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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꼼수 분열은 ‘대깨문’과 ‘소깨문’ 싸움”

[‘한때 좌파’ 4人의 쾌도난마①] 문재인 시대㊤

  •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나꼼수 분열은 ‘대깨문’과 ‘소깨문’ 싸움”

  • ● “민주 질서 무시 文정권 리더들은 레닌주의자”(민경우)
    ● “86세대, 20대 때부터 민주주의 부재 상태”(나연준)
    ● “조국 속한 집단 전체가 나르시시즘”(봉달호)
    ● “체제 뒤엎으려던 80년대 대학생, 민주화운동가 아냐”(노정태)
    ● “촛불혁명은 86세대가 韓 무혈점령한 것”(민경우)
    ● “한반도에서 北 빼고 가장 저질 팬덤이 문빠”(나연준)
    ● “文 비판하니 욕설 세례, 내 밥줄 끊으려 해”(봉달호)
    ● “97세대의 文 지지는 ‘자유로부터의 도피’”(노정태)


‘한때 좌파’ 네 사람이 2020년 12월 7일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에 모였다. 왼쪽부터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민경우 민경우수학교육연구소장, 나연준 제3의길 편집위원, 봉달호 편의점주. [지호영 기자]

‘한때 좌파’ 네 사람이 2020년 12월 7일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에 모였다. 왼쪽부터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민경우 민경우수학교육연구소장, 나연준 제3의길 편집위원, 봉달호 편의점주. [지호영 기자]

네 사람 모두 반문(反文)이다. 문재인 정부에 날 선 칼날을 들이댄다. 여기까지라면 별 흥미가 없다. 친문(親文)이 그렇듯 반문도 차고 넘친다. 이건 어떤가. 네 사람 모두 ‘한때 좌파’였다. 그러면서도 86세대(80년대 학번·60년대 출생), 97세대(90년대 학번·70년대 출생), 밀레니얼 세대(1980년 이후 출생)가 섞여 있다. 네 사람의 이력부터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민경우 민경우수학교육연구소장은 1965년생이다. 1987년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을 지냈다. 1995년부터 2005년까지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사무처장으로 일했다. NL(민족해방) 계열 핵심 이론가였다. 

봉달호 편의점주는 1974년생이다. 92학번이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학생운동을 시작해 구력은 길다. 주체사상을 공부했으나 나중에 비(非)NL 계열로 총학생회장에 출마해 당선됐다. 

나연준 제3의길 편집위원은 1981년생이다. 한국 근현대사 정치사상사를 전공하는 역사학도다. 중앙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 논문을 쓰고 있다. 민주노동당 당원으로 활동했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는 1983년생이다. 딴지일보 온라인 에디터와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을 지냈다. 1980년대생을 대표하는 진보 논객으로 불렸다. 

‘신동아’는 2020년 12월 7일 서울 서대문구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으로 네 사람을 초청했다. 서로의 글은 즐겨 읽지만 이날 처음 보는 사이도 있다고 했다.

“전쟁 끝났어, 빨리 나와”

민경우 민경우수학교육연구소장은 “문재인 정권의 리더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레닌주의자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고 했다. [박해윤 기자]

민경우 민경우수학교육연구소장은 “문재인 정권의 리더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레닌주의자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고 했다. [박해윤 기자]

기자 | 민경우 소장은 1987년 6월 항쟁 당시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이었는데요. 민주화운동의 상징자본이 파산했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민경우 | 조국 사태 이후 친구들과 전혀 대화가 안 돼요. 과거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이 지금 국민들이 보기에는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얘기를 하고 있어요. 검찰개혁을 주장하는데,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상태가 전혀 아니에요. 

기자 |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 중 일부만의 일탈이라는 반박도 가능할 텐데요. 

민경우 | 문재인 정권에 민주화운동의 중심 세력이 있기 때문에 정권이 대중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는 건 민주화운동의 실패라고 볼 수 있죠.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나 서민 단국대 교수처럼 민주화운동 세력에서 부분적으로 이탈한 사람들은 있죠. 저도 거기에 속하고요. 하지만 그 규모가 크지는 않잖아요. 

나연준 | 민주화운동 세력은 민주주의를 몸에 각인할 기회가 많지 않았어요. 지하조직에서 주로 활동했기 때문에 조직 보위가 운동가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어요. 타인을 자신과 동일한 권리의 주체로 바라보거나 절차적 정당성을 준수해야 한다는 훈련이 안 돼 있죠. 그 사람들이 20대 때는 별로 가진 게 없잖아요. 50대가 되면 쥔 것도 지킬 것도 많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기득권화됐어요. 여기에 20대 때부터 이어진 민주주의의 부재 상태가 결합한 겁니다. 

봉달호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0년쯤 지났을 때 태평양 어느 섬에서 일본군 장교가 하나 발견됐는데, 전쟁이 끝난 것도 모르고 혼자 투쟁하고 있었어요. ‘전쟁 끝났어. 빨리 나와’ 이러는데 본인은 안 끝났다는 거예요. 

노정태 | 이것은 우리를 항복시키려는 적의 계략이라고 본 건가요.(웃음) 

기자 | 봉달호 편의점주는 “반미, 종북이 본질이던 우리 운동을 민주화운동이라 부르는 것은 도둑질하려고 은행에 들어갔다가 우연찮게 은행 강도를 잡은 도둑을 영웅으로 추앙하는 형국”이라고 쓴 적 있죠. 

봉달호 | 권력을 쥐었는데도 아직 거악과 싸우고 있다는 착각이 이 사람들에게 있어요. 요새 사람들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해 비아냥거리면서 나르시시즘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조 전 장관이 속한 집단 자체가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어요. 

과연 과거에 우리가 민주화운동을 했었을까…. 저는 자주민주통일(자민통) 운동을 했던 것 같긴 한데, 거기서 민주는 ‘후순위채권’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운동권 문화가 전체주의적이었고 그 안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내면화된 신념 없이 분노나 당위성에 따라 운동했는데 지금도 반복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6월 항쟁 때 反美 외치니 ‘그러지 마’ 하시더라고요”

봉달호 편의점주는 “86세대에게 이념은 허울이나 명분일 뿐이었다”고 했다. [박해윤 기자]

봉달호 편의점주는 “86세대에게 이념은 허울이나 명분일 뿐이었다”고 했다. [박해윤 기자]

기자 | 최근 민경우 소장이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여권의 압박을 레닌의 폭력혁명론에 빗댔는데, 봉달호 편의점주 의견과 연결고리가 있을 것 같네요. 

민경우 | 1980년대 중반 배운 민주주의론이 무엇일까 하는 고민을 하다가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어요. 칸트나 로크, 미국의 독립운동에 대해 (운동권 안에서) 토론해 본 적이 없어요. 레닌주의부터 얘기했고, 그조차 이론보다는 행동주의로 받아들였죠. 우스갯소리로 ‘당을 만들어 무기고를 접수해야 한다’는 얘기를 1984~1985년에 대학교 2학년들이 했다고요. 레닌도 자기를 민주주의자라고 하고, 주체사상도 민주주의라고 하니까 민주주의라는 워딩은 있었죠. 문재인 정권의 리더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레닌주의자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검찰이라는 거대악이 있고 쟤들은 민주적 질서를 거치지 않고서 제거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바로 레닌주의예요. 

기자 | 여권이 많이 쓰는 표현이 ‘민주적 통제’인데요. 

민경우 | (레닌주의와) 똑같죠. 

노정태 | 저는 민주화운동이 파산했다기보다는 이제야 진상이 보인다고 얘기하고 싶어요. 혁명운동하고 반체제운동한 사람도 포용하는 국가는 민주국가죠. 그런데 이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있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란 말이에요. 1980년대 김영삼(YS), 김대중(DJ)이라는 정치 지도자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YS, DJ 찍었을 때 받게 될 멸시와 배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찍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자에 가깝죠. 대학가에 모여 체제를 통째로 들어 엎자는 모의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사람들이 민주화운동가는 아니었습니다. 요새 태국 민주화운동에 대한 보도가 많잖아요. 태국에는 야당 지도자가 없어요. 민주화운동이 작동할 만한 대안이 되는 정치세력, 즉 지도자가 부재하니 대학생들이 왕정 폐지를 주장해도 아무런 힘을 받지 못하는 겁니다. 

기자 | 민주화 과정에서 양 김씨의 역할이 중요했다는 주장인데, 민경우 소장도 동의하나요. 

민경우 | 5·18과 관련해서도 DJ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어요. 5·18 이후에는 부산이 운동의 중심이었는데 1983년 김영삼이 단행한 23일간의 단식이 부산 시위를 촉발했어요. 야당이 선전한 1985년 2·12 총선이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였죠. 그때 서울대 총학생회를 비롯해 대학생들은 ‘뻘짓’하고 있었어요. 주체사상, CA(제헌의회)그룹 같은 이상한 소리를 했어요. 정치적 의미에서 대학생의 민주화운동은 터무니없이 과장됐습니다. 

나연준 | 1987년 6월 항쟁 때 CA그룹에서는 ‘제헌의회 소집’을 내걸었죠. NL(민족해방) 계열은 ‘독재타도’를 표면적으로 내걸었지만 원래 하려던 말은 ‘반미자주’였어요. 6월 항쟁에 대해 86세대가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당시 현장에서 86세대가 외치고 싶었거나 실제 외친 구호는 민주화가 아니었습니다. 

나연준 편집위원의 ‘돌직구’를 민경우 소장은 저항 없이 순순히 맞았다. 그러고는 경험담을 꺼냈다. 

민경우 | 넥타이부대가 판을 깔아주니 대학생들이 거리에서 활개를 친 거죠. 6월 항쟁 후에 대학생들은 조국통일론으로 확 빠져버렸어요. 학생운동의 주요 동력은 이미 1986년 자주통일운동이 돼 있었어요. 이걸 일시적으로 반독재투쟁으로 전환했다가 1988년 본궤도로 돌아온 거죠. 사실 제가 그랬어요. 6월 항쟁 때 거리에 나가서 반미(反美)를 외쳤어요. 어느 날 명동성당 앞에서 넥타이 매신 어른이 절 부르더니 ‘너 그러지 마’ 하시더라고요. 나는 학교에서 늘 하던 소리니 괜찮겠지 하고 한 거죠.

文의 콘크리트 지지층 97세대

나연준 제3의길 편집위원은 “민주화운동 세력은 민주주의를 몸에 각인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고 했다. [박해윤 기자]

나연준 제3의길 편집위원은 “민주화운동 세력은 민주주의를 몸에 각인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고 했다. [박해윤 기자]

기자 | 그 유산이 90년대 학번으로 이어집니다. 1990년대에도 자주통일운동이 학생운동의 중추 아니었습니까. 봉달호 편의점주가 이 중 유일한 97(90년대 학번, 70년대 출생)세대인데요. 

봉달호 | 저는 거창하게 얘기하면 1996~1997년 전향했어요. 더는 NL이니 PD(민중민주)니 ND(민족민주)니 이런 말은 안 하겠지 했는데 지금도 같은 말을 하고 있잖아요. ‘세상이 왜 이래’(웃음). 저는 고등학생이던 1989년 운동을 시작했어요. 1980년대 학생운동은 그나마 고민이 있던 것 같아요. 1990년대 학생운동은 주입식이었어요. 김정일이 쓴 ‘주체사상에 대하여’는 거의 외우다시피 했죠. 1990년대 중반이 되면 정통을 따지면서 북한에서 나온 원서가 아니면 보지도 않았습니다. 굉장히 교조화한 거죠. 1990년대 대학에는 상반되는 세력이 공존했어요. 전체주의 문화를 가진 운동권이 있던 반면, 서태지와 아이들에 빠진 대학생들이 있었어요. 두 집단이 대학에서 어울렸는데 지금은 똑같은 정치 성향을 보이니 참 그로테스크(grotesque·기괴)해요. 

기자 | 나연준 편집위원은 “97세대는 팬덤과 같은 자신의 문화 경험을 정치로 확장했다”고 쓴 적이 있잖아요. 

나연준 | 1980년대 학생운동을 한 사람 상당수는 제도 정치권 진출에 성공했고 안착했어요. 반면 1990년대 학생운동은 계속 실패하면서 역량을 소진했어요. 90년대 학번은 자기를 대변해 줄 수 있는 정치세력을 세대 내에서 못 찾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윗세대를 지지하죠. 지지를 만들어가는 방식에서 두 세대 사이에 차이가 있어요. 서태지와 아이들이 1992년 데뷔했어요. 90년대 학번들에게는 누군가를 공적으로 좋아하는 첫 경험이 팬덤이었던 겁니다. 팬덤이 정치 영역으로 확장하면서 ‘노무현 바람’에서 ‘안철수 현상’까지 흐름이 이어졌죠. 

노정태 | 1930~1940년대 독일인들이 왜 자발적으로 나치를 지지했을까. 당시 바이마르공화국의 혼란 속에서 (불안해하는 독일인들에게) 히틀러가 ‘나에게 종속되는 게 너에게는 좋다’는 식으로 대중을 설득했어요. 에리히 프롬이 전체주의를 분석하며 꺼낸 ‘자유로부터의 도피’입니다. 97세대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자유로운 대중문화를 만끽한 세대입니다. 하지만 자유로운 존재로서 스스로를 재정립하지 않고 의탁할 수 있는 또 다른 존재를 찾아 헤매고 있었고, 노무현의 출현 및 비극적 죽음과 맞물려 유사종교화 된 게 아닌가 싶어요. 

나연준 | 러프(rough)하게 정의하자면 팬덤은 정서와 서사의 공동체예요. 서태지와 아이들이 순위 프로그램에 나가면 팬들이 손가락 부서져라 ARS를 눌렀어요. 저도 그중 한 명이었죠.(웃음) 그렇게 해서 1등 만들어놓으면 기분이 너무 좋은 거예요. 그런 식의 서사를 정치인에게도 투여한 거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되는 과정이 굉장히 극적이었잖아요. 돌아가시는 과정도 상당히 비극적이고요. 여기에 완전히 매몰돼 있거든요. 이 서사의 특징은 스스로 늘 선한 세력으로 규정한 뒤 악마와 싸우는 겁니다. 가까이는 노무현에 머물지만 멀리는 토착왜구 운운하면서 식민지 시기까지 올라가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가 ‘추억 열차’를 타며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노정태 | 서태지와 아이들과 1위 경쟁을 하던 트로트 가수가 있었는데…. 누구였죠? 

나연준 | 2집 때 가장 치열하게 경쟁한 가수는 김수희 씨죠. ‘애모’. 

기자 | 나연준 편집위원은 진짜 팬이셨네. 

노정태 | 서태지와 아이들 팬으로서 자아를 형성한 세대에게는 김수희 씨 같은 구세대와의 경쟁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아마겟돈처럼 느껴질 거예요. 97세대의 의식세계 속에는 어릴 때 느낀 문화적 답답함이 남아 있어요. 걸핏하면 음악 검열을 했던 기성세대가 아직까지도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하지만 97세대를 억눌렀던 사람들은 나이 먹고 은퇴했어요. 이제는 97세대가 사회적으로 어른 역할을 해야 하는데 여전히 공부 안 하고 콘서트 가다 걸려서 부모님한테 혼나던 시절의 마인드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文 대통령은 허물로만 있고요”

97세대가 난타당하자 기자는 지긋이 봉달호 편의점주를 쳐다봤다. 그가 눈치껏 운을 뗐다. 

봉달호 | 요새 욕먹는 97세대로서 자기반성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웃음). 우리 세대는 뭐라고 규정하기 어려우니 X세대라고 불렸어요. 앞 세대와 달리 저희 세대에는 동질감이 없었어요. 이제야 뒤늦게 생기는 것 같기도 하고요. 우리는 축복받은 세대예요. 소비자본주의의 혜택을 가장 먼저 받았고, 문화적 다양성을 경험했죠. 대학 진학률도 높았고 대학 내에서 다양한 의견을 관철할 수 있었죠. PC통신을 통해 정보통신 혁명의 세례도 누렸고요. 

40대가 문재인 정부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현상을 두고도 과도한 정치적 해석을 할 필요는 없어요. 현 정부를 지지하는 분들에게 물으면 ‘지금 코로나 상황이잖아. 힘들 때는 뒤에서 장수한테 뭘 꽂는 거 아니야.’ 이러거든요. 40대는 안정이 가장 중요해요. 40대가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는 건 진보적 사고가 아니라 오히려 안정성을 희구하는 보수적 사고예요. 우리 세대를 대표할 만한 지도자가 나온다면 얼마든지 뒤집히고 열광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민경우 | 지금의 40대가 20대이던 1990년대에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책이 나왔어요. 기업 담론이 역동적으로 한국 사회를 장악했을 법했는데, 당시 20대에게 거의 영향력이 없었어요. 대신 유시민 같은 논객이 담론의 공백을 메웠어요. 

기자 | 그렇다면 봉달호 편의점주는 86세대 기득권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봉달호 | 노무현 정부 때는 86세대가 기관장 할 나이가 아니었죠. 지금은 딱 기관장을 할 나이예요. 오랫동안 연락이 안 되는 선배들이 있는데, 나중에 보면 다 어디 들어가 있어요.(웃음) 아주 쉽게요. 1990년대 후반 어떤 선배가 저한테 운동을 왜 하느냐고 물어봤어요. 저는 순진하게 ‘민중을 사랑해서 합니다’라고 답했어요. 선배가 하는 말이 ‘그래? 나는 권력을 잡으려 하는데’였어요. 굉장히 충격을 받았는데, 돌이켜보면 (그들에게) 딱 맞는 말이에요. 권력의 핵심에 들어가면서 이해관계에 얽히고, 그러면서 하나의 그룹을 형성해 가는 거예요. 이념은 허울이나 명분일 뿐이었던 거죠. 

기자 | 86세대인 민경우 소장이 이야기를 이어가면 좋겠는데요. 

민경우 | 민주화운동 세력이 적이라고 불렀던 집단은 2010년 즈음에 다 돌아가셨어요. 마침 노무현 정권 때 30대 중반이던 사람들이 40대 중후반이 돼 한자리할 수 있는 나이가 됐죠. 운동권만이 아니더라도 기업이나 법조계 등에서 중견 간부 지위에 올라갔습니다. 2016년 촛불시위는 보수가 물리적으로 퇴장하고 사회를 장악한 민주화운동 세력이 (한국을) 무혈점령한 거예요. 문재인 대통령은 이와 같은 구조 위에 허울로만 있고요. 


구(舊)조국, 신(新)조국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는 “민주화운동의 진상이 이제야
보인다”고 했다.  [박해윤 기자]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는 “민주화운동의 진상이 이제야 보인다”고 했다. [박해윤 기자]

기자 | 이야기를 다시 팬덤으로 돌려볼까요. 팬덤 하면 ‘문빠’를 빼놓을 수 없죠. 

노정태 | 최근 ‘나꼼수’(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멤버들이 분열한다고 하던데요. 편의적으로 단어를 붙이면 대깨문(문재인 대통령 열성 지지자)과 소깨문의 싸움 혹은 구깨문과 신깨문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는데….(일동 웃음) 

기자 | 구(舊)조국, 신(新)조국 있듯이….(웃음) 

노정태 | 네. 적과의 싸움을 통해 정체성을 확인하는데, 이건 인간의 본능에 가까워요. 스포츠처럼 그냥 즐기려고만 하면 안전하기도 하고 그 나름의 휴먼 드라마도 탄생합니다. 문제는 이 본능을 정치에 대입해 버린 거예요. 자신들이 움직이면 결과가 나온다는 걸 눈으로 확인해 버리니 멈출 수 없게 된 겁니다. 고작 수백, 수천 명이 악플 단다고 정치인이 말 바꾸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정치가 사람들의 본능을 악용하고 있는 겁니다. 

나연준 | 아이돌 팬덤은 아주 예의 바르게 행동해요. 불우이웃도 돕고 기부도 하고 나무도 심잖아요. 

노정태 | 연예인 이름으로 대신 기부하잖아요. 

나연준 | 그렇죠. 선행을 하면서 우상의 이미지 제고를 꾀한단 말이에요. 발산하는 방식이 건강하잖아요. 같은 팬덤이더라도 ‘대깨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과는 아주 결이 다릅니다. 저는 한반도에 존재하는 팬덤 중 ‘북쪽’ 빼놓고는 가장 저질 팬덤이 대깨문이라고 생각해요. 

기자 | 노무현 전 대통령도 노사모라는 팬덤이 있었는데요. 

나연준 | 노사모와 문빠의 본질은 같다고 생각해요. 노사모가 한창 활동할 때 제가 민주노동당에 있었습니다. 선거만 있으면 노사모가 민주노동당(2010년 지방선거 때는 진보신당) 게시판에 단체로 몰려와서 후보직에서 사퇴하라고 도배를 했어요. 

기자 | 민주당과 야권 단일화를 하라고 요구했죠. 

나연준 | 남이 나와 똑같은 참정권을 갖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민주주의 훈련이 덜 된 거예요. 그들은 자신이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걸 두려워합니다. 노무현 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했어요. 진보진영에서 노무현 정부를 비판했는데, 당시 노사모는 FTA 해야 한다고 주장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노무현 정부 때 체결한 한미 FTA를 이명박 정부 때 비준하려 하니까 반대했어요. 그러면서 내세운 슬로건이 ‘노무현의 FTA는 착한 FTA, 이명박의 FTA는 나쁜 FTA’였습니다. 정책을 선악으로 나누는 겁니다. 스스로도 설명이 안 되면 생각을 바꿔야 하는데, 나꼼수나 ‘김어준의 뉴스공장’ 같은 데서 매일 소스를 던져주잖아요. 

민경우 | 1988년부터 1997년이 매우 중요한 시기예요. 경제적으로 풍요로웠고, 대학 진학률이 높아지고 있었어요. 또 여대생 비율이 급격하게 올라갑니다. 1990년대 초반에는 총학생회장이 주로 남자였어요. 1990년대 후반이 되면 여성 총학생회장이 대거 등장해요. 1987년 6월 항쟁 이후 NL은 통일운동으로 많이 갔어요. 8·15가 되면 범민족대회를 했는데, 대학이 해방구 같았어요. 세상에 서태지가 있건 말건 대학 내에서 10만 명이 축제를 벌였어요. 축제의 키워드는 통일운동이었죠. 그게 팬덤과 유사했어요.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거칠 수가 있을까”

봉달호 편의점주가 얕은 한숨과 함께 말을 받았다. 

봉달호 | 문 대통령을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정서가 강하게 깔려 있는 것처럼 보여요. 문제는 그 정서가 공격적으로 표출된다는 거예요. 제가 팔자에 없이 ‘신동아’에 칼럼을 쓰는데, 한번은 하루에 100개 넘는 욕설 메일을 받은 적이 있어요. 제가 편의점을 하잖아요. 프랜차이즈 본사에 전화해 ‘이런 사람이 이런 글을 쓰는데 왜 가만히 놔두느냐’고 해요. 어떻게 사람들이 이렇게 거칠 수가 있을까. 생각의 차이를 이유로 누군가의 밥줄을 끊어버리겠다는 거잖아요. 중국 문화대혁명(문혁) 때와 너무 똑같아요. 문혁에 대한 기록을 보면 스승을 마당에서 두드려 패고 고깔을 씌웠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중·고등학생이고 순진한 사람들이었단 말이에요. 이 말을 들으면 문 대통령 지지하는 분들이 기분 나쁘겠지만, (그분들은) 역사적 상황이 문혁 때처럼 주어지면 똑같이 행동할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노정태 | 최근에 역사 강사 설민석 씨가 박정희 정권이 몰락한 이유 중 하나로 2차 오일 쇼크(파동)를 들면서 경제가 거꾸러지자 부산·마산 민심이 이반했다고 말했어요. 사람들이 이 설명을 못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박정희를 쫓아낸 것은 우리 위대한 민주화운동의 결과’이지 무슨 석유값 같은 걸 들먹이느냐는 거죠. 그러면서 설씨 아버지가 박정희 정권 때 청와대 경호실에 있었는데 후에 민주당으로 갈아타 국회의원을 했다며 설씨를 공격해요. 박정희가 오일 쇼크의 직격탄을 맞은 건 사실이고, 그때 무너진 정권이 굉장히 많거든요. 하지만 (정치)소비자들이 ‘우리가 갖고 있는 정의로운 역사관에 부합하지 않는다’면서 압력을 주는 거죠. 

*‘한때 좌파’ 4人의 쾌도난마 문재인 시대②로 이어집니다.



신동아 2021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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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Opinion Leader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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