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호

“MB 측근들, 수정안 관철 의지 있었나”

세종시 수정안 주도, 정운찬 前 총리 토로

  • 강지남 기자 | layra@donga.com

    입력2015-02-16 15: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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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시 때문에 나를 총리로 불렀다면 유감
    • 대선후보에 버금가는 행보?…이해 못할 말
    • ‘친박’에게 수모 많이 당했다
    • 세종시, 지금이라도 원점으로 돌려야
    “MB 측근들, 수정안 관철 의지 있었나”
    이명박 전 대통령이 최근 펴낸 786쪽짜리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 중 세종시는 9장 30절 ‘안타까운 세종시’에서 34쪽 분량으로 다뤄졌다. 이 전 대통령은 세종시 수정안 추진과 좌절에 대해 ‘정운찬발(發) 섣부른 이슈화→차기 대선을 의식한 박근혜의 강력 반대→국회 표결에서 끝내 부결’로 정리했다. 주요 대목은 아래와 같다.

    나는 정운찬 전 총장이 총리로 취임한 후 여당과 교감을 갖고 세종시 수정안을 만들어 발표하는 것이 순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2009년 9월 3일 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정 전 총장은 서울대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다가 세종시에 관한 자신의 소신을 여과없이 밝혀 버렸다.

    박근혜 전 대표를 비롯한 이른바 ‘한나라당 비주류’의 반응은 싸늘했다. 2007년 대선 초기 정운찬 전 총장이 대선 후보에 버금가는 행보를 한 전력이 결정타였다. 전혀 근거 없는 추론이었지만, 내가 세종시 수정을 고리로 정운찬 총리 후보자를 2012년 여당의 대선 후보로 내세우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의심을 사게 됐다.

    천안함 폭침 사건으로 온 나라가 어수선한 정국에서 야당이 극력 반대하는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치는 것도 대통령의 도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세종시 수정안은 재석 275명, 찬성 105명, 반대 164명, 기권 6명으로 끝내 부결됐다. (…) 못내 허탈했다. 나에게도 잘못이 있지만, 우리 정치권과 나라의 앞날이 걱정스러웠다.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수정 프로젝트 중심에는 정운찬(69) 전 국무총리가 있다. 잘 알려졌다시피 그는 총리 내정자 시절부터 ‘세종시 원안 반대’의 총대를 어깨에 멨고, 세종시 수정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책임지고 사퇴했다.

    정 전 총리는 ‘대통령의 시간’ 집필에 참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세종시 총리’가 보고 겪은 수정안 추진 과정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드문 수도 분할 과정을 보다 다각도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한때 모셨던 분의 저술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며 한사코 손사래치는 그를 2월 6일 서울 관악구 (사)동반성장연구소에서 어렵사리 만났다.

    ‘수정안 더 잘 만들어야겠다’

    ▼ ‘대통령의 시간’은 읽어보셨나요.

    “책이 어제 도착해서 아직…. 신문에 발췌된 부분들은 읽었습니다.”

    ▼ 책에 ‘세종시 수정안을 총괄해 추진할 적임자가 새 총리가 되기를 바랐다’며 먼저 충남도지사를 지낸 심대평 자유선진당 대표가 물망에 올랐다가, 같은 충청권 출신인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내정했다고 기술됐습니다.

    “총리 내정 전과 후에 이 전 대통령을 만났지만, 세종시의 ‘세’ 자도 안 나왔습니다. 당시 정부가 여러모로 수세였어요. 대통령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을 총리로 데려가면 국민 지지가 높아지지 않을까 해서 제가 발탁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더욱이 총리에 앞서 여러 자리를 제안했었기에 또 거절하기가 어려웠고요.”

    2013년 6월 1일자 동아일보 ‘비밀해제 MB 5년 : 원 포인트 국무총리’에 따르면, 2009년 9월 1일 밤 곽승준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장은 이 대통령의 전화를 받고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정정길 대통령실장 관저로 안내한다. 정 실장은 정 전 총장에게 세종시와 4대강 사업에 대한 생각을 물었고, 정 전 총장은 ‘세종시 계획은 효율적이지 않다’는 취지로 대답한다. 곧 정 실장은 대통령의 뜻이라며 총리 직을 제안한다.

    이에 대해 정 전 총리는 “그날 밤 정 실장을 만난 것은 사실이고, 그 후에도 낮에 한 번 더 만났다”며 “하지만 세종시 얘기를 나눈 적이 없는 걸로 기억한다”고 했다.

    ▼ 당시 이미 청와대는 세종시 수정안 마련에 착수했습니다. 충청권 인사가 총리가 돼 이 일을 맡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고요.

    “세종시 사업을 하라고 저를 불러간 것이라면, 만약 그랬다고 지금 언급했다면 저로서는 유감입니다.”

    ▼ 2009년 9월 3일 총리 내정자 신분으로 ‘세종시 수정’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이 파급력이 매우 컸습니다. 이렇게 세종시 수정 추진이 너무 일찍 공개돼 이후 일이 꼬였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청와대에 있는 가까운 사람이 저한테 전해주기를, 그날 저녁 정운찬이 세종시 원안은 안 된다고 했다는 뉴스가 나오자 청와대 스태프들이 TV를 보며 환호했대요. 비록 조율을 거치지 않은 속내였지만, 준비를 다 한 다음에 발표했다면 일이 순조롭게 풀렸을까요? 모르겠네요, 허허.”

    정 전 총리는 총리 취임 한 달 후 언론인들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수정안이 완성되면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 보여드리고 설득하겠다”고 말했다. 며칠 뒤 국회 대정부 질문에 출석한 그는 한 친박계 의원으로부터 “감히 누가 누구를 설득하겠다는 거냐”며 심하게 질책당했다.

    ▼ 국회 특유의 권위주의를 처음 겪으신 셈인가요.

    “어휴, 권위주의를 뛰어넘었죠. ‘누가 누구를!’ 하며 호통을 치는데…. 두 가지 생각이 들더군요. 하나는 친박은 수정안에 절대 반대하겠구나. 또 하나는, 그러니 더욱 더 수정안을 잘 만들어야겠다. (한숨을 쉬며) 정말 잘 만들려고 노력했어요. 세종시 민관합동위원회에 원안을 강력하게 고수하는 분을 모셨고, 회의 결과를 발표할 때마다 소수의견이 있었다는 것도 꼭 밝히라고 지시했습니다.”

    ‘준비도, 능력도, 수단도 없다’

    “MB 측근들, 수정안 관철 의지 있었나”

    2010년 8월 10일 오전 청와대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마친 뒤 이튿날 퇴임식을 하는 정운찬 당시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2010년 1월 11일 정부는 4조5000억 원 규모의 기업 투자를 유치, 세종시를 기업도시로 만들겠다는 세종시 수정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약속을 지켜라”는 박근혜 전 대표 측은 요지부동이었다. 2월에는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 사이에 ‘강도’ 배틀이 붙었다. 이 대통령이 “잘되는 집안은 강도가 오면 싸우다가도 멈추고 강도를 물리치고 다시 싸운다”고 하자, 박 전 대표는 “집안에 있는 한 사람이 마음이 변해서 갑자기 강도로 돌변하면 그때는 어떻게 하느냐”고 맞받아쳤다. 발끈한 청와대는 “박근혜 의원은 대통령에 대한 기본 예의를 지켜야 한다”며 사과를 요구했다.

    ▼ 분위기가 격해진 그때 대통령을 찾아가 ‘세종시 수정안을 도와주면 (박근혜 전 대표의) 차기 대선을 도와주겠다고 하라’고 말씀하셨다면서요.

    “맞아요. 세종시는 국가의 중차대한 문제니 박 전 대표에게 꼭 좀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되, 대신 차기 대선에서 최대한 돕겠다고 말씀하시라고 했어요.”

    ▼ 그 말에 이 전 대통령이 ‘꽤 심각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고 동아일보에 나왔습니다.

    “그건 말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밝히는 것이 적절치 않아요.”

    ▼ 2012년 대선에 나올 생각이 없었습니까.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지, 무엇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넥스트 스텝, 그러니까 ‘총리 잘해서 대통령 돼야지’ 같은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지금도 정치할 거냐고 묻는 분들이 있는데, 동반성장사회를 만드는 것이 제가 할 일이에요. 이 일에 주력할 겁니다.”

    그는 “총리 일이 얼마나 많은 줄 아세요? 정말 별거 다 해요”라며 웃었다. 총리 시절, 그가 용산 참사 유족과 부산 화재 일본인 희생자 유족을 찾아가 무릎 꿇은 일은 당시 큰 화제가 됐다. 그는 “휠체어 탄 분들에게 훈장을 달아드리면서도 무릎 꿇었다”며 “나라를 위해 무릎 꿇는 게 대수냐”고 했다.

    ▼ ‘대통령의 시간’에 언급된 정운찬 대선 후보설(說)에 대해 청와대가 발끈했습니다.

    “신문에 발췌된 그 부분을 봤는데, 두 가지가 좀…. 확실하게 입장을 밝힐 것이지, 왜 ‘근거 없는 추론’이라고 애매모호하게 얘기했는지…. 그리고 ‘결정타’죠? ‘대선 후보에 버금가는 행보를 한 전력이 결정타’라는 표현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2007년 초반 ‘정운찬이 전국을 돌며 특강 정치를 한다’는 말이 나왔다. 당시 일에 대해 그는 “많은 분이 대선에 나오라고 하도 진지하게 권해서 ‘고민해보겠습니다’라고 하고, 전국 대학에 강의를 다니며 정치 상황을 둘러봤다”며 “두어 달 다니다보니 ‘나는 준비가 안 됐다, 능력도 없고 수단도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리고 4월 불출마 선언을 했다. 그게 끝”이라고 했다.

    ▼ 회고록 집필 팀으로부터 자문 요청은 없었나요.

    “이 전 대통령이 회고록 쓴다고 말씀한 적은 있지만, 읽어보고 고쳐달라고 한 적은 전혀 없어요.”

    ▼ 두 분은 자주 만납니까.

    “작년과 금년에 신년 인사를 갔어요. (이명박 정부) 장·차관 모임에도 두어 번 나갔고요. 퇴임 이후에 개인적으로 서너 번 뵌 것 같아요.”

    “李·朴 협조 가능성 안 보여”

    정 전 총리는 충청도에 열댓 번 내려가고 친박 인사들과 수차례 접촉하며 세종시 수정안 설득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옛 연기군에서는 한밤중에 계란을 맞을 뻔도 했고, 친박 의원들로부터는 냉대와 수모를 많이 당했다고 한다. 그는 “좀 유치하긴 한데…”라며 일화 한 토막을 공개했다.

    “63빌딩에서 한 친박 의원을 기다렸어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자리가 상석인 것 같아 그 반대편에 앉았어요. 그런데 하필이면 출입문이 한강 보이는 자리 옆에 있는 거야. 우리 스태프가 ‘문과 먼 자리가 상석 아닐까요?’ 해서, 내가 한강 보이는 자리로 옮겨 앉았죠. 친박 의원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대뜸 ‘손님 초대해놓고 주인이 상석에 앉습니까?’라고 쏘아붙이더군요. 속으로 ‘잘났다’ 했죠, 허허.”

    ▼ 친박 쪽 찬성을 이끌어내기가 요원했습니까.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가 협조할 가능성이 별로 안 보였어요. 제가 박 전 대표 댁 앞으로 찾아가 기다렸다가, 귀가하실 때 담판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했어요.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라며 찬성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회창 씨 선례를 들어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친박 의원 몇 분에게 전화 걸어 만나게 좀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다들 ‘안 만나 줄걸요?’ 하더라고요.”

    2007년 대선 캠페인 막바지에 이회창 당시 무소속 대선 후보는 박 전 대표의 지지 성명을 끌어내기 위해 세 차례나 박 전 대표의 자택을 찾아갔지만 결국 만나지 못했다.

    ▼ 박 전 대표가 세종시 수정안에 왜 결사반대했다고 봅니까.

    “거기에 대해선 대답할 수가 없어요.”

    정 전 총리는 세종시 수정안을 국민투표에 부쳐야 한다고 여러 번 제안했다. 그는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고 밝혔다.

    “사람 눈빛을 보면 대강 짐작이 가잖아요. 수정안 발표 후 국회 대정부 질의에 출석했을 때 의원들 눈빛을 보고 국회에 의지해서는 별 승산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민투표를 주장한 이유는 두 가지예요. 하나는 국가 운명이 걸린 중차대한 문제이므로 국민 전체에게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또 하나는 17대 국회에서 확정된 원안을 18대 국회에다 바꿔달라고 하는 것이 무리라고 봤어요. 인적 구성이 달라지긴 했지만 국회는 국회잖아요.”

    ▼ 국민투표를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저는 (수정안이) 이겼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세종시를 서울과 수도권이 좋아하겠어요, 아니면 부산이 좋아하겠어요? 물론 국민투표에 부치면 제 고향인 충청이 이겨도 고립, 져도 고립될 수 있다는 걱정이 들었죠. 6월 청와대에서 열린 세종시 수정안 관련 마지막 회의에서도 저는 ‘국민투표가 옳은 선택’이라고 말씀드렸어요.”

    다음 정부로 넘기자?

    김연광 19대 국회의장 비서실장이 쓴 책 ‘선택’(2011)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김 실장은 2009년 10월부터 특임장관실 특임실장을 지내며 세종시 수정안 작업에 참여했다.

    총리실에서는 “청와대 참모들이 게으르고, 실현 가능성 없는 꿈같은 아이디어만 내놓는다” “국민투표가 안 된다면, 세종시 수정안을 관철할 대안을 내놓아야 할 것 아니냐”며 불만을 터뜨렸다.

    ▼ 박심(朴心)을 어떻게든 돌리던가, 아니면 다른 방안을 강구했어야 했는데, 청와대는 무엇을 했습니까.

    “대통령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세종시 원안을 정말 수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수정할 의지가 확고한지에 대해 당시 저는 확신을 못했어요. ‘이게 국민투표감이냐’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하기 싫으니까 그러는 거 아니겠습니까.”

    ▼ 다음 정부로 넘기자는?

    “비슷한 거죠. 그런데 다음 정부로 넘겨야 하겠습니까? 결과적으로 제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았지만 후회하진 않아요.”

    ▼ 2010년 6월 29일 국회 본회의 표결에 대한 전망은 부정적이었죠.

    “국가의 장래보다는 개인, 나아가서는 정파나 정당을 우선하는 정치 풍토에서 세종시 수정안이 가결되긴 힘들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 전 대통령이 퇴임 후에 하신 말씀인데, 그분은 국회에서 가결될 걸로 생각했다더군요.”

    정 전 총리는 이튿날 “세종시 수정안을 관철시키지 못한 데 대해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는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대통령 해외 순방 중에 총리가 사퇴하겠다고 하는 것이 옳지 않아 표현을 ‘사의’에서 ‘책임’으로 바꿨다”고 회고했다.

    “이 전 대통령은 귀국 후 저를 불러서 그만두지 말라며 만류했어요. 제가 ‘대통령께서는 프리핸드(자유재량)를 가지고 일하셔야 합니다’라고 말씀드렸죠. 그리고 남은 업무를 마무리하고 8월 11일 퇴임했습니다.”

    ▼ 세종시 수정안은 결국 정치논리에 희생됐습니다.

    “국회의원 각자가 사안마다 옳고 그름을 택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자신이나 정파, 정당을 중심으로 표결해선 안 돼요. 게다가 내각책임제라면 당의 의견이 있을 테지만, 한국은 대통령 중심제예요. 자신이나 정파의 이익을 위해 의사 결정하는 건 옳지 않아요.”

    “할 말은 다 했다”

    정 전 총리는 “내가 써놓은 글이 있는데…” 하며 A4용지 3장을 건넸다. 글의 요지는 이렇다. ‘세종시는 국가경쟁력 강화 측면에서 실패고, 국토균형발전 측면에서도 목적 달성을 기대하기 힘들다. 정치인이 단지 표를 얻기 위한 거짓 신뢰를 앞세울 경우 국가와 국민의 미래에 부담만 남긴다는 것을 세종시가 가르쳐주고 있다.’

    “언론은 이 전 대통령 회고록에 대해 ‘타이밍이 안 좋다’는 등의 지적을 하는데, 이왕 세종시가 거론됐으면 ‘세종시 문제를 다시 한 번 점검해보자’라고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미 된 것’이라는 사고 때문에 나라 망합니다. 2년 해보니까 비용이 무지 많이 들었어요. 앞으로도 계속 비용이 들어갈 거고요.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비용은 인정하고, 세종시를 다시 원점으로 돌려야 해요.”

    ▼ 한 차관급 공직자는 “정책도 상품이라 팔아야 하는데, 마켓이 서울에 있으니…”라고 토로하더군요.

    “가장 큰 문제가 차분하게 의사 결정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정말로 나라의 앞날을 좌우할 의사결정이 많이 있잖아요. 그런데 장관은 서울에 있고, 차관은 서울 가는 중이고….”

    정 전 총리는 안대희 전 대법관이 총리 후보에서 낙마한 이후인 지난해 6월, 채널A 시사프로그램 ‘이동관의 노트’에 출연해 “대통령과 팀워크를 잘 이룰 수 있는 사람이 총리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 이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2002년 무렵부터죠.

    “서울대 총장에 막 취임했을 때예요. 서울대 앞 고가도로 계획을 취소해달라는 민원을 가지고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을 처음 만나러 갔어요. 씩씩하고 좋더라고요. 솔직해 보이고요. 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후 저한테 여러 자리를 제안하신 걸 보면, 그 분도 저를 좋게 보셨던 것 같고요.”

    ▼ 두 분의 팀워크는 어땠습니까.

    “싸운 적은 없어요. 할 말은 다 했어요. 근데 자존심이 센 분이라 그런지 ‘당신이 옳다’는 말은 안 해요(웃음). 제 말을 들어주셨습니다. 받아줬는지는 모르겠지만. 관계가 나쁘진 않았다고 생각해요.”

    “MB 측근들, 수정안 관철 의지 있었나”

    정운찬 당시 총리가 충남 연기군을 찾은 2009년 10월 30일, 거리로 몰려나와 세종시 원안 추진을 주장하는 충남 연기군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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