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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아메리칸’ 정체성 확립 계기, 한인 정치력 신장 숙제

LA 폭동 20년, 미주 한인 사회 진단

  • 장태한│ UC 리버사이드대 교수,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장 edward.chang@ucr.edu

‘코리안 아메리칸’ 정체성 확립 계기, 한인 정치력 신장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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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력 신장 캠페인

‘4·29 폭동’을 통해 미주 한인 사회에 나타난 이런 변화는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우선 코리아타운에서 다인종 다민족이 어울리고 있다. 1992년 당시만 해도 일반 미국인은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을 ‘이방인의 장소’로 인식하고 방문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은 한인 식당에서 타인종이 갈비와 불고기 그리고 김치를 먹거나 한인 커피숍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전혀 생소하지 않다.

또 20년 전 코리아타운은 범죄가 자주 일어나는, 안전에 문제가 많은 곳으로 알려졌으나 이제는 범죄가 크게 줄어들어 안전한 주거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다. 시내와 근접해 있어 타인종 젊은이들의 주거지로도 각광받고 있고, 은퇴한 노년의 한인들이 살기 편한 코리아타운으로 돌아와 정착하는 일도 많다.

그 사이 미주 한인의 정치적 위상도 달라졌다. ‘4·29 폭동’ 이후 많은 한인이 선출직에 당선돼 활동 중이다. 지난 2008년 민주당 대통령후보 지명 선거 운동 때 유력한 민주당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이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을 방문해 모금활동을 전개한 것도 달라진 한인 사회의 정치적 위상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중국계 또는 일본계에 비하면 아직 미주 한인의 정치력은 초라한 수준이다. 특히 현직 연방 하원의원과 상원의원을 아직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게리맨더링(Gerrymandering)이라고 하는 선거구 분할 제도가 한 원인이다. 백인들은 정치력을 독점하기 위해 소수계 지역을 여러 지역구로 분할해 소수계 표를 분산시키는데,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의 경우도 현재 4개의 시의원 지역구로 분할돼 있어 한인의 정치력이 결집될 수가 없다. 현 상황에서는 한인의 시의원 당선이 거의 불가능하다. 최근 한인들은 이런 제도적인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 2010년 인구 조사 결과에 따라 새로운 선거구가 결정될 당시 한인들은 코리아타운을 하나의 선거구로 재조정할 것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미 주류 언론이 “잠자는 호랑이를 깨웠다”고 대서특필했을 정도로 힘찬 움직임이었다. 미주 한인들이 정치력 신장의 중요성을 깨닫고 실력 행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선거구 재조정에는 실패했지만 미주 한인들이 이제 정치력 신장을 위한 직접 실천을 시작했다는 건 큰 의미가 있다.



한인 교회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4·29 폭동’ 직후 한인 사회에서는 교회의 구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한인 사회에서 이민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가. 한인 사회의 문제에 좀 더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주장이었다. 이후 일부 한인 교회가 사회 참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지역 주민과의 유대 강화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의 한인 교회는 한인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데 소극적인 듯하다.

더불어 사는 지혜

‘4·29 폭동’이 미주 한인들에게 준 가장 큰 교훈은 다인종 다민족 사회에서 타민족과 어울려 더불어 사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코리아타운에서 한인 교회를 다니며 한인끼리 어울리는 폐쇄적인 삶에서 벗어나 보다 능동적으로 타인종·타민족과 어울리고 함께 발전하는 사회를 구축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 한인 1.5세와 2세 단체들은 다인종·다민족 연대에 적극적으로 앞장서왔다. 한인청소년회관의 이름을 ‘코리아타운 청소년회관’으로 바꾸고 다인종·다민족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봉사 활동을 전개하고 있기도 하다. 한인노동연대도 코리아타운 노동연대로 이름을 바꿔 한인과 라틴계 노동자 권익신장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4·29 폭동’ 후 20년이 지난 지금 미국 주류 언론은 한인 사회가 폭동의 쓰라린 경험을 이기고 짧은 시간에 재기에 성공한 것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민 1세들은 아직도 모국 지향적인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치력 신장과 발전은 한인 사회가 이뤄야 할 당면 과제다. 한인 사회의 목소리가 정책에 제대로 반영돼 2세들이 미국 사회에서 뿌리내리고 제대로 경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4·29 폭동’이 대한민국에 던지는 교훈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대한민국은 이미 다문화 사회로 바뀌었지만 ‘인종·민족’에 대한 개념적 이해는 전근대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는 21세기로 변했는데 대한민국의 ‘인종·민족’에 대한 이해는 아직 19세기 수준이라는 진단이다. 많은 한국인은 인종과 민족이 혈통에 의해 정해진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같은 다인종 사회에서 인종은 혈통에만 근거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당시의 정치적, 문화적 그리고 사회적 변수에 의해 형성되고, 없어지고, 재형성될 수 있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가령 미국 사회에서 인도인들은 백인인 ‘코케이전’으로 분류됐다가 1980년대부터 ‘아시안계’로 재분류되고 있다. 이제는 한국 사회에서도 ‘인종·민족’에 대한 개념 변화와 이를 뒷받침할 제도적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 교과 과정도 바뀌어야 하고 교사에 대한 교육도 필요하다. 다문화 교육에 대한 투자는 궁극적으로 한국의 사회비용 절감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한국인과 외국인 사이에 태어난 아이, 특히 한국 남성과 타인종 여성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을 ‘한국인’으로 인정하고, 그들이 집단적 따돌림과 차별을 당하지 않도록 법적, 제도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장치를 마련하는 게 시급하다. 이들의 숫자는 점점 증가할 텐데, 사회적 소외 집단으로 남겨둔다면 가난과 빈곤 그리고 차별의 대상이 돼 언젠가 대한민국에서도 미국과 같은 인종 폭동이 발생할 수 있다.

다인종·다민족 사회

다인종·다민족 사회를 맞이하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어떻게 설정하고 설계할 것인지는 아주 중요한 과제다. 현 정부는 다문화 시대에 맞는 다문화 정책을 시행한다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한국으로 시집온 외국인 신부들을 한국인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 ‘동화정책’이다. 물론 외국인에게 한국 사회 적응 교육을 제공하는 건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의 고유한 언어, 문화 그리고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한국 사회에 기여하도록 하는 다문화 정책이 중요하다. 맹목적 동화를 요구하는 현재의 정책은 실패할 확률이 높다. 이미 미국에서도 인디언, 멕시칸, 흑인, 아시안 등에게 동화정책을 실시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다.

다인종·다민족 사회의 표본인 미국의 가장 큰 장점은 다양하고 풍부한 인적 자원을 충분히 활용하는 제도적 장치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로스앤젤레스 통합교육국은 코리아타운에 새로 생긴 공립중학교 이름을 ‘김영옥중학교’로 하는 조례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재미교포로 미군에 입대해 제2차 세계대전 등에서 큰 공훈을 세운 고(故) 김영옥 대령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필자가 재직 중인 UC리버사이드 대학교도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설립에 동의하고 적극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언젠가는 한국에도 외국인 출신자의 이름을 딴 학교가 세워질 날이 올 것으로 기대한다.

우리가 역사를 망각한다면 ‘4·29 폭동’과 같은 비극이 또다시 한인 사회에, 또는 한국에 닥쳐올 수 있다. 따라서 로스앤젤레스 폭동은 반드시 기억돼야 하며 차세대 교육에 적극 활용해 코리안 아메리칸의 정체성과 다인종 사회에서 더불어 사는 지혜를 습득하는 교훈의 장으로 삼아야 한다.

신동아 2012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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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한│ UC 리버사이드대 교수,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장 edward.chang@ucr.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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