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호

X세대의 오늘

포스트 386이여 <1970년대생> 단결하라!

  • 정해윤│미래문화신문 발행인 kinstinct1@naver.com│

    입력2010-08-02 17: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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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X세대의 오늘
    월드컵의 열기로 2010년 6월이 달아올랐다. ‘공은 둥글다’는 말은 이변이야말로 축구의 참모습이라는 점을 나타낸다. 지난 대회 우승국과 준우승국이던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나란히 16강에 오르지 못했다. 반면 한국과 일본은 또 다른 이변의 주인공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이런 현상을 잘 들여다보면 그 나름의 규칙이 발견된다. 대부분의 팀이 졸전과 선전을 반복한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현상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논리가 세대교체의 성공 여부다. 국가대표는 언제나 같은 또래 중 최고의 선수들로 구성된다. 그런데 국가대표로서 거둔 성과는 왜 세대에 따라 편차가 발생하는 것일까?

    세대교체론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은 다음 월드컵 대회에서 실망스러운 경기를 할 확률이 높다. 박지성을 필두로 한 세대는 은퇴를 예고하고 있다. 설령 이들이 다음 월드컵에 출전하더라도 전성기가 지났을 확률이 높다. 이번 대표팀은 대회 전부터 역대 최강으로 평가받았는데, 훗날 축구사는 이들을 황금세대로 기록할 것이다.

    박지성이 대표하는 황금세대는 안방에서 벌어진 월드컵을 발판 삼아 등장했다. 이들은 외국인 감독 밑에서 선배들과 동등한 경쟁을 벌였고, 4강신화를 이룩하자 병역 혜택이라는 행운이 덤으로 붙었다. 해외 진출이 한층 용이해졌고, 이는 선수로서 도약하는 계기가 됐다. 이처럼 세대 간 승패에 결정적 차이를 만드는 것은 역사적 모멘텀이다. 그런데 행운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누적이득효과를 발생시킨다.

    골키퍼의 세대교체는 승자독식 현상을 잘 보여준다. 이번 월드컵의 주전 골기퍼 정성룡은 1985년생으로 2002월드컵의 주전 골키퍼 이운재와 열두 살 차이다. 4년마다 개최되는 시합이라면 그 중간 연령대의 선수가 한 번쯤 등장했어야 옳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이운재는 2002년 선배 김병지와의 경쟁에서 승리한 뒤 후배들과의 경쟁을 허락하지 않았다. 기량 저하의 징후가 뚜렷이 드러나도 큰 대회를 치러본 관록을 무기 삼아 국가대표 붙박이 지위를 지켰다. 그 결과 이운재의 뒤에 줄을 선 선수들은 A매치 출전 기회를 잡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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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세대 뒤에는 루저세대가 따라온다. 권력은 황금세대에게서 한참을 뛰어넘어 또 다른 황금세대에게로 넘어간다. 정성룡은 이운재처럼 장기집권의 길을 걸어갈 확률이 높다.



    이런 현상은 비단 스포츠의 세계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해마다 대학입시에서 수석 합격자가 탄생한다. 모든 세대는 나름의 수재를 배출한다. 하지만 성인이 된 뒤 파워그룹으로 성장하는 세대와 루저 그룹으로 전락하는 세대가 구별된다. 한국사회는 전대미문의 황금세대를 목도하고 있다. 바로 386세대다. 이들은 학창시절 외친 구호처럼 그야말로 불패의 강철군단 같은 모습이다.

    6월 치러진 지방선거 결과를 놓고 평가가 분분하다. 누군가는 민주당의 승리라고 하고, 누군가는 친노(親盧)의 부활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386의 승리였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결과를 만든 일등공신이 그들의 바로 뒤에 줄을 선 30대 유권자라는 점이다.

    이번 선거에서도 ‘비판적 지지론’이라는 낡은 패러다임이 맹위를 떨쳤다. 그런데 비판적 지지론의 지적재산권을 가진 386세대보다 30대들이 386정치인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였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지나온 과거를 보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1990년대 초 일명 X세대라고 불리며 화려한 조명을 받던 이들을 하루아침에 지옥으로 떨어뜨린 것이 보수정권이기 때문이다. 386세대가 군사정권을 증오했다면 X세대의 분노는 문민정부를 향한다. 노장년층이 보수세력을 ‘부패하지만 유능한’ 집단으로 인식하는 것과 달리 30대들은 ‘부패하면서 무능하기까지 한’ 세력으로 인식한다.

    그런데 정작 선거가 끝나자 진보진영의 모든 찬사는 20대에게 쏟아지고 있다. 진보언론으로부터 가수 신해철에 이르기까지 노골적으로 20대에게 아부하는 모양이 역력하다. 20대들은 고분고분한 후배가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당근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앞으로도 젊은 표심(票心)을 얻기 위한 시혜 정책은 이들에게 집중될 것이다. 그렇다면 386의 밑거름 구실을 한 30대에게는 어떤 결과가 돌아올까?

    황소개구리

    X세대의 오늘

    1970년대생의 초등학교 시절.

    30대들은 언젠가 자신들에게도 기회가 올 것이라고 기대할지도 모른다. 혹은 386선배들이 주입시킨 대로 수구꼴통 노인들만 사라지면 좋은 세상이 올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회는 결코 공평하게, 순차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힘의 역학관계에서 정작 30대들을 질식시키는 요인은 다른 데에 있다.

    3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나오면 으레 등장하는 바람막이가 있다. 소수의 정치권 인사가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386세대를 단순한 정치적 특권층으로 한정짓는 것은 오판이다. 정치권 386도 그 세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인물들이지 외계에서 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실제 이들의 점유 영역은 훨씬 폭넓다. 영화계의 386세대 감독들은 한국사회에서 이 세대가 가진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얼마 전 1980년대 최고 감독 중 하나로 꼽히던 곽지균이 자살했다는 뉴스가 타전됐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더 이상 영화를 만들 수 없는 현실이 그를 극단적 선택을 하게 내몰았다고 한다. 겨우 50대 중반 나이에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게 충격이다. 1980년대를 대표하던 배창호 감독 역시 영화계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그 정도 경륜이면 예술가로서 원숙미를 뽐낼 법도 하지만 또래의 봉급생활자들처럼 영화판에서도 50대가 퇴출 대상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386세대 감독들도 50대가 되면 선배들의 전철을 밟게 될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에 등장한 이들은 30대에 흥행 감독 칭호를 획득한 인물이다. 이른바 ‘아웃라이어’는 이렇듯 특정 시기에 특정 분야에서 집중적으로 출현한다. 이들의 등장이 긍정적 작용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박찬욱은 평생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심정을 공공연히 밝힌다. 세계적 거장의 칭호를 획득한 그라면 충분히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곽지균은 극단적 선택에 내몰려야 했다. 왜 자신의 시대를 대표했던 이 천재 감독은 더 이상 꽃을 피우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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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산업은 자본의 뒷받침이 필수적이다. 이 세계는 한 사회가 제공하는 자산이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1990년대는 한국영화계가 할리우드 시스템으로 변모하던 시점이었다. 대기업 자본이 들어오고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등장했다. 그즈음 30대를 지나던 감독들은 자본이 길들이기에 적절한 대상이었다. 이들은 1990년대 말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 흥행신기록을 수립한다. 축구판의 이운재가 손쉽게 감독의 낙점을 받은 것처럼 흥행감독이란 꼬리표가 붙은 이들이 자본과 개봉관을 독식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곽지균은 자본 확보 전쟁에서 패했다. 그는 히딩크 밑에서 새로운 시험을 치러야 했던 김병지와 같은 운명이었다. 세대 간의 대립은 이렇듯 사회적 자원의 유한성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벌어진다.

    386세대 감독들이 다음 세대를 고사시키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자신들이 30대에 흥행감독의 지위를 차지한 것과 달리 오늘날 이름난 30대 감독을 찾아보는 것은 쉽지 않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찌감치 영화판에 뛰어든 유승완 정도가 있을 뿐이다. 황금세대는 이렇게 세대 간 생태계를 파괴하는 황소개구리 같다. 이들을 중심으로 앞뒤 한 세대가 초토화되는 것이다.

    힘의 불균형 현상은 영화계에 결코 이로울 리가 없다. 이들 중 일부는 ‘세계적 거장’이란 잿밥에만 관심을 둔다. 해외영화제에서의 수상경력을 한국영화의 성취라고 해석하는 것은 재고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한국 영화계에는 이상한 전통이 있는데 배우들의 해외 수상은 거의 여성이 독식한다는 점이다. 가난한 시절부터 한국 여배우의 경쟁력만큼은 독보적이었다. 이는 해외영화제의 심사기준이 어떤 눈높이에서 이뤄지는지 짐작케 한다.

    할리우드에서 동양계 남자배우가 성공하려면 쿵푸를 하거나 어릿광대짓을 해야 한다는 속설이 있다. 그런데 해외영화제에 출품되는 한국영화에 등장하는 남자배우의 스테레오 타입이 있다. 여성을 학대하는 역할이 그것이다. 이렇듯 현실과 괴리된 역할이 해외 평단과 국내 관객의 반응에 극단적 차이를 낳는 것이다. 왜 자국 관객이 아닌 해외 평단을 의식해 만든 작품을 높게 평가해야 하는 것일까. 이들의 영화는 사실상 백인 남자들의 관음증을 충족시켜주는 ‘오리엔탈 포르노’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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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신생아실 모습.

    이들이 문화적 파워를 유지하는 방식도 주목할 만하다. 박찬욱과 봉준호는 이른바 ‘강남좌파’의 대표 인물로 통한다. 진보정당을 공개 지지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한국영화계가 외적 성장을 맞이한 것과는 달리 영화계 종사자들의 현실은 1970년대 청계천 노동자를 방불케 한다. 이는 감독들의 도덕성과 관련해서 반드시 검증해봐야 할 문제다. 어쩌면 평생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박찬욱의 얘기는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현실이 될 수도 있다. 이들은 한국영화계의 자원을 독식하면서도 정작 해외 평단을 위해 봉사하는 매판예술가란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너무나 한국적인…

    말콤 글래드웰은 저서 ‘아웃라이어’에서 미국의 대표적 IT기업가들이 1955년을 전후해 태어났음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1990년대 후반 IT붐의 최후 승자는 에 등장한 이들이다.

    386벤처기업가들에게는 1999년 코스닥 설립이 결정적 모멘텀이었다. 돈방석에 앉았을 때 이들은 모두 30대였다. 그런데 벤처기업가의 경우도 영화계와 동일한 패턴이 보인다. 황금세대가 구축되면서 미래세대가 고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경우와 대조된다.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주커버그는 20대 중반이다. 구글 공동창업자 세르게이 브린과 레리 페이지, 유튜브의 창업자 채드 헐리와 스티브 첸도 30대다. 빌 게이츠의 성공 신화가 미국사회에서 꾸준히 재현되는 것이다. 실리콘밸리는 특정세대에게만 아메리칸 드림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것이 미국의 경쟁력 고양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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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왜 한국에서는 이들 이후에 성공한 벤처기업가가 등장하지 않는 것일까? 그 까닭은 현재의 대기업에 버금가는 또 다른 대기업이 등장하지 못하는 까닭과 비슷하다. 이른바 문어발 전략이라는 한국적 전통 탓이다.

    미국은 산업화 시기부터 독점을 용인하지 않는 전통을 갖고 있다. 존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은 연방정부에 의해 강제 분할되며 종언을 고했다. 한국 모델은 정반대다. 수출주도전략은 해외기업과 대결할 덩치 큰 기업을 키우는 데 우선순위를 뒀고, 여기서 선택받은 이들은 누적이득효과를 누리며 무한히 확장했다. 그 결과 세계적 기업을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사회 불평등도 심화했다.

    진보 지식인들은 보수정권하에서 만들어진 공룡 기업의 존재를 비판한다. 하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권하에서 비슷한 존재가 온라인상에서 구축됐다는 사실은 외면한다. 포털사이트가 대표적이다. 한국의 포털사이트는 미국의 구글보다는 공룡 기업 삼성과 닮은꼴이다. 앤드루 카네기와 존 록펠러는 독점기업가였지만 철강과 정유라는 한 우물을 팠다. 구글 역시 이런 전통을 이어가며 여타의 콘텐츠 산업에는 진출을 자제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네이버와 다음은 게임과 전자상거래 영역에까지 발을 뻗쳤다.

    최근 애플의 비약적 성장을 지켜본 이들이 하나같이 쏟아내는 말이 있다. 왜 한국에는 스티브 잡스가 없느냐는 것이다. 이 질문은 곧잘 삼성전자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것은 정당한 비판이 아니다. 삼성전자가 제조업으로 먹고산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스티브 잡스를 상대해야 하는 이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일까? 코스닥이 활황일 때 벤처기업가들에게 가장 많이 따라붙은 수식어가 ‘한국의 빌 게이츠’였다.

    그렇다면 한국의 스티브 잡스가 요구되는 시기에 그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은 누구일까? 386세대 벤처기업가가 아닐까? 삼성과 현대 창업자 이병철, 정주영은 해외에서 달러를 벌어들였지만 인터넷 기업 중 외화를 버는 곳은 엔씨소프트 외엔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기업이 국내에서 골목대장 노릇하며 후배들의 도약을 가로막고 있다.

    X세대의 오늘

    1990년대 대학 캠퍼스.

    안철수의 사례도 짚고 넘어가고 싶다. 한국에서 그의 이미지는 무척이나 긍정적이다. 하지만 안철수는 대한민국의 ‘후기 성공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완벽한 스펙을 쌓으며 성공한 것은 대치동 아이들의 모델이지 가난한 집안 아이들의 모델은 될 수 없다. 노무현이 꿈꾸던 세상은 안철수가 아니라 정주영 같은 기업가가 출현하는 세상이다.

    세대 간 편차는 사회적 자산이 불평등한 방식으로 분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통사회의 장자들이 부모의 자원을 독식하는 대신 동생들을 거둬들인 것처럼 성공집단은 후배들을 독려해야 할 책무가 있다. 문인들의 세계에서 좋은 선례가 있다. 성공한 문인들이 후배작가에게 집필실을 제공하는 전통이다. 성공에 따르는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않을 때 승자독식이라는 말이 회자되는 것이다.

    철밥통 본색

    이외에도 공지영, 신경숙 같은 여성 베스트셀러 작가, 진중권에서 우석훈에 이르는 좌파논객 등 30대에 유명세를 떨친 386집단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들은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다’는 말처럼 ‘386에 좋은 것은 대한민국에도 좋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과 같은 사례를 제시해도 그렇게 주장할 수 있을까.

    은 김광수경제연구소 카페에 올라온 것으로 조합원 수가 4만명 넘는 제조기업의 노조원들을 출생연도별로 분류한 것이다. 1970년대 초반 2차 베이비붐이 일어나면서 1970년대생들은 1960년대생들과 인구규모에서 차이가 거의 없다는 점을 감안하고 표를 살펴보자. 노조 조합원 수는 1960년생부터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해 1970년생을 기점으로 현저하게 줄어든다.

    특히 1973년생부터 1975년생 사이를 눈여겨보기 바란다. 이 세대에 이르면 노조원 수가 386세대의 4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진다. 설명할 필요도 없이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흔적이다. 그렇다면 1970년대생들은 노조를 싫어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대부분이 비정규직, 일용직으로 내몰린 탓이다. 이것이 1990년대 초반 화려하게 등장한 X세대의 오늘이다. 이들이야말로 한국사회의 진정한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다.

    X세대의 오늘
    이처럼 30대들은 386세대와 이해관계가 전혀 다르다. 386들이 고용안정에 관심을 둔다면 30대들은 비정규직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이 두 세대집단의 목표는 서로 부딪친다. 30대는 386세대의 후방 병참기지 구실을 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386세대에게 철밥통을 허락한 것은 전두환에서 김영삼에 이르는 보수정권이었다. 반면 젊은 세대의 비정규직을 양산한 것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었다. 그런데도 서로의 분노는 엉뚱한 곳을 향하고 있다.

    한나라당 진성호 의원이 공개한 MBC의 인적구조를 살펴보자. MBC는 구성원의 60%가 차장급 이상의 간부진이다. 차장, 부장급의 연령대는 짐작이 가능하다. 이것은 언론기관의 특수한 사례가 아니라 좋은 회사로 알려진 곳에서 비슷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고용시장이 절정기를 맞은 것은 3저(低) 호황 때부터 동아시아 외환위기 이전까지 10여 년 동안이다. 이 시기 사회에 뿌리내린 이들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던 행운을 누렸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386세대는 마지막 철밥통 세대다. 한국사회의 진보이념은 이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고 노조는 철밥통을 유지하는 전위부대의 역할을 한다.

    이 같은 386세대와 포스트386세대의 격차는 당대에서 그칠 것 같지 않다. 다음번 파워 제너레이션은 386세대의 자식 세대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 386세대는 전대미문의 사교육 스테로이드를 자식들에게 투여하고 있다. 원정출산, 조기유학이 모두 이들이 유행시킨 것이다. 반면 경제력을 상실한 30대들은 2세들을 앞선 세대처럼 지원하기 어렵다.

    뉴 노멀(New normal)을 요구하라

    30대가 스스로 불행한 세대라고 체념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고성장과 대량고용의 시대는 다시 오지 않는다. 고용 없는 성장을 받아들여야 한다. 한국사회가 만들어낼 수 있는 일자리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앞선 세대에게 고통의 분담을 요구해야 한다. 대대적인 청년실업을 처음으로 경험한 30대야말로 이런 주장을 펼 당사자다.

    일자리 분배부터 공평해져야 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사회적 발언권에 큰 차이가 있다. 30대가 양질의 일자리를 확보하려면 386세대의 철밥통을 깨부숴야 한다. 한 세대의 취업을 단지 경기 사이클에만 맡겨둘 수는 없다. 대학입시 때 계층별 차이를 인정하는 것처럼 국가는 세대 별로 평등한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40대가 된 386세대가 미래세대의 몫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포스트386세대에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우선 투쟁 역량을 공적 영역에 집중하자. 공기업이야말로 386철밥통의 온상이자 젊은 세대가 투쟁할 목표다. 과다 고용된 386세대의 구조조정을 요구하자. 이렇게 얻어진 여력을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신입사원의 채용 확대로 돌리자고 목소리를 높이자.

    과거 여성주의자들이 행한 방식을 참고할 만하다. 사회적 약자가 사회의 여러 영역에 진출한 것은 평등주의에 입각한 할당제 덕분이었다. 젊은 세대는 각종 영역에서 세대할당제를 요구해야 한다. 이는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방법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선거 때마다 40세 이하의 청년계층을 20%가량 의무적으로 공천하라고 요구하자. 정치권이 젊은 피를 수혈한다며 386세대를 영입한 전례가 있다. 차기 총선은 새로운 피를 수혈해야 할 적기다. 초심을 잃은 386정치인들의 모습은 사회가 새로운 피를 요구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30대는 1980년대의 권위적 운동권 문화를 민주적 문화로 바꾼 이름 없는 공로자다. 30대들은 386세대 뒤에 줄을 서면 구시대의 막내가 되고, 후배들과 연대하면 새 시대의 맏형이 된다. 30대는 새로운 길을 제시할 수 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30대가 새로운 혁명을 이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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