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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근 SF 소설

차원이동자(The Mover)_6

수부테이와 제베, 카스피해의 사냥꾼들

  • 윤채근 단국대 교수

차원이동자(The Mover)_6

  • 탁월한 이야기꾼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SF 소설 ‘차원 이동자(The Mover)’를 연재한다. 과거와 현재, 지구와 우주를 넘나드는 ‘차원 이동자’ 이야기로,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선보이는 이 소설 지난 회는 신동아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편집자 주>
차원이동자(The Mover)_6
1
가늘게 한숨을 내쉰 고문헌학자 선예림이 상대를 응시하며 물었다. 

“지구를 반복적으로 멸망시켜 온 요괴 같은 외계인이 있단 말씀이세요?”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던 스웨덴인 스벤 칼손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주 긴 얘기를 막 마친 참이었다. 어둠이 내린 예림의 대학 연구실 창밖에선 가늘게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예림이 다시 물었다. 

“그리고 … 칼손 교수님께선 그 요괴를 찾고 있는 차원이동자시고요? 역시 외계인이시고?” 

국화차 한 모금을 홀짝인 칼손이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며 대답했다. 



“전 칼손 교수의 육체를 잠시 빌리고 있을 뿐입니다. 정확히 말해 제 신분은 이탈자입니다. 절 쫓는 자가 있거든요.” 

예림은 상대의 연초록빛 눈동자를 오래 바라봤다. 영국 런던대 동아시아학과 교수 칼손은 그녀가 재직하는 대학의 방문교수 신분이었다. 식당에서 더러 마주쳐 눈인사만 나누던 그가 갑자기 그녀 연구실로 찾아와 자신이 외계인이라고 말한 지 두 시간 남짓 지나고 있었다. 

“스웨덴 사람 몸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니 설득력이 있긴 하네요. 동화 같은 얘기지만 우선 믿기로 할게요. 그러니까 결국 제가 가지고 있는 이 문서들이 필요하신 거잖아요?” 

그녀가 문서 두 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문서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칼손이 말했다. 

“문서만 필요했다면 선 교수님 몸속으로 육화했겠죠. 저는 쫓기는 터라 시간이 많지 않거든요. 문서 내용만 요약해 주시겠습니까?” 

“제 뇌를 점령하면 쉬웠을 일을 왜 이리 번거롭게 하시나요?” 

“숙주의 데이터를 완벽히 흡수하려면 시간이 꽤 걸립니다. 빨리 이동해야 하거든요.” 

다시 한숨을 내쉰 예림이 천천히 말했다. 

“이미 알고 오셨겠지만 이건 이슬람 지역 몽골제국이었던 ‘일한국’의 역사가 라시드 앗 딘이 남긴 문서입니다. 몽골인이 지금의 중근동 땅에 일한국을 건설하기 전 중앙아시아 호라즘 제국부터 멸망시켰다는 건 이미 아시리라 믿어요. 호라즘의 마지막 술탄 무함마드 2세는 두 명의 몽골 장수에게 사냥당하다 카스피해에서 병사했어요. 두 추격자는 몽골 최고의 전사들이었지요.” 

“잘 알죠. 바로 수부테이와 제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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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부테이와 제베, 두 맹장이 짝패가 돼 운명의 추격전을 시작한 건 1220년 봄이었다. 제베는 수부테이보다 거의 마흔 살 연상이었지만 둘은 칭기즈칸의 사냥개로서 동등했다. 명사수 제베가 무자비한 맹수였다면 수부테이는 인내심 강한 지략가였는데 마치 나이가 뒤바뀐 듯했다. 

칭기즈칸의 교역 제안을 거부하고 몽골 사신을 참수한 호라즘 제국의 무함마드 2세는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정벌에 나선 칸은 시르다리야강을 건너 불과 3일 만에 수도 부하라를 짓뭉개버렸다. 당황한 술탄은 사마르칸트로 남하해 끝까지 저항해 봤지만 이 오래된 교역 도시 역시 곧 폐허로 변했다. 상인으로 변장한 술탄은 소수의 경호대와 함께 비밀통로로 도주해야만 했다. 복수를 마치고 명예를 회복한 칸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 수부테이와 제베를 불러 무함마드 2세를 사로잡기 전까진 돌아오지 말라 명령했다. 

몽골 기병의 기동력과 첩보 능력으로 술탄을 잡는 데엔 열흘이면 충분했다. 이 손쉬운 사냥이 재미없던 둘은 일부러 상대 이동 속도에 맞추며 말고삐를 늦췄다. 그런데 아무다리야강을 건너 발호 땅에 도착할 무렵, 두 장수는 거의 동시에 격렬한 두통에 휩싸였다. 숙였던 몸을 일으켜 세운 수부테이는 급히 제베의 군막으로 달려갔다. 

“형제 제베여! 그대는 그대인가?” 

검을 짚고 일어선 제베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형제 수부테이여! 이제 요괴를 잡아보자고. 날 쫓는 것보다 훨씬 즐거울 거야.”


3
예림이 첫 번째 문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건 라시드 앗 딘이 기록한 수부테이와 제베의 전기예요. 원본에 가장 가까운 문서고 원나라 파스파 문자로 쓰였어요. 그리고 이건.” 

그녀가 다른 문서를 집으며 말을 이었다. 

“후대의 이본인데 한문본이에요. 두 텍스트에 담긴 내용이 조금 달라요.” 

칼손의 눈이 반짝였다. 그가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그걸 말해 주시죠. 그게 핵심입니다.” 

“파스파본엔 없는 기록이 한문본에 추가됐어요. 바로 제베의 수상한 행적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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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자 무함마드 2세의 목적지는 페르시아 왕국의 바그다드였다. 그곳에서 이슬람 세력을 규합해 본토를 회복하는 게 그의 계획이었다. 예기치 않은 사건은 술탄이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 해당할 헤라트에서 메르브 사막으로 이동하는 도중 발생했다. 

패잔병이 모여들며 병력이 불어난 술탄 경호부대는 경유지에서 행패를 일삼았다. 그들은 무분별하게 식량을 약탈하고 주민을 동원해 화려한 임시 궁전을 짓게 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일부 주민이 군영을 습격했는데 사건을 보고받은 술탄은 애꿎은 인근 마을 주민까지 모조리 체포해 불태워 죽였다. 이는 자비로운 이슬람 황제가 할 짓이 아니었을 뿐더러 적에게 쫓기는 처지에 더욱 해선 안 될 만행이었다. 술탄은 미친 사람 같았다. 

민심은 이반됐고 무함마드 2세가 다가온다는 소식을 접한 다른 지역 주민들은 미리 피신하기 바빴다. 술탄이 호라산을 지나 니샤푸르로 향할 즈음 자력으론 식량조차 조달할 수 없게 된 경호부대 내부에 반란의 기미마저 움텄다. 황제의 목을 바치면 몽골 귀족이 될 수 있다는 은밀한 소문까지 돌았다. 

니샤푸르 도착 직전 부대원들을 평야에 정렬시킨 술탄이 이상한 연설을 시작했다. 

“신은 위대하다! 그리고 잔인하다! 너희는 우주 생성의 비밀을 모른다. 위대한 나 술탄 무함마드는 안다. 신의 원대한 계획은 세상에 무를 창조하는 것이다. 소멸이야말로 신의 뜻이고 참된 지혜의 열쇠다. 이 거짓 세상에서 벗어나 알라 속에 안식하라!” 

술탄은 꼭 필요한 경호 인원만 남기고 나머지 군사를 몰살했다. 그는 거대한 파동을 일으켜 부하들을 산 채로 땅에 묻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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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베는 칸의 명령에 불복했어요. 거의 잡을 뻔했던 술탄을 번번이 놓쳤거든요.” 

예림이 말을 마치고 국화차를 입가로 가져갔다. 칼손이 말했다. 

“원래 사냥의 묘미가 그런 것 아닐까요? 언제든 잡을 자신만 있다면.” 

“천만에요. 칸은 살아 있는 술탄을 모욕한 뒤 노예로 부려 승리의 전리품으로 삼고 싶어 했어요. 제베가 그걸 몰랐을 리 없는데 이상하게 자꾸 술탄을 놔준 것 같아요.” 

“왜 그랬을까요?” 

“처음엔 후배인 수부테이에게 공을 양보하려 했다고 추측해 봤어요. 하지만 이상하지 않아요? 제베는 이미 늙었고 수부테이는 몽골군의 미래였어요. 젊은 수부테이에겐 앞으로 세울 공이 넘치게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한문본엔 그 이유가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술탄과 제베가 모종의 밀약을 한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어요. 뭔가 주고받을 게 있었을 거라고.” 

“그 부분이 어디죠?” 

“그전에 칼손 교수님께 궁금한 게 있어요.” 

고개를 갸웃한 칼손이 몸을 뒤로 물렸다. 상대를 지긋이 응시하던 예림이 물었다. 

“진짜 차원이동자시라면 방금 어디서 이동해 오신 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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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부테이와 제베는 현재의 테헤란 인근에 이르러 호라즘 3만 대군과 정면충돌했다. 모두 접전을 예상했지만 수천 명에 불과한 몽골군이 상대를 손쉽게 제압하고 모조리 도륙해 버렸다. 시체가 산을 이룰 정도였다. 이번에도 술탄이 여유 있게 페르시아 방향으로 빠져나가자 수부테이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제베에게 말했다. 

“어찌 된 건가? 술탄은 우리 동선을 미리 아는 것처럼 움직여. 늘 간발의 차이로 포위를 벗어나지. 혹시 밀통하고 있나?” 

투구를 벗으며 제베가 대답했다. 

“조금 놀아보는 거야. 같이 즐기자는 것 아니었어? 초대에 응했으니 날 따라줘. 요괴 녀석은 내가 반드시 소멸할 거야.” 

“이런 살육 이젠 지겹다. 행성 역사에 간섭하기 싫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선호하는 방법은 아니야. 그래도 놈을 잡으려면 감수해야지. 돕는다고 했잖아?” 

“뭔가 이상해서 그렇다. 시간을 너무 끌고 있어.” 

수부테이의 의심에 제베는 새로운 제안을 했다. 그는 부대를 나누어 양 갈래로 추격하자고 주장했고 수부테이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테헤란 대살육 직후 제베는 남쪽 사막 주변을 따라 이동했고, 수부테이는 북쪽 산간 지역을 타고 사냥감을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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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손을 깍지 낀 칼손은 미동도 않은 채 대답하지 않았다. 마른침을 삼킨 예림은 다부진 표정으로 끈질기게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칼손이 입을 열었다. 

“의심이 많으시군요? 좋아요. 제가 제베였습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예림이 가늘게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그럼 이 추격전의 진실을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 구태여 더 확인하실 게 있나요?” 

“있죠. 조금 긴 얘긴데 … 실은 전 그 요괴와 따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계약이요?” 

“녀석은 단순한 요괴가 아니었습니다. 우주의 비밀로 연결되는 홈을 파고 있었죠. 말하자면 두더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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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을 막 추격하기 시작할 무렵, 제베는 초승달을 바라보며 헤라트 성곽 위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요괴와의 밀약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메마른 바람이 몇 차례 일렁였고 익숙한 파동이 밀려와 제베 주변에 머물렀다. 상대는 도전하지 않으며 제베의 반응을 살피기만 했다. 공격의 순간을 노리던 제베가 물었다. 

“우리가 온 걸 이미 알고 있었군?” 

파동은 감미롭게 원을 그리더니 성곽 깃대 위에 내려앉았다. 

“알고 있었다. 술탄 놀이도 지겨웠던 차에 좀 더 쫓기다 사라질 예정이었다고나 할까?” 

“내게 왜 왔나?” 

“너나 나나 떠돌이 이동자 아니더냐? 이동 방법은 달라도 같은 신세라 이 말씀이지.” 

“그래서?” 

“그래서라니? 친구끼리 말버릇 고약하도다. 잘 들어봐라. 난 지구에 구멍을 파고 있다.” 

“구멍?” 

“그래. 한 지점을 계속 파면 구멍이 뚫리지 않더냐? 다른 세계로 연결될 홈이 생긴다 이 말씀! 지구를 자꾸 멸망시키면 이 좌표의 시공간 차원이 언젠가 뚫리느니라.” 

“공백이 생길 텐데?” 

“나도 그렇게 잘못 알고 있었도다. 근데 아니니라. 차원이 붕괴되면 공백 대신 틈이 생기는 거다. 블랙홀과 비슷하게 말이지. 머리란 걸 써봐라!” 

“어디로 연결되지?” 

“그 틈으로 나갔다는 녀석들 얘기를 듣긴 했도다. 아무튼 행성 하나를 닳고 닳도록 반복해 부수다 보면 차원 유지력이 고갈된다 이 말씀이야. 그러다 뻥! 궁금하지 않으냐? 우리가 어디로 가게 될지?” 

그날 밤 솟구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제베 안의 이탈자는 술탄 무함마드 2세를 숙주 삼은 요괴의 말에 넘어가 밀약을 맺었다. 자신을 믿고 따라온 추격자에겐 미안했지만 그건 이탈자의 타고난 운명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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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우주 밖으로 나가보기 위해 요괴를 일부러 놓아주셨단 말씀이신가요?” 

예림의 질문에 칼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다시 물었다. 

“우주 공간이 아니라 행성을 계속 파괴해야만 구멍이 뚫린다는 말씀이시고요?” 

“그렇습니다. 반드시 중력을 지닌 행성이어야 하죠. 지구는 운이 없다고 할 수 있겠죠?” 

“언젠가 태양계 자체가 사라질 텐데…. 저같이 유한한 존재에겐 불가항력의 의미 없는 사건들이에요.” 

“음…, 꼭 그렇진 않죠. 요괴 녀석이 왜 지구 역사의 전쟁 장면에 계속 출몰할까요?” 

“글쎄요. 저라면 미래 한 시점에 머물며 계속 핵전쟁만 일으킬 것 같은데…. 왜 역사 곳곳을 누비며 그런 수고를 하는 걸까요?” 

머리를 긁적인 칼손이 조용히 대답했다. 

“예를 들어 책 한 권이 다 끝났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구 멸망의 이야기가 말이죠. 그러면 이야기는 다시 첫 페이지로 되돌아가 시작돼야겠죠?” 

“음…, 그러네요.” 

“그렇습니다. 반드시 반복돼야 하는 거죠. 요괴는 핵전쟁이건 로봇전쟁이건 파국을 초래할 최종 지점을 향해 계속 지구를 몰고 가야 하는 겁니다. 분쟁을 격화시켜 끝없이 전쟁을 일으키는 거죠. 그렇게 스트레스가 차츰 쌓여야만 지구 종말 서사가 한 차례 완성되는 겁니다.” 

“그럼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스토리도 가능하단 말씀이신가요?” 

“가능할 수도 있겠죠. 그렇게 되면 지구는 행성으로서 지닌 원래 수명을 다하고 사라질 거고 당연히 시공간의 차원 역시 그만큼은 보존되겠죠.” 

한참 눈을 감고 있던 예림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진짜 악마로군요. 우리가 알고 있던 그 악마.”


10
수부테이가 북부의 투스와 남간 지역을 휩쓸며 사냥감을 남쪽으로 몰자 술탄은 이스파한 서쪽 카룬 땅으로 도피했다. 제베 부대가 매복해있던 곳이다. 술탄은 독안에 든 쥐였다. 군막에 모여든 부장들이 당장 습격하길 청하자 제베가 말했다. 

“형제 수부테이를 기다리겠다. 공을 혼자 차지할 순 없다.” 

성대한 축제를 열며 여러 날 즐긴 술탄은 마침내 바그다드로 향하려 했다. 그 무렵 수부테이는 카룬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남하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부테이를 기다리겠다던 제베는 돌연 부장회의를 소집해 기습을 명령했다. 이 변덕스러운 작전은 유난히 소란스럽게 진행됐고 술탄은 이번에도 여유롭게 포위망을 뚫고 카스피해 쪽으로 북상해 버렸다. 

제베는 수부테이의 도착을 기다리지 않고 카즈빈과 잔잔을 차례로 유린하며 시끌벅적한 추격전을 이어갔다. 그건 마치 서로 짜고 하는 술래잡기 같아서 제베의 행동은 수부테이가 진격할 길을 일부러 가로막아 술탄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잔잔 인근에서 제베와 조우한 수부테이는 분통을 터뜨렸다. 

“형제 제베여! 칸을 배신하려는 것인가?” 

군막 안 카페트에 누워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던 제베는 등을 보인 채 반응이 없었다. 성난 수부테이가 칼을 빼들고 제베의 어깨를 움켜쥐자 미세한 근육의 떨림이 전해왔다. 고개를 돌린 제베가 얼빠진 표정으로 몸을 떨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눈에 초점이 없었다. 

“형제 수부테이여! 여긴 어디인가? 우린 무얼 하고 있었지?” 

상대를 응시하던 수부테이가 한 걸음 물러나 한숨을 쉬며 칼을 칼집에 꽂았다.


11
연구실 창밖으로 새벽빛이 번져들었다. 예림은 누군가 찾아오길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누가 될지 알 순 없었지만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는 상대가 자신과 아주 친밀한 존재일 거라 예감했다. 남편이었다. 

“당신이 추격자신가요?” 

질문 받은 남편은 야릇한 미소를 흘린 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이탈자가 머물렀던 그 자리에 앉았다. 예림이 다시 물었다. 

“확인은 해야겠어요. 당신 제 남편이 아니지요?”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고 한참 예림을 쏘아본 뒤 입을 열었다. 

“간발의 차이로 놓쳤군요. 녀석이 여길 들렀다면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크게 숨을 들이쉰 예림이 칼손과 검토했던 문서 두 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이 문서들 때문이었어요. 그리고 그는 당신에게 이렇게 전해달라고 했어요. 자기가 얻은 지식을 모두 넘겨주겠다. 최선을 다해 날 추격해 주길 바란다. 이렇게요.” 

평소 남편에겐 없던 굳은 표정을 지은 상대가 고개를 살짝 내밀며 속삭였다. 

“당연히 추격할 겁니다. 그럼 그 지식이란 걸 말해 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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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해 서안 아베스쿤 땅에 다다른 술탄은 극도의 사치 속에 향락을 일삼았다. 몽골 정예병이 접근해 오는 위급한 시점에서도 그는 느긋했다. 주연이 끝난 연회장에 단둘이 남게 되자 경호대장 아미드로 화한 이탈자가 물었다. 

“곧 수부테이가 도착한다. 이곳까지 보호해 주겠다는 약속을 지켰으니 이제 계획을 듣고 싶다.” 

술에 취해 비스듬히 쓰러져 있던 술탄이 왕좌에 기어오르며 대답했다. 

“좋아. 대신 나와 같은 패가 된다는 약속도 지켜야 된다 이 말씀이야. 진짜 두더지가 될 수 있겠느냐?” 

우두커니 서서 술탄을 노려보던 아미드가 양고기 한 점을 물어뜯고는 손에 묻은 기름을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에 문대 닦았다. 그가 음산하게 말했다. 

“그게 별거야? 그냥 구멍 밖으로 나가면 되는 거 아냐?” 

“천만에. 내가 왜 개고생해 가며 여기까지 쫓겼을까? 궁금하지 않았느냐?” 

페르시아 검을 빼든 아미드가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 없는데 요점이나 말하지? 서툰 거짓말이면 소멸시키겠어.” 

왕좌에 쪼그리고 앉아 무릎을 두 팔로 감싼 술탄이 입을 열었다. 

“넌 날 요괴라 부르지만 실은 난 수도자니라. 이 우주의 감옥을 벗어나려는 진정한 수도자라고나 할까. 그리고 나 같은 존재는 생각보다 많거든. 우린 부지런히 협동하며 구멍을 파고 있다 그 말씀이지.” 

“우리? 우리라고 했어?” 

“그래. 우리! 무턱대고 쏘다니는 이동자 녀석들은 모르는 위대한 조직이 있느니라. 우린 너희들이 모를 형태로 감쪽같이 숨어서 움직인다 이 말씀!” 

“그런데 내게 포착됐어?” 

“포착? 내가? 우습도다! 항상 내가 널 찾지 않았더냐? 들어보아라. 우린 극도로 신중히 출현한다 이 말씀이야. 이 행성을 한 번 박살내는 게 그리 쉬워 보이느냐? 그렇지 않거든. 수많은 사건이 얽힌 인과의 사슬을 꼼꼼히 관리해야 한다 이거야. 나비효과라고 들어봤느냐? 사소해 보이는 사건이 순서대로 적절히 배열돼야만 최종 파국이 벌어지게 되거든.” 

“그때 나타나 블루피를 죽인 것도, 지금 쫓기는 것도 그 배열 작업이라는 거야?” 

“그렇도다! 넌 우리 일원으로서 자격이 충분해. 다 계획이었도다! 우리가 있는 이 도시 이름이 뭐더냐? 아스트라바드! ‘별의 도시’란 뜻이로다. 술탄 무함마드 2세는 이 도시에서 죽어야만 하거든. 그래야 다음 사건이 순조롭게 펼쳐진단 말씀이지.” 

“그 인과의 사슬이 하나라도 흩어지면?” 

“실패! 실패다 그거거든. 우린 용의주도하게 이 행성 역사를 디자인하고 있다 이거야. 골치 아픈 추격자 놈들만 없었다면 벌써 구멍이 뚫렸을 터인데. 아무튼 넌 우리랑 같은 부류이니, 자 이제 두더지로 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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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를 찡그리며 얘기를 듣던 남편이 손을 들어 예림의 말을 중단시켰다. 

“그러니까 이탈자가 요괴, 아니 두더지들 조직에 가담했단 말입니까?” 

고개를 끄덕인 예림이 대답했다. 

“네. 우주 밖으로 나가려다 소멸돼도 좋다. 그렇게 말했어요.” 

잠시 침묵하던 남편이 문서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녀석은 그 문서들을 찾아 여기 온 듯한데…. 이유가 뭐였습니까?” 

문서들을 뒤적이던 예림이 천천히 대답했다. 

“이탈자는 그 두더지 조직이 서로 떨어져 은밀하게 움직인다고 했어요. 독립된 존재처럼. 대신 서로 맡을 역할을 특정 시공 좌표에 표시해 그때그때 공유한다는군요.” 

“암호 같은 걸 만들어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네. 그 두더지는 가장 가까운 다음 시간대로 움직여 라시드 앗 딘으로 화했어요. 그리고 이 텍스트를 남긴 거지요. 비밀 유지를 위해 여러 판본을 만들었고…. 음, 가장 후대에 발견될 이 한문본 속에, 정확히 말해 제베를 의심하는 대목 속에 자신의 다음 이동 좌표를 감춰둔 거예요.”
 
“한문본이 발굴돼 최종적으로 해독될 이 시공간이 말하자면 그들의 메일함이었군요?” 

“그런 셈이에요. 좌표를 확인한 칼손 교수 안의 그 존재는 바로 사라졌어요.” 

남편은 한문본 곳곳에 암호처럼 감춰져 있던 부호를 확인해 숫자로 변환했다. 두더지와 이탈자가 이동해 간 시공 좌표값이 산출되자 벌떡 일어선 남편이 연구실 밖으로 나서려 했다. 예림이 급히 물었다. 

“하나 궁금한 게 있어요.” 

뒤돌아선 남편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가 말했다. 

“칼손 교수 속의 존재는 페루의 나스카 라인이나 이집트의 피라미드 역시 두더지 조직의 비밀 메시지라고 했어요. 말하자면 그들의 통신수단이지요. 놀라운 건…, 필요할 땐 행성에 새로운 종을 만든다고도 했고. 그들은 행성의 모든 것을 수단으로 활용해 온 셈이에요.” 

의아한 표정이 된 남편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렇다면…, 우리 인류도 그런 것인가요? 혹시 그들이 만든 수단인가요?”


14
카스피해의 섬으로 탈주한 술탄은 몽골 추격 부대가 당도했을 때 이미 병사한 상태였다. 마지막까지 술탄 시신을 지키고 있던 경호대장 아미드는 수부테이와 마지막 결투를 벌였다. 놀랍도록 민첩한 아미드가 자신에게 발사되는 화살을 절묘하게 피해 가며 수부테이를 공격하자 몽골병이 주변을 원처럼 둘러쌌다. 아미드가 소리쳤다. 

“또 기다려줬지만 역시 넌 느려. 잘 쫓아와 봐. 잊지 마. 난 이걸 정말 즐겨.” 

장창을 쥔 수부테이가 상대 이마를 향해 최후의 일격을 가하며 외쳤다. 

“널 믿은 내가 순진했다. 여기서 끝장내자!” 

갑자기 굉음이 울리며 주변 시공간이 응축되는 듯하다 본래 형태로 팽창했다. 타일 바닥에 쓰러진 아미드를 확인한 수부테이가 실망한 표정으로 천천히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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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tyImage]

[GettyImage]

‘차원 이동자’를 검색하던 예림은 우연히 동명의 소설을 발견했다. 별 기대 없이 저자 정보를 확인하던 그녀의 손이 조금씩 떨려왔다. 저자인 공민서는 주요 일간지 과학기자 출신이었다. 호기심을 억누를 길 없던 그녀는 내친김에 소설을 구입해 그날 밤 바로 독파했다. 

다음 날 ‘서프라이즈 월드’ 사이트를 통해 내선 번호를 확인한 예림은 두근대는 가슴을 애써 진정하며 전화번호를 눌렀다. 두 사람을 거쳐서야 당사자와 연결됐다. 

“전 선예림이라고 해요. 공 작가님 소설을 읽었어요.” 

상대는 조심스럽게 대답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예림이 말했다. 

“사실은…. 저 공 작가님과 비슷한 경험을 했어요.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겠지요?” 

꽤 오랜 침묵 끝에 민서가 대답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우린 만나야겠네요?” 

환하게 웃던 예림이 소설 저자 소개란 사진 속의 민서 얼굴을 찬찬히 바라봤다.


차원이동자(The Mover)_6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신동아 2020년 3월호

윤채근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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