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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에서 난 용들은 왜 불안하고 번민하나

수원 화성, 근대를 향한 열망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개천에서 난 용들은 왜 불안하고 번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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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꿈

정조는 곧장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莊獻)으로 추존하고 지금의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기슭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호를 수은묘(垂恩墓)에서 영우원(永祐園)으로 바꿨다. 또한 자신의 자리도 스스로 마련했으니 융릉(隆陵) 옆에 조성된 건릉(健陵)이 곧 정조의 능이다. 융릉은 사도세자와 헌경왕후(獻敬王后) 혜경궁 홍씨가 합장된 능이며, 건릉은 정조와 효의황후(孝懿王后) 김씨가 합장된 능이다. 조선의 역대 왕릉이 어디나 그렇듯 융건릉 또한 평안하고 그윽한 구릉에 경건하게 조성돼 있다.

자료를 살펴보니 융릉은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천하를 품고 노니는 형상, 즉 반룡농주형(盤龍弄珠形)이라 한다. 정조가 아버지의 무덤, 즉 융릉에서 그윽하게 가라앉는 오른쪽 능선 끄트머리에 여의주 모양의 연못을 파서 그곳이 용의 머리가 가 닿는 형상으로 조형하라고 엄명한 것도 이 야트막한 능선의 기품 때문이다. 일컬어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고 할 만하다. 연못이 없다 해도, 이 기품 있고 부드러운 능선은 더없이 거룩한 형상이건만 용이 여의주를 품는다는 결정적인 공간 조형, 즉 연못으로 인해 더욱 아름답고 경건하다.

정조는 1776년 8월 17일 아버지 사도세자를 더욱 추존하고 드높게 존호를 올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슬프게도 음용(音容·음성과 용모)을 받들 수 없으니, 어찌 나를 낳아 준 덕을 갚겠는가. 내가 새로 즉위하기에 미쳐서는 고독(孤獨)한 슬픔이 더욱 간절하다. 아! 저 흉악한 무리들은 어찌 다만 성조(聖祖)에게만 무함(誣陷)이 미쳤겠는가. 밝게 엄토(嚴討)한 것은 대개 선친(先親)이 슬퍼하신 것을 참지 못한 것이다. 이미 융성한 전례(典禮)로 종사를 소중히 여기는 데에 극진히 하였으니, 저 사사로운 은혜라 하여 어찌 근본을 갚는 데에 소홀히 하겠는가.” 이런 마음의 결정판이 융건릉 조성으로 이어진 것이다.

불안의 시대



1789년 7월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 영우원을 현재의 자리로 옮기고 조선 왕조의 마지막 능침사찰(陵寢寺刹)로 용주사(龍珠寺)를 중창했다. 융릉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야트막한 숲을 따라가면 곧 보게 되는 사찰로 신라 문성왕 16년에 창건됐고 병자호란 때 소실돼 숲 속에 방치된 곳인데, 정조가 이를 중창해 능침사찰로 삼은 것이다. 정조는 1790년 당대 최고의 화원인 김홍도를 용주사로 보내 대웅보전과 칠성각의 탱화를 지휘하도록 했는데 그 기간이 2월부터 9월까지, 216일 동안 이어졌다.

한 해에도 몇 차례씩 아버지를 찾아 능행길에 오른 정조는 어느 날 영의정 채제공에게 “내가 죽거든 현륭원(융릉의 이전 이름) 근처에 묻어달라”고 당부했다. 소원대로 그는 융릉 동편에 묻혔으나 그 자리가 원만치 않다는 설이 자주 제기돼 효의왕후가 사망하자 지금의 서편 자리로 옮겨 합장했으니, 건릉이다.

정조가 근대적인 조선을 열망한 문예부흥의 군주였음은 두루 확인된 바와 같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규모인 장서 3만여 권의 규장각을 설치하고 주조활자와 목활자 80여 만 자를 만들어 이를 통해 수많은 책자의 간행을 도모한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우문지치(右文之治·학문을 중심으로 한 정치), 작성지화(作成之化·발명과 발견을 통해 변화와 발전을 이룸)’, 곧 규장각의 슬로건이다. 숙종 이래 완전히 패퇴한 남인의 선비들을 등용하거나 규장각 검서관직(檢書官職) 네 자리를 모두 서민 출신으로 등용하면서 남북·노소론의 당파를 벗어나 천하의 적재를 적소에 배치하고자 한 점도 뚜렷하다.

물론 이 문화통치는 곧 왕권 강화를 위한 정치 행위이기도 했다. 그가 근대적인 조선을 열망했다는 것은 후대의 연구자들이 평가한 것이고, 정조 자신은 왕권 강화를 위해 서학(천주교)을 지속적으로 탄압했고 문체반정을 통해 왕권의 정통성에 조금이라도 위반이 되는 글월을 입에 올리는 자를 엄벌했다. 당대 최고의 수재 이옥(李鈺)을 문체가 난삽하고 이질적인 사유가 스며들어 있다 해서 거듭 지방으로 좌천시킨 일이 대표적이다. 연암 박지원은 정조로부터 문체와 사유의 흠결에 대해 지적을 받고는 곧 참회하는 글을 올렸지만 이옥은 이를 마다해 중앙 권부에서 밀려나 세상 밖으로 떠돌았다.

이런 점을 두루 검토할 때, 이 시대를 제대로 읽으려면 연암의 기록이나 다산의 문집에 더해 전 5권으로 출간된 ‘이옥전집’ 또한 반드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즘으로 치면 사상이 불순해 제도권에 오르지 못한 재야의 천재적인 사상가가 그 나름대로 세상을 살피고 준열하게 비판과 풍자를 더한 것이 ‘이옥전집’이다.

‘교양시민’은 누구인가

역사라는 기찻길에는 수많은 레일이 깔려 있어 설령 종착역이 엇비슷하다 해도 그에 이르는 역사의 행로는 결코 단일하지 않다. 서구의 경우 ‘근대’라는 종착역에 도착하기 위해 ‘산업혁명’과 ‘정치혁명’이라는 이중혁명(에릭 홉스봄)을 대체로 거쳤으나 그것을 제대로 완결한 곳이 있는가 하면(영국, 프랑스) 독일처럼 그것이 한없이 지체되거나 실패해 결국 비스마르크의 국가주의와 히틀러의 파시즘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곳도 있다. 포르투갈, 체코, 핀란드 등 유럽의 작은 나라들이 근대에 이르는 과정에선 영국, 프랑스, 독일과는 또 다른 과제(특히 강대국에 맞선 독립운동)를 수행했어야 했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인용한 헤르만 헤세의 소설 ‘수레바퀴 밑에서’의 비극적인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는 근세 초기에 경제적으로 주권을 확보한 영국의 근대인이나 대혁명으로 정치적 주권을 획득한 프랑스의 근대인과 달리 의미 있는 성취를 이루지 못해 내적인 갈등과 번민에 시달린 독일의 근대인을 표상한다.

이를 문화사적으로는 ‘독일 교양시민 계층’이라고 한다. 경제권력(영국)과 정치권력(프랑스)을 획득하지 못한 독일의 중산시민 계층은 문학, 예술, 교육 등에 진력한다. 그러나 도처에 창궐하는 국가주의와 비스마르크 체제 이후의 강력한 압력으로 인해 이 교양시민 계층은 몰락한다. 그 몰락의 예술적 징후가 구스타프 말러(음악)였고 토마스 만(문학)이었으며 현실적으로 그 몰락이 처참하게 확인된 것이 제1차 세계대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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