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호

재벌가 혼인이 낳은 미국 초현대 미술 寶庫

뉴욕 휘트니 미술관

  • 입력2014-10-22 14: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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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은 주(州)마다 도시마다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미술관이 적어도 하나씩 있다.
    • 세계 미술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빠르게 이동한 데는 이런 미술관의 역할이 컸다. 여기, 미술관에 심취한 경제학자가 있다. 그는 미국 전역의 미술관을 순례하며 미국 부자들이 어떻게 예술을 통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 빛나는 유산을 남겼는지에 주목했다. 뉴욕 휘트니 미술관을 시작으로 그를 따라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미술관 순례를 떠나본다. <편집자>
    재벌가 혼인이 낳은 미국 초현대 미술 寶庫

    1931년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처음 문을 연 휘트니 미술관의 외관 스케치.

    뉴욕 맨해튼의 부촌, 어퍼이스트사이드(Upper East Side)엔 주변 건물과는 사뭇 다른 외양의 현대식 건물이 하나 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남쪽 끝자락에서 다섯 블록 아래로 내려가면 매디슨 애비뉴의 75번 스트리트에서 만나는 휘트니 미술관이다. 정식 이름은 휘트니 미국 작품 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이름에서 보여주듯 미국화(American art) 전문 미술관이다.

    이곳은 20세기 이후 미국 작가 2900여 명의 작품 2만여 점을 소장한 미국 미술의 보고(寶庫)다. 생존 작가를 중심으로 작품을 수집해왔는데, 조지아 오키프, 잭슨 폴록 등 20세기 전반 미국 작가들의 작품이 특히 많다. 지금은 작고했지만 생존해 있을 때, 그리고 아직 유명 작가가 되지 않았을 때 휘트니 미술관은 이들에게 관심을 가졌고 꾸준하게 작품을 구입했다. 이것이 다른 미국 미술관과 휘트니 미술관을 구별 짓는 중요한 차이점이다. 말하자면 휘트니 미술관은 미국 신예 작가들을 위한, 신예 작가들에 의한, 신예 작가들의 미술관이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오판’

    이 미술관을 세운 사람은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Gertrude Vanderbilt Whitney·1875~1942)라는 여성이다. 그녀의 이름에는 미국의 명문가 ‘밴더빌트’와 ‘휘트니’가 함께 들어가 있다. 휘트니가 맨 뒤에 놓인 걸로 봐서 밴더빌트 집안에서 태어나 휘트니 가문으로 시집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거트루드는 서른 살 전후인 1900년대 초 유럽을 여행하면서 예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조각에 관심이 많아 조각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뉴욕과 파리에서 조각을 공부했고 맨해튼 그리니치빌리지에 스튜디오를 열고 작품활동에 몰입했다. 거트루드의 작품은 유럽과 미국에서 호평을 받았다. 한때는 로댕과 함께 일하기도 했다. 그녀의 작품은 지금도 세계 여러 곳에 전시돼 있다. 뉴욕에도 있는데, 매디슨 스퀘어에 있는 ‘빅토리 아치(Victory Arch)’가 그녀의 작품이다.



    직접 작품활동을 해본 거트루드는 신진 작가들의 고충을 알게 됐고, 그래서 이들을 후원하는 일에 나섰다. 1914년 마흔 살의 거트루드는 맨해튼에 젊은 작가들을 위한 전시공간인 ‘휘트니 스튜디오 클럽’을 마련하는데, 이것이 오늘날 휘트니 미술관의 싹이 된다. 거트루드는 여기에 자신이 수집한 작품들을 전시하면서 신진작가 후원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29년 거트루드는 25년간 수집한 현대미술품 700여 점을 기증하고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거절했다. 거트루드가 소장한 작품들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작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작품들은 돈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대작이 돼 있는데, 제아무리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라도 앞을 내다보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 일로 충격을 받은 거트루드는 직접 미술관을 세우기로 작심한다. 휘트니 미술관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거트루드는 얼마나 부자였기에 미술작품을 척척 수집하고 아예 미술관을 직접 세울 수 있었을까.

    거트루드의 친정인 밴더빌트가(家)는 19세기 초 미국 최고의 부자 가문 중 하나였고, 시댁인 휘트니가는 19세기 후반에 정계와 재계를 주름잡는 명문가였다. 밴더빌트가는 일찍이 1600년대 중반 뉴욕으로 이민 온 네덜란드계의 후손이다. 가문을 일으킨 사람은 코넬리우스 밴더빌트(Cornelius Vanderbilt·1794~1877)로, 그는 뉴욕 항 입구에 있는 스테이튼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자유의 여신상이 서 있는 바로 그 섬이다.

    재벌가 혼인이 낳은 미국 초현대 미술 寶庫

    뉴욕 휘트니 미술관은 맨해튼 매디슨 애비뉴 75번 스트리트에 자리하고 있다.



    재벌가 혼인이 낳은 미국 초현대 미술 寶庫

    휘트니 미술관은 2015년 맨해튼 첼시 지역으로 확장 이전한다. 오른쪽 흰색 건물이 하이라인 파크와 인접한 휘트니 미술관의 새 건물이다.

    록펠러 다음가는 부자

    코넬리우스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채 11세 때부터 아버지가 일하던 뉴욕항의 여객선에서 보조 일을 했다. 당시에는 가장 중요한 수송수단이 여객선이었고, 코넬리우스는 20대 중반에 직접 여객선 사업에 뛰어들었다. 여객선은 허드슨 강을 건너는 것에 더해 인근 연안을 연결하는 교통수단이 됐고, 대양으로까지 나가는 중요 교통수단으로 발전했다. 그는 해상 수송사업을 장악하며 부의 성을 쌓아나갔다.

    코넬리우스는 육지 수송에도 진출했다. 당시 육상 수송의 총아는 철도였는데, 미국에선 민간이 철도를 건설하고 운영했다. 그는 동부지방의 중요 철도를 거의 다 장악했고, 마침내 미국 최고의 부자로 등극했다.

    이 야심만만한 사업가의 흔적은 미국 테네시 주 내슈빌에 있는 밴더빌트 대학(Vanderbilt University)에 남아 있다. 그는 죽기 직전 이 대학에 100만 달러를 기증했는데, 이 금액은 당시까지 미국 역사상 최고의 기부금액이었다고 한다. 사망 당시 그의 재산은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무려 1400억 달러(약 150조 원)에 달한다고 한다. 빌 게이츠의 전성기 재산이 1000억 달러였으니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미국 역사상 록펠러 다음의 두 번째 부자라고 한다.

    코넬리우스는 19세 때 한 살 아래의 사촌누이와 결혼해 13명의 자녀를 낳았다. 대부분의 재산은 장남 윌리엄(William Henry Vanderbilt·1821~1885)에게 상속됐다. 거트루드는 윌리엄의 장손녀다. 거트루드가 1875년에 태어났고, 그녀의 증조할아버지 코넬리우스가 1877년에 사망했으니 둘의 생존기간은 잠시나마 겹친다. 거트루드는 재벌가의 상속녀로 매우 유복하게 자랐다.

    대재벌가의 상속녀가 어디로 시집갈지는 뻔하다. 21세에 또 다른 재벌가문의 후손이면서 스포츠광인 해리 휘트니(Harry Payne Whitney·1872~1930)와 결혼했다. 시아버지 윌리엄 휘트니(William C. Whitney·1841~1904)는 재벌 사업가였고, 시어머니는 상원의원의 딸이었다. 남편 해리는 예일대 출신의 변호사이자 폴로 선수, 승마 선수로 활약하면서 순종 말을 키우기 위해 말 농장까지 경영한, 한마디로 미국 최고의 인텔리 기득권자였다.

    시댁 집안의 조상들은 1635년 런던에서 미국으로 이민 와 매사추세츠 주에 정착한, 이른바 ‘미국 양반’이었다. 시아버지는 사업가이자 오늘날 미 국방장관인 해군성 장관을 지낸 정치인이기도 했다. 남편 해리는 아버지의 은행, 담배, 석유사업 분야에서 막대한 부를 상속받았다.

    기획전시에 초점

    거트루드가 직접 미술관을 세우기로 결심한 무렵인 1929년, 뉴욕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이 개관한다. 이 미술관은 미국보다 유럽의 현대미술에 더 관심이 많았다. 거트루드는 이와 차별을 두어 미국 미술만을 위한 미술관을 짓기로 마음먹는다. 그녀는 1931년 그리니치빌리지에 있던 스튜디오 클럽 자리에 주거와 미술관 겸용의 새 건물을 마련, 당시 신진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데 역량을 집중한다. 이것이 휘트니 미술관의 출발이다. 조지아 오키프, 잭슨 폴록, 제프 쿤스 등 미국 최고의 작가들은 이런 휘트니 미술관을 통해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휘트니 미술관을 이야기할 때 휘트니 비엔날레(Whitney Bienniale)를 빼놓을 수 없다. 이는 미국 신진작가를 양성한다는 미술관 설립 취지에 맞춰 2년마다 여는 젊은 작가들의 전시회다. 휘트니 비엔날레는 1973년부터 시작됐지만, 그 출발은 이보다 훨씬 이전인 1932년부터 개최된 연례 전시회(annual exhibition)라고 할 수 있다.

    휘트니 비엔날레는 전 세계 예술계의 최고 행사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전시회에서 호평받는 작가는 성공을 담보한 셈이 된다. 대표적인 예가 현재 미국 최고의 현역 작가로 꼽히는 제프 쿤스다. 그는 1987년 휘트니 비엔날레에 참가한 이후 대중적 인기와 국제적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재벌가 혼인이 낳은 미국 초현대 미술 寶庫
    휘트니 미술관은 상설전시보다는 기획전시에 무게를 둔다. 내가 방문한 2011년에는 상설 전시품이 하나도 없고, 주로 기상천외한 초현대 작품들(contemporary arts)을 전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라이오넬 파이닝거(Lyonel Feininger·1871~1956)라는 옛 화가의 기획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은 작품을 모아놨는데, 파이닝거 작품을 이렇게 많이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렇듯 휘트니 미술관은 기획전시에서 남다른 능력을 과시하고 있다.

    휘트니 미술관은 가장 미국적인 화가로 꼽히는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1882~1967) 작품의 보고이기도 하다. 호퍼의 부인은 남편이 사망한 이듬해 2500점이 넘는 호퍼의 작품을 휘트니 미술관에 기증했다. 단일 작가 작품으로는 미국 미술관 역사상 최대의 기증이다. 역시나 거트루드가 호퍼를 높게 평가해 생전에 그의 작품을 많이 구입한 것이 인연이 돼 이뤄진 일이다.

    뉴욕 주에서 태어난 호퍼는 맨해튼 그리니치빌리지에서 평생을 보내면서 뉴욕의 모습, 특히 맨해튼의 인간 군상을 많이 그렸다. 그는 도시에 사는 인간의 소외감과 고독을 표현한 화가로 평가받는다. 호퍼는 1932년부터 휘트니 연례 전시회에 매년 참가했다.

    휘트니 미술관이 소장한 그의 작품 중에 ‘햇빛을 받고 있는 여인’(A Woman in the Sun, 1961)을 꼭 언급하고 싶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이 방 한가운데 서서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정면으로 받고 있다. 여인 옆 침대의 이부자리를 보면 발가벗고 자다가 막 일어난 것 같다. 손가락에는 피우던 담배가 들려 있고, 여인은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이다. 이지적이면서도 쓸쓸하다. 호퍼는 뉴욕에서 태어나고 활동한 도시 사람인 만큼 도시인의 고독을 누구보다 잘 알고 표현한 작가다.

    휘트니 미술관은 거트루드의 초상화도 소장하고 있다. 로버트 헨리(Robert Henri ·1865~1929)가 그린 1916년 작품인데, 이 그림이 주목받는 것은 거트루드가 휘트니 미술관의 창립자여서가 아니라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초상화이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초상화, 특히 여성의 초상화는 화려하게 단장한 우아한 모습이 대세였다. 그런데 헨리가 그린 거트루드는 파자마 같은 바지에 윗옷은 앞을 풀어헤쳤고,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팔 다리를 자유롭게 뻗고 있다. 이런 모습은 19세기에 많이 그려진 매춘부 누드화와 비슷하다. 단지 옷을 입고 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남편 해리는 이 그림을 집 안에 걸지 못하게 했다. 결국 이 그림은 1931년 휘트니 미술관이 개관하고 나서야 벽에 걸릴 수 있었다.

    거트루드의 초상화를 그린 로버트 헨리 또한 한 시대를 풍미한 화가다. 1929년 미국 최고의 생존작가 3인에 뽑혔을 정도다. 1865년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서 태어나 방랑기 많은 아버지를 따라 네브래스카, 콜로라도 등을 전전하며 살았고, 18세 때인 1883년 뉴욕으로 왔다. 이후에도 뉴저지, 필라델피아, 프랑스 파리 등으로 옮겨 다녔다.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많은 화가를 양성했는데, 에드워드 호퍼, 조지 벨로스 등이 그의 제자다.

    내년 새 둥지로 이사

    휘트니 미술관은 2억 달러가 넘는 수익자산을 갖고 있다. 특히 에스디 로더 화장품 회사의 사장인 레너드 로더가 2008년 이 미술관에 1억3000만 달러라는 거금을 기부했다. 1931년 600여 소장품으로 시작해, 어퍼이스트사이드의 현재 건물로 이전한 1966년에는 2000여 점으로 늘어났다. 현재 소장품은 2만여 점이라고 한다.

    거트루드는 1942년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미술관 운영에 온 정성을 쏟았다. 그는 1남 2녀를 뒀는데, 두 딸은 휘트니 미술관 운영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거트루드의 손녀 플로라 밀러 비들은 1999년 가족에 대한 회고록인 ‘휘트니의 여자들과 미술관(The Whitney Women and the Museum They Made)’을 펴냈다. 이에 앞서 1982년에는 거트루드에 대한 영화 ‘Little Gloria, Happy At Last’가 나온 바 있다.

    재벌가 혼인이 낳은 미국 초현대 미술 寶庫
    최정표

    1953년 경남 하동 출생

    미국 뉴욕주립대 박사(경제학)

    공정거래위원회 비상임위원, 건국대 상경대학장

    저서 :‘재벌들의 특별한 외도’ ‘한국재벌사연구’‘공정거래정책 허와실’‘한국의 그림가격지수’등

    現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경실련 공동대표


    휘트니 미술관은 2015년 완공을 목표로 맨해튼 첼시 지역에 새로운 건물을 짓고 있다. 맨해튼 서쪽 해안가의 지상 철도를 공원으로 바꾸어놓은 하이라인 파크 바로 옆이다. 첼시로 이전하고 나면 현재 건물은 한때 휘트니를 거부했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사용할 것이라고 한다. 오늘날 미국 미술관들은 소장품이 급속도로 늘어나 공간 문제에 골치를 앓고 있다. 미술관이 빠져나간 자리에 다시 미술관이 들어선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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