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호

내가 수확한 곡물이 내 몸으로 들어오는 짜릿함

이 남자들 뒤늦게 막걸리에 흠뻑 빠진 까닭은?

  • 허시명| 술 평론가 sultour@naver.com |

    입력2010-07-30 13: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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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막걸리는 사람을 부르는 술이다.
    • 푸성귀 안주로도 감칠맛이 난다.
    • 술 평론가면서 막걸리학교 교장인 필자가 이달부터 막걸리의 매력을 글로 전한다.
    내가 수확한 곡물이 내 몸으로 들어오는 짜릿함

    막걸리를 마시고 흥에 겨워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

    내가 막걸리학교를 개교했을 때 가장 열정적으로 참여한 이들은 귀촌을 준비하거나 정년을 앞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은퇴를 준비하고 있다. 고향에 내려가 집과 정자를 지어 술과 벗하고 싶다” “시골 가서 전원생활하면서 친구 불러 함께 막걸리를 즐기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몇 명은 이미 귀촌해 농사를 지으면서, 구체적으로 막걸리 프로젝트를 실천하고 있었다. 함양에서 태평농법으로 농사짓는 이는 우리 밀 누룩을 만들겠다고 했고, 임실에서 매실농장을 하는 이는 매실 막걸리를 빚겠다고 했다.

    막걸리학교를 찾아온 농부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이는 2기 강좌에 찾아온 황성현(41)씨다. 성현씨는 경북 청도군에서 복숭아 과수원을 운영하는 귀촌한 지 5년 된 농부다. 턱수염을 길러 성격이 깐깐해 보인다. 그는 농사용 물탱크를 실은 트럭을 동대구역 주차장에 세워놓고, KTX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 명륜동 성균관대 앞의 교육장을 찾아왔다. 그는 두 차례 강의를 들은 뒤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해 목발을 짚고 청도와 서울을 오가야 했다.

    그는 막걸리학교 10주 강의를 모두 들은 뒤, 함께 수업을 듣던 사람들을 ‘복숭아꽃 피는 날’ 청도로 초대하겠다고 했다. 복숭아꽃 살구꽃 피는 시골 마을 얘기를 동창들에게 전하면서 함께 막걸리 들이켤 날을 기약한 것이다. 복숭아꽃 피는 날 실제로 그의 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와 함께 막걸리학교 수업을 들은 수강생 40명 중 20명가량이 참여한 행사였다.

    이서국의 왕궁터

    성현씨가 사는 화양읍 백곡리는 지형이 예사롭지 않다. 청도의 옛 중심인 화양읍을 남쪽에 두고, 청도의 진산인 남산과 그 뒤편의 화악산을 바라보면서 들판에 접시처럼 앉아 있는 마을이다. 야트막하게 경사진 언덕을 넘어야 마을 들머리가 나오는데, 마을 바깥 들판에서는 마을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을은 들판에서 건너오는 적을 기습하기 위해 쌓은 진지처럼 여겨졌다. 그 지형이 독특해 땅에 얽힌 얘기가 없느냐고 물었더니, 성현씨는 “이 마을이 이서국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이라고 했다. 이서국은 한때 신라를 공격해 위기에 빠뜨리기도 했던 삼한시대의 부족국가인데, 이 마을 안에 왕궁이 있었고 마을 둘레의 언덕이 백곡토성으로 불린다고 그는 전했다. 한번은 어떤 학자가 이 마을에 가짜 유물을 묻고, 수년 뒤 발굴 작업을 해 옛 이서국 유물이 나왔다고 호들갑을 떨었으나 마을 사람들의 증언으로 조작이 들통 나서 웃음거리가 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마을과 인연을 맺은 인물로 무오사화 때 참화를 입은 김일손(1464~1498)이 있다. 김일손 고택이 마을 안에 있고 그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뤄 살고 있다.



    성현씨가 막걸리의 참맛을 깨닫게 된 것은 귀촌한 첫해인 2006년이다. 그는 대학 다닐 적부터 술을 즐겼으나 막걸리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선배들이 냉면 사발에 막걸리를 가득 부어 ‘원샷’을 강요했고, 그렇게 마신 뒤에 속이 뒤틀린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귀촌한 첫해, 농사일을 배우고자 뒷집 아저씨를 따라 모내기에 나섰다. 대학교 농활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뒷집 아저씨가 모는 경운기를 타고 논으로 갔는데, 일꾼은 아저씨와 성현씨 둘뿐이었다. 그늘도 없고 눈에 띄는 사람도 없었다. 밀짚모자를 썼는데도 무논에 반사된 햇볕 때문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뒷집 아저씨가 소주를 한 잔 권했지만, 그는 마다했다. 미지근한 맹물만 마시며 힘겹게 하루 일을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경운기를 탔는데 마시다 남은 막걸리 반병이 눈에 띄었다.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보니 상하지 않은 것 같아서, 벌컥벌컥 마셨는데 그 맛이 환상적이었다. 그 순간 그는 불현듯 깨달음을 얻은 선승처럼, 막걸리 맛을 알게 됐다. 그 다음부터 그는 일할 때마다 막걸리를 챙겨 마셨다.

    막걸리 DOC

    내가 수확한 곡물이 내 몸으로 들어오는 짜릿함

    황성현씨가 술을 거르고 있다.

    성현씨의 집에 들어서자, 우리 일행을 반긴 것은 나폴리 피자였다. 그가 직접 빚은 막걸리로 반죽한 나폴레타나 피자(Napoletana pizza)다. 그는 나폴리 사람들이 나폴리 정통 피자를 다른 패스트푸드 피자와 차별화하고자 피자 DOC(농산품과 식료품 분야에서 법규로 통제하는 원산지 명칭으로 이탈리아에서는 DOC, 프랑스에서는 AOC, 유럽연합은 PDO로 표시한다)를 만든 얘기를 풀어놓았다. DOC에는 피자를 반드시 손으로 반죽할 것, 피자의 두께가 두껍지 않아서 손으로 쉽게 접을 수 있을 것, 반드시 장작 화덕을 사용해 400℃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구워 바삭하면서 쫄깃하며 부드럽게 만들 것 등이 명시돼 있다. 그의 이야기는 피자와 막걸리를 넘나들었다. 한국에 많은 막걸리가 있지만, 막걸리 품질 등급 표시는 없다. 낯선 동네에서 막걸리를 접하면 어떤 게 좋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영국 위스키, 프랑스 와인, 일본 청주는 △자국산 원료 사용 △엄격한 품질 관리 △제조 공정 표준화 △품질 등급제 △고급화를 위한 연구 개발 △홍보 마케팅 등이 효과적으로 이뤄져 세계적 명품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단다. “막걸리도 그 같은 길을 가야 한다. 나폴리 사람들이 나폴리 피자를 지켰던 것처럼, 막걸리도 DOC를 만들어 가치를 높여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성현씨는 묘한 이력을 지녔다.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했지만, 영상 자료와 책을 통해서 요리를 독학했다. 그리고 요리를 잘할 수 있게 되자, 무림의 고수를 찾아다니듯 음식의 고수와 고장을 찾아다니면서 음식을 배웠다.

    중국음식은 영화 속에 나오는 음식을 따라 만들면서 배웠다. 서울의 이름난 중국요리 학원을 다니기도 했고, 호텔 조리사들과 베이징(北京) 음식기행, 쓰촨(四川)성 음식기행 등도 다녀왔다.

    터키음식은 서울 터키문화원에서 진행하는 터키 음식 강좌를 아내와 함께 수강하면서 배웠다. 문화원에서 만난 터키인이 고향으로 돌아간다기에, “당신 집에 놀러가도 되겠느냐”고 물어 방문 허락을 받았다. 마침 그 터키인의 고향 마을이 터키 대표 음식인 케밥의 본고장인 부르사(Bursa)였다. 그는 가족과 함께 부르사로 날아가, 원조 케밥 식당, 케밥 재료를 파는 상점 등을 둘러보고, 그 터키인의 어머니에게 케밥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는 음식으로 세계와 소통하고자 했다.

    유럽음식도 여행을 다니면서 배웠다. 1994년, 1999년, 2000년, 2004년 유럽여행을 떠났는데, 그때마다 친구 혹은 현지인 소개로 가정집을 찾아다니면서 여러 문화권의 음식을 익혔다. 특히 2004년 가족과 함께 떠난 6개월간의 음식기행을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동서양의 음식을 혼합한 작은 식당을 유럽에서 열어볼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런데 영국 맨체스터에서 한 한식당 주인을 만나고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 식당 주인은 성현씨의 말을 듣더니 단번에 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왜냐고 묻자, 한국음식을 앞세우면 손님이 안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현씨가 “맛있으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그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음식은 유럽인에게 생소해서 호기심 많은 사람만 찾아온다는 것이다. “음식 장사는 문화 장사여서 한국음식을 앞세우려면 10년 넘게 버틸 자신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오래 버티다보면 뭐하는 곳인가 궁금해서라도 손님이 찾아온다. 버틸 힘이 없다면 타이 레스토랑이나 베트남 음식점을 하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성현씨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성현씨는 스페인의 음식점에서 3개월 정도 일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음식을 배우고자 중국집과 일식집에서 일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귀촌해 집을 지을 때 주방을 중심으로 한 건물을 지었다. 일자형 2층 건물인데, 1층에 아내와 동시에 일할 수 있는 넓은 조리대와 두 개의 개수대, 두 개의 화덕을 갖춰놓았다. 넓은 주방 공간은 거실을 겸하고 있으며, 2층에 서재와 침실이 있다. 손님이 찾아오면 1층 주방 탁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음식을 함께 해서 먹는다. 막걸리 빚는 법을 배운 뒤로는 막걸리독도 주방에 마련해두었다.

    내가 수확한 곡물이 내 몸으로 들어오는 짜릿함

    대나무에 용수를 걸어두고 막걸리 잔치가 벌어진 날을 기념하고 있다.

    “왜 막걸리 빚기를 배웠느냐”고 성현씨에게 물어보았다. “이웃과 나눠 먹을 수 있는 막걸리 한 독만 있어도 사람들을 부를 수 있습니다. 시골에 푸성귀가 많이 있으니 안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 고향 들판의 곡식으로 술을 담그는 것만으로도 흥분되는 일입니다. 내가 수확한 곡물이 내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 자체가 감격스러운 일이죠”라고 그는 답했다.

    막걸리는 마지막 술

    막걸리를 좋아하는 이들을 살펴보면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을 적지 않게 만나게 된다. 경기 고양시 일산의 한 의사는 암에 걸려 술을 끊었다가 완치돼 다시 술을 마시려고 막걸리학교를 찾아왔다고 했다. 성현씨의 집을 방문한 막걸리학교 학생 중에서도 심장 수술을 해서 술을 많이 마실 수 없고, 신장이 좋지 않아 금세 피곤해지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술을 끊는 것이 옳다. 그런데도 술을 곁들여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몹시 좋아한다. 분위기에 취해 노래 한 곡조 멋지게 부를 줄 아는 사람들이다. 사람과 어울리고자 술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나마 건강을 생각해서 그들이 타협한 마지막 지점이 막걸리다. 막걸리는 몸에 충격을 주지 않아서 즐길 만하다는 것이다.

    성현씨가 음식에 관심을 갖고 막걸리를 마시게 된 것도 건강 때문이다. 성현씨는 스물일곱 살 때 위암 판정을 받고 위 절제 수술을 받았다. 흡연과 나쁜 식습관 탓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위를 절제하고 나자 물 한 숟가락만으로도 과식한 듯 어지럽고 포만감이 들었다. 직장 생활을 하는 아내에게 요리하는 일을 모두 맡길 수 없었기에 음식을 스스로 해먹으면서 차츰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 기왕 먹을 바에야 제대로 알고 먹고 다양하게 먹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성현씨가 요리를 배우고 음식 여행을 떠난 것은 그 뒤의 일이다. 청도로 귀향해 살면서 농가맛집 ‘냠냠’이라는 음식공간을 마련했다. 농촌진흥청의 지원을 받아 살림집과 잇대어서 음식 스튜디오를 꾸렸다. 농가맛집은 농가에서 직접 생산한 농산물과 지역의 농축산물을 식재료로 사용한다. 음식 체험, 맛 체험을 하는 공간인데, 외국요리와 제철음식을 맛보면서, 음식 얘기를 함께 나누려는 이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성현씨는 막걸리 빚기를 배우기 전까지 집을 찾아오는 손님에게 술을 사서 제공했다. 와인이나 마트에서 사온 술이었다. 하지만 술을 빚으면서 “저 집에 가면 술이 있더라, 풋고추, 오이, 날된장으로 안주를 삼으면 되니 가보자”며 부담 없이 찾아오는 사람이 늘었다. 이웃과 더불어 사는 게 우리 농촌 문화가 아닌가. 막걸리가 있어 재미가 배가됐다. 정구지전(부추전)이나 배추전을 부쳐서 술을 나눠 먹는 분위기를 그 자신뿐만 아니라 찾아오는 이웃도 즐겼다. 그는 막걸리 덕분에 사람들과 소통이 쉬워지고 친근해졌다고 했다.

    성현씨는 막걸리를 농촌 생활의 필수품으로 여긴다. 막걸리를 맛본 친구가 함께 온 아내더러 막걸리 빚는 법을 배우라고 종용하는 것을 볼 때마다 그는 “네가 직접 빚어라!”고 말한다. 지금 농촌에는 부부만 사는 집이 많다. 부부가 밥을 각자 챙겨 먹는 게 문화처럼 자리 잡았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 안주를 만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현씨는 주방을 여자들의 전용공간으로 남겨두지 않고, 남녀가 공유하는 공간으로 만드는 데 막걸리가 기여하는 바가 클 것이라고 했다.

    음식번역가 많아져야

    성현씨는 ‘음식번역가’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는 외국문학을 번역하는 이나 외국음악을 소개하는 이는 있지만 외국음식을 해석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여긴다. 사실 한국은 외국 문화를 소개하는 데 게으르면서도 지나치게 편의적이다. 한국은 외국 문학의 번역에 가치와 무게를 크게 두지 않는데, 외국 음식을 ‘번역’하는 일도 마찬가지라고 그는 말했다.

    성현씨는 한국의 커피문화, 피자문화, 패밀리레스토랑 문화를 살펴보면 우스꽝스러운 점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커피는 냉동건조커피가 장악하고 있다. 신선한 커피콩을 볶아서 그 맛과 향을 우려내는 게 커피인데, 한국에서는 군용물자 같은 즉석커피가 주류가 되었다. 커피에서 단맛은 부수적인데, 단맛이 아니면 커피가 아닌 것으로 여기고, 팜유로 만든 유지를 커피에 섞어 마신다. 달고 기름진 커피가 판을 치다보니, 진짜 커피 맛은 온데간데없다. 이는 2박3일 한국에 머물면서 김치를 맛본 미국인이, 미국에 돌아가 칠리소스로 배추를 버무린 뒤 코리안 김치라고 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는 말했다.

    성현씨는 피자의 보편성을 잃어버린 한국 피자에도 아쉬움을 토로한다. 피자의 반죽은 바삭하면서도 부드러움이 살아 있어야 하는데, 강력분 밀가루만으로 딱딱한 피자를 패스트푸드화해서 내는 현실이 아쉽다고 했다. 반죽을 공장에서 만들어 유통시키다보니, 피자를 구울 때 기름을 많이 쓴다. 피자 위에 얻는 토핑도 그 성격이 변질돼 있다. 피자가 햄버거처럼 비만을 부르는 좋지 않은 음식으로 취급되는 것도 성현씨가 안타까워하는 대목이다. 이는 외래 음식을 받아들이는 제대로 된 음식번역가가 부재해 비롯된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성현씨가 막걸리 빚기를 배운 또 다른 이유는, 현재 짓고 있는 복숭아농사, 쌀농사와 막걸리를 서로 연계하고 싶어서다. 김치나 된장 담그듯이 쌀복숭아술을 빚고 싶단다. 그리고 ‘마심’이라는 행위를 여러 사람과 나누고 싶다고도 했다.

    복숭아꽃 핀 날에, 막걸리학교 동문들이 그의 집을 찾아 ‘막걸리학교 제1호 동문의 집’이라는 현판을 걸어두고 갔다. 이것을 본 이웃집 할머니나 우체부가 그 간판을 바라보며 그게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러면 그는 막걸리 한잔 건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며칠 전 막걸리학교 카페에 성현씨는 이런 글을 올렸다.

    “오늘은 막걸리를 사용해 아주 프랑스다운 빵을 만들어보았습니다. 반죽에서부터 발효, 성형, 굽기까지 재미있는 실험이었습니다. 막걸리의 느낌은 깊고 진합니다. 이른바 술빵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네요. 막걸리를 재료 삼아 이러저런 시도를 해보면 머리와 손, 입에 그 무엇이 다가오겠지요. 아무튼 좋습니다. 내일 아침 식사가 준비돼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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