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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라이벌 ②

‘직류전기’ 토머스 에디슨 vs ‘교류전기’ 니콜라 테슬라

세상을 밝힌 빛의 혁명가

  • 이현경| 동아사이언스 더사이언스팀 기자 uneasy75@donga.com

‘직류전기’ 토머스 에디슨 vs ‘교류전기’ 니콜라 테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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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들은 일제히 “15초 만에 송아지는 쇠고기 덩어리로 변했다”고 보도하면서 “보라! 인간보다 더 큰 포유동물을 죽이는 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은가? 인간도 이들 동물만큼 빠르게 처형시킬 수 있다”는 브라운의 주장을 실었다.

결국 뉴욕 주도 전기의자를 사형집행에 쓰기로 결정했다. 물론 테슬라는 에디슨에게 교류 발전기를 팔지 않았다. 그러자 에디슨은 자기 회사의 가장 뛰어난 기술자인 아서 켈리(Arthur Kelly)를 시켜 전기의자를 설계하고 발전기도 다른 방식으로 구입하게 했다. 전기의자의 첫 희생양은 내연녀를 도끼로 죽인 죄로 감옥살이를 하던 윌리엄 케믈러(William Kemmler)라는 죄수였다. 1890년 8월 6일 케믈러는 전기의자에 앉아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몸으로 교류 안전성 입증한 테슬라

드디어 집행이 시작됐고 17초 동안 1000V가 전기의자에 흘렀다. 케믈러는 비명을 질러댔고 곧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살아 있었다. 이번에는 72초 동안 전류를 흘렸다. 하지만 연기만 솟아오른 뒤 전기는 끊어졌다. 전기의자를 이용한 사형은 실패였다. 에디슨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다. 나중에 밝혀진 것이지만 에디슨의 전기의자가 실패한 것은 전기를 흘린 방식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디슨은 사형수의 손을 소금물이 담긴 그릇에 담근 뒤 그 그릇에 전류를 흘려보내게 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치명적인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후 사형수의 머리에서 종아리로 전류를 보내는 처형 방식이 채택됐다.

에디슨의 전기사형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테슬라의 교류 방식이 시장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하지만 에디슨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1903년에도 조련사 3명을 죽인 코끼리를 교류에 감전시켜 죽이면서 끝까지 직류를 고집했다.



하지만 에디슨과 테슬라의 ‘전류전쟁’ 2라운드에서 에디슨은 직류의 단점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은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장에서 벌어졌다. 당시 시카고 만국박람회는 콜럼버스의 미 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해 열린 터라 규모가 매우 컸다. 박람회에 켤 전구만 25만 개나 됐다. 에디슨과 테슬라 측은 서로 이 사업을 따려고 노력했다. 테슬라는 고주파 교류 전력이 자신의 몸을 통과하는 실험을 진행해 교류 전기의 안전성을 입증했다.

결국 25만 개의 전구를 켜는 행사는 테슬라 측에 돌아갔고, 웨스팅하우스는 테슬라가 특허권을 무상으로 양도하면서 자금난이 해소돼 박람회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 일로 에디슨 진영은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이후 에디슨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JP모건은행은 에디슨전기회사를 다른 회사와 합병해 대형 전기회사로 만들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제조업체인 제너럴일렉트릭(GE)이 이렇게 탄생했다. GE의 주식 5%를 얻은 에디슨은 이때부터 전기사업에서 멀어졌고 미국의 전력산업은 테슬라와 에디슨의 손을 벗어나 웨스팅하우스와 GE 간의 경쟁으로 커나갔다. 에디슨과 테슬라의 ‘전류전쟁’은 ‘나이애가라 대결’로 완전히 끝이 났다. 당시 캐터랙트라는 기업이 나이애가라 폭포의 풍부한 수자원을 이용해 발전소를 설치했는데, 약 42㎞ 떨어진 버팔로 시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송전 사업자를 물색했고 여기서 에디슨의 GE와 테슬라의 웨스팅하우스가 한판 대결을 벌이지만 승리의 여신은 또다시 웨스팅하우스의 손을 들어줬다.

이로써 전류전쟁은 테슬라와 교류의 승리로 끝났고 교류 시스템은 전력 공급 방식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흥미롭게도 에디슨과 테슬라의 ‘악연’은 노벨상까지 이어진다. 1915년 뉴욕타임스는 노벨상 수상자로 에디슨과 테슬라가 내정됐다는 기사를 실었다.

하지만 둘은 앙숙을 넘어 원수로 불릴 만큼 반목이 심한 상태였다. 기사가 나간 이후 에디슨과 테슬라는 공동 수상을 거부할 것이라는 얘기가 돌았고, 그해 노벨상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 게다가 190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가브리엘 리프만은 최초로 컬러사진을 만들어 노벨상을 받았는데 이게 오늘날 컬러사진의 원리와 전혀 다른 바람에 노벨위원회는 이후 발명에 대해서는 수상을 꺼리게 됐다.

발명가인 에디슨이 노벨상을 받지 못한 데는 이런 점도 작용했다는 해석이 있다. 말년에 에디슨은 테슬라와 사이가 틀어진 것을 후회하며 그를 존중하지 않았던 점을 뉘우쳤다고 한다.

테슬라는 뛰어난 천재였지만 특이한 성격으로 평생 독신으로 살며 1943년 뉴욕의 한 호텔에서 빚에 시달리다 쓸쓸히 숨을 거뒀다. 에디슨은 당대에 화려한 삶을 누렸지만 테슬라는 죽은 뒤에야 세상의 인정을 받았다.

오늘날 자기장의 세기를 나타내는 단위로 테슬라의 이름을 딴 T(테슬라)를 쓰는 것도 테슬라의 천재성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동아 2012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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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경| 동아사이언스 더사이언스팀 기자 uneasy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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