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호

환상극장④

신라 천재 최치원의 금지된 사랑

  • 윤채근 단국대 교수

    .

    입력2021-01-03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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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운하 옆 오층 주루 난간에서 바라다보이는 소주 지역의 밤 풍경은 찬란하고도 위엄 있었다. 등불 밝힌 누각과 그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 모습을 넋 놓고 감상하던 고려 역관 최인량이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한시를 조용히 읊조렸다. 그가 오래도록 기다리던 왕 노인이 나타난 건 그 순간이었다. 

    “고려의 역관 나으리가 이미 은퇴해 쓸모없는 송나라 노인을 왜 찾으셨을까?” 

    앞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왕 노인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인량을 쏘아보며 물었다. 우선 닭요리부터 주문한 인량이 상대의 잔에 이미 미지근해진 차를 따르며 공손히 대답했다. 

    “저희 고려 사신단이 북쪽 요나라를 거쳐 돌아가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산동으로 이동해 배를 타려 하고 있지요.” 

    백주를 마시듯 차를 입안에 털어 넣은 노인이 입술을 뒤틀며 웃기만 했다. 두 손을 모은 인량이 이번엔 독한 백주를 시키고서 말을 이었다. 



    “전 허락을 얻어 잠시 사신단 본진에서 벗어났습니다. 알아보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막 탁자에 배달된 술병을 들어 자기 잔에 한가득 따른 노인이 말했다. 

    “비록 운하를 따라 세금이나 걷고 다니는 조운 일을 맡았지만, 내 이래봬도 송나라 관리 출신이오. 하급직이라도 세상 돌아가는 것 정도는 안다 이거지. 요즘 고려가 요나라와 화친하고 잘 지낸다면서? 뭘 알아낼 꿍꿍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잘 안될 거요.” 

    길게 한숨을 내쉰 인량이 자기 잔에도 술을 따라 살짝 입술만 적시고 입을 뗐다. 

    “고려는 요나라와 화친한 게 아닙니다. 그들이 귀 대국과 우리 고려 사이를 가로막고 있지 않습니까? 길을 트려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일도 있는 법이지요. 오죽하면 이리 먼 길을 돌아가고 있겠습니까?” 

    연거푸 백주를 들이켜던 노인이 탁자에 갓 올린 닭요리 한 점을 베어 물고 말했다. 

    “좋소. 중간에서 소개해 준 사람들 체면도 있으니. 뭘 알아보시려고?” 

    인량이 몸을 앞으로 굽히며 속삭였다. 

    “쌍녀분이 있는 곳에 가보고 싶습니다. 노사께서 좀 도와주십시오.”


    평생 궁금해하던 문제

    송 황제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되는 고려 사신단에 선발되자마자 인량은 조상님들 신주를 모신 사당에 가 예를 올렸다. 그는 평생 궁금해하던 문제를 이제야 풀 기회가 왔음을 영령들께 두루 고하고 침실로 돌아와 아내와 마주 앉았다. 

    “부인. 내 이번 행차에서 반드시 쌍녀분에 다녀오리다. 하지만 이건 알아두시구려.” 

    불안한 눈빛의 아내는 말없이 남편 입만 바라보았다. 

    “황제가 있는 개봉까지는 육로로 가게 될 거요. 요나라를 통과하겠지. 하지만 소주에 있다는 쌍녀분에 들르려면 돌아올 때는 남쪽으로 내려와 뱃길을 이용해야 하지 않겠소?” 

    침을 꼴깍 삼킨 아내가 희미한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은 그저 역관 신분인데, 어떻게 사신 행로를 마음대로 바꾼단 말씀이세요?” 

    아내의 두 손을 꼭 쥔 인량이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요나라 땅을 지날 때 그쪽 관리들과 연회가 있을 거요. 거란족 말을 할 줄 아는 역관은 거의 없소. 내가 통역을 하게 되지 않겠소? 적당히 실수할 셈이오. 그들 화를 부추길 만한.” 

    “그러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아이고, 관두세요!” 

    “신중하게 할 거요. 하지만 문제가 커지면 내 운명을 장담할 수 없소. 자연스럽게, 귀국 노정을 바꿀 정도로만, 그 정도로만 일을 칠 셈이니까.” 

    인량은 두려움에 바들바들 떠는 아내를 위로하며 하룻밤 내내 뜬눈으로 보내야만 했다. 


    쌍녀분에 얽힌 오래된 이야기

    코끝이 발그레해질 정도로 취기가 오른 왕 노인이 젓가락질을 멈추고 말했다.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소? 화본 나부랭이 때문에 쌍녀분에 가겠다고?” 

    고개를 크게 가로저은 인량이 급히 대답했다. 

    “창극 대본인 화본이 아니라 소설입니다. 고려에서는 아주 유명한 작품이지요. 그 주인공이 저의 조상인 최치원 공이시고요.” 

    한 손으로 천천히 턱을 괸 노인이 인량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물었다. 

    “우리 송에선 그런 걸 화본이라 부르오. 아무튼 당신이 그 유명한 최치원의 후손이라 그 말 아니오?” 

    “그렇습니다. 노사께서 그분에 대해 잘 아시는가 봅니다?” 

    “소주 지역 사람 중에 최치원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소? 당나라 때부터 아주 유명했으니까. 신라에서 유학 왔던 분 아니오? 여기서 첫 벼슬을 살다 신분이 귀해졌다 들었소만.” 

    “빈공과에 급제하신 뒤 이곳 율수현을 다스리셨다 들었습니다. 관운은 꽤 좋으셨지만 당이 망해가자 신라로 귀국하셨지요.” 

    “귀국해선 잘 사셨소, 그 양반?” 

    술잔을 들어 목을 축인 인량이 서글픈 표정으로 대답했다. 

    “신라 형편도 좋지 않았습니다. 뜻을 펴시지 못하자 은둔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크게 입맛을 다신 노인이 팔짱을 끼며 속삭였다. 

    “그래서 그 양반 얘기가 고려에 널리 퍼진 거구려? 자고로 실패한 영웅 얘기만큼 재밌는 게 없지! 그런데 그 소설 배경이 쌍녀분이라 그거 아니오?” 

    고개를 끄덕인 인량이 상대 잔에 술을 가득 부으며 대답했다. 

    “조금 괴상한 귀신 이야기입니다. 어려서부터 참 이상하다 생각해 왔지요. 하고많은 얘기 중 공께서 여자 귀신들과 사귀는 얘기가 만들어진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두 손을 마주 비비며 자세를 바로잡은 노인이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 문제라면 내가 약간은 도움이 되겠구려. 우선 들어봅시다. 고려에서 유행했다는 그 얘기.”


    최치원이 쌍녀분에 찾아간 까닭

    가문의 창업자인 최치원에 관한 소설은 인량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개경에서 유행했다. 성균관에 들어갈 무렵 작품을 처음 접한 인량은 작가의 범상치 않은 글솜씨만큼이나 그 안에 담긴 해괴한 내용에 놀랐다. 고민에 빠진 그가 부친에게 이 사실을 고하자 돌아온 답변은 이러했다. 

    “내 듣기론 당나라 때는 그런 이야기가 흔했다고 하더구나. 공께서 부임하셨던 소주 지역의 어떤 문인이 지었다고도 하고, 또 친한 후배였던 신라 유학생이 지었다고도 하고. 잘 모르겠구나. 아무튼 언제부턴가 개경에도 퍼지기 시작했던 걸로 기억한다.” 

    호기심을 주체 못한 그는 소설을 찍어낸 절의 주지를 만나 출판하게 된 연유를 캐물었다. 주지의 답은 이러했다. 

    “우리야 송나라에서 물 건너온 재밌는 책을 필사해 각수에게 넘길 뿐이외다. 나랏님께서 지정하신 중요한 책은 따로 서목을 만들어 대궐에서 찍어내고 있지 않소이까? 우리 같은 경우로 말하자면, 잡서를 출간하며 일일이 따로 기록을 남기진 않는다, 뭐 이 말씀이외다.” 

    실망한 인량은 이번에는 송나라에서 물건을 수입해 오는 개경 상인을 찾아갔다. 수입 물목을 깐깐하게 기록해 두는 그들 습관 덕분에 인량은 마침내 궁금증을 풀어줄 무역상을 만날 수 있었다. 무역상의 답은 다음과 같았다. 

    “송나라 책을 받으면 돈이 될 물건인지부터 확인하는 거지. 돈 된다 싶음 바로 절에 보내는 거야. 절에서 불경 새기는 각수들 워낙 솜씨 좋잖아? 적당한 부수를 간행하면 저자에 풀어 팔기 시작하지. 팔릴 책인지 누가 판단하느냐고? 명색이 성균관 유생인데 홍시중이도 몰라? 별명이 문하시중이라 홍시중, 홍시중 부르고 있지. 과거에 번번이 낙방하는 친구야.” 

    인량은 개경의 한 주점에서 낙방거사 홍상춘을 만났다. 상춘은 이렇게 말했다. 

    “내 천하에 운 없는 낙방거사지만 서책에는 무불통지라 이 말씀! 최치원 공 얘기는 유통 과정이 좀 복잡해. 이게 본디 신라시대 ‘수이전’이라는 책에 실려 있었다고. 근데 책이 전란 통에 사라졌어. 대신 똑같은 내용이 당나라에서도 출간됐었다 이 말씀! 덕분에 이게 거꾸로 개경에 수입된 거지. 작가가 누구냐고? 알게 뭐람. 궁금하면 쌍녀분에 가보면 될 거 아냐? 최치원 공이 소주에 있다는 쌍녀분에 찾아가는 얘기 아닌감?”


    억울하게 죽은 두 소녀

    눈동자가 약간 풀린 왕 노인이 인량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속삭였다. 

    “어쨌든 고생깨나 하셨단 말씀이구려. 어떤 얘긴지나 한번 들어보자니까 그러시네.” 

    운하를 오가는 배가 차츰 줄어들자 주루를 가득 채웠던 손님도 썰물 빠져나가듯 하나둘 사라졌다. 어색하게 찾아든 적막을 뚫고 인량이 천천히 입을 뗐다. 

    “소설은 공이 당나라 과거시험에 급제한 뒤 율수현에 부임한 때가 배경입니다. 어느 날 초현관이라는 유명한 객관을 방문하게 되지요. 그런데 초현관 부근에는 유서 깊은 무덤 하나가 있었답니다. 억울하게 죽은 두 소녀를 묻은 쌍녀분입니다. 워낙 유명한 장소인지라 공이 방문해서 시를 남깁니다.” 

    “잠깐! 초현관은 실제 당나라 때 있었소. 지금은 폐허가 됐소만. 얘기 계속하시구려.” 

    “그럼 이어가겠습니다. 무덤 앞 석문에 시를 남기고 저녁에 산책을 합니다. 그때, 갑자기 낯모를 시녀 한 명이 출현해 무덤의 주인인 두 소녀의 답시를 전해주지요.” 

    “다시 잠깐! 그 시녀도 귀신이오?” 

    “그렇지요! 그녀 역시 귀신입니다. 아무튼 답시를 읽은 공은 소녀들에게 매료됩니다. 간절히 만나고 싶어 하지요. 결국 무덤가에서 셋이 만나 멋진 시를 주고받게 됩니다. 그 가운데 절창 한 수를 읊어봐도 될까요?” 

    떨떠름한 표정의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인량이 소설 속 연시 하나를 유장하게 읊었다. 읊기를 마친 인량이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술잔을 입에 대자 노인이 말했다. 

    “지금 읊은 시 말인데, 그거 시가 아니라 노래 가사요. 잘 아시겠지만 내가 불러드릴까?” 

    놀란 인량이 두 손을 모아 부탁의 뜻을 전하자 노인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같은 내용이었지만 노랫가락으로 바뀌자 느낌이 훨씬 처량하고 슬펐다. 손으로 무릎장단을 맞추며 노래하던 노인이 문득 중간에 멈추고 말했다. 

    “여기까지요. 내 무식하오만 이 근방 가요란 가요는 다 꿰고 있지. 얘기 계속 해보시오.” 

    “노래 잘 들었습니다. 세 사람은 결국 동침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침 해가 떠오르자 영원한 이별을 맞이합니다. 아주 구성진 장시 한 수가 마지막에 등장하지요. 공은 그 후 세상에 뜻을 잃고 방황하다 신라로 귀국합니다. 그 이후의 삶은 현실과 정확히 일치하고요.” 

    “세상으로부터 은둔했다, 그거 아니오?” 

    “그렇지요. 신라의 가야산이라는 곳에서 신선이 되셨다는 전설이 있고, 어떤 글 가운데 더러는 자결하셨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부친께 여쭤보니 세상과 인연을 끊고 조용히 돌아가셨다고 하시더군요. 부끄러운 저희 집안 얘기였습니다.” 

    눈빛이 초롱초롱해진 노인이 고개를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쌍녀분에 묻힌 두 소녀 말이오. 책엔 누구라고 쓰여 있소?” 

    “장씨 성을 가진 소녀들입니다. 자매였지요. 아버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들에게 강제로 혼인시키려 들자 울분 때문에 죽은 것으로 나옵니다.” 

    “어떤 남자들인데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소금장수와 차장수입니다.” 

    노인이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한참을 키득거리던 그가 겨우 진정하고 말했다. 

    “이 나라에선 최고의 신랑감이오. 엄청난 부자들이지! 그 작품이 원래 당나라에서 지어진 것이라면, 신라로 건너가서 많이 바뀐 모양이구려. 소금장수를 마다하는 처녀라니!” 

    인량이 건성으로 따라 웃으며 어둠에 잠긴 운하 주변을 둘러봤다. 그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던 노인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내일 저녁 여기서 다시 만나야겠소. 내 하나 조사해 볼 게 생겼다 이 말이오. 쌍녀분에 갈지 말지는 그때 정합시다.”


    고려 사신의 일탈

    다음 날 늦게까지 늘어지게 잔 인량은 숙소인 객관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길에서 왕 노인을 소개해 준 소주 관아 소속 고려 역관을 우연히 만난 인량이 상대를 구석으로 잡아끌며 말했다. 

    “석숭 역관 나으리! 소개받은 왕 노사는 잘 만나봤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군요.” 

    석숭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여태 사신단으로 복귀하지 않고 뭐하고 계셨소이까? 외국인이 이렇게 멋대로 돌아다니면 아니 된단 말입니다. 사정 봐드리는 것도 한도가 있소이다.” 

    주머니에서 은전을 꺼내 상대 소매 안에 넣으며 인량이 다급히 속삭였다. 

    “제가 대국 말을 잘하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감쪽같이 쌍녀분에만 다녀올 심산이니까요.” 

    “그럼 어서 다녀와 사신단 본진에 따라붙어야 하지 않겠소이까? 답답하오.” 

    “염려 마십시오. 그런데 왕창령이라는 그 노사 분 말입니다. 정체가 뭡니까?” 

    “왜, 뭐가 잘못됐소이까?” 

    “아니 그게 아니라, 보통 분이 아닌 것 같아서 말입니다. 당나라 가요를 자유자재로 부르더란 말이지오.” 

    뇌물로 받은 은전을 소매 깊숙이 넣으며 석숭이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비록 하급직이었지만 관리 출신 아닙니까? 게다가 그 노인 꽤 잘나가는 설화인이란 말이요!” 

    “설화인이라면?” 

    “화본 작가란 말입니다. 워낙 이야기 재주가 뛰어나 이 지역에선 알아줍니다. 최 역관 부탁 듣고 제일 먼저 그 사람 생각이 떠올랐소이다. 다 그 소설인지 뭔지 때문에 이러시는 거 아니었소이까?”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인량이 석숭의 소매에 은전 하나를 더 집어넣으며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오늘 저녁까지 쌍녀분에 가는 문제를 결정하겠습니다. 조금 더 말미를 주십시오.” 

    석숭과 헤어진 인량은 노자를 모시는 도교 사당인 도관을 둘러보며 시내를 배회했다. 유학이 뿌리내린 고려와 달리 송나라 성시를 가득 채우고 있는 건 바로 도관들이었다.


    왕 노인 기억 속의 진실

    저물녘 주루에서 다시 만난 왕 노인은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그가 고급 안주를 잔뜩 시키더니 인량을 향해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책을 받아 든 인량이 묻자 노인이 대답했다. 

    “그게 화본이오. 요즘 잘나가는 대본은 아닌데, 제목을 한번 보시구려.” 

    제목을 훑어본 인량이 조금 놀란 눈빛으로 책갈피를 이리저리 넘기다 물었다. 

    “이건 최치원 공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로군요?” 

    미묘한 미소를 흘리며 노인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맞소이다! 당나라 때부터 전해오던 얘기에 살을 좀 붙인 거지. 어제 댁과 만날 때부터 계속 이 화본을 떠올리고 있었지 뭐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였거든.” 

    책을 내려놓은 인량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이걸 보여주시는 이유가 뭔지요?” 

    탁자에 두 손을 집으며 상체를 앞으로 내민 노인이 대답했다. 

    “이게 말이요, 원본은 아니라 이거지. 원본은 여기에 들어 있다고나 할까?” 

    자기 머리를 가리킨 노인이 몸을 뒤로 물려 등을 의자에 바싹 붙였다. 인량은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자꾸 머뭇거려야 했다. 탁자 위에 놓인 새우요리를 집어 든 노인이 속삭였다. 

    “실은 나도 까맣게 잊고 있던 대본이었소. 어제 이 대본을 찾아내자 어릴 때 주워들었던 얘기도 뒤미처 떠오릅디다.” 

    “듣고 싶습니다.” 

    새우를 입안에 밀어 넣고 오래 씹던 노인이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바지에 문대며 말했다. 

    “고려에선 어떻게 그런 얘기가 만들어졌는지 모르겠소만, 내 알기론 원래 얘기는 그것과 한참 다르오.” 

    “고려의 작품과 아주 많이 다릅니까?” 

    “다르다마다! 당나라 때 여기서 읽히던 작품과도 다르고. 오직 화본만이 진실을 담거든.”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잡은 인량이 상대의 입을 지그시 응시했다. 노인이 다시 말했다. 

    “당신이 말한 그 소설 속 얘기는 사실을 미화한 거요. 최치원이 율수현에 부임했을 때, 쌍녀분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소.” 

    “존재하지 않았다면?” 

    “다 거짓말이지! 난 기억력이 좋아 어려서부터 뭐든 잘 외웠소. 그 시절 최치원을 주인공으로 한 화본도 읽은 기억이 나오. 탁자 위 이것과는 다른 거였소. 진짜 이 지역 사람들로부터 수집한 얘기를 토대로 엮은 거였지. 그게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원본이란 거요.” 

    “그 원본 얘기를 해주십시오.” 

    “내 장담하지만, 이 얘길 듣고 나면 쌍녀분엔 절대 가고 싶지 않아질 거요.”

    신라 천재 최지원의 금지된 사랑

    뛰어난 문재(文才)로 신라를 넘어 당나라까지 이름을 알린 최치원은 여러 전설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GettyImages]

    뛰어난 문재(文才)로 신라를 넘어 당나라까지 이름을 알린 최치원은 여러 전설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GettyImages]

    떠날 채비를 마친 인량이 석숭을 찾아가 하직 인사를 했다. 못내 아쉬운 얼굴을 한 석숭이 물었다. 

    “쌍녀분엔 안 가보고 그냥 떠나도 되겠소이까? 뭐 나야 다행이오만.” 

    고개를 끄덕인 인량이 쓸쓸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진실을 알았으니 굳이 갈 필요가 없어졌지요.” 

    “왕 노사가 무슨 중요한 말이라도 해줬소이까? 나도 조금 궁금하긴 하오만.” 

    한참을 망설이던 인량이 짐 꾸러미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말하자면 조금 긴 얘기입니다. 제 조상이신 최치원 공께서 이 지역에 부임하시고 벌어진 일입니다.” 

    바싹 다가앉은 석숭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인량을 바라봤다. 인량이 입을 뗐다. 

    “현에 도착하신 공께서는 부쩍 외로움을 많이 타셨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외국인이기도 하셨고. 그래서 고을의 한 자매와 깊은 연정에 빠지게 되셨다는군요. 송씨 집안이었는데, 언니가 혜련, 동생이 지련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오! 그건 처음 듣는 얘기로군요?” 

    “제가 읽은 소설에선 장씨로 바뀌어 있습니다. 아무튼 두 자매는 공을 무척 따랐답니다. 공 역시 재주 많은데다 예쁜 소녀들을 몹시 총애하셨고. 하지만 20대였던 공께는 이미 아내가 있었던 관계로.” 

    “어차피 맺어질 순 없었다?” 

    “그렇지요. 그러다가 임기를 마친 공께서는 고을을 떠나셔야 했답니다. 자매와 마지막 밤을 보낸 곳이 바로 초현관이고. 그날 무척이나 울적해진 세 사람은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고 합니다. 다음 날 아침 공께서 눈을 뜨셨을 때, 소녀들은 이승 사람이 아니었지요.” 

    “자결했단 말이오이까?” 

    “그렇습니다. 나란히 목을 매 죽었다는군요. 그래서 그녀들을 초현관 인근에 묻어주고, 무덤을 쌍녀분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소설 속에선 공께서 부임하시기 훨씬 오래전에 죽은 귀신들로 나오지만, 사실이 아니었지요.” 

    “그럼 지금껏 전해오는 쌍녀분 설화는 다 거짓이란 말이오이까?” 

    “그냥 거짓이라기보다는, 사실보다 더 멋진 이야기가 사실을 덮어버린 경우가 되겠지요. 진실을 그냥 묻어두는 게 더 좋을 때도 있는 법이니까요.” 

    석숭과 이별한 인량은 말에 올라타자마자 사신단 본진이 있는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왕 노인이 헤어지기 직전 그에게 해준 마지막 말, 석숭에게는 차마 숨겨야 했던 말이 다시 귓전을 맴돌았다. 

    “진짜 귀신은 최치원 공이었소! 쌍녀분 주변에 늙은 사내 유령 하나가 계속 출몰했었다고 하오. 당나라가 망한 이후로도 아주 오래도록 말이요. 그 기이한 유령 사건 덕분에 소설도 화본도 지어진 거거든.”

    * 이 작품은 ‘태평통재’를 통해 전해진 소설 ‘최치원(崔致遠)’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것이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환상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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