워.”

    영국 집으로 이사하면서 내 머릿속에서 내내 맴돌았던 건 바로 이 말이었다. 중요한 건 얼마나 잘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행복하게 사느냐 하는 문제라는.

    지난 6월 중순, 9개월간 살던 플랫(Flat·연립주택 같은 구조의 3~4층 집합주택)을 떠나 2층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 이사에는 한두 가지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하고 긴 사연이 얽혀 있다. 그리고 짐을 싸서 옮기는 이사의 과정도 한국에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단하고 힘들었다. 그러나 이사를 결행하고 난 지금, 나와 내 아이들은 조금 더 행복해진 것 같다. 그것만으로도 이사를 전후해서 내가 겪어야 했던 무지막지한 고생이 약간이나마 보상되는 듯싶다.

    플랫 1층에 살고파라



    긴 사연을 대강 설명하자면 이렇다. 유학생들은 대개 영국에 처음 오면 기숙사에서 살거나 집을 세낸다. 혼자 오는 유학생이라면 대부분 학교 가까이에 있고 집세도 싼 기숙사를 선호하지만 나같이 가족이 딸린 사람들은 가족용 기숙사가 거의 없기 때문에 학교 밖에서 셋집을 알아봐야 한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부동산’에 가서 집을 찾는 것이다. 영국, 아니 영국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에는 ‘전세’가 없다. 영국이나 미국에서 ‘집을 렌트한다’는 건 매달 월세를 내고 집을 빌린다는 의미다. ‘디포짓(Deposit)’이라고 해서 한 달이나 두 달분의 집세를 미리 내고 집을 나갈 때 돌려받는 금액이 있긴 하지만 아무튼 영국의 셋집은 모두가 월세다.

    월세 금액은 집의 상태에 따라, 또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런던 같은 곳에서는 사람이 살 만한 집이라면 최소한 1200파운드(220만원) 정도의 월세는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시골 도시인 글래스고는 그 정도는 아니어서 500파운드(90만원)에서 700파운드(125만원) 사이면 그럭저럭 살만한 집을 구할 수 있다.

    여기서 ‘살 만한 집’이란 방이 두 칸 있고 거실이 하나, 식당이 하나 있는 플랫이나 하우스를 의미한다. 영국의 셋집은 대개 ‘Furnished House’라고 해서 침대 책상 의자 식탁 등 살림에 필요한 가구들이 전부 갖춰져 있다(심지어 그릇과 냄비, 숟가락까지 다 있다). 세간살이가 모두 구비된 점을 따져보면 방 두 칸짜리 플랫의 월세 100만원은 그리 비싼 가격이 아니다. 우리가 처음 글래스고에 와서 구한 집도 월세 650파운드의 방 두 칸짜리 플랫이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이 플랫에서 채 한 달도 살기 전에 이 집이 우리에게 적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영국 플랫의 방음 구조, 특히 층간 소음 문제는 한국에 비하면 정말 심각한 수준이다. 윗집과 아랫집의 쿵쿵대는 발소리, 물 트는 소리, 개 짖는 소리, 책 떨어뜨리는 소리가 그대로 들린다. 그러니 매일 싸우고 뛰고 울고 소리 지르는 게 일과인 희찬, 희원이를 키우는 내 처지에서는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같았다. 우리는 영국에 오기 전부터 플랫의 형편없는 방음구조를 잘 알고 있었기에 기를 쓰고 플랫의 1층(영국식으로 따지면 0층. 영국에서는 1층을 0층이라고 하고 우리 식의 2층을 1층이라고 한다)을 찾아 헤맸지만, 이상하게도 부동산시장에서 플랫 1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춥고 불편한 ‘진짜 영국 집’에서 새록새록 추억 만들기 시작!

    제 방 침대에 걸터앉은 희원이.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는데 플랫의 1층에는 대부분 거동이 불편한 노부부들이 살고 계셨다. 영국의 ‘하우스’ 즉 보통의 집은 작은 정원이 딸린 2층 구조로 되어 있다. 하우스의 1층에는 거실과 식당이, 그리고 2층에는 침실이 있다. 그래서 하우스에 살려면 매일 1층과 2층을 잇는 계단을 수도 없이 오르내려야 하고, 정원 손질도 최소한 1주일에 한번은 해줘야 한다. 그 때문에 거동이 불편해져 이런 집치레를 할 수 없는 노인들은 오랫동안 살던 하우스를 팔고 플랫 1층으로 이사한다. 그리고 부부 중 한 쪽이 세상을 뜨면 나머지 한 사람은 양로원에 들어가 일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다시 그 학교로? 난 안 가”

    이런 연유로 글래스고의 부동산시장에서 플랫 1층을 빌리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어려웠다. 결국 우리는 글래스고 대학 근처의 플랫 2층을 빌렸다. 우리 집 아래층의 마음씨 좋은 스코틀랜드 노부부는 “낮에는 아이들이 얼마든지 뛰어도 된다”고 하셨지만 내 마음은 늘 좌불안석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빌려주던 집이다 보니 대부분의 가구가 망가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희찬이가 동네 초등학교에서 매일같이 말썽을 일으켰다. 영국의 초등학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학군제여서 그 동네에 있는 가까운 학교에 가야만 한다. 학교의 정원이 다 차서 전학생을 받을 자리가 없다면 모를까, 학생 마음대로 학교를 선택해서 갈 수는 없다. 그런데 동네 초등학교가 마음에 안 든다며 아이가 죽어도 학교를 안 가겠다고 하니 이래저래 난감한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이 연재물을 계속 봐오신 독자는 아시겠지만, 우리 집의 문제는 대개 희찬이로부터 비롯된다).

    지난 호에서 잠깐 설명한 대로, 희찬이는 지난해 10월에 첫 학교인 세인트피터스 초등학교에서 외국인 특별학급이 있는 오크그로브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다행히 외국인 특별학급에서 희찬이는 모범학생으로 180도 변신했고, 선생님의 칭찬을 받으며 영어도 많이 배웠다. 그런데 이 외국인 특별학급은 원칙적으로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학생들은 다닐 수 없는 곳이었다. 말 그대로 ‘영어가 안되는 외국 학생’만 한시적으로 다닐 수 있는 학교였다. 그래도 나는 스코틀랜드의 1년 학제가 끝나는 6월 말까지는 희찬이가 외국인 학급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글래스고 시의회가 예산 부족을 이유로 글래스고 시 전체에 있는 외국인 특별학급을 5월 말에 일제히 닫아버렸다.

    희찬이는 원래 학교인 세인트피터스 초등학교로 돌아갈 바에는 학교를 아예 안 다니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아이를 잘 설득해서 학교를 계속 다니게 하는 게 정답이겠지만, 아이가 그렇게나 다니기 싫다고 하는 학교에 억지로 되돌려 보내는 게 꼭 옳은 길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왕 살고 있는 플랫도 이래저래 마음에 들지 않으니 이번 기회에 집을 옮겨보자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집을 옮기면 다른 학군으로 소속돼 자동적으로 전학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영국의 도시 근교에는 중산층이 모여 사는 베드타운 마을이 여러 곳 있다. 이런 마을에는 학군 좋다고 소문난 초등학교와 큰 슈퍼마켓 체인들이 있고 공원과 골프장 등 녹지가 많다. 한마디로 교외의 평온하고 안정된 마을이다. 글래스고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그래 봤자 5㎞ 정도지만) 지역에 베어스덴이라는 소도시가 하나 있었다. 학군 좋고 동네 분위기 좋기로 유명한 지역이니만큼 집세도 싼 편은 아니었다.

    ‘학군의 유혹’ 앞에 무너지다

    춥고 불편한 ‘진짜 영국 집’에서 새록새록 추억 만들기 시작!

    정원 숲 사이에서 신나게 뛰어노는 희찬이와 희원이.

    그런데 마침 일이 풀리려는지, 베어스덴에 맞춤한 가격의 2층집이 하나 나왔다. 알고 지내던 교수님 부부가 좀 더 큰 집으로 이사하면서 당신들의 집을 시중 가격보다 싸게 빌려주겠다고 제안하셨다. 아이 둘 데리고 좁은 플랫에서 쩔쩔매며 사는 내 사정이 영 딱해 보인 모양이다. 사실 이 제안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많이 망설였다. 교수님 댁은 지은 지 60년쯤 된 전형적인 2층 하우스인데, 플랫에 비하면 집이 꽤 추웠다.

    영국 집의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점은 늘 춥다는 것이다. 단열이란 개념이 아예 없는 건지, 아니면 영국 사람들이 원래 추위를 안 타서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겨울에 영국 하우스에 들어가보면 추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손이 시려 장갑을 벗을 수 없을 정도다. 겨울에도 늘 후끈후끈한 아파트에서 살던 우리 체질로서는 도저히 버티기 어려운 게 영국 집이다.

    그러니 베어스덴의 집으로 이사 가는 게 맞는 결정인지 쉽사리 확신할 수 없었다. 썰렁한 하우스에서 1년에 9개월이 겨울인 스코틀랜드의 으슬으슬한 추위를 고스란히 감당할 걸 생각하니 생각만으로도 몸이 덜덜 떨려왔다. 그러나 나와 달리 아이들은 처음 가봤을 때부터 이 집을 좋아했다. 아이들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계단도 있고, 정원도 있고, 다락방도 있는 무지무지 좋은 집’이자 ‘집 안에서 숨바꼭질도 할 수 있는 진짜 멋진 집’이라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의 말을 들으니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열다섯 살 무렵이었나, 그때의 우리 집도 서울 강북의 평범한 단독주택이었다. 마당에는 장미나무와 잔디, 잡초가 뒤섞여 자라고, 어두컴컴한 지하실에는 연탄이 여러 층으로 쌓여 있는 그런 집 말이다. 겨울이면 난방비를 아끼느라 온 가족이 안방에 이불 펴고 잠을 잤다. 연합고사를 치르고 고1이 되기 전, 석 달간의 긴 겨울방학 동안 마루의 연탄난로 앞에 앉아 폼 잡으며 ‘여자의 일생’이나 ‘적과 흑’ 같은 고전들을 끙끙거리며 읽곤 했다. 마당에서 키우던 잡종 진돗개가 잔디밭을 온통 파헤쳐놓아 엄마가 짜증을 내시던, 마당 한 구석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면 가끔 큰 쥐가 튀어나오던 그 춥고 오래된 집….

    그러나 이제 내 기억에는 추운 겨울과 무서운 쥐보다는 온 가족이 안방에 이불 펴고 자던, 그리고 연탄난로에 밤을 구워 먹던 따스한 추억만 남아 있다. 이왕 오래된 나라 영국에 와서 사는 마당에, 내 아이들에게도 그런 추억거리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 집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 힘든 결정적인 이유도 있었다. 바로 ‘학군’이었다. 베어스덴은 글래스고 전체에서 가장 학군이 좋기로 소문난 동네였다.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 아줌마’인지라 학군 좋은 동네라는 말이 주는 유혹은 영 뿌리치기가 어려웠다. 실제로 베어스덴에 있는 초등학교를 가보니 시설이나 방과 후 활동 등 모든 면에서 글래스고 시내의 학교들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예를 들면, 이 학교에서는 4학년(한국식으로 따지면 2학년 2학기)부터 원하는 학생은 누구나 악기 레슨을 받을 수 있다. 방과 후 활동도 축구 배드민턴 테니스 원예 미술 과학 합창 체스 등등 한국 학원에 있는 종목들은 다 망라돼 있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이사를 결정하고 6월 중순, 작은 정원이 있는 베어스덴의 2층집으로 과감하게 이사를 했다.

    안방에 요강이라도 들여놔?

    워낙 인건비가 비싼 나라가 영국인지라 ‘포장이사’ 같은 건 상상도 못하고 모든 이사를 교수님 댁 도움을 받아가며 혼자서 했다. 일단 이사하기 한 달 전쯤 가스와 전기, 전화 회사에 전화해 이사를 통보해야 했다. 뭐든 굼벵이처럼 느린 영국에서는 최소 7일 전까지 이사를 통보하지 않으면 전기나 가스 고지서가 이사하는 날짜에 맞춰 나오지 않는다. 인터넷 회선은 이사하기 한 달 전에 전화를 해서 새로 인터넷 회선을 연결할 날짜를 잡아야 한다.

    이사 며칠 전부터 플랫에 있는 짐을 하나씩 싸기 시작했다. 당일에 교수님 댁에서 빌려주신 밴에 짐을 다 실어 2층집에 내려다놓고, 다시 플랫으로 와 빈 집을 깨끗하게 청소하고(청소를 하지 않으면 부동산 회사에서 디포짓을 내주지 않거나, 청소비를 떼어낸 디포짓을 주기 때문에), 새집으로 가서 짐을 다 풀고, 새집에서 새로 인터넷과 전화선을 연결하고, 주민세 면제 양식을 시의회 홈페이지에서 내려받아 학교에서 도장을 받은 후 시의회에 보내고…거의 1주일에 걸친 고된 이사 끝에 나는 말 그대로 초주검이 되어버렸다. 아아, 내가 왜 포장이사 잘 해주는 한국 마다하고 이 먼 나라에 왔을까! 하는 누워서 침 뱉기 같은 신세한탄이 절로 나왔다.

    막상 이사 와서 집 구조를 살펴보니 앞으로 여기서의 삶이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60년 전에 지은 집이라 부엌에는 냉장고를 놓을 만한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냉장고는 가건물처럼 지어진 부엌 뒤의 공간에 놓았다. 또 부엌과 식당 사이가 제법 멀어서 밥을 차리려면 음식을 가지고 부엌과 식당을 계속 들락날락해야만 했다. 펄펄 끓는 뚝배기를 들고는 도저히 갈 수 없는 거리다. 하긴, 영국 사람들이 뚝배기를 쓸 리 없겠지만.

    1층 거실과 아이들 방이 있는 2층 사이를 몇 번 오르락내리락 했더니 다리가 뻣뻣해지는 것 같았다. 화장실도 춥고 멀다. 안방에 딸린 화장실, 이런 건 기대조차 할 수 없다. 겨울밤에 화장실 가려면 되게 춥겠다. 할머니들처럼 요강이라도 들여놓아야 하나?

    그러나 엄마의 걱정과는 아랑곳없이, 아이들은 이사를 온 순간부터 강아지처럼 1층과 2층을 뛰어다니며 놀기 시작했다. 아이들 눈에는 온통 신기한 것 투성이였다. “엄마, 가든에 버터컵(야생화 이름) 있는 거 봤어?” “엄마, 엄마, 복도에 거미 있다! 거미줄도 쳤어! ” “엄마, 다락방에 있는 벽장에 들어가서 한참 갔더니 다른 방 벽장으로 나왔어! ” “엄마, 다락방 벽장에는 박스 넣지 마, 거기서 숨바꼭질해야 된단 말야! ” “엉엉, 엄마, 계단에서 떨어졌어.”…아이들은 종일 집 안 구석구석을 뒤져가며 신기한 것들을 찾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앞에는 야생여우, 뒤엔 ‘대평원’

    특히 아이들은 플랫에서 지금까지 키워 오던 화분의 꽃들을 정원에 옮겨 심을 수 있다는 것을 몹시 기뻐했다. 신기하게도 정원에 옮겨 심자 그동안 잘 자라지 않던 해바라기며 국화, 제라늄 같은 꽃들이 금방 무성하게 자라났다. 그 광경을 보면서 희찬이가 한마디한다.

    “엄마, 역시 식물은 자연에서 키워야 잘 자라나봐.”

    글쎄다, 희찬아. 엄마 생각에는 식물뿐만 아니라 사람도 자연에서 커야 잘 자라지 않을까?

    그렇게 정신없이 1주일이 가고, 6월 말의 화창한 주말,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정원의 빨랫줄에 내다 널었다. 북구의 환한 햇빛과 바람 속에서 빨래는 금방 보송보송 말라갔다. 정원의 꽃과 나무에 물을 주고, 허브차를 한 잔 타서 거실에 와 앉았다. 거실 너머로 바깥 거리가 내다보였다. 신기하게도 이 동네에는 대문이 있는 집이 하나도 없다. 담벼락은 시멘트 담이 아니라 높이 1m쯤 되는 관목으로 둘러쳐져 있다. 그러니 바깥에서도 안이 훤히 다 들여다보인다. 집 안에 앉아 있다가도 거리를 산책하는 할머니와 시선이 마주친다. 할머니도 나도 자연스럽게 손을 들면서 ‘하이’라고 인사한다. 저녁이 되면 소리 없이 집 앞을 지나가는 자그만 몸집의 야생 여우가 보일 때도 있다.

    집의 뒤쪽으로는 희찬이가 ‘대평원’이라고 부르는, 무지무지하게 넓은 잔디밭 놀이터와 축구장이 펼쳐져 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희찬이는 엄마 등쌀에 못 이겨서 수학 문제집을 몇 장 푼 뒤에 희원이 손을 잡고 이 대평원에 가서 신나게 뛰어다니며 논다. 나는 저녁을 다 해놓고 정원으로 나가서 뒤편의 놀이터를 항해 소리친다.

    “희찬아! 희원이 데리고 와서 저녁 먹어! ”

    생각해보니, 우리의 어린 시절도 그랬던 것 같다. 골목에서 어둑해질 때까지 정신없이 놀다보면 골목 어귀어귀마다 있는 대문에서 엄마들이 한 사람씩 나와 “밥 먹어라! ” 하고 소리치고, 그러면 “내일 또 놀자” 하고 인사하며 각자의 집으로 밥 먹으러 들어가던…. 그때는 일제고사도 자율학습도 학원 같은 것도 없었는데, 그 시절을 거친 우리는 모두 이렇게 잘 자라지 않았는가. 어쩌면 희찬, 희원이에게도 훗날 영국에서의 추억은 이 낡은 2층집, 겨울이면 집 안에 있어도 입김이 나오고 여름 아침마다 정원에 친 거미줄을 걷는 이 집에서의 추억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희찬, 희원이는 내가 거미줄을 걷어낼 때마다 ‘해충 잡아먹는 착한 거미 괴롭힌다’며 난리를 친다).

    비단 베어스덴뿐 아니라 원래 영국 사람들은 2층으로 된 하우스를, 그중에서도 옛날 집(Unmodernised House)을 좋아한다. 영국 사람들에게 우리 식의 아파트는 진짜 집이 아닌, 잠시 머무르다 가는 공간으로만 비쳐지는 것 같다. 이들에게 집이란 뭐니뭐니 해도 직접 가꿀 수 있는 정원이 있고 그을린 벽난로와 할머니가 쓰던 안락의자가 있는 오래된 2층 하우스다.

    이 집은 정말 우리 집

    영국 사람들이 낡은 집을 좋아하는 이유는 워낙 인건비가 비싸서 새집을 지으려면 돈이 많이 들기도 해서겠지만, 그보다는 오래된 집에는 그 집에서 살아온 시간만큼 많은 역사와 추억이 쌓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인 것 같다. 영국 사람들이 집에다 들이는 시간과 정성의 양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베어스덴의 2층집과 정원은 다들 오래되긴 했어도 그런 주인들의 사랑과 정성 덕에 저마다 예쁜 모습으로 반짝반짝 빛난다.

    내가 과연 앞으로도 이 집을 제대로 건사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오래된 2층집을 조금씩 수리하면서, 또 정성껏 가꾸면서 살아가기에는 나는 턱도 없이 게으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정원 딸린 집의 안주인이라면 철마다 라스베리 잼과 오렌지 마멀레이드를 담그고 육개장을 끓이기 위해 야생 고사리를 따다 말리는 바지런한 아줌마여야 한다. 그러나 나는 잼과 마멀레이드가 어떻게 다른지도 모르고, 고사리를 따기는커녕 고사리 다듬을 줄도 몰라서 즉석육개장을 사다가 끓여 먹는 형편이니 이런 집 건사할 능력 따위는 애당초 없는 게 확실하다. 그리고 8월 말이면 이내 추워지는 스코틀랜드의 길고 긴 겨울을 여기서 어떻게 날지….

    춥고 불편한 ‘진짜 영국 집’에서 새록새록 추억 만들기 시작!
    전원경

    1970년 출생

    연세대, 런던 시티대 대학원(석사) 졸업

    월간 ‘객석’, ‘주간동아’ 기자

    저서 : ‘영국: 바꾸지 않아도 행복한 나라’ ‘짧은 영광, 그래서 더 슬픈 영혼’ ‘역사가 된 남자’ 등

    現 영국 글래스고대 문화정책 전공 박사과정 재학 중


    하지만 사실 큰 걱정은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이 낯선 곳에 와 살면서 더한 어려움도 헤쳐오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이 집으로 이사 오면서 이제 스코틀랜드는 나와 내 아이들에게 확실한 ‘집’이 되어버린 듯싶다. 예전의 플랫이 뜨내기들이 잠시 머물다 가던 집이었다면, 베어스덴의 이 2층집은 정말 우리 집이라는 느낌이 든다. ‘우리 집’이라는 말이 주는 그 안락하고도 편안한 느낌! 이 글을 쓰는 지금, 잠시 눈을 돌려 거실 창을 바라보니 밤 11시가 지났는데도 하늘에는 아직 보랏빛 노을이 남아 있다. 잉크빛으로 물드는 이 북구의 여름 저녁을 한국의 정다운 사람들과 같이 볼 수 있다면!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