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태조의 둘째아들 정종의 태실(胎室)을 모셨던 직지사. 왕가의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답게 최고의 길지(吉地)에 자리해 있다. ‘기(氣)를 폭포수처럼 분출하는 생기처(生氣處)’라 했으니 그 기세를 짐작할 만하다. 태실에 이르는 솔숲길엔 ‘생명의 나무’들이 활기를 뿜어내고, 절집 안으로 바짝 들어선 단풍나무 숲은 철마다 색색의 아름다움을 펼쳐 보인다.
- 요즘 같은 한여름에 눈부시도록 붉게 피어나는 배롱나무 꽃엔 ‘부처님 공양 꽃’이란 이름이 붙었다.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나와 만물이 한 몸이란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태실 가는 길에 서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들.
태실이란 왕실에서 산모가 태아를 출산한 뒤 나오는 태반을 묻는 장소로, 태봉(胎封)이나 태묘(胎墓)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태의 자리가 다음 아기의 잉태(孕胎)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믿었다. 그래서 액이 없는 방향에서 태를 태우거나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삼국사기’나 ‘고려사’에는 신라 김유신도 태를 묻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것으로 미뤄보아 태를 묻는 풍습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것이라 하겠다.
태봉은 백제, 마한, 가야, 고려시대의 기록에도 나타나며, 풍수지리를 중시하던 조선시대에는 의궤까지 편찬했을 정도로 왕실의 중요한 의례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봉에 관한 논의가 120여 회나 나타나며, 태실에 대한 조선시대의 연구자료(‘조선의 태실’)에 따르면 조선의 국왕과 그 자녀의 태반을 묻은 구체적 위치나 지명이 90여 곳에 달한다. 그밖에 ‘태봉’이라 불리던 지명까지 망라하면 276곳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각지의 명당에 분포해 있다고 한다. 조선 왕실이 100리 이내에 왕릉을 썼던 것과는 달리 왕실의 뿌리인 태실을 전국 각지에 골고루 둔 것은 왕실과 지역 주민 간에 일체감을 갖게 만들 의도였으리라는 해석도 있다.
숭유억불 견뎌낸 ‘태실 수직사찰’
직지사의 정종 태실은 평소 사찰림과 조선 왕실의 관계에 관심을 갖고 있던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원하지 않던 임금 자리를 억지로 맡을 수밖에 없었던 방과는 왜 2년(정확하게 26개월)이라는 짧은 재임 기간, 그것도 하필이면 즉위 첫해에 자신의 태실을 직지사로 옮겼을까. 옮겨진 정종 태실은 그 후 직지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태실 주변의 산림을 태봉산(胎封山)으로 지정해 철저히 보호하던 조선 왕조의 산림정책을 참고할 때 직지사의 태실은 사찰림의 기원과 기능에 대한 사례를 찾던 나에게 좋은 연구대상이었다.
직지사는 풍수적으로 마니산, 태백산 문수봉, 오대산 적멸보궁과 함께 ‘기(氣)를 폭포수처럼 분출하는’ 생기처(生氣處)로 알려져 있으며, 정종의 태실은 풍수에서 최고의 길지로 알려진, 뱀이 먹이를 찾아 내려오는 형상의 머리 부분 혈(蛇頭血)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한다.
동생 이방원의 뜻에 따라 왕위에 오른 정종은 목숨을 부지하고자 왕위를 태종에게 물려주고 ‘격구, 사냥, 온천, 연회 등의 유유자적한 생활’을 19년 동안 영위하다가 63세로 일기를 마쳤다. 사두혈에 태실을 옮긴 덕분인지 몰라도 정종은 정안왕후 김씨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지만, 나머지 7명의 부인 사이에 15남 8녀를 두었다. 냉엄하고 비정한 권력 다툼의 세계에서 한발 벗어나 상왕생활을 19년간이나 누리고, 또 23명의 자식까지 둔 정종이 누린 영화(?)가 풍수적 최고의 길지에 자신의 태실을 옮긴 덕분인지, 내 짧은 풍수지식으론 감당할 수 없다.
조선 왕실에 태실을 내어준 직지사는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정종은 직지사를 수직사찰(守直寺刹)로 지정해 태실 수호의 소임을 맡겼다. 직지사의 주지는 수직군의 소임을 수행하는 승려들의 수장이기도 했다. 덕분에 직지사는 조선 초기부터 시작된 숭유억불의 모진 세월 속에서도 비교적 순탄하게 사세(寺勢)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왕실은 태실을 보호하고자 직지사 주위 30리 내에서는 벌목과 수렵과 경작을 금했다. 태실 수직사찰의 사격(寺格)을 확보한 덕분에 직지사는 태실 주변의 산림을 태봉산으로 수호하는 한편, 넓은 영유지(領有地)를 확보할 수 있었다. 직지사 홈페이지에 따르면 현재 약 600㏊의 산림을 보유하고 있으며, 직지사에서 12㎞나 떨어진 김천시내의 법원과 구화사(九華寺)까지가 직지사의 영유지였다고 한다.
직지사가 임금의 태실을 지키던 원찰임을 알려주는 안양루 앞 태석.
조선의 王木이자 생명의 나무
정종의 어태(御胎)를 530년 동안 모셨던 직지사의 독특한 이력을 생각하면 이 절집이 포용하고 있는 숲의 식솔들은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식솔들 중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숲은 무어라 해도 소나무 숲이다. 소나무는 조선의 왕목(王木)이었고, 풍수적 관점에서 양택(陽宅)과 음택(陰宅)에 생기를 제공하는 생명의 나무였다. 소나무가 풍수적 소재로 식재된 사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시대의 왕릉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왕릉 주변에 식재된 소나무는 왕의 유택을 길지로 만들어 왕조의 무궁한 번영을 꾀할 수 있다고 믿은 조상들의 풍수사상이 반영된 흔적이다. 왕이나 왕후의 태를 모신 태실 주변도 예외는 아니다.
산문에서 일주문에 이르는 들머리 숲에서는 대부분의 소나무가 사라졌지만, 산문 내 부도전에서 양옆으로 갈라지는 세 갈래 길의 오른편 숲길에서는 몇 그루 낙락장송을 찾을 수 있다. 이들 소나무로 미뤄보아, 오른편 숲길이 태실로 향하던 옛 길임을 추측할 수 있다. 가운데 길은 일주문을 지나 만세루를 거쳐 경내로 진입하는 길이며, 왼편 길은 산내의 여러 암자로 향하는 포장된 길이다.
태실을 향한 오른편 길을 따라 조금만 북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대나무 숲에 이어 꽤 넓은 면적의 울창한 소나무 숲이 나타난다. 대부분 수령 50년 전후의 어린 소나무이지만, 직지사 일대에서는 쉬 볼 수 없는 소나무 단순림이라 이채롭다. 태실 주변을 감싸고 있던 솔숲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태실을 지키는 원당의 위상에 비춰볼 때 직지사도 여느 절집과 마찬가지로 들머리를 비롯해 주변에 솔숲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절집 주변을 지키던 솔숲은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 등 사회적 혼란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옛 솔숲의 흔적은 사천왕문을 거쳐 만세루에 이르는 진입로 곳곳에 서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에서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오늘날 정종의 태실은 북봉에 없다. 조선총독부가 조선 왕실의 정기를 차단하고자 1928년 전국 각지의 명당에 매장되어 있던 왕실의 태 53위(왕의 태실 21위, 공주 및 왕자의 태실 32위)를 파헤쳐 서삼릉으로 옮겼을 때, 정종의 태옹(胎甕)도 함께 옮겼기 때문이다. 정종 임금의 옛 태실 흔적은 안양루 앞의 태석과 청풍료 마당에 전시된 태실의 난간석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직지사는 고구려 승려 아도(阿道)화상이 418년(신라 눌지왕 2년)에 창건했다고 한다. 신라시대에 자장(慈藏)과 천묵(天默)이 중수하고, 고려 태조의 도움을 받아 중건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탄 당우(堂宇)들이 1970년대 이후 녹원스님에 의해 30년간에 걸친 복원사업으로 오늘의 모습을 이루게 됐다.
‘직지사(直指寺)’라는 절 이름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창건주 아도 화상이 도리사를 건립하고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直指)‘저 산 아래에도 절을 지을 길상지지(吉祥之地)가 있다’고 한 데서 전래했다는 설도 있다.
임진왜란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사명대사 유정(惟政·1544~1610)은 이곳에서 출가했으며, 경내에는 석조약사여래좌상(보물 319호), 대웅전 앞 3층석탑(보물 606호), 비로전 앞 3층 석탑(보물 607호), 대웅전 삼존불 탱화 3폭(보물 670호), 청풍료(淸風寮) 앞 3층 석탑(보물 1186호) 등의 중요 문화재가 있다.
어느 절집엔들 숲이 없으랴만, 조선 왕실의 수직사찰이던 직지사의 숲은 절집 안에 바짝 들어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절집 마당에서 사방 어느 곳을 둘러봐도 빈 구석이 없을 만큼 녹색세상을 이루고 있다. 그 녹색세상의 첫 구성원은 사천왕문과 만세루 오른편 언덕의 단풍나무 숲이다. 썩 넓은 숲은 아닐지라도 이 일대의 단풍 숲은 철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제 방식대로 뽐낸다.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경험한 이들은 봄철의 신록과 여름철의 녹음과 함께 가을 단풍의 풍광을 잊지 못한다. 다른 어떤 곳의 단풍 숲과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멋진 숲이기 때문이다.
직지사에는 또 다른 단풍 숲이 있다. 대웅전에서 비로전으로 향하는 통로에 심은 단풍나무 터널이다. 이 땅 곳곳의 절집들이 멋진 들머리 단풍나무 숲을 유지하고 있지만, 경내의 한 통로에 소박한 터널 형태로 몇 백 년째 이어오고 있는 단풍 숲을 간직한 곳은 직지사뿐이다. 이 단풍 터널을 거닐 때는 나란히 난 수로(水路)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절집 대부분이 풍수지리상 물을 담벼락 밖으로 빼내는 데 견주어 직지사는 오히려 그걸 보듬어 물을 경내 곳곳으로 흘려보내고 있다. 단풍 터널의 수로를 따라 흘러내리는 물과 함께, 천불암 담벼락을 타고 흘러온 물이 황악루 앞을 가로질러 흐르거나 만세루 앞의 소나무 숲 사이로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물길을 만나는 것은 다른 어떤 절집에서도 쉬 경험할 수 없는 풍경이다.
이처럼 절집 곳곳에 물이 흘러내리게 만든 수로 덕분에 직지사의 수목들은 왕성하게 자라는지도 모른다. 이 수로가 예부터 있어온 것인지 또는 복원사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된 1970년대에 만들어진 것인지 몰라도 절집 마당 곳곳으로 물이 흐르도록 친수공간을 배치한 스님들의 지혜가 예사롭지 않다.
한여름에 獨也紅紅하는 배롱나무 꽃
직지사를 가로지르는 여러 수로와 함께 시선을 고정해야 할 대상은 사명각 앞을 지키고 선 배롱나무다. 올해는 지난 봄의 늦추위 때문에 꽃눈이 많이 상해서 꽃구경을 못하고 상경했지만, 지난해 7월 하순에 만발했던 백일홍 꽃을 잊을 수 없다. 배롱나무의 꽃은 백일이나 가기 때문에 목(木)백일홍, 또는 자미화(紫微花)라고도 불린다. 배롱나무 꽃은 7월과 8월과 9월 초에 각각 20여 일간 피고, 이후 10여 일 정도 시들어 모두 100일 정도 연속해서 피고 진다고 한다. 특히 8월 말에서 9월 초에 피는 유일한 꽃으로 예로부터 조상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다른 꽃이 별로 없는 한여름에 독특하게 붉은 꽃을 피우는 특성 때문에 식물의 품격을 1품에서 9품으로 나눈 강희안(1417~1464)의 ‘양화소록(養花小錄)’에는 백일홍이 매화, 소나무와 함께 1품으로 가장 윗자리에 등재되어 있다.
방외거사 조용헌 선생의 해석도 새롭다. 조 선생은 태극의 색이 청과 홍으로 이뤄져 있는데 그 청홍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식물로 소나무와 배롱나무를 든다. 소나무는 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식물로 겨울에 독야청청(獨也靑靑)하며, 배롱나무는 홍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식물로 여름에 독야홍홍((獨也紅紅)한다는 것이다.
배롱나무가 직지사는 물론이고 수많은 절집에서 오래전부터 자리를 잡게 된 배경도 꽃이 없는 계절에 부처님께 꽃 공양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절집에 순수한 아름다움을 제공하기 위한 스님들의 안목 덕분일 것이다. 염천에 땀 흘려 꽤 먼 거리의 들머리 녹색 숲을 통과한 불자들이 대웅전이 있는 절집 마당에 들어선 순간, 붉게 만발한 백일홍을 만나는 감흥은 유별날 것이다. 아! 하고 감탄사를 내면서 백일홍의 아름다움에 빠지는 그 무구한 순간은 하늘과 인간 사이에, 자연과 인간 사이에 어떤 간격도 사라지고(天人無間), 하늘과 내가, 자연과 내가, 부처와 속세 간에는 어떤 간격도 없는 합일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아닐까. 한여름에 배롱나무 꽃이 내뿜는 아름다움을 만나는 그 순수한 마음이 바로 부처님을 만나는 마음 아니겠는가. 내 속에 부처가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절집의 배롱나무를 통해서도 깨칠 수 있다면, 천지만물이 가진 아름다움을 제때에 제대로 담을 수 있는 감성의 그릇을 키우는 일조차 수행 방법의 하나라고 주장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왜 하필이면 사명각 곁에 목백일홍이 심어졌을까.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단풍나무 터널의 녹음 곁에 선 붉은 배롱나무 꽃은 한여름 절집의 단조로운 풍광에 변화를 주는 데 부족함이 없다. 밀양 표충사가 사명대사를 기리는 표충사당과 표충서원을 절집 안에 품고 있는 것처럼, 직지사도 사명각을 건립함으로써 사명대사 유정의 영탱을 봉안해 대사의 유덕을 기리는 것은 스님이 신묵대사의 제자가 되어 이 절집에서 출가한 인연 때문일 것이다.
황악루 살구나무에 깃든 사연
대웅전에서 비로전에 이르는 단풍나무 숲길.
직지사의 감나무도 유별나다. 이 절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조선 정종과 절친했던 주지스님이 왕에게 직지사 감을 진상했고, 그 맛이 너무나 좋아서 조정에서는 ‘직지사반시진상법’까지 제정했다고 한다. 직지사 감이 조선조 말까지 왕의 식탁에 올랐음은 물론이다. 조정에 진상하던 감나무는 맛있는 홍시를 생산하는 납작감(반시·盤枾)나무로, 청풍료 옆 굴뚝 옆이나 설법전 뒷마당에 서 있는 거대한 감나무들에서 옛 영광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들 아름드리 감나무는 여전히 맛있는 홍시를 생산하고 있다. 어떤 이는 이들 감나무가 600년 정도 묵었다고 하지만, 크고 오래된 것일수록 이름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인지 몰라도 세상에 통용되는 나이 중에 나무 나이만큼 가늠하기 어려운 것도 많지 않다. 아무튼 감나무들이 절집에 터 잡은 덕분에 제 천수를 누리고 있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감나무와 함께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세월의 무게를 말없이 전하는 직지사의 늙은 개나리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나리는 연필보다 조금 더 굵은 줄기를 가진 것이 대부분이지만, 직지사의 개나리는 주변에서 쉬 찾을 수 없을 만큼 굵은 줄기로 세월의 무게를 자랑한다. 어떤 이는 200년 묵었을 것이라고도 하지만, 이 역시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다.
개나리와 관련해서는 직지사 일주문의 기둥 하나는 개나리 줄기로, 다른 하나는 1000년이 넘은 싸리나무로 만들어졌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청풍료 옆 마당의 어른 팔뚝만한 굵기의 줄기를 간직한 개나리가 200년 묵었다면, 일주문 기둥감으로 쓸 개나리는 아마 수천 년 묵은 개나리라야 가능할 터인데, 키 작은 관목이 키 큰 교목처럼 자랄 수 없는 이치를 생각할 때 직지사 개나리의 빼어남을 자랑하려는 ‘판타지’이리라.
다섯 암자에 이르는 숲길
소년 박정희가 타고 올랐다는 황악루 앞의 살구나무.
다섯 암자에 이르는 숲길은 잠시나마 도시의 욕망을 내려놓기 좋은 장소다. 우선 그렇게 멀지 않다. 시멘트로 포장된 점이 아쉽지만, 폭이 꽤 넓은 통행로이기에 발 밑의 장애물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으며, 은선암을 제외하곤 운수암으로 가는 길에 차례로 명적암과 중암과 백련암을 둘러볼 수 있게끔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숲길에서는 느리게 걷는 것이 좋다. 그리고 생각의 고리를 하나하나 끊어내고 자신과 대면하면서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되돌아보기에 안성맞춤이다.
은선암은 만덕전을 지나 등산로 초입에서 왼편으로 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오르면 갈 수 있는데, 등산로와 같은 방향에 자리 잡은 다른 암자들과는 달리 왼편 산록에 있어서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등산객은 대부분 오른편 산록에 자리 잡은 백련암과 운수암으로 난 길을 따라 황악산을 오르기 때문이다. ‘은선암’에는 ‘신선이 스스로 살 곳을 선택해서 산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신선들이 사는 곳답게 은선암에 오르는 숲길은 활엽수림이 울창하고, 경사가 좀 있지만 포장된 길이라 가족이나 동료들과 함께 걷기 좋다. 신선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자세로 마음을 비우고 느리게 걸어볼 일이다. 이 숲길을 갈짓자처럼 몇 굽이를 돌면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전통 한옥에 어울릴 것 같은 대문을 가진 은선암이 불쑥 나타난다.
은선암으로 오르는 숲길도 좋지만, 은선암에서 내려다보는 직지사의 정경도 인상적이다. 비전문가의 눈에도 ‘천하의 길지’라는 명성을 얻은 이유를 수긍할 수 있을 만큼 황악산 자락에 바구니처럼 감싸인 모양의 아늑한 직지사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황악산의 중앙이나 오른편에 자리 잡은 암자로 가려면 은선암에서 다시 내려서야 한다. 은선암으로 오르는 처음의 갈림길에서 운수암까지는 약 2㎞ 거리이지만, 이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숲으로 덮여 있어 최상의 산책길이다. 황악산 중앙의 명적암은 큰절의 안내판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을 정도로 최근에 건립된 암자다. 세 번째 암자인 중암은 14칸 규모의 단아한 한옥 건물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그 곁에 새로 지은 법당이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앉아 있다. 일본에 체류하다 어머니 일엽스님을 따라 66세에 뒤늦게 출가해 화승(畵僧)으로 봉직한 일당스님(속명 김태신·일엽스님의 외아들)이 계시던 곳이다. 일당스님은 일본의 권위 있는 미술상인 아사히상을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 북한의 김일성종합대학에 걸려 있는 김일성 주석의 초상화를 그린 이로 알려져 있다.
사명각 앞의 배롱나무. ‘붉은 여름’을 선사한다.
직지사를 네 번째 찾은 끝에 마침내 산내 암자를 모두 둘러보았다. 하지만 하안거 중이라 어느 암자에서도 스님을 뵙고 말씀을 청해 들을 수 없었던 점이 조금 아쉽다. 절집은 수행 정진으로 깊은 침묵에 빠졌지만, 다섯 암자의 수각 물은 어떤 제한도 없이 계속 흐르고 있어서 방문객의 갈증을 풀어줬다. 또한 절집에 이르는 한적한 숲길은 도시에서 안고 온 욕심과 기대와 집착을 비우는 데 부족함이 없을 만큼 청정했기에 도시의 욕망을 잠시나마 비울 수 있었다.
숲을 즐기는 데 계절을 가릴 필요는 없다. 우리 주변의 어떤 숲에서나 자기 스스로 풍경 속의 한 점경(點景)이 되어보는 것이 숲을 즐기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 방법에 대해 설명을 조금 덧붙이면, 그냥 숲 바닥에 널려 있는 바위에 걸터앉거나 또는 땅바닥에 그대로 퍼질러 앉아 몸과 마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일이 먼저다. 그러나 이런 고요한 상태에 이르기란 쉽지 않다. 우리 대부분은 몸과 마음이 모두 번다하거나, 마음은 고요한데 몸이 번다하거나, 또는 몸은 고요한데 마음이 번다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욕심과 기대와 집착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오는데, 어떻게 하면 한순간이라도 몸과 마음을 고요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을까.
숲에서 비우고 채우기
나는 지난 글에서도 몇 번이나 언급했듯이 ‘지금 이 순간 이 공간’에 온전히 머무는 일에 집중한다. 시간과 공간의 합일에 의해 만들어진 풍광 속에 놓인 나 자신에 집중함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잡념을 떨쳐버리고, 다른 일을 벌이고 싶은 욕망을 내려놓는다. 이런 마음으로 숲(자연)에 몰입하면, ‘욕심과 기대와 집착’이 잦아들기 시작하며, 작은 것에도 마음의 풍요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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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나의 방식이 모든 사람에게 통용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지만, 몸과 마음을 고요한 상태로 만드는 나만의 다음 순서는 10번쯤 천천히 심호흡을 하는 일이다. 여러분도 한 번 시도해보시라. 단순한 심호흡만으로도 마음이 고요해지고, 다음으로 몸이 편안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 이르게 되면 다음 단계로 들어가기가 쉽다. 나무가 내쉰 날숨(산소)을 내가 들숨으로 마시고, 내가 내쉰 날숨(이산화탄소)을 나무들이 들숨으로 마셔 영양분이 되어 자신의 몸을 서로 키워간다는 상상이다.
이런 상상을 키워가면 우리 주변을 둘러싼 자연이 단순한 사물이 아님을 자각하게 된다. 나무와 내 자신이 딴 몸이 아니라는 자각이 심화되면, 우리 주변의 모든 자연이 우리와 다른 몸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만일 여러분이 이런 경지에 이르게 되면 자신이 주변의 천지만물과 거미줄처럼 서로 연결돼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바로 우주 안의 뭇 생명이 한 몸이 되는 순간이다. 불가에선 이런 깨달음을 동체대비(同體大悲)라고 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