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호

美 독립 성지(聖地)의 문화 자존심

필라델피아 미술관

  • 최정표 |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jpchoi@konkuk.ac.kr

    입력2015-02-23 15: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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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미국 독립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설립됐다. 이후 이 지역 출신 재벌들이 돈과 정성을 쏟아부어 세계적 수준의 미술관으로 키웠다. 그럼에도 이 미술관은 여전히 공공이 소유하고 전문가가 경영하는 시민의 자산이다.
    美 독립 성지(聖地)의 문화 자존심
    영화배우 실베스터 스탤론이 만들고 주연한 영화 ‘록키’(1976)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1편의 인기에 힘입어 무려 5편까지 제작됐으니 말이다. 이 영화에서 인상 깊은 배경의 하나는 주인공 록키가 운동하는 돌계단이다. 록키는 매일 이 돌계단을 뛰어 오르내리며 열심히 운동해 세계 챔피언이 된다.

    이 계단은 미국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역사의 도시’ 필라델피아의 필라델피아 미술관(Philadelphia Museum of Art)에 있다. ‘록키’ 덕분에 미술관보다 미술관 계단이 더 유명해지는 아이러니가 벌어졌다. ‘록키 계단(Rocky Steps)’이라는 애칭도 생겼다. 지금도 미국인 중에는 계단은 알아도 미술관은 모르는 이가 많다고 한다.

    ‘역사 도시’의 아이콘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미국 동부 필라델피아 페어마운트 공원(Fairmount Park)에 자리 잡은, 미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유명한 미술관이다. 고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모양을 한 아름다운 석조 건물이다. 건물 정면은 미네소타에서 가져온 백운석으로 단장했다고 한다.

    널찍한 계단을 한참 올라가야 미술관 입구가 나온다. 건물이 언덕 위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맨 위 계단에 서면 남쪽으로 필라델피아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멀지 않은 곳에서 높은 첨탑의 시청 건물도 눈에 들어온다.



    ‘록키’ 3편을 찍을 때는 계단 맨위에 록키 동상을 세웠다. 그러나 순수예술을 지향하는 미술관의 권위를 훼손한다는 격렬한 반발 때문에 이 동상은 자리를 뺄 수밖에 없었다. 동상은 5편 제작을 위해 다시 돌아오긴 했으나, 2006년 9월 계단 맨아래 오른쪽 화단으로 옮겨져 지금에 이르렀다. 록키가 양팔을 치켜든, 박력 넘치는 형상의 청동상이다.

    미술관은 계단 위에 ㄷ자형으로 건축돼 있다. 고대 양식의 대리석 건물로 전시실이 200개가 넘는다. 23만 점 이상의 소장품을 보유한 종합 미술관으로 매년 전 세계에서 온 100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간다.

    이 미술관의 소장품은 시간적으로 2000년 이상의 세월을 아우르지만, 고대 이집트 및 로마 시대 작품과 콜럼버스 이전 시대의 미국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유는 미술관 설립 초기에 펜실베이니아대(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 중국 도자기를 빌려온 대신 대학에 고대 작품을 대여해줬기 때문이다. 그 이후부터는 특별 전시를 위해 매우 중요한 고대 작품만 소량 가지고 있을 뿐이다.

    필라델피아는 미국 건국 초기 13개 주 중 하나인 펜실베이니아주(州) 동쪽 끝에 자리한 도시로 뉴욕과 워싱턴DC의 중간쯤에 있다. 인구는 600여 만 명으로 미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은 1776년 7월 4일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1787년 9월 17일 역시 필라델피아에서 미국 헌법이 공포됐다. 워싱턴DC가 건설되는 동안 1787년부터 1800년까지는 임시 수도 구실도 했다.

    명실상부한 미국 독립의 성지인 이 도시는 미국 최고의 관광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시내 인디펜던스 홀(Independence Hall) 앞에 있는 자유의 종(Liberty Bell)을 보러 매년 2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다녀간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이런 역사 도시의 아이콘이자 독립 성지의 자존심 그 자체다.

    공공의 설립, 부자의 지원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1876년 설립됐는데 이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보다 불과 6년 뒤로, 그만큼 일찍 설립된 축에 든다. 1876년은 미국 독립 100주년이 되는 때로 필라델피아에서는 독립 100주년 기념 박람회(Centennial Exhibition)가 개최됐다. 산업과 문화를 선양하기 위한 이 행사는 미국에서 개최된 최초의 대규모 박람회로 전 세계 37개국이 참가했다. 40여 만 평의 페어마운트 공원에 수많은 전시장이 마련됐고, 무려 1000만 명의 관람객이 몰려들었다.

    전시장 중에는 미술관(Art Gallery)도 있었다. 미술관은 4000여 점의 예술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2년에 걸쳐 항구적인 건물로 건설됐다. 나중에 메모리얼 홀(Memorial Hall)로 명명되는데, 이것이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출발이었다.

    독립 100주년 행사를 준비하면서 필라델피아 사람들은 미술관 설립의 필요성을 느껴 1876년 2월 시로부터 미술관(Pennsylvania Museum and School of Industrial Art) 설립을 인가받았다. 그리고 1877년 5월 10일, 100주년 행사의 1주년을 기념하는 날에 메모리얼 홀을 미술관 건물로 해서 필라델피아 미술관을 출범시켰다. 독립의 성지에서 개최된 독립 100주년 행사가 독립적인 미술관을 만들어낸 것이다.

    미술관은 이후 50여 년간 큰 변화 없이 유지돼오다 킴볼(Fixk Kimball·1888~1955)이 관장을 맡으면서 그 면모가 일신됐다. 킴볼은 1925년부터 1955년까지 무려 30년 동안 관장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현재의 건물을 지어 미술관을 이전했다. 새 건물 개관 첫해에만 10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몰려들었다. 킴볼은 매사추세츠 주 태생으로 하버드대를 나온 건축가이자 건축사학자였다.

    미국에는 공공미술관도 부자의 기부와 기증으로 더욱 발전해가는 전통이 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JP모건을 필두로 수많은 재벌이 달라붙어 만들어낸 미술관이다. 필라델피아 미술관 역시 공공미술관으로 출발했지만, 많은 부호의 지원으로 오늘날의 위치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 특히 이곳 출신 재벌로 대를 이어 미술관을 후원한 매킬헤니 가문(Mcilhenny Family)의 기여가 컸다.

    50여 년 동안 꾸준히 미술관을 후원한 헨리 매킬헤니(Henry Plumer McIlhenny· 1910~1986)는 날 때부터 재벌이었다. 그의 할아버지가 가스 미터를 발명해 사업을 일으켰고, 아버지가 가스 사업으로 재벌이 된 덕분이다. 하버드대를 졸업한 헨리는 미술품과 골동품 전문 감정가이자 세계를 두루 여행하는 여행가, 사교계 명사, 자선사업가로 활동했다. 특히 예술품 수집에 열정이 남달랐다. 부모 때부터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후원자이던 가정 분위기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예술 사랑의 유전자 덕분이었을 것이다.

    매킬헤니家의 예술 사랑

    美 독립 성지(聖地)의 문화 자존심

    토머스 에어킨스의 ‘그로스 클리닉’(1875)

    헨리의 아버지 존 매킬헤니(John D. McIlhenny)는 1920년부터 1925년 사망할 때까지 필라델피아 미술관 이사회 회장을 지냈다. 1926년에는 그가 수집한 중요 작품이 모두 미술관에 기증됐다. 그의 딸, 즉 헨리의 누이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미술관 이사회장을 지냈다. 이후 헨리까지 이사회장을 지냈으니, 미술관과 매킬헤니 가문의 관계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헨리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해군으로 참전했고 1935년부터 1964년까지는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큐레이터로 봉사했다. 1976년부터 1986년 사망할 때까지 미술관 이사회장을 맡았다. 평생 수집해온 엄청난 양의 예술 작품을 모두 미술관에 기부했다. 그는 부동산 부자이기도 했는데, 사망 후 모든 부동산을 미술관에 기증했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2층 전시실에서 많은 카펫을 전시하고 있는데, 모두 헨리가 기증한 것이다. 미술관이 소장할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그의 수집품은 크리스티 경매에서 일반인에게 판매됐다. 이를 통해 생긴 370만 달러(약 40억 원)의 수익금 역시 미술관 기금으로 편입됐다.

    매킬헤니 가문이 이렇게 돈과 정성을 퍼부었지만,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결코 그들의 미술관이 아니다. 미술관은 공익법인이 소유하고, 전문가가 경영하며, 일반 대중이 찾아가 즐기는 시민의 것이다. 재벌은 이런 훌륭한 미술관을 만드는 데 크게 공헌했다는 기록만 남을 뿐이다. 이런 기록만으로도 만족하는 사회가 진정한 선진사회가 아닐까 싶다.

    필라델피아 미술관 발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명이 존 존슨(John G. Johnson· 1841~1917)이다. 그는 필라델피아 태생의 유명 변호사로 무려 1300여 점을 미술관에 기증했다. 그는 셰익스피어에 심취한, 기억력이 출중한 문학청년으로 잠시 남북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1800년대 말 미국에서 성행했던 대규모 독점회사와 재벌을 변호하며 큰돈을 벌었다. 부자와 한 배를 타야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한국이나 미국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존슨은 제임스 가필드,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으로부터 대법관으로 지명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으로부터는 법무장관 요청까지 받았지만 이 역시 사양했다. 우리 사회와 비교할 때 의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부와 권력을 동시에 갖지 않겠다는 철학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1971년 ‘뉴욕타임스’는 그를 영어권 최고의 변호사라고 칭송했다.

    존슨은 매년 유럽을 여행하며 유럽에 관한 책을 쓰고 주로 유럽의 유명 그림을 대량 수집했다. 서른네 살 때 세 아이를 둔 미망인과 결혼했는데, 둘 사이에는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이 부부는 필라델피아 사우스 브로드 스트리트에 저택을 짓고 이웃 건물까지 사들여 소장 작품을 전시했다. 존슨은 자신의 건물에서 계속 전시한다는 조건을 달아 소장품을 모두 필라델피아 시에 기증했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현재 건물이 완성되자 1933년 이 작품들을 미술관으로 옮겨 전시했다. 애초에는 잠시만 옮긴다는 계획이었는데 이후 무려 50년 동안이나 미술관에서 다른 소장품과 구분해 독립적으로 전시됐다. 1980년대에 와서야 존슨의 작품들도 다른 소장품과 함께 전시될 수 있도록 허가됐다. 현재는 미술관 소장품으로 편입돼 있다.

    19세기 수술실 풍경

    토머스 에이킨스(Thomas Eakins·1844~1916)는 필라델피아의 자존심과 같은 화가다. 이곳 태생인 에이킨스는 젊은 시절 유럽에서 미술 공부를 하던 시기를 빼놓고는 한평생 고향에서 활동했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이 소장한 그의 대표작 중 하나가 ‘그로스 클리닉(The Gross Clinic)’인데, 이 그림에는 미술관과 얽힌 특별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

    1875년에 그려진 이 그림은 당시로서는 드문 대작(240×200cm)이었다. 그래서 1876년 열린 국제박람회 때 크기가 문제 돼 전시를 거절당하고는 군 병원(Army Post Hospital)에 걸렸다. 이후 필라델피아에 있는 토머스 제퍼슨대(Thomas Jefferson University)에 200달러에 매각돼 제퍼슨 의대(Jefferson Medical College)에 걸렸다. 1980년대에는 제퍼슨 동창회 건물(Jefferson Alumni Hall)로 옮겨졌다. 그러다가 2006년 11월 제퍼슨대가 워싱턴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rt)과 아칸소의 한 미술관에 이 작품을 무려 6800만 달러(약 800억 원)에 매각하는 일을 추진했다. 이 가격은 에이킨스 작품 중 최고 가격일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미국 작품 중에서도 최고가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필라델피아 시민들은 깜짝 놀랐다. 필라델피아의 자존심을 걸고 이 작품을 놓치지 말자는 운동이 벌어졌다. 시민들은 이 그림이 필라델피아의 역사적 유산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모금운동이 개시됐고 단번에 3000만 달러가 모였다. 하지만 대금 납부일인 2006년 12월 26일이 되도록 그림값을 다 채울 수가 없었다. 다행히 와초비아 은행(Wachovia Bank)이 모금이 완료될 때까지 그 차액을 대출해주겠다고 나섰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그로스 클리닉’은 필라델피아에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모금운동에서도 6800만 달러를 채우지 못해 결국 펜실베이니아 예술아카데미와 필라델피아 미술관이 기존에 소유하고 있던 에이킨스의 다른 작품들을 팔아 모자란 자금을 공동으로 마련했다. 이후 두 기관은 이 그림을 공동 소유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 그림은 종종 필라델피아 미술관이 아닌 필라델피아 예술아카데미에 걸린다.

    ‘그로스 클리닉’은 당시 유명한 의사이던 그로스 박사(Dr. Samuel D. Gross·1805~1884)가 제퍼슨 의대에서 학생들을 앞에 두고 수술하는 광경을 그린 작품이다. 그림의 초점은 그로스 박사에게 맞춰져 있다. 이 그림이 그로스 박사의 초상화로도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림 속 그로스 박사는 70세의 노교수다. 그러나 매우 정정해 보인다. 그림에는 에이킨스 자신의 모습도 있다. 오른쪽 끝에 앉아서 뭔가를 그리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인데, 카메오 출연을 한 셈이다. 그로스 박사의 오른쪽 어깨 뒤에는 수술 상황을 기록하는 병원 측 인사, 프랭클린 웨스트 박사(Dr. Franklin West)가 그려져 있다. 마치 사진을 찍은 듯한 사실화인 것이다.

    이 작품은 의료사(醫療史)에서도 중요한 자료로 간주된다. 19세기 후반에 이미 수술이 의료의 한 분야였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수술실 광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림 속 수술실은 일종의 대강당으로 매우 난삽해 보인다. 언뜻 불결해 보이는 환경에서 수련의인 듯한 이들이 수술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그로스 박사 옆에서 울고 있는 여자는 환자 가족임에 틀림없다. 오늘날의 수술실과 비교하면 엉성하기 짝이 없다.

    그로스 박사는 당시 유명 의사로 미국의사협회 회장까지 지냈다. 이 그림 덕에 더욱 이름을 날려 영원한 유명 인사가 됐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주 시골 마을 출신으로 역시 제퍼슨 의대를 졸업했다. 남북전쟁 때 종군의사로 참가했고, 많은 저술을 남겼다.

    뒤샹과 그레이스 켈리

    美 독립 성지(聖地)의 문화 자존심

    뒤샹의 ‘샘’

    나는 이 미술관의 현대미술 전시실에서 아주 의외의 ‘물건’과 마주쳤다. 182번 방의 한 전시대 위에 버젓이 얹혀 있는 것은 남자 변기였다. 1917년 뉴욕에서 큰 말썽을 일으킨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1887~1968)의 바로 그 문제작이었다.

    다다이스트(Dadaist)이면서 초현실주의 작가인 뒤샹은 1917년 독립작가협회(Society of Independents Artists)가 뉴욕에서 개최한 전시에 남자 변기를 뜯어와 ‘샘(Fountain)’이라는 제목을 달아 작품이라고 내놓았다. 전시회 관계자들은 아연실색했다. 소변기를, 그것도 자신이 만들지도 않은 것을 작품이라고 가져왔으니 말이다. 출품작을 무조건 전시해주는 행사였지만, 주최 측은 이 작품만은 전시하기를 거부했다. 뒤샹 자신도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던 전시위원회는 ‘소변기가 무슨 예술 작품이냐’고 했다. 결국 뒤샹의 ‘샘’은 전시가 거절됐고, 뒤샹은 위원직을 사임했다. 이런 소란을 일으킨 소변기를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만난 것이다. 1917년 그 소변기는 분실됐고, 이후 뒤샹이 여러 개를 만들었는데 그중 하나다.

    뒤샹의 소변기 사건은 예술 작품의 정의에 관해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미 만들어진 기성품(ready-made)을 예술 작품으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뒤샹은 소변기를 만들지 않았다. 그가 한 일이라곤 소변기를 벽에서 뜯어내 소변기에 ‘R. Mutt, 1917’이라고 서명한 것뿐이다. 뒤샹은 소변기 이전에도 삽과 같은 기성품을 예술 작품이라고 내놓은 적이 있다.

    그러나 뒤샹의 소변기는 2004년에 와서 500인의 유명 작가와 역사가에 의해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 작품’으로 선정됐다. 오늘날의 현대 작품(contemporary art works)에는 이보다 더 기이한 것도 많다. 똥을 담아놓은 깡통을 예술 작품이라고 내놓은 작가도 있다. 하여 뒤샹의 ‘샘’을 현대미술의 시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샘’은 8개의 복제본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1999년 170만 달러(약 20억 원)에 거래됐다고 한다.

    美 독립 성지(聖地)의 문화 자존심
    최정표

    1953년 경남 하동 출생

    미국 뉴욕주립대 박사(경제학)

    공정거래위원회 비상임위원, 건국대 상경대학장

    저서 :‘재벌들의 특별한 외도’ ‘한국재벌사연구’‘공정거래정책 허와 실’‘한국의 그림가격지수’등

    現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경실련 공동대표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소장품 중 또 하나 특기할 것은 미국의 유명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의 웨딩드레스다. 1950년대 미국 영화계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켈리는 1956년 모나코 왕자 레이니어 3세와 결혼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결혼식 후 그녀의 웨딩드레스가 이 미술관에 기증됐다고 한다. 그녀가 필라델피아 출신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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