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호

‘패션 코리아’를 위한 여섯 가지 제언

  • 입력2010-07-30 17: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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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부가 패션산업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관련 업계에 활기가 돌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6월 초, 2015년까지 390억원을 들여 패션 문화 산업을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창조적인 디자이너 패션에 예산을 집중하고, 한국 패션을 대표하는 통합형 브랜드(Umbrella Brand)를 구축해 해외 진출을 지원하는 등 산업 선진화에 힘을 쏟겠다는 방침이다. 이에 발맞춰 각 지방자치단체에서도 패션을 테마로 한 행사를 잇달아 개최하는 등 사회 전반적으로 패션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고 있다.
    • 바야흐로 찾아온 한국 패션의 부흥기에 우리 패션산업이 한 단계 성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패션기자, 대학교수, 현직 디자이너, 해외 패션 전문가 등 패션산업 내부에서 ‘한국 패션의 발전’을 모색해온 여섯 명의 전문가가 각각의 관점에서 한국 패션의 내일을 위한 제언을 보내왔다. <편집자 주>
    ‘패션 코리아’를 위한 여섯 가지 제언
    1 패션기자의 제언

    >>> “다양성이 존재하는 세상, 오! 패션 코리아”

    패션이 ‘일’과 ‘존재’인 기자이자 쇼퍼홀릭인 나의 시선으로 보면, 21세기 대한민국은 둘로 나뉜다. 패션으로 가득한 세계와 패션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

    패션이 ‘있는’ 코리아 서울은 뉴욕, 파리, 밀라노, 런던과 같은 시간대에 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의 컬렉션이 실시간으로 생중계되고, 트위터로 셀린느의 새 수석 디자이너 피비 필로에게 “마지막 옷이 죽여준다”고 축하 인사를 보내면, 바로 그 신상이 청담동 매장에 걸린다.

    실제로 겨울과 여름, 유럽의 컬렉션에 참석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비행기를 탄다. 파리나 밀라노에서 한국의 패셔니스타들은 마치 청담동에서 마주친 것처럼, 양손에 들린 쇼핑백을 서로 서로 스캔해, 혹시 자신의 쇼핑리스트에서 빠뜨린 것이 없는지를 챙긴다. 쇼퍼홀릭의 입장에서 우리는 완벽한 세계화를 이루었다.



    패션으로 꼼꼼히 네트워킹된 세계에선 하얀색 셔츠의 소재, 박음질, 가슴 부분의 주머니 장식이 취향, 경제적 상황, 정보력, 미적 센스, 상대에 대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이 털어놓는다. 그러니까 이런 말도 가능하다.

    “난 그 사람이 싫어요. 아이보리 컬러의 바지에 검은색 슬립온 구두를 신었기 때문에요.”

    이곳에서 패션은 열렬한 숭배의 대상이다. 사람들은 검은색의 미묘한 차이를 두고도 격렬한 논쟁을 벌인다. 패션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이다. 미드 ‘섹스앤더시티’의 대사를 그대로 옮기자면, 이곳 사람들에게 ‘스타일은 새로운 신’이다.

    패션, 가득하거나 아예 없거나

    ‘패션 코리아’를 위한 여섯 가지 제언

    2009 서울 패션위크에서 열린 패션쇼. 유명 연예인 등 많은 관객이 모여 패션 경향을 살폈다.

    여기서 78° 쯤 기울어진 우주의 다른 공간에 패션이 존재하지 않는 대한민국도 있다. 이곳에선 단지 ‘옷을 입다’ 와 ‘옷을 벗다’가 있고, ‘신발을 신다’ 와 ‘신발을 벗다’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0과 1로 이뤄지는 디지털적 세계다. 예를 들어, 저녁에 패션 피플인 친구들과 모임이 예정된 직장 여성이라면 패션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내리는 친구들을 의식해 일주일 전부터 최신 트렌드 정보를 수집하고 당일 새벽부터 2시간 동안 혼자 20여 벌의 옷을 소화하는 패션쇼를 치른 뒤 무심한 듯 ‘에지 있는’ 차림으로 출근할 것이다.

    그러나 회사에서 그녀의 스타일에 대해 코멘트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그녀의 사무실, 패션이 없는 세계에서 패션은 입거나, 벗거나 둘 중 하나만 의미가 있다. 그녀가 그 유명한 블랙 미니 드레스를 선택함으로써 패션의 역사에 대한 이해와 다소 도도해 보이려는 욕망을 말한다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한 사람의 존재가 그가 외부로 표출하는 행동의 총합이라면, 패션은 분명한 행동이지만, 패션이 없는 곳에서 그것은 침묵이다.

    물론 이곳에도 패션이란 단어는 존재한다. 그러나 패션이 없는 세계에서 패션이란 ‘사치’ ‘허영’의 다른 말일 따름이다. 좋게 봐줘야 ‘비정상적인 열정’이며, 종종 ‘된장녀’의 전매특허로 통용된다. 그래서 아무리 패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도, 공공연히 옷이나 스타일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무식함과 무개념으로 보일까 두려워한다.

    여기까지. 이런 시각이 패션중독자가 세상을 보는 흥미로운 시선일 따름이라고 말할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나마 매우 너그러운 자세라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패션이 존재하거나 혹은 아니거나’의 분류법은 생각보다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디자이너가 자신의 패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통망인 백화점은 패션으로 가득한 곳처럼 보이지만, 패션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백화점엔 오로지 상품만 존재한다. 우리의 백화점들은 자리를 빌려주고 자릿세를 받는 부동산업과 비슷하다. 매출이 떨어지는 순서대로 방을 빼야 한다. 그러므로 백화점에 들어가려면 가장 대중적인 상품을, 가장 이윤이 많이 남는 방식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 창의적인 디자인보다는 해외 디자이너의 컬렉션을 베끼는 순발력과 뻔뻔함이 환영받는다. 백화점이 반기는 VIP는 비싸기 때문에 지갑을 여는 손님들이다.

    패션이 필요한 까닭

    패션 정책을 수행하는 정부의 시선에서 보자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오로지 패션’이거나 ‘패션은 없다’로 나뉜다. 어느 부에서 패션은 오로지 단가와 수량으로 계산되는 수출 상품이고, 어느 부에선 옷이 아니라 추상화처럼 난해해야 패션이라고 쳐준다. 또 다른 어느 공무원이 보기에 패션이란 외국 관광객을 끌어 모으기 위한 길거리 서커스와도 같다. 어느 쪽이든 한국 패션이 이제 세계로 진출해야 하며, ‘글로벌’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 앞에서는 누구도 패션이 사치라고 말하지 않는다. 패션은 고부가가치 수출 역군, 문화적 자산, 관광자원으로만 인정받는다. 전반적으로 패션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패션은 아름다움에 대한 열정이고, 몰개성한 세상에 대한 저항이고, 순수한 일탈이라고 생각하며 진심으로 패션을 근심하는 이들이 있다. 한국의 패션이 ‘베끼기’에서 벗어나 자기 것을 찾아내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난 생각한다. 그들은 예술가처럼 존경받지도 못하고, 기업가처럼 셈이 빠르지도 않으며 대부분은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천재 디렉터 존 갈리아노처럼 세계적 명성을 얻지 못하겠지만, 슈트의 절묘한 어깨 각에서 감동을 받는다. 남과 같은 것을 만드느니, 마루를 깨끗이 닦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패션이 계급적 구별짓기라는 말을 부인할 순 없다. 그러나 패션을 통하지 않은 구별짓기는 얼마나 잔인한가. 아름다운 것을 창조하려는 열정을 전쟁과 돈벌이에 쏟아 부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난폭했을 것이다. 패션은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세상에 대한 유머러스한 은유다. 패션이 있는 세상은, 그래서 더 재미있다. 대한민국이 ‘패션 코리아’가 되기를 바라는 이유다.



    김민경 동아일보 주간동아 차장 holden@donga.com

    2 패션디자인학과 교수의 제언

    >>> “해외 패션을 향한 선망과 관심을 국내 디자이너에게”

    최근 중앙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패션을 문화콘텐츠로 보고 다양한 육성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직접적인 일자리 창출에 대한 기대뿐 아니라 고부가가치적 특성을 가진 패션산업에 대해 새로운 가능성을 인정해서일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방법에 대해서는 생각할 여지가 많다.

    패션에 관심 있는 국가들은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일반적인 선진국 혹은 문화 강국이다. 이들 국가가 패션산업을 지원하는 방식은 철저히 신인 중심의 개인 단위로 이뤄진다(물론 전체 패션산업에 대한 지원도 있겠지만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하에서 개별 산업에 대한 지원이 쉽지 않지만 신인에 대한 지원은 각국이 암묵적으로 양해하는 사항이다). 이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신인을 지원하는 것이 산업 전체의 발전 가능성을 위해 필요한 것임은 두 말할 나위 없다. 물론 지금 우리나라에도 신인 패션디자이너를 위한 지원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문제점 또한 많은 것이 사실이다.

    신인 발굴과 육성

    현재 우리나라에서 신인에 대한 지원은 철저히 단발성으로 진행된다. 대부분 공모전을 통해 우승자에게 현금(상금)을 주는 방식이다. 신인에게 현금과 유학 기회 제공은 달콤한 당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단 한 번의 공모를 통해 단 한 명에게만 많은 혜택을 주는 방식보다는, 다수에게 시장의 판단을 거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한국 패션의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

    패션의 속성상 단 한 번 성공을 이룬 재능이 평생 유지될 수 없다. 디자이너는 꾸준히 자신의 능력을 계발해야 하고, 평생 1년에 두 번(일반적으로는 봄·가을의 컬렉션) 이상 자신의 역량을 시장과 사회로부터 평가받아야 한다. 신인을 위한 지원은 현금이 아니라 자신들의 역량을 시장에서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가 돼야 한다.

    패션의 가치는 이미지에서 나온다. 1만원짜리 티셔츠와 50만원짜리 티셔츠의 차이는 재료가 아니라 어떤 콘텐츠를, 누가 만드는가다. 그것이 디자이너의 명성이고, 브랜드의 가치다. 하지만 시장에는 이미 잘나가는 디자이너가 차고 넘친다. 그 속에서 신인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신인에게 ‘기회’가 필요한 건 이 때문이다.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를 향한 관심의 10분의 1이라도 우리나라 패션 신인에게 보여주자. 그 관심이 신인들이 배를 곯아가며 옷을 만들 수 있게 하고 미래를 꿈꾸게 하는 최소한의 영양분이다.

    그러면 그 관심은 어떻게 만들까? 일반인과 언론의 관심이 필요하다. 대중의 관심은 디자이너를 천재로도 범재로도 만들 수 있다. 언론은 한국 패션의 이미지를 만들고 이미지는 시장의 관심을 만든다. 언제까지 외국에서 멋지게 성공한 한국 출신의 디자이너만 기다릴 것인가? 우리나라 언론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한국 디자이너와 브랜드가 해외 언론에서 주목받을 수 있을까? 한국 축구를 주목하는 세계의 시선은 오직 선수들의 뛰어난 실력만이 그 이유일까? 2002년에 보여준 전 국민의 붉은 응원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아닐까?

    뉴밀레니엄 시대를 맞아 새로운 문화강국으로 부상하고자 한 영국 정부가 선택한 중요한 이벤트 중 하나는 테이트 모던 뮤지엄(Tate Modern Museum) 개관이었다. 테이트 모던 뮤지엄을 개관하기 1년 전부터 영국 미디어들은 현대미술에 대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보도했다. 한 방송사는 매주 금요일 주요 시간대에 ‘This is modern art’라는 프로그램을 편성하기도 했다. 디자인을 전공한 필자가 보기에도 매우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일반 대중이 현대미술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진 프로그램이었다. 이런 노력 덕분이었는지, 테이트 모던 뮤지엄이 문을 여는 날 영국 전역 및 유럽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템스 강변을 가득 메우고 입장을 기다렸다. 이후 ‘테이트 모던’은 세계적으로 현대미술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됐다.

    우리의 신인 디자이너들에게도 그들의 패션이 시장에서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오 패션 코리아’가 우렁차고 건강한 울림이 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정부는 홀로 한국 패션을 지원하기보다, 한국 미디어와 한국의 패션 팬들이 신인 디자이너를 시장에서 늘 만날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한다. 한국 신문과 잡지, TV에서 한국 패션디자이너와 외국 패션디자이너를 동등한 비중으로 다룬다면, 해외의 팬과 미디어도 ‘패션 코리아’를 인정하지 않겠나. 단순하지만 이보다 확실한 지원은 없을 것이다.

    정재우 동덕여대 패션디자인전공 교수 rhuhan@dongduk.ac.kr

    3 현직 디자이너의 제언

    >>> “천재 디자이너가 날아오를 공간 만들어라”

    한동안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꿈은 CD, 즉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다. 막내 디자이너로 입사해 10년 지나 팀장 되고, 또 실장 되고 불혹의 나이를 훌쩍 넘긴 뒤에야 맡게 되는 정통 디렉터가 아니라, 젊은 나이에 천재성을 인정받아 한 브랜드의 디자인에서 커뮤니케이션까지, 브랜드 미학과 관련된 모든 일을 총괄하는, 그런 꿈의 자리 말이다. ‘꿈도 크다’며 웃어넘길 일은 아닌 것이, 1957년 크리스티앙 디오르 사망 후 디오르 하우스에서 혁명적인 라인을 선보인 젊은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이나, 20대부터 클로에, 펜디를 디렉팅하고, ‘올드 쿠튀르’였던 샤넬에 가죽과 데님, 골프공만한 진주를 달아 젊음의 생기를 불어넣은 칼 라거펠트 등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유럽의 전통은 있되 진부하던 패션하우스들이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된 중심에는 항상 디자인학교를 졸업한 지 오래지 않은 악동 CD들이 있었다.

    서구 패션 선진국의 ‘스타 만들기’

    대학 졸업 후 5년 만에 페리엘리스의 수석디자이너를 맡아 하이(high) 패션에 그런지(grunge)라는 하위문화를 접목시킨 마크 제이콥스는 프랑스의 고색창연한 브랜드 루이비통에서, 비슷한 경력의 톰 포드는 이탈리아의 구찌에서 마술을 부렸다. ‘뉴룩’을 재해석한 디오르의 존 갈리아노, 파리의 전통을 가진 클로에에 영국 로큰롤을 가미한 스텔라 매카트니, 휴면 상태의 버버리를 깨운 크리스토퍼 베일리, 그리고 지방시를 되살려낸 알렉산더 매퀸까지 숱한 디자이너가 학교 졸업쇼에서 주목받고 20대에 한 브랜드를 책임지는 CD가 됐다.

    사실 디자인학교 졸업 패션쇼에 에디터, 바이어 등 패션계 거물들이 모이고, 그 곳에서 인재가 발굴되는 현상은 우리로서는 꿈같은 이야기다. 유통시스템의 차이 때문이다. 서구의 유통회사들은 디자이너 컬렉션을 직접 사서 판매하기 때문에 패션하우스나 바이어들로 하여금 신진 패션 천재들을 발굴하고 그들을 패션계의 큰 별로 만드는 일에 앞장서게 한다. 패션계는 프랑스의 패션하우스들이 젊고 훈련 안된 영국 디자이너들의 재능을 자본화하는 방법을 보면서 교훈을 얻었고, 이어 영국을 비롯해 프랑스, 벨기에의 디자인학교나 신진들의 컬렉션에서 인재를 발굴하는 일에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스타 만들기’에는 기자, 디자이너, 기업을 비롯해 크고 작은 매장을 소유한 바이어들, 거대 백화점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참여한다. 예를 들면, 유명한 에디터들이 졸업 작품을 구매하거나 신진 컬렉션을 밀어주고, 삭스피프스애비뉴, 하비 니콜스 등 고급백화점과 편집매장, H·M 같은 매스마켓 브랜드도 졸업 작품이나 신진컬렉션을 전시 또는 판매해준다. 또 디젤, 망고 같은 글로벌 패션 회사가 주최하는 대형 공모전은 신진 디자이너들의 이름을 전세계에 홍보한다. 패션기업의 인재발굴사업은 디자인학교와의 산학프로젝트, 인턴십 제도에서 시작한다. 산학프로젝트 결과물을 회사가 실제로 적용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수상자를 선정하고 장학금을 주면서 키운다. 짧게는 한 학기, 길게는 1년으로 이어지는 인턴십 제도는 학생들이 졸업과 동시에 개인 컬렉션을 가질 수 있도록 준비하게 한다.

    “선생님이 미안하다”

    우리나라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패션계 지원에 나서고 있는 최근의 현상은 무척 반갑다. 그러나 패션학도들을 육성하려면 무엇보다 패션 기업과 유통 회사가 나서야 한다. 패션 기업 차원에서 봐도 대담한 신진 발굴은 내수시장 전망이 점점 불투명해져가는 현실에서, 논리보다 마술이, 경험보다 감각이 통하고, 기능보다 이미지로 값이 매겨지는 패션산업의 특수성을 현명하게 이용하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10꼬르소꼬모, 데일리프로젝트 등 서구식 유통망으로 운영되는 편집매장에서 조금씩 시도되고 있는 신진 디자이너 지원 사업이 백화점 등 대형유통사로 확대돼 우리도 졸업쇼에서 스타가 탄생할 수 있게 하는 전략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학창 시절 CD가 꿈이었던 졸업생들을 학교에서 다시 보는 일이 잦아졌다. 재학 중에 큰 규모의 공모전이나 학교 행사에서 영광스러운 상을 받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굴지의 패션 대기업에 다니다 자발적 백수가 된 녀석들이다. 그들이 하는 일은 국제 콘테스트 준비, 유학 준비, 개인 컬렉션 준비다. 그들의 재능과 열정을 풀어내기에 한국의 내셔널 브랜드는 너무 좁았던 것 같다. 마땅한 대안이 없기에 추천하는 취업이지만 글로벌하고, 끼가 넘치는 그들에게 ‘무조건 견디다보면 언젠가 너의 장을 펼칠 날이 올 것’이라는 진부한 상담을 해주는 것이 이젠 고역스럽다. 독립을 선언한 제자들에게 국제 콘테스트와 해외교육기관에 대한 정보를 전해주고, 국내 컬렉션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터주는 등의 단기적인 지원은 하고 있지만, 그들에게 날개를 달아줄 장기적 지원 방법이 아직까진 막연하다.

    박주희 디자이너, 삼성디자인학교(SADI)패션디자인학과 교수 zenn95@hanmail.net

    4 패션산업 전문가의 제언

    >>> “내수시장에 안주 말고 세계로 진출해야”

    ‘패션 코리아’를 위한 여섯 가지 제언

    H&M, 자라, 유니클로 등 SPA들은 세계 각지에서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주요 언론들이 연일 글로벌 SPA (Spe-cialty store retailer of Private label Apparel·생산부터 소매, 유통까지 직접 관리해 트렌드를 상품에 빠르게 반영하는 브랜드 유통업체)의 한국 입성을 대서특필하고 있다. 이전의 어느 국내 브랜드도 받아보지 못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글로벌 브랜드의 이름은 서서히 한국 소비자의 머릿속을 채워가고 있다. 명동을 오랜만에 방문한 홍콩의 패션 전문가는 명동 상권이 H·M, 자라, 유니클로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다며, 왜 한국 패션계에서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느냐고 질문한다. 반면 소비자는 더 많은, 더 다양한 글로벌 브랜드가 한국시장에 진출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여전히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IMF 외환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시장은 국내 기업들이 키운 토종 브랜드가 해외 브랜드를 누르고 당당히 소비자에게 인정받던 곳이었다. 해외 브랜드는 대부분 한국에서 라이선스 사업만 진행했다. 이후 15년 만에 한국시장은 완전히 바뀌었다. 많은 글로벌 브랜드가 앞 다퉈 한국시장에 들어올 채비를 하고 있고, 라이선스 사업을 하던 브랜드들도 직접진출로 전략을 수정했다. 한국시장이 매력적이지 않아서 철수한다던 브랜드들은 한국시장 재진출을 심각하게 고려하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기업들이 패션산업에서 살아남기는 점점 더 어려워 보인다.

    글로벌 패션 브랜드의 각축장

    ‘패션 코리아’를 위한 여섯 가지 제언

    지난 2월 뉴욕에서 열린 ‘콘셉트 코리아’ 행사에는 미국 패션디자인협회(CFDA) 다이앤 폰 퍼스텐버그 회장(가운데) 등이 참석했다.

    한국 패션산업의 내수시장 규모는 2010년 현재 29조원 정도로 추산된다. 많은 전문가는 외환위기 이후 시장 규모가 정체상태에 있다고 한다. 자본이 많지 않아도 탁월한 시장 감각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어 한때 블루오션으로 통했던 국내 패션 시장은 레드오션으로 바뀐 지 오래다.

    많은 글로벌 기업은 한국시장을 브랜드의 글로벌화를 위해 반드시 들어가야 할 시장 중 하나로 꼽는다. 한국시장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아시아시장에서의 미래도 담보할 수 없다고 여긴다. 왜 그들은 한국시장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할까?

    첫째, 한국시장은 아시아 문화권을 대표할 수 있는 곳이다. 한류 열풍만 봐도 알 수 있듯, 한국인의 취향은 아시아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아직까지 아시아의 패션 강국은 일본이다. 그러나 일본 스타일은 서양 사람들이 보기에 새롭고 매력적인 것일 뿐, 아시아 전체를 대변하는 스타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사실을 글로벌 브랜드 담당자들이 이제 느끼고 있는 것이다.

    둘째, 한국 소비자는 까다롭다. 전세계에서 한국 소비자만큼 세세한 곳까지 신경 쓰고, 까다롭게 구는 소비자는 없을 것이다. 이런 한국 소비자의 눈을 통과한 제품과 브랜드는 다른 시장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셋째, 한국시장은 콤팩트한 시장 특성으로 인해 변화가 빠르다. 소위 시장의 변화가 소비자에게까지 전달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짧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패션 제품과 같이 비교적 짧은 주기를 가지고 상품이 개발되는 산업에서는 신제품을 테스트해보거나 변화하는 소비자의 트렌드를 읽기에 적합하다.

    외국계 기업들이 한국 패션시장의 장점을 높이 사 한국시장 진출을 다투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한국의 내셔널 패션 브랜드들은 깊은 시름에 빠져 있다. 작은 내수시장 규모로 인해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국가적 관심까지 자동차, IT, 혹은 영화와 게임 같은 다른 문화 산업 쪽으로 옮겨가버렸다. 한때 대한민국 성장의 중심이던 섬유봉제산업의 하락과 더불어 패션산업 전체가 사양산업이라는 인식이 확대되고 있다.

    H·M의 마술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시선은 외국의 시선이 아니라 우리 내부의 시선, 내부의 고정관념이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해외 글로벌 브랜드에서는 점차 한국 디자인의 독창성을 인정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해외 브랜드들이 동대문 패션상가들과 주요 백화점을 방문해 새롭게 출시되는 상품들을 제품 개발을 위한 샘플로 사가는 일이 드물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가 패션의 미래를 보는 시선을 조금 움직여 국내가 아닌 해외시장에서 가능성을 찾아야 할 때가 왔다.

    작은 나라 스웨덴의 패션 기업인 H·M은 2009년도 한 해에만 18조원 이상의 매출을 거뒀다. H·M의 본사가 있는 스웨덴의 내수시장 규모가 크기 때문일까? 천만에. H·M의 전체 매출 가운데 스웨덴시장에서 발생하는 것은 7%에 불과하다. 만약 H·M이 작은 내수시장 규모를 보고 패션산업에 투자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글로벌 브랜드 H·M은 없었을 것이다.

    한국의 패션 기업들은 작은 내수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가장 까다로운 소비자를 만족시켜온 전력이 있다. 10년 전 미국 가전제품 매장의 제일 앞줄에는 소니가 있었다. 지금은 삼성과 LG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지금은 세계 주요 도시의 패션 스트리트에 유니클로, 자라, H·M이 있지만, 곧 그 자리에서 우리의 패션 브랜드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계시장에서 우리도 잘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그곳까지 나아가려면 대한민국 패션 기업이 똘똘 뭉쳐서 함께 어려움을 헤쳐가야 한다는 공감대의 형성이다. 글로벌시장에서 성공하는 데는 생각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장기적 예측을 바탕으로 한 치밀하고 침착한 계획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정민 트렌드컨설팅그룹 PFIN 대표이사 mindy@pfin.kr

    5 해외 패션 전문가의 시선

    >>> “해외시장 성공의 키워드는 콘텐츠화와 현지화”

    매년 2월과 9월 첫째 주가 되면, 뉴욕은 전세계에서 모여든 패션산업 인사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다음 시즌 기성복 패션 경향을 볼 수 있는 ‘뉴욕 패션위크’가 열리기 때문이다. 지난 2월, 이 자리에서 생소하지만 의미 있는 행사가 하나 열렸다. 민간 행사인 뉴욕 패션위크 기간에, 한 나라의 정부가 주도해 자국의 패션 콘텐츠와 디자이너를 알리는 과감한 발상의 행사를 주최한 것이다. 한국 정부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와 산하기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주관한 ‘콘셉트 코리아’ 행사다.

    ‘콘셉트 코리아’ 프로젝트는 한국 국내 및 해외 패션 전문가들에 의해 선정된 6명의 한국 디자이너(정석원·윤원정 부부, 정욱준, 박춘무, 정구호, 홍승완,이도이)를 뉴욕 패션계에 소개한다는 취지로 기획됐다. 이를 위해 일종의 홍보책자인 룩북(lookbook)이 발간됐고, 쇼룸 전시 행사도 열렸다. 특히 2월10일 밤 열린 오프닝 파티는 미국을 대표하는 패션 단체 ‘미국 패션디자이너협회(CFDA·Council of Fashion Designers of America)’가 문화체육관광부와 공동으로 주관했다는 점에서, 진입장벽 높고 경쟁이 치열한 뉴욕 패션시장에 이제 막 도전장을 내놓은 한국의 디자이너 브랜드에 든든한 힘과 울타리가 돼준 의미 깊은 자리였다.

    필자는 뉴욕 패션계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전문 인력의 한 사람으로 ‘콘셉트 코리아’ 행사에 참여했다. 필자는 뉴욕의 패션 광고를 기획 및 제작하는 회사에서 아트디렉터로 일하며 캘빈클라인, 프라다, 휴고보스, 톰포드 광고에 참여한 이력이 있다. 현재는 질샌더와 로베르토카발리, 시세이도 등의 광고 기획과 제작에 참여 중이다. 필자가 ‘콘셉트 코리아’ 행사의 뉴욕 현지 컨설턴트를 맡은 뒤 가장 염두에 두고 실행에 옮기려 한 건 ‘패션의 콘텐츠화’와 현지화였다.

    ‘한국 패션’이라는 브랜드

    패션계에서는 새로운 디자인과 소재를 개발하는 것 못지않게, 브랜드 자체를 하나의 문화적 콘텐츠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 부분은 여태껏 일본의 패션디자이너나 브랜드는 해왔지만, 한국은 실행에 옮기지 못한 부분이었다. ‘콘셉트 코리아’는 세계 패션의 중심지에 한국 패션이라는 콘텐츠를 선보이는 행사였으므로, 세계의 패션 피플에게 한국 패션의 문화적인 수준을 강력하게 보여줘야 했다. 한국 패션은 이런 것이라는 전체적인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워 승부를 걸어야 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첫 번째 ‘콘셉트 코리아’ 행사는 아쉬운 점도 적지 않다. 행사 이후 즉각적으로 세계 패션계에 정보를 전달해주는 후속 조치가 미흡했고, 특히 룩북의 경우 뉴욕 패션 전문가들도 입이 벌어지게 만드는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지만, 결과적으로 목표에 다소 미치지 못했던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높이 평가할 부분이 없는 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콘셉트 코리아’가 한국 패션의 뉴욕 진출에 물꼬를 텄다는 점이다. 오는 9월 한국 신인 디자이너 세 명이 뉴욕 패션위크의 공식 패션쇼 무대에서 그룹쇼를 펼치고, 내년 2월에는 역시 뉴욕 패션위크에서 제2회 ‘콘셉트 코리아’가 열리게 됐다. 이제 중요한 것은, 막 뉴욕에 발을 들인 한국 패션이 어떻게 현지화에 성공하느냐가 됐다.

    뉴욕은 언뜻 신인들에게 관대한 것처럼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발을 담근 순간부터 피도 눈물도 없는 전쟁을 벌여야 하는 전장이다. 모두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어떻게든 뿌리를 내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뉴욕에서는 뉴욕 패션으로”

    흔히 패션의 ‘글로벌화’에 대해 얘기하는데, 패션의 경우 ‘글로벌화’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현지화’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뉴욕, 파리, 밀라노 등 가장 글로벌한 도시에서는 누구도 ‘글로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한국 디자이너가 살아남느냐, 죽어서 철수하느냐는 뉴욕 현지인들이 자연스럽게 한국 패션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곳에 존재해왔던 것처럼 현지에 스며드는 전략이 필요하다. ‘뉴욕에 가면 뉴욕 패션을 따르라’는 명제를 이해하지 못하면 패션 비즈니스는 결국 물건을 사고파는 단순한 거래가 될 수밖에 없다.

    정부가 주도하는 패션산업 지원 전략은 이를 감안해 문화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첫 번째 ‘콘셉트 코리아’ 행사가 성과를 거둔 것은 문화를 다루는 정부 부처가 주도해 패션을 돈 벌기 위한 산업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콘텐츠로서, 현재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한국의 영화나 게임, 방송처럼 세계시장에 진출시켜 보겠다는 의지를 보였기 때문이다. 비즈니스 면에서 당장 성과를 거두려는 디자이너나 기업의 입장에선 다소 거리감이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장기적인 시각에서 한국 패션의 미래를 볼 때 올바른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개별 패션 인재들이 패션 선진국들과 문화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오늘도 한국의 수많은 젊은이가 뉴욕으로 파리로 밀라노로 런던으로 패션 전문가의 꿈을 품고 유학길에 오르고 있다. 하지만 그중 극소수가 패션디자이너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을 뿐, 상당수는 이름 없이 사라져버린다. 패션계에는 수많은 다른 직종이 존재한다. 필자 같은 광고 기획자도 있고 마케터, 홍보전문가, 스타일리스트 등도 있다. 다양한 직종에서 한국의 젊은이들이 맘껏 활약하는 날이 온다면, 한국 패션 피플의 이름을 세계 패션계에서 자연스럽게 접하게 될 날도 성큼 다가올 것이다.

    뉴욕=조엘킴백 패션 광고기획자 joelkimbeck@gmail.com

    6 뉴욕에서 활동해온 한국 디자이너의 시선

    >>> “디자이너의 개성 존중하고 과감하게 지원해야”

    ‘패션 코리아’를 위한 여섯 가지 제언

    디자이너 윤한희(왼쪽) 강진영 부부.

    윤한희·강진영(44) 동갑내기 부부는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브랜드 ‘오브제’를 론칭하고, 2001년 뉴욕에 진출해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최초의 디자이너로 유명하다. 두 사람은 지난 2월 뉴욕 패션위크에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소개되기도 했다. ‘패션 코리아’를 한국과 미국에서 보고 경험한 윤한희 디자이너를 만났다.

    ▼ 강진영씨와 더불어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출발해 스타 디자이너로 성장했습니다. 양갓집 규수들의 예복 중심으로 발전해온 한국 패션계에 새로운 돌파구를 열며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요?

    “저희가 ‘Obzee by 강진영’을 론칭한 때는 1990년대 초, 미국 샌프란시스코 유학을 끝내고 막 서울로 돌아온 뒤였습니다. 디자이너 브랜드와 내셔널 브랜드로 양분된 당시 유통 현장에서 디자이너의 감성을 내셔널 브랜드처럼 풀어내자는 모토 아래 디자이너의 철학이나 영감을 집약한 브랜드를 만들었죠. 뉴 콘셉트, 뉴 룩, 뉴 디자인의 파격적이고 창조적인 브랜드였던 게 주효한 것 같습니다.”

    ▼ 글로벌 무대에 진출하며 대기업과 협업을 시도했다가 결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익을 우선하는 대기업과 창의적인 패션은 공생하기 어려운 걸까요?

    “저희는 한국 디자이너로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선택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힘도 들었고요. 2001년 ‘Y·Kei(와이앤케이)’를 뉴욕에 론칭하고, 2005년 ‘Hanii Y(하니와이)’를 론칭하면서 매출 1000만달러를 달성했으니 어느 정도 목표를 이뤘다고 할 수 있었지요. 그런데 7~8년 동안 뉴욕 패션계를 경험하며 한국 패션의 세계 진출이 우리의 힘만으로 가능할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글로벌화를 위한 투자를 전제로 2008년 SK네트웍스와 M·A를 했어요. 그 후 세계경제위기가 오면서 회사의 투자계획이 전면 수정된 건 지금 돌아봐도 안타깝죠.”

    ▼ 해외의 럭셔리 브랜드들 역시 스타 디자이너와 대기업의 M·A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은 디자이너의 개성과 장인의 전통을 잘 이어가는 듯 보입니다.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일까요?

    “잠깐이지만 대기업에서의 경험은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대기업은 인적자원이 넘쳐나고, 조직과 관리에 의해 결과를 만들어가는 시스템을 갖고 있어요. 다만 패션, 디자인, 문화라는 특별한 분야의 스페셜리스트를 이해할 수 있는 경영진, 현장에서 이를 직접 경험한 경영진의 부재가 아쉽더군요. 샤넬, 에르메스, 구찌 같은 외국 럭셔리 브랜드의 경우 패션디자인 브랜드 위주의 기업 형태를 갖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경영과 디자인의 철저한 분리, 오래된 브랜드 경영에 대한 경험, 디자이너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매니지먼트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거지요. 프랑스의 대표 브랜드 루이비통을 예로 들면, 아르노 회장의 마켓을 읽는 탁월한 경영감각과 미국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영입한 미국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의 감각이 만나 LVMH제국의 초석을 다지게 되거든요. 우리나라에는 아직 패션디자이너를 리드할 수 있는 전문가적 식견을 가진 아르노 회장 같은 인물이 없는 것 같고, 마크 제이콥스처럼 아트와 패션을 결합시키는 아이디어로 마켓을 리드할 수 있는 탁월한 디자이너도 배출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기업과 디자이너 모두 반성해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 지금 해외에 진출하려는 디자이너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고 정부의 지원은 어떻게 이뤄져야 할까요.

    “정부에서 문화나 패션디자인을 지원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는 건 매우 고무적입니다. 다만 적은 예산으로 너무 많은 수의 디자이너를 해외에 내보내는 건 걱정스럽습니다. 누가 경쟁력 있는 디자이너인지를 현장에서 검증받고, 본인 스스로 결과를 만들어 살아 돌아오라고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처럼 적은 예산으로 디자이너 혼자 디자인하고, 홍보하고, 바이어 협상을 하고 패션쇼 준비까지 하면서 결과를 만들어내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디자이너 선정에는 엄정한 기준이나 원칙이 있어야 하고, 선택한 디자이너에게 지원을 집중해야 하며, 지원하는 규모도 더 커져야 합니다. 각 디자이너에게 모든 권한을 부여하되, 결과에 대해 책임지게 해야 합니다. 그 외에도 패션쇼와 한국 문화를 연계할 방법, 한국 제품을 홍보할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겁니다. 디자이너들은 정부의 지원을 당연시하는 분위기도 있는 것 같은데, 최선의 결과를 위해 디자이너 스스로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결과에 대한 철저한 책임감도 가져야 하고요. 잘되면 내 탓, 안되면 남 탓하는 풍토는 지양돼야 합니다.”

    ▼ 대기업과의 제휴를 끝내고 독자적으로 다시 뉴욕 진출을 준비하면서 새롭게 세운 전략은 무엇입니까.

    “서두르지 않으려 합니다. 강진영씨는 코넬대학원 어패럴 디자인 박사과정에 입학해 이론적으로 부족했던 부분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뉴욕 현지에서 일하며 느꼈던 가장 큰 불만이 아직도 한국을 잘 모른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술, 디자인, 패션’을 콘셉트로 한 공간을 만들 생각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창의적인 공간과 디자이너와 아티스트를 가졌다는걸 알리고 싶어요. 저의 시각에서 표현하는 공간이라 Y′s View(와이즈 뷰)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내년 하반기에 먼저 서울에 오픈한 뒤, 뉴욕에도 같은 공간을 오픈할 계획입니다.”

    김민경 동아일보 주간동아 차장 hold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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