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보다 스타벅스 간판이 더 많이 눈에 띄는 서울을 보고 싶지는 않다.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구닥다리 시인의 푸념을 조금 더 늘어놔도 될까.
“저~ 여기가 학고재 화랑 자리 아닌가요?”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만 할 뿐, 길 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시원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114에 전화해 화랑의 전화번호와 위치를 알아내어, 삼청동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걸어가도 되는 가까운 거리이지만, 그날따라 비도 내리고 정신적으로 지쳤기에 더는 헤매고 싶지 않았다. 헤아려 보니 춘천에 살던 지난 2년간 내가 인사동의 어느 화랑에서 누구를 만난 적이 없는 것 같다. 단골식당에서 낮에 밥을 먹었을 뿐, 화랑이나 미술관 문턱을 넘지 않았다. 문화생활을 멀리하고 저녁의 술자리에도 어울리지 않았다. 왜 그렇게 살벌하게 살았는지 후회하며 나는 여러 번 가슴을 칠 것이다.
수도약국 뒷골목
인사동에 내가 처음 발을 들여놓은 때가 언제인지. 서울이 자랑하는 문화의 거리에서 언제 처음 밥을 먹었는지? 골동품 수집가인 아버지에 이끌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릴 적에 벌써 드나들었겠지만, 인사동이 나의 약속장소로 애용된 것은 등단 무렵이었다. 문예잡지사에 시를 투고하고 문단의 선후배들에 이끌려, 밥을 먹기 전에 차를 먼저 마셨던가, 술을 먼저 마셨던가. 마포에 있던 창작과비평사에 자주 드나들던 1990년대 초였다. 평론가 김사인을 따라 들어간 어느 후미진 골목의 전통찻집, 탁자가 두어 개밖에 없던, 가게인지 뉘 집의 사랑채인지 분간 안 되는 작은 찻집에 앉아 문학을 논하던 어리벙벙한 신인. 사람 좋은 ‘고향 오라비’ 같은 그를 깍듯하게 선배로 대접하던 서른 살의 시인.
내가 기억하는 가장 낡은 인사동의 내 초상이다. 좁아터진 전통찻집이 나는 불편했다. 앞 사람과 간격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손님들끼리 한 식구처럼 어울리는 곳에서 나는 편히 숨을 쉬지 못했다. 곧 나는 신인 딱지를 떼고 그의 영향에서 벗어나 내게 어울리는 장소를 찾았다. 학고재 골목으로 죽 들어가 ‘평화 만들기’ 옆의 ‘볼가’가 나의 아지트였다. 담쟁이 넝쿨이 멋스럽게 드리워진 창가에 앉아 나는 시를 썼다. 내 첫 시집의 제일 마지막에 실린 ‘시’라는 제목의 시를 거기서 완성했다. 둥근 탁자에 초고종이를 펼쳐놓고 한 행, 한 행 지워가며 문득 주위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었다.
점심과 저녁 사이의 어정쩡한 시간, 사람들이 찾지 않는 늦은 오후에 찻집에 앉아 ‘새벽 1시’의 고독을 썼다 지우며 약간의 이율배반이랄까, 어색함을 느꼈던 것 같다. 오후 4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새벽 1시 병원의 불빛이 새어나오는 시”를 음미하다니. 거짓말을 할 때처럼 뒤가 켕겼다. 지금 생각하면 그 정도의 어긋남은 아무것도 아니며, 작업시간과 작품에 나타나는 시간을 일치시킨다는 건 멍청한 짓이며, ‘정직’을 들먹일 문제도 아니지만, 고지식한 30대의 초보 시인은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못했다.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야 좋은 작품을 쓰는 글쟁이의 숙명을 의식하며, 정직에 대한 나의 오랜 집착을 버리려면 세월이 더 흘러야 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나 ‘돼지들에게’를 탈고하며 나는 드디어 완전한 허구의 세계를 정복하는 창조자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오래된 한옥을 개조한 우아한 실내. 외부는 한옥이지만 안에 들어오면 서양냄새가 나는, 술집으로 부를지 찻집으로 불러야 할지 애매한 그곳은 메뉴에서도 동서양이 혼합된 소위 퓨전 레스토랑이었다. 녹차와 데킬라, 새우가 들어간 해산물도리아가 나의 단골메뉴였다. 앙증맞은 데킬라 잔에 소금을 바르며, 나는 세계시민이 되는 의식을 치렀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 술을 시켰는데 왜 소금이 나올까? 의아해 하는 내게 선인장으로 만든 멕시코 전통주를 제대로 즐기는 법을 가르쳐주던 그가 누구인지. 내 옆에 앉아있던 그의 얼굴도 이름도 잊었지만, 알코올에 녹아든 소금의 찝찔한 맛을 내 혀는 지금도 기억한다. 호기심에 한두 번 시도했지만, 깔끔한 맛을 선호하는 나는 다음부터는 내 술잔을 소금으로 더럽히지 않았다. 이탈리아어인지 스페인어인지 모르지만 ‘도리아’라는 이름의 서양음식이 있다는 것도 거기서 처음 알았다. 서양음식을 (구경할 기회가 없어) 즐기지 않던 내가 치즈에 버무린 밥에 익숙해지며, 1980년대에 갇혀있던 입맛이 현대화 국제화된 것도 ‘볼가’의 덕이다.
내가 그곳에 자주 출입하던 등단 무렵, 1990년대 초에 서울에서 ‘해산물도리아’를 파는 레스토랑이 드물었다. 오래된 레코드판, 구식 다이얼 전화기. 그리고 벽에 걸린 옛날 영화포스터. 무엇보다 음악이 좋았다.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처럼 우울하고 나른하면서도 달콤한 노래들. 팝과 재즈와 클래식의 명곡들이 번갈아 나와 지루하지 않았다. 의자가 푹신하고 장식이 과하지 않은 실내, 그리 크지 않지만 편안한 공간. 저녁에 여럿이 어울려도 술맛이 나는 세련된 분위기. 아주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나처럼 가난한 문인의 허기를 채우기엔 충분한, 늦은 오후에 호젓이 앉아 점심을 때우기에 딱 알맞은 식당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메뉴이지만 음식도 괜찮고 값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Volga’ 라는 러시아식 이름도 향수를 자극했다. 서양사를 공부한 내가 볼가 강변에서 해산물도리아를 포크로 찍어 먹는 모습이 그럴듯하지 않은가.
아버지가 소개한 밥집은 다 입맛에 맞았다
고기가 당기는 날은 수도약국 뒤의 사동면옥에서 설렁탕을 먹었다. 뜨거운 국물을 살살 식혀 숟갈로 떠먹으며 나는 아버지 생각을 많이 했다. 언제던가, 월드베이스볼 대회 뒤에 아버지와 여기에서 만나, 설렁탕을 먹으며 신나게 야구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좌투수의 공을 좌타자들이 왜 못 치는지, 커브와 슬라이드가 어떻게 다른지…. 나의 끝없는 질문에 즐겁게 답하는 아버지를 쳐다보며, 나는 알았다. 내가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부녀는 닮았다. 내 몸에는 운동선수의 피가 흐른다.
광복 후 처음 열린 전국체전에 출전해 역도와 해머던지기에서 메달을 땄던 당신의 영향으로 나는 어려서부터 온갖 놀이와 운동으로 몸을 단련했다. 고교시절에 한때 나는 농구선수가 될까, 진지하게 고민도 했다. 야구와 축구의 기본 규칙을 아버지로부터 처음 배웠다. 여고 1학년 여름이었다. 한창 공부할 나이인 당신의 딸이 고교야구에 빠져 라디오를 끼고 사는 걸 아버지는 말리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내 또래의 여자애에게 허락된 거의 모든 스포츠를 섭렵하며 나는 자랐다. 식탐이 심한 나는 운동에도 욕심이 많았다. 가난한 집안형편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모는 내가 사달라고 조르는 운동기구를 사주었다. 어머니는 굶더라도 딸은 여름에도 실내 빙상장에서 스케이트를 즐겼고, 수영복을 입고 각선미를 뽐내는 흑백사진이 유년의 앨범에 자랑스레 꽂혀 있다. 영양부족으로 새까맣게 타들어간, 비쩍 마른 엄마와 찍은 사진 속에서 나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다. 그 사진들을 내가 버리지 못하는 한, 나는 당신들의 희생을 외면하지 못하리라.
야구와 축구는 남자들만의 운동이라 감히 시도하지 못하고 구경만 했는데, 그래서 지금 내가 야구와 축구에 열광하나보다. 내가 해보지 못한, 내게 금지된 미지의 세계였기에,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나의 호기심은 멈추지 못하리. 아침에 컴퓨터를 열고 새로 받은 편지를 확인한 뒤에 내가 먼저 들어가는 곳, 즐겨찾기의 절반은 스포츠 관련 사이트들이다. 내가 딸이 아니라 아들이었다면 아버지를 더 일찍, 더 잘 이해했으리라. 풍운아였던 당신. 내가 아는 가장 이기적이며 강한 남자.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준 인사동의 괜찮은 밥집 중에 보쌈집이 있다. 스타벅스 못미처 사거리에서 오른편 골목으로 들어가 몇 집 지나 오른편 1층. 장군보쌈이던가, 가게이름은 가물가물하다. 가격은 싸지만 만든 이의 정성이 담긴 음식. 지난겨울에 갔더니 대보름날이라고 내가 시키지도 않은, 메뉴에도 없는 오곡밥에 나물을 내놓아 감동했었다. 아무튼 아버지가 내게 소개한 밥집은 다 내 입맛에 맞았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근래의 인사동. 기념품 가게인 ‘한국의 미’를 빼놓을 수 없다. 내 친구 박윤주가 만든, 소산당의 누비소품들을 사러 나는 그곳에 들르곤 했다. 고등학교 동창인 그녀가 디자인한 화려한 색상의 누비지갑들을 나는 무척 좋아한다. 우리나라 전통떡살 문양으로 수를 놓은 컵받침과 통장지갑, 명함지갑들을 그녀로부터 이미 여러 차례 받았지만, 그동안 신세진 주위 사람들에게 하나 둘 선물하다보니 금세 없어졌다. 필요할 때마다 친구에게 달라고 말하기가 미안해, 해외에 나가거나 신간을 출판해 선물 보낼 곳이 많아지면 내가 직접 매장에 가서 물건을 골랐다. 그런데 최근에 친구로부터 ‘한국의 미’가 없어지고 그 자리에 화장품가게가 들어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 관광객들에게 싸고 품질 좋은 국산 화장품이 인기를 끌며, 인사동 거리에서 고미술품이나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하나둘 문을 닫는다니. 시대에 따라 거리풍경도 변한다지만, 섭섭한 일이다.
인사동 골목을 나와 종로통에 번창하는 커피점들의 간판을 세며 나는 절망한다. 서울사람들은 물 대신에 커피를 마시나. 불과 몇 년 사이에 스타벅스의 서울 지점이 100개로 불었다는 기사를 보고 나는 내 나라가 부끄러웠다. 이건 좀 비정상이다. 이쯤 되면 그들이 파는 것은 단지 커피가 아니라 아메리카 대중문화다. 반미 촛불 시위의 한켠에서 미국의 커피 체인점이 번성 중인 이 희한한 사태를 어찌 설명할꼬. 물론 나도 한여름에는 에어컨 바람이 시원한 스타벅스에서 책을 읽으며 더위를 피하곤 했다. 커피가 아니라 생수를 마시며, 춘천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시간 보내기에 거기보다 좋은 장소를 알지 못하기에.
구닥다리 시인의 푸념
나는 친미주의자도 반미주의자도 아니지만, 서울의 국제화가 지나쳐서 뉴욕보다 스타벅스 간판이 더 많이 눈에 띄는 서울을 보고 싶지는 않다. 아침부터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펴놓고 게임을 하는 젊은 애들을 보노라면, 이상하게 온몸에 힘이 빠진다. 책을 읽지 않아도 좋으니, 친구와 하루 종일 쓸데없는 수다를 떨어도 좋으니, 제발 컴퓨터게임은 말아다오.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구닥다리 시인의 푸념을 조금 더 늘어놔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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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첨단기술이 아이들을 망치는 주범이다. 전자제품들과 반도체산업이 우리를 그동안 먹여살렸지만, 동시에 우리의 교육을 피폐화시켰다. 컴퓨터게임과 인터넷에 빠져, 휴대전화를 만날 손에 쥐고 사는 애들이 크면 장차 이 나라는 어찌 되려는고. 아이들의 미래가 나는 걱정된다. 부동산과 골프의 공화국. 아시아의 부자나라 대한민국. 뉴욕보다 파리보다 더욱 새것에, 새 물건에, 새 기술에 열광하는 바로 그것이 촌스러움과 교양 없음의 표지(標識)임을 사람들은 왜 모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