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국가 소년’ 꼬리표, 한때 불편했지만 이젠 영광”
- “정치 무관심, 대통령 희화화 사라져야”
- 100억 출연해 대안 유치원 설립
- 수입 절반 이상 기부하는 ‘열혈’ 홍보대사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검은색 연미복을 입은 열일곱 소년은 유난히 검은 눈동자를 빛내며 고운 목소리로 애국가를 불렀다. 웅장하면서도 마음을 울리는, 청아하면서도 깊이 있는 음성. 누군가는 ‘새 정권을 응원하는 천사의 목소리’라 했고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했다’는 찬사도 있었다.
그리고 정권이 두 번 바뀌었다. 소년은 스물여덟 청년이 됐다. 취임식의 주인공은 부침(浮沈) 끝에 역사 너머로 사라졌지만, 임형주는 그간 단 한 번의 슬럼프도 없이 꾸준히 앨범을 내고 국내외 유명 무대에서 공연하며 촉망받는 젊은 예술가로 성장했다.
지난 12월 3일 서울 서초구 염곡동 아트원문화재단에서 임형주를 만났다. 다음 날 일본 도쿄 쇼케이스를 앞두고 맹연습 중이던 그는 피곤한 기색에도 잔뜩 상기된 모습이었다. 예의 까만 눈동자와 머리칼이 반짝거렸다.
그의 면모는 다채롭다. 대한적십자사, 사랑의 열매 등 여러 사회단체의 홍보대사로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동아일보 등 유력 일간지에 매주 기명 칼럼을 쓴다. 3년 전에는 장희빈에 대한 역사책을 내기도 했다. ‘임형주의 태평양 인맥’이란 말이 있을 만큼 인적 네트워크가 넓다. 세계무대 데뷔 10주년을 기념해 지난 10월 6일과 11월 3일 서울 국립극장 대극장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공연 때는 이명박 전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 엄기영 전 MBC 사장, 가수 광희 씨 등 명사들이 눈에 띄었다. 문화재단을 운영하면서 교육사업에까지 손을 뻗쳤다.
어머니의 방목형 교육
아트원문화재단은 그가 2008년 설립한 문화재단으로 대안 유치원 ‘소르고 유아학교’를 운영한다. 소르고 유아학교는 개원 당시 ‘임형주의 100억 유치원’으로 불리며 관심을 모았다. 지하 1층, 지상 4층의 건물은 발레 레슨실, 피아노 레슨실 30여 개, 갤러리, 200석 규모의 공연장 등을 갖췄다. 임 씨의 어머니 김민호 씨가 이사장을 맡으며 “형주를 키우며 겪은 시행착오는 빼고 좋았던 점만 투영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귀족학교’ 이미지와는 달리 원비는 일반 국공립 유치원 수준이고 전공생 아닌 일반 학생만 받는다. 유치원 운영을 통해 얻은 수익으로 저소득층 예술 영재에게 무료 레슨을 해준다.
▼ 왜 취학 전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유아학교죠?
“교육은 백년지대계라잖아요. 요즘 ‘글로벌 리더가 돼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글로벌 리더가 뭔가요? 국제중, 특목고 나와 유학 갔다 온 뒤 대기업에 취직하는 게 진정한 글로벌 리더는 아니잖아요. 요즘은 아이들 성장속도가 워낙 빠르니까 유치원 때부터 글로벌 리더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하는 것 같아요. 영어, 음악은 기본으로 가르치고 무엇보다 자기주도학습을 할 수 있는 토양을 길러주려고 합니다.”
▼ ‘성악가 임형주’가 운영하는 유치원의 음악 수업이 궁금하네요.
“역시 가장 큰 특징은 임형주가 직접 강의한다는 거죠. 제가 직접 수업자료를 준비해서 강의해요. 클래식 작곡가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고, 공연 에티켓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도 있고요. 직접 노래를 부를 때도 있어요. 근데 아이들을 가르칠 때 주의할 점은 한 시간에 딱 한 가지 이야기만 해야 하는 거예요. 아무리 많은 내용을 말해도 다는 못 알아듣거든요.”
▼ 처음에는 ‘귀족학교’라는 비판도 있었죠.
“여긴 비영리재단이에요. 여기서 나오는 수익으로는 가정 형편은 어렵지만 예술적 재능이 있는 음악 전공 청소년들에게 ‘멘토 앤 멘티’ 프로그램으로 개인 레슨을 해줘요. 매년 10여 명에게 혜택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가르친 학생이 100명쯤 되죠.”
▼ 임형주 씨에게 어머니는 어떤 존재였나요.
“사실 전 방목됐어요. 어머니는 공부하라는 말을 한 번도 안 했어요. 제가 예원학교 다닐 때 수학, 과학을 못해서 30점 맞은 적도 있어요. 근데 한 번도 혼나지 않았어요. 대신 국사, 국어, 영어 등은 공부 안 해도 성적이 잘 나왔거든요. 어머니는 콩쿠르나 개인 레슨 때도 늘 저를 혼자 보내셨어요. 그게 좋았던 것 같아요. 어차피 예술가는 무대 위나 아래에서 혼자예요. 늘 외로운 존재죠.”
“극단적인 것 혐오”
2003년 제16대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임형주.
2003년은 임형주에게 이래저래 잊을 수 없는 해다. 그해 대통령 취임식에서 애국가를 불렀을 뿐 아니라 6월 미국 카네기홀에선 남자 성악가 중 최연소로 데뷔 독창회를 열었다. 첫 세계 데뷔 공연은 성공적이었고 해외 진출의 발판이 됐다. 그해 초 낸 음반 ‘샐리 가든’은 45만 장이 나갔는데 이 중 8만 장은 해외에서 팔렸다. 프랑스 살 가보, 오스트리아 미라벨궁전,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 등 전 세계 음악인들이 동경하는 무대를 모두 섭렵한 그를 여전히 우리는 ‘애국가 소년’으로 기억한다.
▼ ‘애국가 소년’이라는 꼬리표, 이젠 지겹지 않아요?
“전혀 싫지 않아요. 영광스럽죠. 국가를 대표하는 애국가가 제 대표곡이라는 게.”
▼ 그래도 좀 부담스러울 것 같은데.
“한때는 국가 행사의 애국가 독창 제의가 들어오면 거절한 적도 있어요. ‘애국가 소년’ 꼬리표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요. 하지만 지금은 다 기쁜 마음으로 해요. 2013년에도 한국전쟁 유엔군 참전 및 정전 60주년 기념식 등 여러 차례 무대에 섰어요.”
▼ 2009년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곡 ‘천 개의 바람이 되어’를 불렀어요. 취임식 인연이 길었나봐요.
“그분에겐 최고의 순간이었을 취임식에 제가 함께했으니 떠나실 때도 제가 위로해드리고 싶었어요.”
▼ 노 전 대통령과의 인연 때문에 ‘좌파’라는 꼬리표가 붙기도 했어요. 2012년 전국투어콘서트에서는 한 관객이 ‘빨갱이’라고 소리를 치기도 했고.
“취임식에서 노래할 때 열일곱이었어요. 당연히 ‘노사모’도 아니고 투표권도 없었어요. 대통령직인수위의 초청을 받아 영광스럽게, 즐겁게 가서 노래했을 뿐이에요. 그 후로도 노 전 대통령을 국가 행사에서 몇 번 뵀지만, 다 공적인 자리여서 대화를 거의 못해봤어요. 그냥 저를 한국에, 그리고 세계에 알리게 도와주신 고마운 분이죠. 저는 이명박 대통령 때도 국가행사에 자주 참석하면서 김윤옥 여사님과 가까웠어요. 저는 극단적인 걸 정말 혐오해요. 저더러 가장 위대한 대통령 2명 꼽으라고 하면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을 꼽겠어요. 한 분은 경제를 부흥시키고 또 한 분은 민주주의의 기틀을 만드셨잖아요.”
▼ 뜻밖이네요.
“제 또래 친구들이 대통령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고 희화화하는데,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대통령은 국민 대다수가 선택한 나라의 대표잖아요. 대통령들은 저마다 강한 기운이 있는 것 같아요. 확실히 나라의 대표가 되려면 천운(天運)을 받아야 하나봐요. 특히 이 전 대통령 뵐 때마다 정말 안타까웠어요. 제가 해외에서 많이 생활하다보니 실감하는 건데, 이 전 대통령 때 정말 한국의 대외적 이미지가 많이 좋아졌거든요. 그런데 정작 한국에서는 그 효과를 잘 모르는 것 같아요.”
▼ 지난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독창회에 프랑스를 공식 방문 중이던 박근혜 대통령이 찾았죠.
“네, 참 감사한 일이죠. 박 대통령은 누구를 만나도 늘 먼저 고개 숙여 인사하고 웃으시는데, 그 미소의 힘이 대단해요. 앞으로도 해외 순방을 많이 하셨으면 좋겠어요. 그 의의를 폄훼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정상의 해외 순방을 통해 국가 이미지가 개선되고 양국 교류가 활발해지는 경향이 분명 있거든요.”
“정치부 기자 됐을 것”
‘스물여덟 예술가’라는 ‘스펙’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는 정치 이야기를 즐겼다. 그 힘은 바로 신문이다. 자신이 ‘활자중독증’ 환자라고 했다. 매일 15종의 신문을 구독하고, 해외에 있을 때는 현지 신문까지 챙겨 본다. ‘신동아’도 7년째 구독하고 있다. 빈말이 아닌 것이, 그는 2011년 한국신문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신문읽기 스타’에 올랐고 2010년엔 동아일보 역대 최연소 칼럼니스트로 등용됐다. 스스로 “음악가가 되지 않았다면 사회부나 정치부 기자가 됐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 그와 신문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마치 다른 언론사 기자와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각 신문의 특징을 명확하게 꿰뚫고 있었고 ‘나와바리’(취재구역) ‘1단’ ‘단독’ ‘5판’ 같은 언론계 ‘전문용어’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 2010년 25세 나이로 동아일보 칼럼니스트가 됐죠.
“처음 제의가 왔을 때 정말 신기했고 기뻤죠. 내가 쓴 칼럼으로 누군가가 논술공부를 한다니…. 제가 죽은 뒤에도 제 글은 동아일보 역사에 남는 거잖아요. 게다가 2010년 동아일보 창간 90주년을 함께한다는 건 정말 영광이었죠. 지금도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로부터 ‘이 양반은 노래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글도 잘 쓰더라’라는 말을 들으면 ‘노래 잘 부른다’는 얘기보다 더 좋아요.”
2003년 미국 카네기홀에서 역대 최연소로 데뷔 무대에 섰다.
“많을 때는 한 달에 40~50권 읽어요. 적어도 한 달에 20권쯤. 친구들은 저를 ‘간첩’이라고 해요. 단 한 번도 스타크래프트 같은 컴퓨터 게임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TV도 잘 안 봐요. 주말 하루만 투자해도 3권은 거뜬히 읽어요.”
▼ 독서 효과를 실감할 때가 있나요.
“제가 즉흥적 스피치를 잘해요.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아마 머릿속에 단어들이 차곡차곡 기록돼 있나봐요.”
▼ 매일 15개나 되는 신문을 읽으려면 나름대로 읽는 방법이 있겠어요.
“일단 단독 보도부터 보고, 풀 기사(언론사 공유 기사)는 넘어가요. 머리기사나 1단 기사를 주로 보면서 그 언론사에서 어떤 정보를 가장 중시하나 보기도 하고요.”
▼ 왜 신문을 그렇게 열심히 보죠?
“SNS나 인터넷은 신속하긴 한데 정확성이 떨어져요. 신문은 기자라는 ‘정보처리 전문가’들이 매일 회의를 거쳐 정보를 취합하고 선택한 후 중요도에 따라 기사를 배치하잖아요. 정제된 고급 정보죠. 신문 보는 사람이 줄어드는 거, 정말 안타까워요. 요즘 CD 음반이 사라지는 걸 보면서 신문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하지만 CD 판매량이 줄어도 여전히 고급 LP판은 고가에 거래되잖아요. 기술이 발전해도 역사적 의미가 있는 신문은 살아남을 거예요.”
장희빈에게 꽂히다
▼ 신동아를 7년째 봤으면 스물한 살부터 본 거네요?
“네. 나이가 들수록 신동아가 재밌어요. 지금도 서재에 신동아가 쭉 꽂혀 있어요. 가끔 심심할 때 몇 년 전 신동아를 꺼내 보면서 ’아, 예전엔 이런 일이 있었지’ 하며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 어떤 기사가 제일 재미있나요.
“지금 정부에 대한 전문가들의 견해를 볼 수 있는 기사요. 또 나이를 먹을수록 정치기사가 재밌어요. 이젠 신문을 봐도 문화면보다 정치면부터 봐요. 친구들에게도 정치에 관심을 가지라고 목놓아 외치는데, 친구들은 무관심해요. 선진 시민, 국가에 기여하는 시민이 되려면 정치를 알아야 해요. 투표도 안 해놓고 정부가 잘못됐다고 말할 자격이 없어요. 저는 1년에 3개월 이상 해외에 체류하지만 크고 작은 선거 투표 단 한 번도 거른 적 없어요. 요즘은 해외 부재자 투표도 되니까.”
▼ 2011년에는 책도 썼죠? ‘임형주, 장희빈을 부르다‘라는.
“칼럼을 쓰다보니 글쓰기에 자신감이 붙었어요. 어릴 때부터 외할아버지한테 역사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장희빈에게 딱 꽂혔어요. 가부장적 유교사상이 지배하는 조선왕조에 태어나 천민의 신분으로 아무 정치적 배경 없이 자기 힘으로 국모의 자리에 올랐어요. 제가 동양인으로서 서양음악을 했고, 팝페라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잖아요. 장희빈의 도전정신에 동질감을 갖고 끌렸나봐요.”
팝과 오페라를 넘나드는 ‘팝페라’는 피아노, 바이올린 등 고전적 악기로 편성된 오케스트라 반주에 대중적인 팝 스타일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1985년 키메라가 ‘더 로스트 오페라’라는 앨범을 내면서 팝페라라는 장르가 생겨났고 미국의 사라 브라이트만, 이탈리아의 안드레아 보챌리 등이 인기를 끌면서 점차 성장했다. 임형주는 예원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미국 줄리어드 음대 예비학교에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합격했지만, 줄리어드를 마다하고 이탈리아 피렌체의 산 피렌체 음악원에 진학했다. 클래식이 아니라 팝페라를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2010년 한국인 최초로 유엔 평화메달을 수상했다.
“어릴 때 들은 음악이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정통 클래식 성악을 공부했지만, 어릴 때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 엘튼 존 등 팝음악을 많이 들었어요. 제가 공연에서 많이 부르는 ‘애모’ ‘IOU’ 등도 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곡이에요.”
▼ 해외 공연도 많이 했죠.
“네, 프랑스, 미국, 일본…. 특히 프랑스 공연이 좋았어요. 파리지앵이 콧대가 높은데, 저를 많이 좋아해주세요.”
▼ 임형주를 잇는 국내 팝페라 스타가 없다는 우려가 있어요.
“임태경, 카이 씨 등이 있는데 이분들은 뮤지컬 배우를 겸업하시니 저와는 분야가 좀 다르죠. 안타까워요. 팝페라라는 시장의 파이가 커져야 하는데. 제가 한국 최초의 팝페라 테너잖아요. 제가 은퇴하면 이 시장이 없어질지도 모르니 어서 후배를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별들의 잔치’
▼ 아직 서른도 안 됐는데 은퇴 생각을?
“남보다 데뷔가 이른 편이었으니 은퇴의 순간도 남보다 이를 거라고 생각해요. 정상의 기량을 발휘할 때 내려오고 싶어요.”
▼ 목소리가 많이 변했습니까.
“물론 10대 때의 청초하고 청아했던 목소리는 안 나와요. 하지만 지금은 원숙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 컨디션 관리는 어떻게 하죠?
“술, 담배를 안 해요. 와인이나 소주를 아주 가끔 입에 대긴 하지만. 포장마차에서 닭똥집 먹는 거 좋아해요. 술은 약해도 한 잔 마시면 열 잔 마신 것처럼 놀아요.”
▼ 쉬는 날은 뭘 하죠?
“제 별명이 ‘집돌이’예요. 집에서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집앞 잔디도 깎고 양재동 화훼시장에서 묘목 사다 심고. 친구들과는 카카오톡이나 카카오 보이스톡 무료전화로 얘기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사교도 좋지만 예술가에겐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요.”
▼ 인맥 넓기로 소문났더군요.
“2012년 11월 오페라극장에서 콘서트를 했는데 정말 ‘별들의 잔치’였어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한덕수 전 총리, 방송인 백지연 씨, 엄기영 전 MBC 사장님 등등 정말 많이 오셨는데 다 표를 사서 오셨어요. 얼마 전 노 관장님을 만나 얘기했는데, 한 50분 흐른 줄 알았더니 5시간 동안 대화를 했더라고요. 한완상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님과는 얼마 전 영화를 같이 봤어요. 1936년 생이시니 제가 증손자뻘이거든요. 또 강남에 40년 된 떡볶이집 아줌마도 저랑 ‘절친’이에요.”
▼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비결이 있나요.
“누구를 만나도 말이 잘 통해요. 가식적으로 ‘잘 보여야지’ 하지 않아요. 나이, 신분, 직업 초월해 누구를 만나도 할 말이 많아요. 아마 신문을 많이 본 덕분인 것 같아요. 저는 참 축복받았어요. 청와대에서 오찬하고 오후에 광장시장에서 부침개 먹는 거, 얼마나 행복하고 짜릿한 일이에요. 유명한 무대에 몇 번 서면 ‘스타병’에 걸리는 사람이 많은데 저는 무대에서 내려오면 일반인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해요.”
▼ 10년간 단 한 번도 슬럼프가 없었나요.
“제가 생긴 건 여성스러워도 뚝심이 있어서 슬럼프가 못 비집고 들어왔어요. 몸이 아플 때는 있었죠. 칠삭둥이로 태어나 몸 이곳저곳이 아파요. 정말 건강이 가장 중요해요.”
“돈 관리도 잘해요”
그는 겨울이면 더욱 바쁘다. 다양한 분야의 홍보대사 활동 때문이다. 대한적십자사, 사랑의 열매, 월드비전, 한국 YWCA, 녹색성장 국민연합 등 8곳의 홍보대사로 활동한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좋은 일 하는 NGO (비정부단체)중 ‘유니세프’ 빼고는 모두 내가 홍보대사”라고 말한다. 인터뷰 당일에도 사랑의 열매 행사에 다녀왔다. 그의 옷깃엔 동글동글한 ‘사랑의 열매’ 배지가 달려 있었다. 그는 겨우내 ‘사랑의 열매’ 배지를 코트 주머니 가득 넣고 다니며 만나는 이들의 옷에 꽂아준다.
▼ 홍보대사 제의가 오면 다 응하나요.
“네,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회단체라면 무조건 도와야죠. 근데 돈은 안 받아요. 홍보대사랍시고 CF 찍고 개런티 받는 경우도 있는데 그게 어떻게 홍보대사인가요, 광고모델이지. 절대 이름만 걸고 활동 안 하는 홍보대사는 안 해요. 그러다 보니 집에 국가기관, 자선봉사단체, NGO 같은 데서 준 공로패가 아주 많아요.”
▼ 홍보대사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어릴 때부터 과분한 사랑을 받았어요. 그 사랑을 돌려드려야죠. 여전히 어렵게 사시는 분이 너무 많아요. 제가 노래로, 잠깐의 참여로 도와드릴 수 있다면 무조건 해야죠.”
▼ 기부도 많이 한다고 들었어요.
“제가 번 돈 중 당장 쓸 돈만 남기고 다 기부해요. 다행히 집이 유복하기도 하고요. 지금까지 번 돈의 3분의 2는 다 기부한 것 같아요. 한때 ‘내가 미쳤지. 그때 왜 그렇게 많이 기부했지’ 하고 후회한 적도 있지만 기부하고 나면 대체로 홀가분해요. 이 돈은 불특정 다수로부터 과분한 사랑과 지지를 받은 대가니까 돌려드리는 게 당연해요. 더러 ‘나중에 정치하려고 그러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데, 저는 정치할 생각 전혀 없어요. 그냥 음악가로서 사회에 보탬이 되고 싶을 뿐이에요.”
▼ 절약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던데.
“5년 전부터 제 수입을 다 제가 관리하는데, 저 돈 관리를 참 잘해요. 주식도 잘 하고요. 저축도 많이 하는데 목표가 있으면 절대 적금을 끊지 않아요. OK캐시백을 25만 점까지 모은 적이 있고, 신용카드 포인트, 할인혜택도 꼼꼼하게 챙기죠. 예술 하는 친구들이 세상물정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철저한 편이에요. 하지만 스크루지 영감 같은 구두쇠 스타일은 아니에요. 값이 나가도 시계, 백 등 정말 갖고 싶은 건 꼭 사요. 다만 과소비하지는 않는 거죠. 어차피 모든 물건은 시간이 지나면 고물이 되니까.”
▼ 임형주 씨와 동갑이고 같은 나이에 데뷔해 ‘천사의 목소리’로 주목받았던 영국 팝페라 소프라노 샬럿 처치는 천상의 목소리로 주목 받았지만 어린 나이에 임신과 유산을 반복하는 등 ‘스캔들 메이커’가 됐어요. 반면 임형주 씨는 데뷔 이래 단 한 번도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온 적이 없어요.
“인생은 신이 주신 소풍이라고 생각해요. 제게 주어진 인생을 정말 잘 살아서 기분 좋은 소풍을 마쳤으면 해요.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거나 유명 콘서트홀에서 공연하는 것도 좋겠지만, 무엇보다 저 스스로가 행복한 사람이 돼서 ‘영원히 행복한 음악인’으로 남고 싶어요.”
“결혼 스케줄은 없네요”
▼ 이제 스물여덟인데, 결혼 생각은 없어요?
“데뷔를 일찍 해서 다들 제가 30대 중반쯤일 거라 생각하는데 저 아직도 20대예요. 재작년부터 친한 친구들이 한둘씩 결혼하면서 세월의 무게를 느껴요. 특히 예원학교 때부터 친했던 여자친구 3명이 작년에 모두 결혼했어요.”
▼ 2013년 채문선 애경산업 마케팅 부문과장(애경산업 채형석 부회장 장녀)과 이태성 세아홀딩스 상무(세아그룹 고 이운형 회장 장남) 결혼식에서 15인조 오케스트라와 함께 축가를 불렀죠.
“네, 채문선 씨가 제 예원학교 성악과 동문이에요.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라, 제가 15인조 오케스트라에 하프까지 갖춰놓고 축가 불렀죠, 축의금 대신. 하객들이 콘서트에 온 것처럼 좋아하셨어요. 제일 친한 친구가 같이 예원학교 입학식을 했던 정동교회에서 결혼하니 얼마나 기쁘고 뿌듯해요. 축가 비용은 하나도 안 받았어요. 대신 애경그룹에서 비누, 치약, 샴푸 삼종 선물세트 받았어요.”
▼ 그런 걸 봐도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떠밀려서가 아니라 때가 될 때 하고 싶어요. 지금은 3년 정도 스케줄이 다 차 있는데, 그 안에 결혼이라는 스케줄은 아직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