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호

‘짝퉁’의 시대에 큰 울림 주는 문화인 공자의 ‘명품론’ 특강

  • 배병삼│영산대 교수·정치사상 baebs@ysu.ac.kr│

    입력2010-08-04 10: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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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자인이 품질보다 못하면 촌스럽고, 디자인이 품질보다 튀면 경박하다. 디자인과 품질이 조화롭게 빛나야 명품이다.” 파리의 패션쇼에서 만난 아르마니나 루이뷔통 경영자의 말이 아니다. 이는 공자가 2500년 전에 설파한 ‘문질빈빈(文質彬彬)’의 진리다. 공자는 이렇듯 품질과 디자인, 브랜드 파워와 고객 신뢰의 역학관계를 멋들어진 시어(詩語)와 비유로 풀어놓았다.
    ‘짝퉁’의 시대에 큰 울림 주는 문화인 공자의 ‘명품론’ 특강

    백화점에 전시된 명품 도자기.

    “어떤 회사든지 브랜드 위상을 높여야 한다고 쉴 새 없이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회사는 드물다. 이들이 실패하는 까닭은 브랜드와 회사 인지도를 혼돈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브랜드가 신뢰의 동의어이며, 예산 따위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지 못한다.” (켄 올레타 ‘구글드’, 452쪽)

    최근 언론보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이른바 ‘명품시장’ 규모는 5조원 대에 달한다. 지방의 중소도시에도 ‘명품매장 아웃렛’이 생겨나 성업 중이고, 중저가 명품을 다루는 백화점이 따로 생길 정도가 됐다. 프랑스 사람들이 바캉스를 떠난 뒤 동양인들의 긴 행렬이 파리 시내를 가득 메운 지는 꽤 오래됐다. 루이뷔통이니 구찌와 같은 세계적 명품 매장 앞이나 샹젤리제 거리의 화장품 백화점 앞에 북적이는 한국인과 일본인, 중국인의 행렬 말이다. 이런 현상들은 ‘명품’이라는 단어를 오늘날의 상징어로 꼽을 수 있는 조건이 된다.

    그런데 막상 ‘명품이란 무엇인가’를 따지고 들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인터넷에서 명품의 정의를 찾아보면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어떤 이는 수준 높은 품질을 꼽고, 또 어떤 사람은 ‘명품은 곧 브랜드다’라며 그 상표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어떤 이는 ‘비싼 게 명품’이라고 조롱하기도 한다. 어쩌면 명품이란 말 자체가 어떤 특정한 의미가 아닌, 그야말로 오늘날 소비자의 세속적 욕망을 두루 합산한 복합적 개념인지도 모른다.

    즉 요즘 우리 귀에 익은 명품이란 ‘진품, 명품’과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명칭에서 연상되듯, 장인이 오랜 시간 솜씨와 공력을 들여 만든 수제품(품격)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세속적 욕망의 대명사, 곧 사치품을 의미할 따름이라는 얘기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치품이라는 명칭에서 연상되는 천박함 또는 윤리적, 도덕적 사시(斜視)를 회피하면서도 고급품에 대한 선망을 드러내려는 대용언어로서 ‘명품’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셈이다.

    공자가 본 ‘명품의 조건’



    그렇다면 우리가 쓰는 명품이라는 말은 그 본래 뜻에 어긋난 것이다. 실제는 사치품에 불과한 것을 ‘명품’으로 잘못 호명하는 틈에 사기와 거짓이 끼어드는 것이리라. ‘짝퉁’이라는 말이 명품이라는 말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까닭이 여기서 분명해진다. 몇 년 전 가짜 명품 시계사건으로 떠들썩했던 일이라든지, 짝퉁 명품 가방들을 모아 불태우는 장면이 툭하면 TV 뉴스에 나오는 것은 오늘날 명품이란 말이 품고 있는 거짓과 허망함을 상징한다. 사치품을 명품이라고 잘못 이름 붙이고 또 이를 추종하다보면 가짜가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그러면 참된 명품이란 어떤 것일까. 아니, 이 땅 전래의 명품이란 무엇일까. 혹 ‘논어’에서 공자가 생각하는 명품의 조건들을 추출해볼 수는 없을까. 2500년 전 춘추시대에 어찌 오늘날과 똑같은 의미로서의 명품=사치품이 존재했으랴마는, 인간 욕망의 보편성에 기대어 따지자면 명품에 대한 공자의 인식도 헤아려볼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맹자’는 지금으로부터 근 2300년 전의 것이지만, 이 책에서 최고의 음식으로 꼽힌 곰발바닥(熊掌) 요리는 지금도 중국의 진귀한 음식으로 대접받는다. 또 당시 선망의 대상이던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駟)’는 오늘날의 최고급 자동차에 비유할 만하다. 즉 맛난 것 먹고 싶고, 편하고 빠른 차 타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시공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명품에 대한 욕망도 있을 법하다. ‘논어’를 읽으면서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는 말이 나오는 다음 문장을 볼 적마다 나는 ‘명품의 조건’을 떠올리곤 한다.

    공자 말씀하시다. “문(文·디자인)보다 질(質·품질)이 나으면 촌스럽게 되고, ‘문’이 ‘질’에 비해 튀면 부박하다. 디자인과 바탕 품질이 서로 조화롭게 빛날 적에야 명품이라 할 수 있다.”

    (子曰,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 논어, 6:18)

    나는 ‘문질빈빈’에서 문(文)을 요즘 식으로 ‘디자인’이라고, 질(質)은 ‘품질’(quality)로 해석하고자 한다. 문질빈빈이란 구절을 디자인과 품질이 적절히 조화를 이룰 적에야(‘빈빈’은 ‘빛나다’는 뜻이다) 명품의 세계가 열린다는 뜻으로 읽고 싶다.

    이 문장에는 공자의 미학적 범주들이 세 층위로 들어차 있다. 첫째는 ‘촌스러움의 세계’요, 둘째는 ‘부박한 세계’이며, 셋째는 ‘조화로움’을 뜻하는 빈빈(彬彬)의 세계다. 이 가운데 ‘빈빈의 세계’를 명품의 범주로 지목할 수 있으리라.

    첫째, 촌스러움(野)이란 디자인이 품질에 못 미치는 경우다. 사람으로 치면 시골 사람과 같다. 속은 깊고 또 어진 성품을 갖고 있건만, 그 깊은 심성을 조리 있게 표현하지 못해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모양새다. 의복으로 치자면 옷감은 질기고 또 보온성도 뛰어날뿐더러 오래 써도 닳지 않건만, 디자인이나 색상이 만족스럽지 못해 옷장 속에 내내 처박혀 있는 처지에 해당하리라.

    둘째, 부박함(史)이란 디자인은 반질반질해서 눈길을 끌지만 품질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다. 사람으로 치면 도회지 시장바닥의 약장수와 같고, 물건으로 보자면 모양은 그럴싸한데 막상 잉크가 술술 나오지 않아 만년필이라는 제 본래 기능을 하지 못하는 사이비 만년필에 비유할 수 있으리라.

    셋째, 문질빈빈이란 디자인과 품질이 함께 조화를 이룰 때라야 획득된다. 공자가 보는 명품의 세계, 곧 문질빈빈은 품질도 최고급이지만 디자인 역시 최상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공자가 이상으로 여기는 명품의 조건은 첫째가 최고급 품질, 둘째는 독특한 디자인, 그리고 셋째는 빈빈, 즉 품질과 디자인의 조화인 것이다.

    문채(文彩)보다는 질박함

    무엇보다 명품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품질이다. 제아무리 디자인이 훌륭하다 해도 품질이 최고급이 되지 않고서는 명품이 될 수 없다. 남성의류의 세계적 명품으로 알려진 아르마니의 창업자이자 CEO인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다음처럼 말하는 것은 의외인 듯하지만 실은 명품의 핵심 조건을 찌른 것이다.

    “최근 럭셔리 브랜드를 보면 너무 튀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게 있어서 럭셔리란 품질(quality)입니다.”

    품질이 명품의 기본 요건임을 웅변으로 증거한다. ‘렉서스’ 브랜드를 통해 명품으로 도약하던 도요타자동차가 최근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것도 품질에서 망가져버렸기 때문 아닌가.

    품질은 범주적으로 ‘기본’에 대한 강조와 직통한다. 세계적 화장품회사인 에스티로더의 브랜드 CEO 바비 브라운은 이렇게 말했다.

    “기본이 항상 이기는 것 같습니다. 제가 발견한 것은 아주 단순한 사실, 즉 모든 사람의 얼굴 피부 톤은 옐로(yellow)라는 것입니다. 얼굴이 옐로면 옐로 화장품을 바르는 게 자연스럽고 기본입니다. 저는 이 기본을 제품에 적용시켰고, 지금 내놓은 옐로 톤을 일관되게 지켰습니다.”(‘위클리비즈’)

    공자도 질, 즉 인품이나 사물의 품질을 중시한 흔적을 여러 곳에 남겼다. 가령 “옛 사람들은 ‘질박함’을 좋아했던 반면, 요즘 사람들은 ‘찬란함’을 좋아하더군. 나를 보고 고르라면 옛사람의 질박함 쪽을 선택하겠노라”(논어, 11:1)는 대목이 공자의 속마음을 잘 보여준다. 앞서 봤듯 명품의 이상적 조건이야 문채(文彩)와 질박함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지만, 정히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란다면 그는 문채보다 질박함, 즉 디자인보다 기본 품성(품질)을 선택하겠다는 뜻이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질을 강조한 대목은 또 있다.

    “예식은 사치하기보다는 검소한 것이 차라리 낫고, 장례는 매끄러운 것보다 슬픔이 절절한 것이 낫다.”(禮與其奢也, 寧儉, 喪與其易也, 寧戚. 논어, 3:4)

    사치한 예식은 문(文)에 치우친 것이고, 검소한 의례는 질(質)에 치우친 것이다. 장례식이 형식에 치중한 것은 ‘문’에 치우친 것이고, 부모 잃은 슬픔이 낭자한 것은 ‘질’에 치우친 것이다. 둘 다 지나친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문질빈빈이 불가능하다면 사치하거나 매끄러운 형식보다는 검소하고 설움이 질펀한 질박함을 선호하겠다는 뜻이다.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의 깊은 뜻

    꼼꼼한 공자 제자 자하(子夏)의 질문과 그 답변에서 명품의 첫째 조건인 질(바탕, 덕성)에 대한 강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자하가 공자에게 여쭈었다. “‘시경’에 이런 노래가 있습디다. ‘어여쁜 웃음에 귀여운 보조개. 예쁜 눈에 새까만 눈동자여. 흰 바탕에야 문채가 빛난다네’라고요. 이게 무슨 뜻인지요?”

    공자가 알려주었다. “그림(文)을 제대로 그리려면, 먼저 사람됨(質)이 올발라야 한다는 뜻이지.” (‘논어’, 3:8)

    어여쁜 웃음은 바탕 즉 질이요, 그걸 빛내주는 보조개는 문(디자인)이다. 보조개가 아름답다고는 하나 환한 웃음에 매력을 더하는 것이지, 보조개만으로 미추(美醜)를 분간할 수는 없다. 또 예쁜 눈, 서글서글한 눈매는 그 자체로 아름다움의 바탕을 이룬다. 그 서글서글한 눈매에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것이 새까만 눈동자(디자인)다. 이것은 곧 바탕(質)이 제대로 갖춰졌을 때라야 디자인(文)이 제대로 표출될 수 있다는 뜻이다.

    회화에서도 도화지(질)가 흰색 바탕일 때라야 작가가 원하는 그림(문)을 뜻대로 표현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자하가 질문한 ‘시경’의 노랫말에 대한 공자의 답변이 “그림을 제대로 그리려면 바탕, 곧 사람됨이 올발라야 한다”는 것이다. 즉 ‘기예는 인격이 닦인 다음의 일이다, 혹은 예술은 인격의 표현이다’와 같은 뜻을 천명한 것이다. 이로부터 전문적 화공이 그린 기술적인 그림보다 도리어 선비들의, 비록 솜씨는 서툴러도 뜻이 깃든 ‘문인화’를 높이 사는 전통이 수립된다.

    이 대목은 명품의 첫째 조건으로 ‘품질’을 주장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제아무리 아름답고 독특한 디자인을 가진 물건이라도, 즉 ‘보조개’가 제아무리 귀엽고 ‘눈동자’가 아무리 새까맣더라도, 해맑은 웃음과 고운 마음씨가 바탕에 없다면 그것은 참된 아름다움이 아니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3000년 전 ‘시경’ 속의 노랫말과 1960년대 대중가요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박춘석 작곡, 남진 노래)의 가사 의미가 흡사하다는 점이다. 그 노랫말을 생각나는 대로 옮기면 이렇다.

    새카만 눈동자의 아가씨

    겉으론 거만한 것 같아도

    마음이 비단같이 고와서

    정말로 나는 반했네.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한번만 마음 주면 변치 않는

    여자가 정말 여자지.

    ‘새카만 눈동자의 아가씨’라는 노랫말은 ‘시경’에 그려진 ‘어여쁜 눈에 새카만 눈동자’라는 대목을 연상케 하고, 또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라는 가사는 공자가 귀띔한 회사후소(繪事後素)라, ‘그림 그리는 일은 사람 됨됨이의 다음’이라는 의미와 곧바로 통하는 것이다. 수천년 전 인간의 미적 감각이 오늘날에도 두루 통하는 것으로 보아 어찌 인간이 진보한다고 할 수 있으랴 싶다. 그야말로 사람의 ‘질’은 변치 않는다고나 할까.

    詩 → 禮 → 樂

    오늘날은 디자인의 시대다. 이미 상품의 품질 면에서는 동서양이 다르지 않고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도 거의 사라졌다. 품질에 관한 한 ‘평평한 세계’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 있어 디자인의 비중이 더욱 커지지 않을 수 없다. 세계적 디자이너 아르마니가 지적하듯, “디자인을 구체화하는 데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 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절대 수용하지 않는다”(‘위클리비즈’)라는 강력한 디자인 고수의 원칙은 이 ‘디자인 시대’의 핵심적 가치를 잘 표현한 말이다.

    공자도 품질만 중시한 것은 아니다. 앞에서 본 ‘문질빈빈’이라는 말에 문채, 즉 디자인의 중요성이 이미 깃들어 있다. 주의할 것은 여기에서 문채=디자인이 단순히 미학적이거나 기술적인 차원만을 두고 이르는 말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쩌면 문채=디자인은 소프트웨어적인 것들을 총칭한다. 그런 점에서 문채는 창조적 사유, 예술적 사유와 관련된다. 베스트셀러 ‘생각의 탄생’의 저자인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미국 미시간 주립대 생리학 교수는 이렇게 지적한다.



    “예술 작품은 창조적 사고의 가장 좋은 도구라고 할 수 있어요. 예술은 ‘독특한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기존 사고방식을 뒤흔들어놓습니다. 예술이 수학, 과학, 어학만큼 인재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죠.”(‘위클리비즈’)

    공자 역시 그러했다. 공자에게 문채의 세계는 시(詩)와 음악으로 상징된다. 문채에 대한 강조, 우리식으로 하면 디자인· 표현에 대한 생각들을 ‘논어’ 속에서 찾아보자.

    무엇보다 그는 문채의 핵심적 도구로서 시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한 바다. 시는 본질적으로 공자의 정신, 또는 유교와 친화적이라 할 만하다. 그는 “정치와 외교에서 시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논어, 13:5)고 지적했고, 아들 백어(伯魚)에게 시 공부를 권하면서 “시를 모르면 말을 할 수가 없다”(논어, 16:13)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훗날 사서삼경 가운데 중요한 텍스트가 된 ‘대학’과 ‘중용’ 그리고 ‘맹자’에서는 논리 전개를 위해 필수적인 전거의 대부분을 ‘시경’에서 채용했다. 예컨대 잘 알려진 ‘전전긍긍’‘연비어약’ 같은 구절들이 모두 시어다. 유교와 시의 친화성은 과거시험에서 시작(詩作)을 강조한 것으로도 나타났다. 시가 세계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안목을 간략하면서도 깊숙하게 테스트할 수 있는 장르였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시는 단순히 문학 장르의 한 요소가 아니었다. 실은 모든 문화, 디자인, 표현성의 총아였다.

    공자 말씀하시다. “얘들아. 어찌 시(詩)를 배우지 않을쏘냐! 시는 흥을 돋우고, 세상 보는 눈을 갖춰주고, 함께 어울려 사귀는 기술을 가르쳐주고, 또 원망을 표현하는 도구이기도 하느니라. 가까이로는 부모를 모시고 멀리는 국가에 봉사하게 만드는 기술이며, 나아가 날짐승, 들짐승, 풀과 나무와 같은 자연 생태의 이름까지도 모두 시를 통해 알 수 있지 않으냐!” (논어, 17:9)

    이처럼 시는 가정생활의 지침, 정치의 통치기술, 외교관계의 표현술, 사회적 사교술, 대정부 비판의식, 나아가 동식물에 대한 지식까지 담긴 백과사전과 같은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유교에서 시는 문학 장르로서만이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문화의 형식, 곧 문(文)의 핵심적 도구가 된다. 곧 공자에게 ‘표현의 세계’는 시에서 비롯된다.

    “시(詩)에서 몸을 일으키고, 예(禮)에서 바로 서며, 악(樂)에서 사람됨을 완성한다.”(논어, 8:8)

    시, 예, 악은 문질 가운데 문(디자인, 표현)의 핵심적 요소들이다. 나아가 공자는 스스로가 문화를 즐겨 배우고 익히는 학습자이기도 했다. 특히 음악은 그 자체로서 인간의 자아를 드러내는 표현도구다. 음악 속에서 인간은 자유와 자연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공자가 제나라에서 고전음악 소(韶)에 심취하여 석 달 동안 고기를 먹어도 그 맛을 모를 정도였다. 말씀하시길, “음악의 세계가 이런 경지에까지 이를 줄은 여태 알지 못했구나!” (논어, 7:13)

    공자가 시와 음악의 힘을 깊이 이해한 사람임은 꼭 유의해야 한다. 그러니까 공자에게 시와 음악은 문의 세계, 즉 디자인된 문명의 중요한 요소였으며 그는 이를 체득하기 위해 대단한 노력을 기울인 ‘문화인’이었던 것이다.

    호피와 개가죽의 차이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 ‘문채=디자인=창의적 사유’의 대명사는 자공이다. 그는 큰 재산을 모은 재력가이자, 또 외교관으로서 천하의 정세를 바꾼 정치가이기도 했다. 공자도 그를 두고 ‘언어에는 자공’이라고 하여 말과 표현의 달인임을 인정할 정도였다. 그가 다음처럼 질(하드웨어)보다 문(소프트웨어)을 강조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대부 ‘극자성’이 말했다. “군자는 질(質)만으로 족한 게야. 문채는 쓸 데 없는 거라고!”

    자공이 말했다. “안타깝도다. 극자성의 주장이여! 급행 마차도 그의 혀를 따르지 못하겠네.

    ‘품질’이 바탕이 될 때라야 ‘문채’가 아름답고, ‘문채’는 역시 ‘품질’과 조화를 이뤄야 하는 법. 호랑이와 표범의 화려한 가죽털인들, 그 밑바탕이야 개나 돼지의 가죽과 다를 게 뭘꼬!”(논어, 12:8)

    춘추시대는 전대미문의 폭력과 광기의 세기였다. 근거 없는 루머와 잡설들이 횡행하는 시대이기도 했다. 공자도 시대적 병폐 가운데 특별히 “날카로운 입이 나라를 뒤집어엎는 것을 미워하노라”(논어, 17:16)라고 하면서 진저리를 칠 정도였다. 악성 댓글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오늘날 우리 세태와 흡사한 데가 있었다.

    이에 당시 정치가 극자성도 표현력(말주변) 좋은 것은 필요 없고 묵묵한 내면의 힘, 곧 인품이 정치가의 핵심 요건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군자는 질만으로 족한 게야. 문채는 쓸 데 없는 것”이라고 단정적인 발언을 한 까닭이다. 말만 번지르르한 세태를 극복할 진중한 인격자를 기다리는 시대적 바람이 들어 있는 말이다.

    공자의 또 다른 제자 자하라면 극자성의 주장에 찬성했을 듯싶다. 자하 역시 “소인배들의 잘못은 언제나 문(文·표현욕구)에서 비롯된다”(논어, 19:8)라고 지적한 바 있기 때문이다. 우리 방식으로 당겨 와서 해석하자면, 자하와 극자성은 디자인은 중요하지 않고 상품의 질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입장인 셈이다. 상품의 질이 좋으면 소비자는 결국 사게 마련이라는 우직한 품질제일주의자들이라 하겠다.

    그러나 자공은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문화의 힘, 달리 말해서 ‘디자인 능력’에 달려 있다고 봤다. 문(文)이라는 글자의 기원이 몸에 새기는 ‘문신’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은, 문화-문명이 가진 표현(expression)의 의의를 잘 드러낸다. 자공은 인간문명, 즉 인문(人文)이란 사람마다 문신이 각각 다른 것처럼 각자의 독특성, 즉 개성을 표현하는 행위로 본 것이다. 물론 자공도 인격 혹은 제품의 질을 도외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디자인은 원단과 같은 값어치를 갖고 있다는 것이 자공의 생각이다.

    여기서 그가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가져온 비유의 맛을 한 번 보자. 호피, 즉 호랑이 가죽이 비싼 까닭은 가죽에 드러난 털의 무늬(文) 때문이다. 만일 호랑이나 표범의 털을 깎아내 버린다면, 그 바탕(質)의 가죽이라야 털을 벗겨낸 개나 돼지가죽과 다를 바가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무늬(디자인)가 어찌 바탕만큼 못하랴, 아니 오히려 바탕보다 더 중요하지 않으냐는 것이다. 실제로 호피 가격과 개털 가죽의 차이는 털을 벗겨낸 가죽들의 가격 차이보다 훨씬 크다. 그 차이란 곧 무늬(디자인)의 값어치와 다름없다. 즉 호피 가격은 오로지 호랑이 털의 무늬 값일 따름이다.

    요컨대 ‘논어’에서 개진되는 명품은 문채(디자인, 표현)와 질(품질, 인품)이 더불어 조화를 이룬 상태가 이상적인 것이다. 이는 오늘날 명품의 조건과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2500년 전의 공자가 명품의 세 번째 조건으로서 ‘브랜드의 가치’를 제시했다면 믿을 수 있을까.

    ‘브랜드 파워’ 절감한 공자

    우리는 공자의 사상을 따로 ‘정명(正名)’이라고 개념화하는 것이 낯익다. 이를테면 군군신신(君君臣臣) 부부자자(父父子子)라,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것’(논어, 12:11)을 정치의 핵심으로 지적하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여기서 ‘임금의 임금다움’이란 곧 브랜드 가치에 대한 공자의 깊은 이해로 해석해도 좋다. 정명은 오늘날의 ‘브랜드 파워’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브랜드는 명(名)이요 파워는 정(正)이다. 공자는 이름(브랜드)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했다.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죽을 때조차 그 이름(名)이 일컬어지지 않음을 병통으로 여긴다.” (子曰 “君子疾沒世而名不稱焉.” 논어, 15:20)

    ‘죽을 때조차 이름이 일컬어지지 않음을 병통으로 여기는’의 ‘이름(名)’이란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라던 속담 속 호랑이 가죽과 다를 바 없다. 어쩌면 앞서 자공이 인식한 호랑이 가죽과 표범 가죽의 중요성은 그 자체로 디자인적 특성과 더불어 브랜드의 속성을 함께 갖추고 있었던 듯하다. 즉 자공이 털을 벗겨낸 개 가죽과 호랑이 가죽에 차이가 없다고 했을 때 그는 이미 호랑이의 정체성으로서 호피라는 ‘브랜드’의 중요성을 함께 인식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직한 무사 출신 제자 자로만큼은 브랜드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듯하다.

    자로가 말했다. “지금 위나라 군자가 선생님을 총리로 삼는다면 무엇을 급선무로 삼으시겠습니까?”

    공자 말씀하시다.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아야지(正名)!”

    자로가 말했다. “아이고, 이렇다니깐, 우리 선생님의 고지식함이! 이 상황에서 어떻게 이름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공자 말씀하시다.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이놈! 군자란, 모르면 입 닥치고 배우려 들어야 하거늘! 이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소통될 수 없고, 말이 소통되지 못하면 일을 해낼 수 없고, 일이 이뤄지지 않으면 문명을 이룩할 수 없는 법. 그러므로 정치가란 ‘명분이 바르면’(正名) 반드시 ‘말이 소통되도록 해야 하고’(言順), 말이 소통되면 또 반드시 ‘일을 성취해야 하는 법’(事成)이다!”(논어, 13:3)

    공자가 춘추시대 대혼란의 원인을 이름, 곧 브랜드의 문제로 보고 있음을 드러낸다. 사회생활, 사업관계, 그리고 정치세계는 모두 말과 이름의 세계, 다시 말해 브랜드 위에 구축된 세계임이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공자가 제시한 정명(正名)과 언순(言順) 그리고 사성(事成)의 단계들, 즉 ‘정확한 이름’‘언어의 소통’‘업무의 성취’라는 연속된 관계의 밑자락에는 ‘이름(名)과 언어(言)’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공자의 국가경영론이 ‘브랜드 파워’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가경영자가 제 이름에 합당한 행위를 남김없이 행하는 것으로부터 올바른 경영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이름과 말, 그리고 업무 성취 간의 이러한 관계는 결코 옛 춘추시대에 국한된 것일 수 없다. 아니, 오히려 경영의 시대인 오늘날에야말로 이름과 말의 바탕 위에서라야 대화와 거래가 순조롭게 소통될 수 있고, 또 대화가 순조롭게 통해야 비즈니스가 제대로 성사될 수 있을 테다(계약서에 맞게 물건이 오고 가지 않아서야 어디 비즈니스를 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오늘날도 제반 사업의 바탕 자리에는 이름(名), 곧 브랜드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브랜드란 무엇일까. 김춘수의 시 ‘꽃’이 말해주듯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는 것이리라. 요컨대 꽃이 꽃답지 못하면, 꽃이라는 이름은 헛된 것이다. 그것은 실제를 벗어난 쭉정이 브랜드일 뿐이다(오늘날 ‘명품’이란 이름처럼!). 그렇다면 브랜드의 힘은 역시 ‘신뢰’에서 비롯하는 줄을 알겠다.

    브랜드는 신뢰를 먹고 자란다

    공자가 가장 중시하는 사회적 가치가 바로 신뢰(信)다. ‘논어’를 펼치면 신뢰라는 단어를 숱하게 발견할 수 있다. 그 가운데 한 가지만 예로 들어보자.

    사람으로서 신뢰(信)가 없다면 그를 사람이라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큰 수레에 끌채고리(·#53687;)가 없고, 작은 수레에 연결고리(·#53687;)가 없다면 그 어찌 움직일 수 있으랴!(논어, 2:22)

    여기서 공자 사상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신뢰를 명백히 강조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공자가 꿈꾸는 세계는 한마디로 신뢰사회(fiduciary society)라고 이름 붙일 만하다. 그는 언어를 실천으로 매개하는 신뢰(信)와 언행을 스스로 반성하는 성찰(忠)에 특히 중요성을 두고 강조했다(“主忠信.” 논어, 9:24).

    요컨대 신뢰, 즉 내 이름에 대한 값어치를 유지하는 것, 이것이 브랜드의 조건이다. 이를테면 프라다는 프라다답게, 오메가는 오메가답게, 이 ‘답게’가 명품의 ‘명’(名)을 채우는 내실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머리맡에 게시한 인용문 가운데 특히 ‘브랜드가 신뢰의 동의어이며, 예산 따위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진리다. 세계적 명품 루이뷔통의 CEO인 이브 카르셀은 이를 다음처럼 강조한 적이 있다.

    “우리 제품은 지금까지 그 흔한 세일 한 번 하지 않았지요. 다른 명품업체는 그해에 남은 물량을 세일을 통해 처분하지만 우리는 그냥 폐기 처분합니다. 모조리 없애 버리죠.”(박종세, ‘21세기 경영대가를 만나다’, 김영사, 64~65쪽)

    ‘차라리 상품을 태워버릴지언정 세일은 하지 않는다’라는 카르셀의 말에서 브랜드=신뢰의 등식에 대한 치열한 욕망을 읽어낼 수 있다.

    ‘짝퉁’의 시대에 큰 울림 주는 문화인 공자의 ‘명품론’ 특강
    裵 柄 三

    1959년 출생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경희대 대학원 정치학과(정치학 박사)

    한국사상사연구소 연구원

    現 영산대학교 학부대학 교수

    저서:‘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한글세대가 본 논어’ ‘풀숲을 쳐 뱀을 놀라게 하다’ 등


    결론적으로 우리는 공자에게 명품의 조건이란 품질과 디자인과 브랜드, 그리고 이 세 요소의 조화(빈빈)를 통한 신뢰 획득과 그 유지에 달려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이는 그저 옛날이야기만이 아니라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언제 어디서나 통용되는 명품의 참된 조건일 것이다. 오늘날 속살 없이 횡행하는 명품이라는 말의 속살을 채우는 내용물도 이 네 가지(품질· 디자인· 브랜드·신뢰)를 벗어나지 않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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